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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의 미래 - 팬데믹 이후 10년, 금융세계를 뒤흔들 기술과 트렌트
제이슨 솅커 지음, 최진선 옮김 / 리드리드출판(한국능률협회)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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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서평을 의뢰받았다. 요즘 관심사도 관심사거니와, 이렇게 서평 쪽으로 신뢰를 받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라 흔쾌히 의뢰에 응했다.

그렇게 받은 책이 바로 『금융의 미래』. 원제는 『The Future of Finance After COVID』다. 즉 ‘코로나 이후’의 금융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다. 지금 가장 사람들의 생활과, 경제, 국제정세와 밀접한 이슈를 다루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자연히, 이와 관련된 금융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지금 어려운 상황을 헤쳐나가야하는 사람들에게 이보다 더 유용한 지식이 있을까?

하지만 이 책은, 미래에 코로나 사태를 극복한다고 해서 쓸모가 없어지는 책이 아니다. 현 이슈와 관련된 요소를 파헤친다 해도 보편적인 ‘돈의 규칙’, 돈 문제의 해결법에는 변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

따라서, 설령 코로나19가 완전히 극복된 이후에도 이 책은 여전히 유용할 것이다. 시대의 변화와 위기 속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그 시대를 헤쳐나갔는가’에 대한 답을 이 책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슈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책을 읽을 때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당장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기도 하지만, 그 방법을 구하기까지의 과정, 사고의 ‘원리’를 배우는 것이다. 원리를 익히면 다른 상황에서도 어느 정도 응용이 가능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낄 수 있는 쾌감은 두 가지다.

하나는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길을 제시해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지금까지 나름 잘 해왔음을 확인해준다는 것이다. 특히 핀테크, 비대면=원격 기술 금융의 발전 속에서, 내가 이용하는 카카오페이나 카카오뱅크, 그리고 KB의 각종 어플리케이션 발달 등이 그 흐름에 속해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일단 나는 시대의 흐름을 놓치지는 않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이러한 흐름은 코로나19 이후 더욱 가속해왔는데, 카카오펀드, 그 중에서도 IT와 4차 산업혁명에 투자하여 수익을 올리는 선택은, 해당 분야가 핀테크와 비대면=원격 기술과 동의어라는 점을 확인하면서, 더욱 올바른 선택이었음을 확인했다.

물론 이 책을 통해 내가 어떤 실수를 했는지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는 카카오펀드 중 ‘AI가 관리하는 합리적인 펀드’에 투자를 했다가 손해를 봤는데, 이 책에서는 AI 등의 새로운 기술들이 지나치게 ‘과대평가’ 되어 있으며, 이를 맹신하고 투자하면 손해를 볼 수밖에 없음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 이유로 실패하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역시나 그런 이유라니 씁쓸하면서도 지식이 탄탄해지는 묘한 느낌이 든다.

의외인 부분도 있는데, 국내의 자칭 경제 전문가, 혹은 경제 전문지에서 주장하는 규제 철폐에 대해 저자는 다소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공산주의는 냉전의 종식과 함께 패배한 것이 아니며, 언제든지 부활할 수 있다’고 보는 것도 흥미로웠다.(물론 저자의 직업상, 그런 미래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는 국내 전문가들의 의견을 교차검증하기 위해 해외 전문가의 시선도 살펴볼 필요가 있음을 말해준다. 국내의 자칭 전문가들이 이러저러하게 말했다고 해도, 해외의, 노는 물 자체가 다른 전문가가 보는 시선은 또 다른 법이니까.

하지만 모든 책이 그렇듯이, 다소 약점을 지닌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어 정부에서 지급하는 지원금에 대해 ‘일할 의지가 없는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는 사람의 돈을 공짜로 받는다’고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사람들은 일을 하면서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고 보람을 느낀다. 그런데 지원금은 그 기회를 빼앗는다’고 말하는 모순을 범한다. 조금만 논리적으로 생각해보면 두 말 중 하나가 참이면, 다른 하나는 거짓일 수밖에 없는데 말이다.

이는 사회학이나 심리학 같은 분야에는 전문가가 아닌,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다. 이를테면 중국 근현대사의 전문가가 중국 고대사에 대해 강의하면 오류가 어마어마하게 튀어나오듯이 말이다. 따라서 다소 이상한 부분은 적당히 걸러 들을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런 단점을 안고 있더라도 이 책은 세계 경제의 현황, 흐름, 미래를 읽기 위해서는 참 좋은 책이다. 무엇보다도 거시적인 맥락을 잡아준다. 따라서 이 책으로 중요한 테마, 거시적인 흐름, 보편적인 법칙에 대한 느낌을 잡고, 다른 책으로 디테일한 지식을 보완해나가면 좋을 듯하다. 곧 이어서 또 두 권의 책이 서평 의뢰로 도착할 예정인데, 이 책을 기반으로 하여 그 책들을 통해 더 많은 지식을 쌓을 수 있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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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도시 SG컬렉션 1
정명섭 지음 / Storehouse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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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패』를 읽을 때도, 『케이든 선』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책을 엄청 느리게 읽는 내가 이틀 정도 몰입해서 다 읽을 정도니 그 몰입감과 재미에 대해서는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나 서평을 부탁받은 만큼(그보다는 내가 정명섭 선생님의 책을 읽고 싶어서 ‘제발 서평단에 선정되게 해주세요’하는 기분으로 신청했지만), 이 소설을 읽을까 말까 고민 중인 사람들에 매력을 제대로 설명해야겠지.

개성공단.

주인공은 거기서 공장을 경영하는 외삼촌의 부탁으로, 자꾸만 없어지는 원자재와 재고 문제를 조사하러 간다. 그리고 조사 중 물건을 빼돌리던 유력한 용의자가 의문사한다.

남북한의 이해, 그 안에 들어선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얽힌 개성공단은, 그 배경만으로도 읽는 사람을 바싹 긴장시킨다. 소설의 등장인물들 역시 마찬가지다. 단순히 남한 대 북한, 혹은 통일과 민족, 전쟁과 평화라는 테마를 가운데 놓고 스테레오 타입의 인물들을 내세우는 다른 작품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빨갱이 박멸을 부르짖던 남자는 개성공단의 사장이 되어 어느새 보수단체를 향해 욕설을 퍼붓고 있고, 자본주의 남조선을 경멸하던 남자는 남한의 드라마와 영화 명대사를 줄줄 읊고 다닌다. 개성공단이라는 특수한 공간 속에서 욕망하는 인간이라는 보편성을 바탕으로 입체적인 인물상을 자아낸다.

때문에 이 작품은 플롯의 반전도 반전이지만, 인물상을 통한 반전을 거듭한다는 것도 무척 재미있는 요소다. 굳이 비유하자면 <강철비>로 시작해서 <공작>으로 끝나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스포일러가 되기 때문에 자세한 이야기를 더 할 수는 없지만, 269페이지까지 정말 독자를 쉴 틈 없이 즐겁게 한다. 이 즐거움을 여러분도 함께할 수 있으면 좋겠다.

책의 내용 말고도 좋은 게 있다면, 그건 책의 편집디자인. 책을 딱 펼쳤을 때 보이는 글자와 여백의 배치는, 예전에 읽던 시집 같아서 그리움을 자아내는 한편으로, 읽기에도 편하다. 누가 이렇게 하자고 했는지는 몰라도 정말 좋은 시도가 아닌가 싶다. 스토어하우스에서 펴내는 책이 모두 이런 식이라면 같은 SG시리즈의 소설들도 더 읽어보고 싶다.

신문로에서는 저절로 보이는 것들이 있다. - P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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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배주의자들의 가장 나쁜 점은, 그들이 방관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은 누군가의 노력에 대해 ‘잘 안될 거야’라고 의욕을 꺾는 말을 하는 걸 넘어서, 그 말을 현실화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노력을 기울인다.

 ‘저러다 저놈이 잘되면 어쩌지’라며 전전긍긍하다가, 잘되는 듯하면 어떻게든 안 되도록 만들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정말로 잘된 결과가 나오면 저주를 퍼붓고 사라진다. 아니면 ‘흥! 운이 좋았어! 그건 네 노력과 실력에 의한 게 아니야!’라고 정신승리를 하거나.

 웹소설 작가로 데뷔를 앞둔 나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몇 개 있다.

 처음 『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의 연재를 시작했을 때, 어떤 사람이 나에게 그렇게 인기가 없는 작품은(그들 말로는 ‘지표가 나쁘다’고 한다) 시간 낭비하지 말고 어서 엎고 새로운 작품을 연재하라고 조언을 해주었다.

 나는 계속해서 인기를 얻을 방법을 궁리하며 그 작품을 고치고, 연재를 이어나갔다. 그렇게 1년이 지나니 네이버 웹소설 측에서 내 작품을 ‘베스트리그’에 올려주었다. 늘 공모전에서 고배만 마시던 내 작품이, 처음으로 어떤 가치를 인정받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다고 출판사의 계약 제의를 받을 수 있는 건 아니라며 새로운 작품을 시작하라고 했다.

 나는 베스트리그에 올라가고 나서도 연재를 계속했다. 무료 연재를 할 수 있는 사이트를 7개로 늘리며, 최대한 나를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출판사 북팔의 고마운 계약 제의를 받았다. 나는 생소한 수색역 부근의 출판사로 올라가 떨리는 손으로 계약을 마치고 나왔다. 처음으로 작품 출간 계약서를 품에 안고 돌아오니 그는 ‘계약은 개나 소나 다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출판사에서는 내 작품을 카카오페이지의 ‘기다리면 무료’ 프로모션 심사를 넣어주었다. 대략 7개월이 걸렸는데, 이 기간에 그가 ‘너는 제대로 된 무료연재 성적이 없으니 당연히 떨어질 것’이라 냉소했다. 그러나 나는 7개월 만에 심사 통과 소식을 받았으며, 5월 선연재, 7월 기다리면 무료 런칭을 기다리고 있다.

 통과 소식을 기다리던 7개월 동안, 나는 문피아에서 『삼국지 대황제 유선』이라는 대체역사물을 연재했다.(지금은 연재를 잠시 중단하고 카카오페이지 런칭을 준비 중이지만, 언젠가 전면 개정 작을 내놓으려고 틈틈이 작업 중이다)

 웹소설, 특히 남성향 웹소설에는 ‘여성 주인공(히로인)이 부각되는 작품, 연애가 부각되는 작품은 성공할 수 없다’는 속설이 있다. 그러나 나는 유선과 그 주변 여성들의 연애 요소를 적극적으로 그려내고, 그녀들에게 상당한 역할을 부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러면서도 기존 삼국지 인물들과의 균형을 잃지 않고, 또 삼국지 마니아들의 호응도 꽤 성공적으로 얻어냈다. 덕분에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투데이 베스트’라는 관문을 들락거리게 되었다.

 그러나 ‘여성 인물들이 부각되는 소설은 절대로 성공할 수 없으니 제발 그 부분은 삭제하라’고 권유하던 어떤 이는, 나에게 ‘취미로 쓰는 소설이 아니라 유료 연재에서도 그렇게 잘 되는지 두고 봅시다’라는 저주를 퍼붓고는 떠나갔다.

 나는 ‘노력 만능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노력과 더불어 환경도 아주 중요하다. ‘현실’의 문제를 고려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현실’이란 얼마나 얄팍한가에 대해, 나는 내 인생 경험을 통해 회의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나의 의욕을 꺾기 위해 애썼던 사람들이 실제로 내가 글을 그만 쓰게 만들 ‘힘’이 있었다면 어땠을지…… 소름 끼치는 상상을 해본다.

 지금의 한일 외교 문제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우리는 몰락했다가 화려한 귀환을 꿈꾸는 두 제국 사이에 있다. 얼핏 보면 우리는 두 강국 사이에 끼어서 공중분해 되거나, 이웃한 강국 중 하나에게 노예처럼 굽실거려야 할 운명인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어떤 분들이 말씀하시는 ‘현실’인 것 같기도 하다. 실제로 고려 이래 통일 국가를 이루어왔던 한반도는 강국의 영향을 받아 남과 북으로 나뉘어 있지 않은가.

 그러나 최근의 상황을 보면, 강국의 심기를 거슬러서 어쩌려는가, 했던 그분들의 염려가 기우에 지나지 않았던 것 같다. 허와 실을 따져보면, 우리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실’했고, 강국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허’했다. ‘현실’의 또 다른 측면이다.

 그런데 금방이라도 나라가 망할 듯이 걱정하시던 분들은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들이 생각하던 ‘현실’만이 유일한 현실이 되어야 만족하는지, 나라가 망하지 않은 현실을 저주한다. 혹은 여전히 언젠가는 망할 거라며 새로운 변명을 만들어낸다. 물론 그게 다른 ‘현실’에 가로막히면 새로운 ‘현실’을 변명처럼 들이밀면서.

 그러니 나는 웹소설 작가 데뷔를 준비하며 했던 말을 다시 할 수밖에 없다. 그들이 말하는 ‘현실’이란 얼마나 얄팍한 것인가.

 물론 그분들의 우려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런 우려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이다. 우려는 현 상황을 개선하겠다는 목표를 분명히 인지하고 있을 때만 의미가 있다. 그렇지 않은 우려는 방향을 잃는다. 그리고 ‘우려가 현실화하지 않은 현실을 저주하며, 우려가 현실화하기를 갈망하는 못된 마음’으로 자라난다.

 내가 처음 연재를 시작할 때, 나는 ‘그 어떤 이들’과 비슷한 우려를 하지 않았던 걸까? 마냥 낙관적으로만 생각했을까? 나도 비슷한 우려를 했다. 아니 더 심한 우려를 했다. 당연하다. 내 작품이고 내 인생이니까.

 그러나 내가 만약 우려에만 그쳤다면 지금 소소하게나마 거둔 성공이 있었을까? 나는 그 우려가 현실화하는 상황을 피하려고 무수히 작품을 뜯어고쳤다. 온갖 고민을 했다. 내가 거둔 이 자그마한 성공에는 운도 뒷받침되었겠지만, 상황을 타개하고 나아가려는 ‘방향’에 대한 고민도 뒷받침해주었을 것이다.

 많은 웹소설 작가 지망생들이 참으로 안타깝게도, ‘현실적 가능성’만을 내세우며, ‘트렌드’를 읽고 ‘적당히 다른 작품들의 성공 요인을 짜맞춰 조회수를 늘려보려는’, 그런 ‘현실 타협’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현실’이 무엇인지,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얼마 전까지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고집을 부린다’는 쓴소리를 듣던 나는, 지금은 ‘현실과 잘 타협해 트렌드를 따른다’는 소리를 듣는다. 같은 작품인데 말이다.

 내 개인의 일이라는 거울에 나라의 일을 비춰보면, 그들이 말하는 ‘현실’은 얼마나 얄팍한가, 지겹도록 되풀이해 말할 수밖에 없다.

 『왜 일본은 한국을 정복하고 싶어 하는가』를 펼치자마자, 인상적인 구절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이 책의 결론은 한반도 중립화야말로 우리의 생존과 동아시아의 안정을 창출하고 보장하는 유일무이한 전략이라는 사실을 드러내 보여준다.…… (중략) …… 그렇다면 한반도 중립화는 그저 이상에 지나지 않을까? 아니다. 냉전 체제가 무너지고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가 요동치는 지금, 한반도 중립화는 가능 여부를 따져가며 추진해야 하는 목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불가결 조건이다.(10쪽)


 다소 격한 부분이긴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내 생각과 들어맞는다. 물론 ‘가능 여부를 따져가며 추진’해야 한다.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으니까. 그러나 ‘가능성이 아주 낮다’는 결론이 나왔을 때는, 일부 사람들과는 다른 생각을 해야 한다. 일부 사람들은 이런 결론을 두고 아예 실행도 하지 않고 포기하거나, 혹은 일본이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 중심이 되어 재편된 질서에 편입하는, ‘현실 타협’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회의한다. 민족적 자존심이고 뭐고 이전에, 그런 현실 타협이 우리에게 최선의 이익을 보장하는가? 오히려 손해는 아닌가?

 ‘현실적인 판단’을 내린다면서 그게 국가적 손해로 이어진다면, 그 ‘현실적 판단’이 무슨 소용인가? 아니 애초에 현실적 판단이 맞긴 한가?

 손해라면, 우리는 우리에게 이익이 되는 다른 이상적 상황을 상정하고, 그 상황을 이룰 가능성이 낮다면,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방법을 연구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현실적 대응’이다.

 강제 징용 문제, 성노예 문제를 비롯해 한일 간에 얽힌 여러 문제가 있다. 이런 문제에 대해 타협하지 않는 것은 단순한 민족적 자존심이 아니다. 도덕성에 관한 문제에만 머무르는 것도 아니다. 이에 대한 진실된 반성과, 피해자들이 납득할 수 있는 형태의 보상을 요구하는 것은, ‘재발 방지’라는 중대한 의미가 있다. 이미 일어난 일을 되돌릴 수 없다면, 적어도 앞으로는 그런 일 없을 거라는 약속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이를 유치한 민족주의라고만 치부하며 ‘덮고 넘어가자’는 말은, ‘나는 그런 일을 반드시 미래에 또 당신들에게 저지를 것이다’라는 선언과 다를 바 없다. 실제로 한반도의 완전 정복에 성공했던 강국의 태도가 이렇다면, 이보다 더 큰 안보적 위협이 어디 있으며, 그 손해가 얼마나 막대한가?

 어떤 분들은 이런 희망을 품는다. 우리가 과거사를 덮고 넘어가고, 일본이 주도하는 동아시아 질서에 충실히 따르면, 그것이 우리가 평화를 유지하는 최선의 방책일 것이라고. 그러나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 평화와 건설적인 미래 관계 구축도 양측이 평화를 원해야 이루어질 수 있다. 한쪽은 옛 식민지의 재정복이라는 카드를 여전히 버리지 않았는데, 다른 한쪽이 짝사랑한다고 해봤자 이루어지는 평화는 없다.

 그리고 안일한 짝사랑만 고집하며 ‘언젠가는 사랑을 이룰 날을 망상’하는 것은 ‘현실’이 아니다. ‘현실이라고 믿고, 보고 싶은 그 어떤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정말로, 얄팍한 ‘현실주의’가 아닐 수 없다.

 현실적 대책이란 이런 것이다. 사랑받지 않는다면, 사랑을 쟁취할 방법을 실행하거나, 과감히 포기하고 새로운 사랑을 찾아 떠나는 것.

 『왜 일본은 한국을 정복하고 싶어 하는가』는 이에 대해 흥미로운 인물의 흥미로운 말을 인용하고 있다.


 무력으로 끊임없이 확장을 꾀하는 나라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싸워야 합니다.(276쪽)


 이토 히로부미가 고종에게 한 말이라고 한다. 이는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위협하는 두 제국주의(혹은 그 후속편인 무언가)에게 그대로 돌려줄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한반도 중립화라는 이상, 혹은 ‘해야만 할 일’에 대해 『왜 일본은 한국을 정복하고 싶어 하는가』는 이런 문구로 마무리 짓고 있다.


 중립은 고립이 아니고 소통이다. 평화와 공존을 발신하고 실행하는 일이다. 일본의 보수는 왜 한국 중립화 논의를 친중(또는 친북)정책으로 치부하는가? 중립화에는 현금의 동북아시아 지정학을 염두에 두면서도 19세기에서 발원하는 한중일 관계의 프로토콜이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지배층은 한반도에 대한 장악력이 줄어드는 어떤 사태도 원하지 않으며 훼방하려 한다. 남북의 화해 또한 마찬가지다. 그런 면에서 근대 이후 최강의 국력을 보유한 지금이야말로 우리는 주체적으로 중립의 의미를 상상하고 현재화해 실현하려는 구체적 행보를 시작해야 한다.(326쪽)


 여기에 내 생각 몇 가지를 덧붙이자면, 한반도 중립화의 조건이든 결과든, 남북의 평화 통일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이다. 이는 북한이라는, 종종 대한민국의 안보, 외교정책에 찬물을 끼얹는 변수를 확실히 없앨 수 있다는 점에서 이익이며, ‘70여 년 만에 통일된 국가가 한반도에 출현’이라는 현상 자체가 지니는 힘이 외교적인 이익을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드라마 <왕좌의 게임>에도 나온 말처럼, ‘힘은 힘이 있으리라 믿어지는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물론 경제, 사회적 진통도 만만치 않겠지만, 누차 이야기했듯, ‘그러니 통일을 포기하자’는 우리가 취할 현실적 대책이 아니다. 그것은 아무런 방향성도 없는, 무의미한 말이다. 현실적 대책이란 ‘그런 진통을 어떻게 경감시켜 나갈 것인가’이다.

 아마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내 인생 경험을 통해 얻은 교훈에 따르면, 통일이 실제로 이루어져도 어떻게든 통일 이후의 진통을 극대화하고 통일 이전으로 돌아가도록 안간힘을 쓸 것이다. 내 눈에는 통일 이후의 어려움을 극복해나가는 한국의 상황에 전전긍긍하는 그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그러나 통일한국이라는 ‘현실’ 앞에선 일본도 좀 더 다른 방향을 모색하리라고 기대해 볼 수 있고, 정말 일본의 일각에서 우려하는 대로 중화제국의 팽창주의가 대두한다면 그때 ‘진심으로 반성한’ 일본과 맹우가 되는 것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거기까지 갈 가능성을 어떻게 높일 것인가, 그것을 고민해야 한다. 그게 좀 더 생산적이고 알맹이가 있는 고민이며, ‘이익이 되는’ 고민이다.

 『왜 일본은 한국을 정복하고 싶어 하는가』에서 아쉬운 점을 하나 이야기하자면, 저자 자신도 이야기했듯, 청일전쟁 이후부터 2차 세계대전 종전 전까지의 역사에 대한 분석은 생략됐다는 점이다. ‘정한론’을 구상단계부터 돌이켜본 것은 ‘현재의 기원’을 찾아본다는 측면에서는 아주 뜻깊은 작업이지만, 그 기원이 ‘실제로 이루어졌을 때’와는 또 많이 다르다. 전에 읽었던 『미완의 파시즘』을 비롯한 다른 책들을 통해 머릿속에서 보정하면서 읽을 수밖에 없지만, 언젠가 저자가 그 부분에 대해서도 후속 저작을 내주었으면 하고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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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 전의 폭풍 - 로마 공화정 몰락의 서막
마이크 덩컨 지음, 이은주 옮김 / 교유서가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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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로마 역사 소설인 『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즈를 낸 교유서가에서, 이번에는 로마 역사서를 냈다. 마이크 덩컨의 『폭풍 전의 폭풍』은 그라쿠스 형제의 등장부터 격화되는 로마 정치 권력의 다툼과, 술라의 집권과 죽음을 통한 마무리를 다루고 있다. 물론 그라쿠스 형제가 왜 개혁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배경과, 술라 사후 그가 남긴 영향들에 대한 평가도 다루고 있기에 책에 포함된 시대는 훨씬 넓지만, 일단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부터 코르넬리우스 술라까지의 서술이 중심 기둥을 이루고 있다.

이는 『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즈의 시대 배경과 상당히 겹치기 때문에, 교유서가에서는 한 편으로는 소설을 소개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역사교양서로 소설에서 다루지 않은 측면들을 독자가 살펴보도록 배려한 듯하다. 추천사에는 이 책을 읽고 『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즈에 접근하라고 권하지만, 나는 『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즈의 1부인 『로마의 일인자』를 읽고 『폭풍 전의 폭풍』을 읽는 걸 권하고 싶다. 그렇게 하면 소설 속의 장면들을 머릿속에서 다시 그려볼 수도 있고, 소설에서는 과거의 인물로 그려지는 그라쿠스 형제나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자세한 사연들도 볼 수 있어, 소설의 향기를 더욱 깊게 느끼게 해 준다.

이른바 ‘통사’라고 해서 한 국가나 문화권의 역사 전체를 다루는 책도 좋아하지만, 이렇게 한정된 시대와 주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책도 좋아한다. 이 『폭풍 전의 폭풍』은 후자에 해당하는데, 『로마인 이야기』 같은 책에서는 다소 부족했던 로마의 어두운 측면들, 그리고 뿌리 깊은 사회적 갈등(『로마인 이야기』는 약자의 불만을 그냥 폭동으로 치부하거나, 사회적 갈등을 못본 척 넘어가려는 경향이 있다)을 자세히 읽을 수 있기에, 로마사 입문서보다는 어려운 책에 도전해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꼭 권하고 싶은 책이다.

이 책을 읽어내려가면서 내가 주목한 건 ‘모스 마이오룸’이라는 개념이다. 이는 로마 정치계에서 작용하는 도덕적 불문율이다. 이를테면 적이라 해도 신성한 장소에서는 죽이지 않는다든가, 연임을 제한하는 규정이 따로 없어도 공화국을 위해 스스로 권력을 더 탐하지 않는다든가 하는 것을 말한다.

로마가 도시국가에서 영토국가로, 더 나아가 지중해 제국으로 거듭나면서 사회적 모순이 발생한다. 예를 들어 아직 도시국가이던 시절에는, 전쟁을 해도 로마시 주변에서 벌어지는 부족 간, 도시국가 간 전쟁이었기에, 시민들은 전쟁이 끝나면 얼마든지 다시 생활 터전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를 지배하는 영토국가로 성장하고, 또 다른 영토국가인 카르타고와 전쟁을 하면서 사정은 달라진다. 이제 시민들은 수년 이상을 전쟁터에서 보내야 한다. 그리고 돌아오면 생활 터전, 즉 경제 기반인 토지는 돌봐주는 손길이 없어 황폐해진 지 오래다. 이 틈을 귀족들이 노려, 헐값에 땅을 사들인다. 땅이 없어진 시민은 이제 푼돈을 들고 뭐라도 찾아서 로마시로 들어와, 도시 빈민으로 전락한다.

이러한 상황을 개혁하기 위해 그라쿠스 등 이른바 ‘민중파’ 정치인들이 나선다. 그런데 사회적 문제들은 ‘영토국가’를 넘어서 ‘제국’단위의 일이 된 지 오래인데, 이걸 개혁할 정치인들은 여전히 ‘도시국가’ 시절의 제도에 묶여 있다. 집정관의 임기도 1년, 호민관의 임기도 1년이다. 작은 도시 공동체에서는 문제를 해결하기에 별 어려움이 없는 재임 기간이지만, 교통도 통신도 발달하지 못한 고대 제국에서는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고 효과를 보기엔 턱없이 짧은 기간이었다. 현대 대한민국 대통령이 5년, 미국 대통령이 4년에서 8년의 임기가 있는 것을 생각해보면 더욱 그러하다.

이로 인해 민중파 정치인들은 반복적으로 ‘모스 마이오룸’을 어기기 시작한다. 법에는 연임 제한이 없지만, 도덕적으로는 연임하지 않는 게 옳다는 불문율이 널리 퍼진 로마 사회에서, 함부로 도덕적 가치를 훼손한 것이다. 반대파 역시 바보처럼 ‘모스 마이오룸’을 지키고 있을 이유는 없으니, 이제 너도나도 ‘모스 마이오룸’을 훼손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민중파와 그 반대파인 귀족파의 다툼은, 피비린내 나는 길거리 폭력, 암살, 더 나아가 내전으로 치닫게 된다.

책의 후반부 주인공인 술라는 이 문제를 제도로 보완한다. 내전과 뒤이은 잔혹한 학살 끝에 독재관으로 집권한 술라는, 연임 제한 기간을 구체적으로 규정한 법을 세우고, 법의 빈틈을 활용해 야심을 채우려는 사람들을 막을 수 있도록 각종 제도를 정비한다. 하지만 그런 술라의 노력도, 술라가 죽고 난 후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 무너진다. 마이크 덩컨은 술라 자신이 ‘모스 마이오룸’을 어긴 사람이었기에, 그런 제도적 조치들이 지속될 수 없었다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내 생각은 이렇다. 모스 마이오룸-즉 도덕적 불문율도 만능이 아니고, 제도도 만능이 아니다. 따라서 이 둘은 상호보완적으로 작용해야 한다. 사회의 변화, 시대의 변화에 맞춰 제도는 끊임없이 정비되어야 하며, 그런 정비의 와중에 이해관계에 놓인 여러 세력들 사이에 모스 마이오룸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모스 마이오룸을 어긴 자는 철저히 그 대가를 치를 만한 제도적 장치들이 마련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또 하나 흥미로웠던 점은 로마 시민권의 확대다. 이 역시 로마가 도시국가에서 영토국가로 확대되는 과정과 관련이 있다. 로마인들은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해 지중해 제국으로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도시국가 시절의 관념에 얽매여 있었다. 그러니까 ‘로마 국가의 수도 로마시’라는 개념으로 이탈리아나 해외 식민지를 받아들이는 게 아니었다. 이탈리아는 로마의 영토라기보다는 로마와 동맹(속국)관계를 맺고 있는 또 다른 여러 ‘도시’들이었고, 식민지 역시 ‘이탈리아를 영토로 하는 로마 국가’의 이익이 아니라 ‘로마 도시’의 소유물로 취급되었다. 이는 이탈리아 여러 도시국가, 부족들이 “우리도 로마 시민으로 인정해 달라! 참정권을 달라!”고 요구하면서 동맹시 전쟁이라는 내전으로 발전한다.

결국 로마가 요구를 수용하면서 모든 이탈리아인들이 로마 시민권을 획득하면서 이 문제는 마무리되는데, 나는 이것이 도시 로마가 영토국가 로마로 거듭나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즉 국가의 성장과 권리의 보편적 확대에 유의미한 관련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만약 로마가 끝까지 이탈리아인들의 요구를 무시하고 저항했다면, 우리가 아는 로마 제국은 없었을 것이다. 아마 그저 그런 도시연맹체로 역사에서 일찌감치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로마는 권리의 확대와, 그에 따른 체제의 변화를 받아들였고, 그렇게 해서 살아남았다. 이러한 변신은 제정 도입, 크리스트교의 수용이나 8세기 수취체제의 변화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나는 로마가 1453년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원동력이 바로 이렇게 변화를 수용하는 데에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는 이노우에 고이치가 『살아남은 로마, 비잔틴제국』에서도 지적했던 바다.

이 부분은 구입해 놓고 아직 읽지 않은 『로마 공화국과 이탈리아 도시』라는 책을 통해서 더 자세히 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드는 게 있는데, 211년 카라칼라 황제의 ‘제국 내 모든 자유민에게 시민권 부여’에 대한 것이다. 마이크 덩컨은 굉장히 냉소적으로 이를 평가하는데, 이탈리아인에게 시민권을 부여한 것과 달리 속주민에게 부여된 시민권은 그저 ‘하사된 것’이며, 이것을 요구하는 저항에 의한 것이 아니었고, 또 속주민은 면세 혜택이 있었으므로 시민권을 부여해 세금 수입을 확보하려는 시도였다는 것이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는(시오노 나나미의 특성상 이쪽의 신뢰성이 떨어지는 건 사실이다) 반대로 시민에게 면세 혜택이 있었기 때문에 카라칼라의 시민권 확대 조치 이후 로마 제국이 재정난에 허덕였다는 식으로 평한다. 도대체 둘 중 누가 맞는 말을 하는 건지, 설령 마이크 덩컨이 맞다고 해도, 카라칼라의 시민권 확대가 그렇게 일축할 만큼 의미 없는 사건인지, 좀 더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또 더 알아보고 싶은 점은,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8세기 수취제도의 개혁이다. 로마는 행정기구가 세금을 거두는 게 아니라, 징세청부업체가 일을 받아서 대신 세금을 거둬주는 식으로 운영됐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징세청부업자들이 자기들 이익을 늘리려고 세금을 과도하게(국가에 원래 바쳐야 할 세금을 제하면 나머지는 자신들의 이익이 되므로) 매겼다는 것이다. 심하면 주민들을 노예로 팔아서까지 이익을 거뒀고, 이는 노예로 팔린 사람들의 노예 반란, 속주 반란으로 이어진다. 마이크 덩컨은 아우구스투스의 제정 확립 이후 황제들의 선의에 의해 해결됐다고 하지만, 나로서는 과연 그런가? 하고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다. 이후 페르시아 제국의 침공이나 이슬람 제국의 침공에 속주들이 순식간에 제국을 떠나면서 제국이 위기를 맞이했고, 8세기에 이르러 제도를 개혁하고 나서야 비로소 9, 10세기의 중흥이 가능해졌던 걸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마이크 덩컨이 고대 이후의 로마사, 즉 중세 로마사에 대해서는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알지 못하니 어쩔 수 없지만, 언젠가는 자세히 알아보고 싶은 부분이다.

음, 그리고 제정에 대해서 ‘군주정’적 요소가 강화되었다고 한 부분 역시 의문이다. 최근의 이른바 ‘수정주의’측에서는 로마 제국이 중세 후기까지도 여전히 ‘공화정’적 요소를 담고 있었다고 보는데, 마이크 덩컨의 의견은 어떨까? 수정주의 측에서는, 황제들이 여전히 시민(여기서는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이겠지만)과 원로원의 의사를 중요하게 여겼으며, 또 로마의 실질적인 정치 주체로서 활동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에 대해서도 언젠가 깊게 공부해보고 싶다.

교유서가에서 앤서니 칼델리스의 『비잔틴 공화국(The Byzantine Republic)』 같은 책이나, 중세 로마 시기를 다룬 소설을 번역, 출간해준다면 더욱 좋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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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광활한 인간 정도전 1 소설 조선왕조실록 1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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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를 소설로 풀어내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과거와 과거의 인간을 사실적으로 재구성하여,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답을 구하는 겁니다. 둘째는 역사라는 거울을 잘 닦아 지금을 보다 선명하게 비추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이유에 대해 이야기하지면, 제가 역사소설을 많이 읽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제가 읽은 역사 소설 중 다수는 이런 과제를 만족시키지 못했습니다. 가장 단순한 경우엔 주인공을 선으로, 대척점에 있는 인물을 악으로 두어, 어떤 역사적 상황을 선과 악의 대결구도로 만듭니다. 이는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전래동화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혁명은 주요 인물들을 선과 악으로 나누어 놓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입체적인 인간, 살아있는 인간을 드러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여기서 혁명은 분명한 한계를 안고 있습니다. 작가도 이러한 한계를 알고 여러 가지 장치를 배치한 게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물들이 단순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나 봅니다.


 정도전과 이성계, 정몽주 이 세 주요 인물들은 너무나도 순결합니다. 권력에 대한 열망이나 자잘한 실수들이 언급되기도 하지만 이 세 사람의 순결함을 가리진 못합니다. 방향이 다르든 어쨌든 이 세 사람을 움직이는 원동력은 혁명을 향한 순수한 열망입니다. 다른 것들은 그 열망의 찬란한 순수함에 가려져 버립니다. 성욕도 식욕도 수면욕도 없이 혁명을 향해 전진하는 혁명기계.


 김훈의 칼의 노래에서 여진과의 섹스 신이, 박경리의 토지에서 무수한 섹스 신과 결점 많고 우스꽝스러운 인간 군상들이 등장하는 것을 단순히 대중의 취향에 맞췄다거나 하는 식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대중의 취향에 맞춘다는 것, 통속, 속세와 통한다는 것은 분명 그것이 호소하는 바가 있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불완전함을, 인간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을 때 비로소 소설 속 인간은 온전해집니다. 혁명속 정도전과 이성계, 정몽주는 완벽한 초인일지는 모르나, 인간으로서는 불완전한 존재들입니다. 가장 순수한 독립운동가와 가장 추악한 야심가가 한 몸에서 공존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특히 저는 시낭과 정도전의 플라토닉한 관계에서 오히려 그 어떤 포르노보다 더한 역함을 느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혁명혁명그 자체에 대한 깊이 있는 생각을 담고 있는가 하면 그런 것도 아닙니다. ‘혁명을 큰 난리를 동반한 격변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는 선에서 이야기를 진행시키니, ‘혁명은 뜬 구름 잡는 이야기처럼, 이상주의자들의 머릿속에 개념으로만 떠도는 말처럼 들립니다. 이건 어쩌면 사사키 아타루의 영향을 받은 저의 혁명관과 작가의 혁명관이 다르기에 그렇게 보이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렇게 나열한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큰 울림을 갖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두 번째 이유를 충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진인이든 왜인이든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타고날 때부터 잔인하고 포악한 이는 없소. 맑고 순수하기가 한겨울 고드름 같아서 놀란 적도 많다오. 그들이 진력할 생업이 있었다면 이 한결같은 마음을 버릴 까닭이 없소. 다시 말해 남자에겐 끼니를 잇고도 남는 곡식이 있고 여자에겐 겨울 추위를 막고도 남은 옷감이 있다면, 부모를 섬기고 자식을 기르기에 넉넉하다면, 누구나 예의를 갖출 것이오. 장졸을 이끌고 전쟁터로 나서지 않더라도 세상의 모든 도적들이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이 말이외다. 이 일은 나처럼 전쟁터를 누비는 장수가 아니라 그대나 포은 같은 문신들이 맡아 주어야 하오.”

 항산(恒産)이 있는 자는 항심(恒心)이 있으나 항산이 없는 자는 항심이 없다. 맹자의 가르침을 깊이 체득한 자의 주장이었다.

-176~77

 

도적을 물리쳤다면 백성이 한 일이다. 풍년을 이뤘다면 백성이 한 일이다. 궁궐을 짓고 성을 쌓았다면 백성이 한 일이다. 고행은 전부 백성이 하고 영광은 모두 왕이 누리니, 어느 백성이 그 왕을 자신들의 왕으로 떠받들겠는가.

-2107

 

 인간 사회의 모순에 도전하고,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의 생각은 동서양 거리와 수천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공통된 흐름과 모양새를 갖고, 연결됩니다. 맹자의 말이 마르크스의 유물론과 닮은 구석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물줄기는 한국의 김탁환에게도, 그리고 그의 작품을 읽는 저에게도 이어집니다. 좌익과 빨갱이라는 편견을 넘어, 더 좋은 세상을 소망하는 이들의 가슴 속에 있는, 그런 소망을 가진 이라면 누구나 공통적으로 갖는 무언가를 혁명은 건드리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김탁환은 정도전이 되고, 저는 이성계도 되고 맹자도 되고, 수천 년의 시간과 수천 킬로미터의 공간을 뛰어넘어 홀로 한 고민이 아니라는, 이것이 옛 지성들로부터 이어져온 생각이며, 나 또한 거기에 손끝이나마 간신히 닿았음을 느끼게 되는 감동이, 혁명에 있습니다.


 또 한 가지 혁명이 마음을 건드리는 이유는, 비극적인 이야기의 아름다움이, 안타까움이, 비장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혁명이 그리고 있는 것처럼 정도전, 이성계, 정몽주가 순결한 인간이라면, 그런 우정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굉장히 멋진 일입니다. 그런 멋진 것이 우연과 찰나의 실수로 부서져 가는 모습에는 비극이 가져오는 슬픔과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삼국지연의가 관우와 제갈량의 죽음으로 아름다움을 얻듯이 말입니다.


 우리는 세 사람이 어떤 결말을 맞는지, 조금만 역사를 공부해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결말을 알고 보는 소설, 파국으로 치닫는 그 과정을 지켜봐야만 하는 소설은 사람의 마음 속 안타까움을 흔들어댑니다. 정몽주의 죽음을 알리는 담담한 기사 투의 문장이 앞에 놓이고, 정몽주를 살리기 위해 달려가는 정도전의 절박한 숨소리가 그런 안타까움을 극대화시킵니다. 그리고 독자들은 1권의 제일 첫머리로 돌아옵니다. 잠시 뒤에는 죽을 사람이 지난 삶을 정리하고 미래를 바라보며 남긴 글이 다시금 잔잔하게 울려옵니다.


 향긋한 문장으로 쓰인 소설입니다. 많은 것을 깨우쳐주고 많은 감정을 되살려준 소설입니다. 이런 소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흔히 있는 일은 아니지요. 다음번에도 이런 행운이 찾아오길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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