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주의자들의 가장 나쁜 점은, 그들이 방관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은 누군가의 노력에 대해 ‘잘 안될 거야’라고 의욕을 꺾는 말을 하는 걸 넘어서, 그 말을 현실화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노력을 기울인다.

 ‘저러다 저놈이 잘되면 어쩌지’라며 전전긍긍하다가, 잘되는 듯하면 어떻게든 안 되도록 만들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정말로 잘된 결과가 나오면 저주를 퍼붓고 사라진다. 아니면 ‘흥! 운이 좋았어! 그건 네 노력과 실력에 의한 게 아니야!’라고 정신승리를 하거나.

 웹소설 작가로 데뷔를 앞둔 나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몇 개 있다.

 처음 『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의 연재를 시작했을 때, 어떤 사람이 나에게 그렇게 인기가 없는 작품은(그들 말로는 ‘지표가 나쁘다’고 한다) 시간 낭비하지 말고 어서 엎고 새로운 작품을 연재하라고 조언을 해주었다.

 나는 계속해서 인기를 얻을 방법을 궁리하며 그 작품을 고치고, 연재를 이어나갔다. 그렇게 1년이 지나니 네이버 웹소설 측에서 내 작품을 ‘베스트리그’에 올려주었다. 늘 공모전에서 고배만 마시던 내 작품이, 처음으로 어떤 가치를 인정받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다고 출판사의 계약 제의를 받을 수 있는 건 아니라며 새로운 작품을 시작하라고 했다.

 나는 베스트리그에 올라가고 나서도 연재를 계속했다. 무료 연재를 할 수 있는 사이트를 7개로 늘리며, 최대한 나를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출판사 북팔의 고마운 계약 제의를 받았다. 나는 생소한 수색역 부근의 출판사로 올라가 떨리는 손으로 계약을 마치고 나왔다. 처음으로 작품 출간 계약서를 품에 안고 돌아오니 그는 ‘계약은 개나 소나 다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출판사에서는 내 작품을 카카오페이지의 ‘기다리면 무료’ 프로모션 심사를 넣어주었다. 대략 7개월이 걸렸는데, 이 기간에 그가 ‘너는 제대로 된 무료연재 성적이 없으니 당연히 떨어질 것’이라 냉소했다. 그러나 나는 7개월 만에 심사 통과 소식을 받았으며, 5월 선연재, 7월 기다리면 무료 런칭을 기다리고 있다.

 통과 소식을 기다리던 7개월 동안, 나는 문피아에서 『삼국지 대황제 유선』이라는 대체역사물을 연재했다.(지금은 연재를 잠시 중단하고 카카오페이지 런칭을 준비 중이지만, 언젠가 전면 개정 작을 내놓으려고 틈틈이 작업 중이다)

 웹소설, 특히 남성향 웹소설에는 ‘여성 주인공(히로인)이 부각되는 작품, 연애가 부각되는 작품은 성공할 수 없다’는 속설이 있다. 그러나 나는 유선과 그 주변 여성들의 연애 요소를 적극적으로 그려내고, 그녀들에게 상당한 역할을 부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러면서도 기존 삼국지 인물들과의 균형을 잃지 않고, 또 삼국지 마니아들의 호응도 꽤 성공적으로 얻어냈다. 덕분에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투데이 베스트’라는 관문을 들락거리게 되었다.

 그러나 ‘여성 인물들이 부각되는 소설은 절대로 성공할 수 없으니 제발 그 부분은 삭제하라’고 권유하던 어떤 이는, 나에게 ‘취미로 쓰는 소설이 아니라 유료 연재에서도 그렇게 잘 되는지 두고 봅시다’라는 저주를 퍼붓고는 떠나갔다.

 나는 ‘노력 만능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노력과 더불어 환경도 아주 중요하다. ‘현실’의 문제를 고려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현실’이란 얼마나 얄팍한가에 대해, 나는 내 인생 경험을 통해 회의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나의 의욕을 꺾기 위해 애썼던 사람들이 실제로 내가 글을 그만 쓰게 만들 ‘힘’이 있었다면 어땠을지…… 소름 끼치는 상상을 해본다.

 지금의 한일 외교 문제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우리는 몰락했다가 화려한 귀환을 꿈꾸는 두 제국 사이에 있다. 얼핏 보면 우리는 두 강국 사이에 끼어서 공중분해 되거나, 이웃한 강국 중 하나에게 노예처럼 굽실거려야 할 운명인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어떤 분들이 말씀하시는 ‘현실’인 것 같기도 하다. 실제로 고려 이래 통일 국가를 이루어왔던 한반도는 강국의 영향을 받아 남과 북으로 나뉘어 있지 않은가.

 그러나 최근의 상황을 보면, 강국의 심기를 거슬러서 어쩌려는가, 했던 그분들의 염려가 기우에 지나지 않았던 것 같다. 허와 실을 따져보면, 우리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실’했고, 강국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허’했다. ‘현실’의 또 다른 측면이다.

 그런데 금방이라도 나라가 망할 듯이 걱정하시던 분들은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들이 생각하던 ‘현실’만이 유일한 현실이 되어야 만족하는지, 나라가 망하지 않은 현실을 저주한다. 혹은 여전히 언젠가는 망할 거라며 새로운 변명을 만들어낸다. 물론 그게 다른 ‘현실’에 가로막히면 새로운 ‘현실’을 변명처럼 들이밀면서.

 그러니 나는 웹소설 작가 데뷔를 준비하며 했던 말을 다시 할 수밖에 없다. 그들이 말하는 ‘현실’이란 얼마나 얄팍한 것인가.

 물론 그분들의 우려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런 우려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이다. 우려는 현 상황을 개선하겠다는 목표를 분명히 인지하고 있을 때만 의미가 있다. 그렇지 않은 우려는 방향을 잃는다. 그리고 ‘우려가 현실화하지 않은 현실을 저주하며, 우려가 현실화하기를 갈망하는 못된 마음’으로 자라난다.

 내가 처음 연재를 시작할 때, 나는 ‘그 어떤 이들’과 비슷한 우려를 하지 않았던 걸까? 마냥 낙관적으로만 생각했을까? 나도 비슷한 우려를 했다. 아니 더 심한 우려를 했다. 당연하다. 내 작품이고 내 인생이니까.

 그러나 내가 만약 우려에만 그쳤다면 지금 소소하게나마 거둔 성공이 있었을까? 나는 그 우려가 현실화하는 상황을 피하려고 무수히 작품을 뜯어고쳤다. 온갖 고민을 했다. 내가 거둔 이 자그마한 성공에는 운도 뒷받침되었겠지만, 상황을 타개하고 나아가려는 ‘방향’에 대한 고민도 뒷받침해주었을 것이다.

 많은 웹소설 작가 지망생들이 참으로 안타깝게도, ‘현실적 가능성’만을 내세우며, ‘트렌드’를 읽고 ‘적당히 다른 작품들의 성공 요인을 짜맞춰 조회수를 늘려보려는’, 그런 ‘현실 타협’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현실’이 무엇인지,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얼마 전까지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고집을 부린다’는 쓴소리를 듣던 나는, 지금은 ‘현실과 잘 타협해 트렌드를 따른다’는 소리를 듣는다. 같은 작품인데 말이다.

 내 개인의 일이라는 거울에 나라의 일을 비춰보면, 그들이 말하는 ‘현실’은 얼마나 얄팍한가, 지겹도록 되풀이해 말할 수밖에 없다.

 『왜 일본은 한국을 정복하고 싶어 하는가』를 펼치자마자, 인상적인 구절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이 책의 결론은 한반도 중립화야말로 우리의 생존과 동아시아의 안정을 창출하고 보장하는 유일무이한 전략이라는 사실을 드러내 보여준다.…… (중략) …… 그렇다면 한반도 중립화는 그저 이상에 지나지 않을까? 아니다. 냉전 체제가 무너지고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가 요동치는 지금, 한반도 중립화는 가능 여부를 따져가며 추진해야 하는 목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불가결 조건이다.(10쪽)


 다소 격한 부분이긴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내 생각과 들어맞는다. 물론 ‘가능 여부를 따져가며 추진’해야 한다.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으니까. 그러나 ‘가능성이 아주 낮다’는 결론이 나왔을 때는, 일부 사람들과는 다른 생각을 해야 한다. 일부 사람들은 이런 결론을 두고 아예 실행도 하지 않고 포기하거나, 혹은 일본이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 중심이 되어 재편된 질서에 편입하는, ‘현실 타협’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회의한다. 민족적 자존심이고 뭐고 이전에, 그런 현실 타협이 우리에게 최선의 이익을 보장하는가? 오히려 손해는 아닌가?

 ‘현실적인 판단’을 내린다면서 그게 국가적 손해로 이어진다면, 그 ‘현실적 판단’이 무슨 소용인가? 아니 애초에 현실적 판단이 맞긴 한가?

 손해라면, 우리는 우리에게 이익이 되는 다른 이상적 상황을 상정하고, 그 상황을 이룰 가능성이 낮다면,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방법을 연구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현실적 대응’이다.

 강제 징용 문제, 성노예 문제를 비롯해 한일 간에 얽힌 여러 문제가 있다. 이런 문제에 대해 타협하지 않는 것은 단순한 민족적 자존심이 아니다. 도덕성에 관한 문제에만 머무르는 것도 아니다. 이에 대한 진실된 반성과, 피해자들이 납득할 수 있는 형태의 보상을 요구하는 것은, ‘재발 방지’라는 중대한 의미가 있다. 이미 일어난 일을 되돌릴 수 없다면, 적어도 앞으로는 그런 일 없을 거라는 약속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이를 유치한 민족주의라고만 치부하며 ‘덮고 넘어가자’는 말은, ‘나는 그런 일을 반드시 미래에 또 당신들에게 저지를 것이다’라는 선언과 다를 바 없다. 실제로 한반도의 완전 정복에 성공했던 강국의 태도가 이렇다면, 이보다 더 큰 안보적 위협이 어디 있으며, 그 손해가 얼마나 막대한가?

 어떤 분들은 이런 희망을 품는다. 우리가 과거사를 덮고 넘어가고, 일본이 주도하는 동아시아 질서에 충실히 따르면, 그것이 우리가 평화를 유지하는 최선의 방책일 것이라고. 그러나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 평화와 건설적인 미래 관계 구축도 양측이 평화를 원해야 이루어질 수 있다. 한쪽은 옛 식민지의 재정복이라는 카드를 여전히 버리지 않았는데, 다른 한쪽이 짝사랑한다고 해봤자 이루어지는 평화는 없다.

 그리고 안일한 짝사랑만 고집하며 ‘언젠가는 사랑을 이룰 날을 망상’하는 것은 ‘현실’이 아니다. ‘현실이라고 믿고, 보고 싶은 그 어떤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정말로, 얄팍한 ‘현실주의’가 아닐 수 없다.

 현실적 대책이란 이런 것이다. 사랑받지 않는다면, 사랑을 쟁취할 방법을 실행하거나, 과감히 포기하고 새로운 사랑을 찾아 떠나는 것.

 『왜 일본은 한국을 정복하고 싶어 하는가』는 이에 대해 흥미로운 인물의 흥미로운 말을 인용하고 있다.


 무력으로 끊임없이 확장을 꾀하는 나라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싸워야 합니다.(276쪽)


 이토 히로부미가 고종에게 한 말이라고 한다. 이는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위협하는 두 제국주의(혹은 그 후속편인 무언가)에게 그대로 돌려줄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한반도 중립화라는 이상, 혹은 ‘해야만 할 일’에 대해 『왜 일본은 한국을 정복하고 싶어 하는가』는 이런 문구로 마무리 짓고 있다.


 중립은 고립이 아니고 소통이다. 평화와 공존을 발신하고 실행하는 일이다. 일본의 보수는 왜 한국 중립화 논의를 친중(또는 친북)정책으로 치부하는가? 중립화에는 현금의 동북아시아 지정학을 염두에 두면서도 19세기에서 발원하는 한중일 관계의 프로토콜이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지배층은 한반도에 대한 장악력이 줄어드는 어떤 사태도 원하지 않으며 훼방하려 한다. 남북의 화해 또한 마찬가지다. 그런 면에서 근대 이후 최강의 국력을 보유한 지금이야말로 우리는 주체적으로 중립의 의미를 상상하고 현재화해 실현하려는 구체적 행보를 시작해야 한다.(326쪽)


 여기에 내 생각 몇 가지를 덧붙이자면, 한반도 중립화의 조건이든 결과든, 남북의 평화 통일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이다. 이는 북한이라는, 종종 대한민국의 안보, 외교정책에 찬물을 끼얹는 변수를 확실히 없앨 수 있다는 점에서 이익이며, ‘70여 년 만에 통일된 국가가 한반도에 출현’이라는 현상 자체가 지니는 힘이 외교적인 이익을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드라마 <왕좌의 게임>에도 나온 말처럼, ‘힘은 힘이 있으리라 믿어지는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물론 경제, 사회적 진통도 만만치 않겠지만, 누차 이야기했듯, ‘그러니 통일을 포기하자’는 우리가 취할 현실적 대책이 아니다. 그것은 아무런 방향성도 없는, 무의미한 말이다. 현실적 대책이란 ‘그런 진통을 어떻게 경감시켜 나갈 것인가’이다.

 아마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내 인생 경험을 통해 얻은 교훈에 따르면, 통일이 실제로 이루어져도 어떻게든 통일 이후의 진통을 극대화하고 통일 이전으로 돌아가도록 안간힘을 쓸 것이다. 내 눈에는 통일 이후의 어려움을 극복해나가는 한국의 상황에 전전긍긍하는 그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그러나 통일한국이라는 ‘현실’ 앞에선 일본도 좀 더 다른 방향을 모색하리라고 기대해 볼 수 있고, 정말 일본의 일각에서 우려하는 대로 중화제국의 팽창주의가 대두한다면 그때 ‘진심으로 반성한’ 일본과 맹우가 되는 것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거기까지 갈 가능성을 어떻게 높일 것인가, 그것을 고민해야 한다. 그게 좀 더 생산적이고 알맹이가 있는 고민이며, ‘이익이 되는’ 고민이다.

 『왜 일본은 한국을 정복하고 싶어 하는가』에서 아쉬운 점을 하나 이야기하자면, 저자 자신도 이야기했듯, 청일전쟁 이후부터 2차 세계대전 종전 전까지의 역사에 대한 분석은 생략됐다는 점이다. ‘정한론’을 구상단계부터 돌이켜본 것은 ‘현재의 기원’을 찾아본다는 측면에서는 아주 뜻깊은 작업이지만, 그 기원이 ‘실제로 이루어졌을 때’와는 또 많이 다르다. 전에 읽었던 『미완의 파시즘』을 비롯한 다른 책들을 통해 머릿속에서 보정하면서 읽을 수밖에 없지만, 언젠가 저자가 그 부분에 대해서도 후속 저작을 내주었으면 하고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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