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 광활한 인간 정도전 1 소설 조선왕조실록 1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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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를 소설로 풀어내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과거와 과거의 인간을 사실적으로 재구성하여,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답을 구하는 겁니다. 둘째는 역사라는 거울을 잘 닦아 지금을 보다 선명하게 비추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이유에 대해 이야기하지면, 제가 역사소설을 많이 읽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제가 읽은 역사 소설 중 다수는 이런 과제를 만족시키지 못했습니다. 가장 단순한 경우엔 주인공을 선으로, 대척점에 있는 인물을 악으로 두어, 어떤 역사적 상황을 선과 악의 대결구도로 만듭니다. 이는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전래동화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혁명은 주요 인물들을 선과 악으로 나누어 놓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입체적인 인간, 살아있는 인간을 드러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여기서 혁명은 분명한 한계를 안고 있습니다. 작가도 이러한 한계를 알고 여러 가지 장치를 배치한 게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물들이 단순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나 봅니다.


 정도전과 이성계, 정몽주 이 세 주요 인물들은 너무나도 순결합니다. 권력에 대한 열망이나 자잘한 실수들이 언급되기도 하지만 이 세 사람의 순결함을 가리진 못합니다. 방향이 다르든 어쨌든 이 세 사람을 움직이는 원동력은 혁명을 향한 순수한 열망입니다. 다른 것들은 그 열망의 찬란한 순수함에 가려져 버립니다. 성욕도 식욕도 수면욕도 없이 혁명을 향해 전진하는 혁명기계.


 김훈의 칼의 노래에서 여진과의 섹스 신이, 박경리의 토지에서 무수한 섹스 신과 결점 많고 우스꽝스러운 인간 군상들이 등장하는 것을 단순히 대중의 취향에 맞췄다거나 하는 식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대중의 취향에 맞춘다는 것, 통속, 속세와 통한다는 것은 분명 그것이 호소하는 바가 있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불완전함을, 인간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을 때 비로소 소설 속 인간은 온전해집니다. 혁명속 정도전과 이성계, 정몽주는 완벽한 초인일지는 모르나, 인간으로서는 불완전한 존재들입니다. 가장 순수한 독립운동가와 가장 추악한 야심가가 한 몸에서 공존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특히 저는 시낭과 정도전의 플라토닉한 관계에서 오히려 그 어떤 포르노보다 더한 역함을 느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혁명혁명그 자체에 대한 깊이 있는 생각을 담고 있는가 하면 그런 것도 아닙니다. ‘혁명을 큰 난리를 동반한 격변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는 선에서 이야기를 진행시키니, ‘혁명은 뜬 구름 잡는 이야기처럼, 이상주의자들의 머릿속에 개념으로만 떠도는 말처럼 들립니다. 이건 어쩌면 사사키 아타루의 영향을 받은 저의 혁명관과 작가의 혁명관이 다르기에 그렇게 보이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렇게 나열한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큰 울림을 갖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두 번째 이유를 충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진인이든 왜인이든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타고날 때부터 잔인하고 포악한 이는 없소. 맑고 순수하기가 한겨울 고드름 같아서 놀란 적도 많다오. 그들이 진력할 생업이 있었다면 이 한결같은 마음을 버릴 까닭이 없소. 다시 말해 남자에겐 끼니를 잇고도 남는 곡식이 있고 여자에겐 겨울 추위를 막고도 남은 옷감이 있다면, 부모를 섬기고 자식을 기르기에 넉넉하다면, 누구나 예의를 갖출 것이오. 장졸을 이끌고 전쟁터로 나서지 않더라도 세상의 모든 도적들이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이 말이외다. 이 일은 나처럼 전쟁터를 누비는 장수가 아니라 그대나 포은 같은 문신들이 맡아 주어야 하오.”

 항산(恒産)이 있는 자는 항심(恒心)이 있으나 항산이 없는 자는 항심이 없다. 맹자의 가르침을 깊이 체득한 자의 주장이었다.

-176~77

 

도적을 물리쳤다면 백성이 한 일이다. 풍년을 이뤘다면 백성이 한 일이다. 궁궐을 짓고 성을 쌓았다면 백성이 한 일이다. 고행은 전부 백성이 하고 영광은 모두 왕이 누리니, 어느 백성이 그 왕을 자신들의 왕으로 떠받들겠는가.

-2107

 

 인간 사회의 모순에 도전하고,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의 생각은 동서양 거리와 수천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공통된 흐름과 모양새를 갖고, 연결됩니다. 맹자의 말이 마르크스의 유물론과 닮은 구석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물줄기는 한국의 김탁환에게도, 그리고 그의 작품을 읽는 저에게도 이어집니다. 좌익과 빨갱이라는 편견을 넘어, 더 좋은 세상을 소망하는 이들의 가슴 속에 있는, 그런 소망을 가진 이라면 누구나 공통적으로 갖는 무언가를 혁명은 건드리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김탁환은 정도전이 되고, 저는 이성계도 되고 맹자도 되고, 수천 년의 시간과 수천 킬로미터의 공간을 뛰어넘어 홀로 한 고민이 아니라는, 이것이 옛 지성들로부터 이어져온 생각이며, 나 또한 거기에 손끝이나마 간신히 닿았음을 느끼게 되는 감동이, 혁명에 있습니다.


 또 한 가지 혁명이 마음을 건드리는 이유는, 비극적인 이야기의 아름다움이, 안타까움이, 비장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혁명이 그리고 있는 것처럼 정도전, 이성계, 정몽주가 순결한 인간이라면, 그런 우정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굉장히 멋진 일입니다. 그런 멋진 것이 우연과 찰나의 실수로 부서져 가는 모습에는 비극이 가져오는 슬픔과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삼국지연의가 관우와 제갈량의 죽음으로 아름다움을 얻듯이 말입니다.


 우리는 세 사람이 어떤 결말을 맞는지, 조금만 역사를 공부해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결말을 알고 보는 소설, 파국으로 치닫는 그 과정을 지켜봐야만 하는 소설은 사람의 마음 속 안타까움을 흔들어댑니다. 정몽주의 죽음을 알리는 담담한 기사 투의 문장이 앞에 놓이고, 정몽주를 살리기 위해 달려가는 정도전의 절박한 숨소리가 그런 안타까움을 극대화시킵니다. 그리고 독자들은 1권의 제일 첫머리로 돌아옵니다. 잠시 뒤에는 죽을 사람이 지난 삶을 정리하고 미래를 바라보며 남긴 글이 다시금 잔잔하게 울려옵니다.


 향긋한 문장으로 쓰인 소설입니다. 많은 것을 깨우쳐주고 많은 감정을 되살려준 소설입니다. 이런 소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흔히 있는 일은 아니지요. 다음번에도 이런 행운이 찾아오길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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