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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리영희, 임헌영 대담 / 한길사 / 2005년 3월
평점 :
현재 우리나라에서 선생이나 스승으로 부르며 존경을 표할만한 사람이 있을까? 김구 선생이나 장준하선생처럼 이미 고인이 된 분들을 제외하면 단연 리영희 선생이 떠오른다. 대담형식의 회고록인 대화를 읽으며 그간 몇몇 글을 통해 간접적으로만 접해왔던 그의 진면목을 느낄 수 있었는데 기쁨 그 자체였다. 스승은 어떠한 사람일까? 내 생각에는 인품과 사랑, 자애를 통해 사람들을 품는 고결한 스승, 지식과 지혜를 통해 사람을 일깨우는 각성의 스승이 있지 않을까 한다. 리영희 선생은 아마 각성의 스승에 더 가까울 것 같다.
선생은 일생은 그야말로 진실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라고 할 수 있다. 반공주의와 맹목적인 국가주의에 온 국민이 세뇌되어 있을 때, 영어, 일본어, 프랑스어, 중국어 등을 열심히 공부하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세계에 눈을 돌려 격변하는 세계정세를 연구하고 진실을 알리는 작업을 일관되게 해온 것이다. 극우에도 극좌에게도 치우치지 않으며, 끊임없이 자료를 찾고, 남들보다 열심히 공부함으로써 세계의 흐름을 잘 알았고, 우리나라의 처지와 미국, 중국 등 주변정세에 대해 객관적인 사실과 진실을 연구하고, 이를 우리와 세계인에게 알리는 실천적 지식인의 자세는 그야 말로 귀감이 아닐 수 없다.
70-90년대를 살아가면서 인간과 국가, 그리고 세계를 고민했던 이들이라면, 리영희 선생의 저작이 얼마나 날카로운 고통을 주었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어릴 적부터 세뇌되어왔던 모든 지식들이 깨어지는 아픔은 아프락사스의 알의 깨짐에 비유할 수 있을까. 이제와 생각해보면 초중고, 심지어 대학에서의 사회와 세계, 그리고 역사에 대해 배워온 것들이 얼마나 허망한 것이었는지. 그것이 모든 것으로 알았고, 이 이상의 진실은 없을 것으로 여겨왔던 것이 이제 어떠한 책들을 읽더라도 쉽게 부정되고 마는 가설의 한 조각에 불과한 것이며, 심지어는 조작되고 선전 선동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고통스런 일일 것이다.
이를 떠나 이런 사실을 인정한다는 것 자체가 자신의 삶의 근원을 부정하는 것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월남전 파병이 미국의 용병 노릇에 불과하며, 베트남의 매국노들을 돕는 일이고, 베트남 침공의 원인인 통킹만 사건이 미국의 조작이며, 그 이유는 베트남이 자유선거를 하면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설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이을 막으려고 저지른 비극이라는 점은 모두 사실로 밝혀졌다. 그러나 이를 인정한다면, 베트남 전쟁을 통해 친우를 잃고, 청춘과 건강을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바쳤던 이들에게는 자신의 희생과 개인적 비극을 모두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일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런 아픔을 견딜 수 없는 이들이나 희생을 부추겼던 무리들에게 진실을 갈파한 리영희 선생은 부정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따지고 보면, 이들도 불행한 존재들이 아닐까.
회고록을 통해 선생의 모습을 보면서 느낀 것은 그 분의 지사적 풍모의 기반이 평범한 상식인에서 비롯한 것이라는 점이었다. 이 책에는 일제시대부터 근래까지 역사의 격변기마다 글과 말을 통해 사회 변화의 힘과 계기를 주었던 선생의 일들이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항상 끊임없이 공부하고 탐구하면서 그 결과를 객관적으로 기술하였던 일들이 쓰여있다. 그러나 뜻밖에도 내가 볼 때에는 고고한 종교인적 품성이 아니라 평범한 상식인으로서의 자세를 지켜온 선생의 모습에서 표출된 것이다. 책에는 젊은 혈기로 못되게 굴다가 의연하고 용기있는 사람들의 모습에 반성하는 모습, 정권의 탄압에 겁먹었던 모습, 사회적 활동에만 애쓰다가 가족들에 소홀하였던 점을 후회하는 모습 등 선생의 인간적 면모와 단점도 기탄없이 나타난다. 그런 점에서 선생은 평범하지만 옳은 일은 옳고, 그른 일은 그르다고 하는 상식인의 자세를 끝까지 견지해나간다. 진실과 사실이라는 그 자체가 허용되지 않는 반공주의와 국수주의 속에서 평범한 상식인의 모습이란 스스로 지사적 풍모를 띌 수 밖에 없는 것. 그것이 한국현대사의 비극이자 리영희 선생을 얻은 우리의 기쁨의 근원이다.
리영희 선생의 세대에서는 중학생도 지식인에 해당하였다. 영어와 일어를 능숙하게 읽을 수 있었고, 많은 책들을 섭렵함으로써 인간과 세계관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또한 리영희 선생은 이공계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사회과학과 언론 분야에서 이토록 훌륭한 업적을 이루어냈다는 점이 놀랍지만 박정희 정권 시절에도 이공계로 유학하였다가 인문학자로 활동한 학자들은 많았다고 한다. 대학생과 대학원생들이 넘치고 또 넘치는 현재에서, 과연 왜 학문을 공부하고, 지식인의 책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 것인지. 어쩌면 우리는 기능적 지식인으로서 목적 의식 없이 쓸려다니는 레밍즈에 불과한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