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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의 정치 : 이제 소수를 위하여 ㅣ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44
이남석 지음 / 책세상 / 2001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차이의 정치, 소수자 정치 등등의 개념들은 보통 포스트모던 계열의 철학들에서 강조되어 왔던 것이다. 이러한 계열의 철학은 이전의 근대적 철학이 지닌 한계들을 넘어서기 위한 진지한 성찰의 측면도 있었지만, 이를 넘어서서 새로운 일반성을 수립하는 운동으로 나아가지 못한 한계를 동시에 지녔다. 물론 이들 철학들 중의 일부는 이러한 일반성 혹은 통일성의 수립 자체를 부정하고 개별성과 특수성을 일면적으로 강조하기도 한다.
아무튼 이러한 철학적 조류들은 실천적인 측면에 있어서 근대의 사회 구조물들뿐만 아니라 근대의 노동, 정당, 사회운동이 지녔던 한계를 일면 정당하게 지적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지배의 논리를 벗어나고자 한 해방의 논리가 다시 지배의 논리로 순환하고야 마는, 배제의 탈피를 향한 운동이 또다른 배제를 낳고야 마는, 마치 모든 것이 근대의 포획 기계들 사이로 빨려 들어가고야 마는 운동을 탈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희미하게나마 보여주었다.
이 책의 저자 역시 차이의 정치에서 대의제 민주주의와 협의 민주주의의 한계를 뛰어 넘을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고 있다. 그렇지만 저자의 모색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차이의 정치가 갖는 고유한 한계 또한 저자는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 엄밀한 논의는 이루어지고 있지 않지만 철학적 한계는 물론 실천적 측면에서 차이의 정치의 주체가 갖는 한계 또한 지적하고 있다. "현실의 맹점을 비판은 하되 대안 주체가 되지는 않겠다는 식"으로 뒷걸음질치는 차이의 정치의 주체들을 저자는 경계하며, "권력관이 없는 차이의 정치는 공허한 외침이나 강자에게 시혜를 구걸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이들에게 일침을 가한다.
저자가 제시하는 결론 혹은 현실적 대안은 근대 민주주의의 한계와 차이의 정치의 한계 모두를 넘어서는 것이다. 즉, "새로운 대안은 타자성을 수용해야만 하며 또한 동시에 구성적 공공선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가 제시하는 '비례대표제', '특수대표권', '제2의 상원' 등의 대안은 다소 지엽적이다. 물론 빈약한 실천적 경험을 공유하는 역사적 환경 속에서 좀 더 완성된 형태의 대안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을 감안해야 하지만.
아무튼 이 책은 여러 모로 쉽고 간결하며 유익하다. 그리고 소수자 운동의 경험을 갖고 있거나 지금도 실천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집단 혹은 개인 스스로의 궤적을 반추하며 앞으로의 '차이의 정치'의 방향을 모색하는 데에 있어서 이 책이 적지 않은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 역시 X항과 Y항을 넘어서는 Z항, 즉 제3항을 만드는 과제는 항상 우리의 몫이다.
덤으로, 이 책에서 공화주의적 전통에 대한 이야기들을 발견할 수도 있다. 공화주의의 좌파적 재전유를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눈여겨 볼 대목이 몇 군데 있다. 복지국가 혹은 후견국가와 참정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정리도 잘 되어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하버마스의 협의 민주주의에 대한 충분한 비판을 수행하기에는 지면의 제약이 좀 컷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