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미술관 - 미술관 담장을 넘어 전하는 열다섯 개 그림 이야기
이소라 지음 / 혜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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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빛 가득한 밤 너머 저만치쯤에 새벽이 숨어있을 것만 같은 표지가 참 예쁜 책이다. 미술 이야기를 담으려면 이정도는 되줘야지, 라며 즐거이 책장을 펼쳤다.
하루의 '처리해야할 일들'을 모두 마치고 맞이하는 밤의 노곤한 기분은 한가로운 마음을 만나 조금쯤 달달해진다. 그런 시간에 기분 좋게 긴장을 풀어주는 건 책이거나, 음악이거나, 그림이거나. 이 책은 제목이 말해주듯 한밤에 발끝을 톡톡 차며 편안히 보고 읽을만한 책이었다. 화가들의 삶과 그림이 전해주는 이야기, 그림에서 읽어낸 사색들을 편안하고 할랑하게 담고있다. 그렇지만 결코 가볍지만은 않게.

여기 소개된 열다섯 명의 화가와 열다섯 곳의 미술관들 중 이미 알고 있는 화가나 이미 다녀온 미술관을 만나는 일은 즐거웠다. 올 봄의 유럽여행에서 꽤나 여러 곳의 미술관을 다녔는데, 가는 곳마다 '내가 좋아하는 화가'를 새로 갈아치우고 싶을 만큼 매번 즐거운 경험이었다. '역시 고흐야', 했다가는 '르네 마그리트를 내 인생의 화가로 삼아야겠어', 했다가는 며칠 후엔 마티스나 코로나 혹은 또다른 누군가가 되기도 했었다.

그리고 여전히 제대로 만나보지 못한 수많은 화가들 중 몇몇을 이번 책을 통해 만났다. 내가 사랑해야할 화가들과 그림들이 여전히 많이 있다는 것 또한 즐거운 일이다. 처음 소개하고 있는 작품은 포드코빈스키(폴란드)의 <광분>이다. 그야말로 광분하여 날뛰고 있는 검은 말, 그리고 그 말 위에 올라탄 벌거벗은 여자. 그 여자는 너무나 평온한 모습으로 말의 목에 팔을 두르고 올라타 있다. 이 그림은 1894년 전시에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고 하는데, 말과 여인의 대비가 정말 인상적으로 보였다. 그런데 화가 자신이 며칠 뒤 이 그림 속 여인을 칼로 갈기갈기 찢어버렸다고 한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뒷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얼마 후 세상을 떠났다고 하니 그림에 얽히 이야기가 그림만큼이나 극적이다. 젊은 화가의 광적인 슬픔과 분노가 담겨있을 이 그림은 지금 복원되어 폴란드 크라쿠프 국립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고하니, 폴란드에 가야할 이유가 하나 생기고 말았다.
<그네>라는 작품으로만 기억하고 있던 프라고나르,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잇는 작품은 <책읽는 소녀>이다. 잔뜩 집중해서 발그레 달아오른 뺨을 한 소녀의 모습, 무언가에 몰입한 순간이 주는 팽팽한 긴장이 아름답다.

2007년, 그녀의 필름이 발견되면서 순식간에 화제를 모았던 비비안 마이어도 소개되어 있다. 영국의 미술 평론가 로라 커밍은 자화상을 '진실을 드러내는 특별한 수단'이라고 했다는데, 그녀가 가장 관심을 가졌던 피사체는 잘 알려진대로 그녀 자신이었다. 여러개의 가명들을 가지고, 자신의 정체에 대해 수많은 거짓말을 늘어놓았다는 마이어는 다만 사진을 통해 진실에 도달하고 싶었던걸까. 사람들이 그녀를 어떤 이름으로 부르던, 그녀를 누구로 생각하던, 그녀의 본질적인 정체는 달라지지 않은 채 스스로가 찍은 사진 속에 담겨 있는 셈이다. "그녀에게 중요했던 것은 존재 위에 덧씌워진 것들이 아니라 지금 자신이 카메라 렌즈를 들이대고 있는 '존재' 그 자체였다. (55쪽)" 그녀의 사진 중 아직 인화되지 않은 것이 13만5천 장에 달한다고 한다. 그녀가 보여주고자 했던 세계를 언젠가 더 만나보고 싶다.

특별히 게으른 하루를 보내고 마음이 불편한 날에는 존 윌리엄 고드워드의 <달콤한 게으름 Sweet to do nothing>을, 내 속의 너무 많은 내가 부담스러웠던 날에는 에곤 실레의 <이중 자화상>을 펼쳐보고 싶어질 것 같다. 그리고 이런 문장에 밑줄을 그을 것 같다. "실레의 강렬한 자화상들은 말하고 있다. '나'라고 정의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자아'가 있다는 생각. 그것은, 허구라고. (126쪽)"

한없이 낮은 곳에서, '더딤'과 '인내'의 과정을 거쳐 완성되는 모래 만다라는 TV 다큐멘터리를 통해 한번쯤 보았던 기억이 있다. 결코 세워지거나 관객의 시선을 받지 않은 채, 완성되면서 다시 흩어져 無로 돌아가 강물로 흘려보내진다는, 모래로 만드는 만다라. 만다라는 '본질을 얻는다'는 의미라고 하는데, 승려들이 얻으려는 구도의 본질은 모래 만다라를 만들고 허무는 과정일뿐, 그 결과물은 결코 아닌 셈이다. 작가의 글처럼 '내포하고 있는 의미와 외연의 형태가' 하나인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한 화가의 삶, 한 점의 그림에도 무수한 사연과 마음이 담겨 있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무수한 화가들과 그림들이 있다. 부지런히 미술관이나 전시를 찾아다닌다 해도 내가 직접 마주할 수 있는 화가와 그림은 비록 그 중 너무나 적은 일부이겠지만, 미술을 이야기하는 좋은 책들, 예쁜 책들이 있어, 책을 통해서나마 문득 너무나 사랑하고 싶은 그림들을 만나게 된다. 어쩌면 결정적인 한 장면에서 문득 비루한 인생까지도 사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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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근육을 키우는 질문하는 소설들 - 카프카 / 카뮈 / 쿤데라 깊이 읽기
조현행 지음 / 이비락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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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소설을 읽을까? 나는 왜 소설을 읽는가? 거의 잊어가던 이런 케케묵은 질문을 다시 떠오르게 한 책 <생각의 근욱을 키우는 질문하는 소설들>. 실재로 존재하지 않지만, 충분히 존재할수 있을 법한 인물들의 삶을 나는 왜 그리도 집요하게 쫓아다니는걸까. 이 책은 '소설'은 우리의 삶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예리하고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던 세 명의 소설가들과 그들의 작품을 소개(분석)하고 있다.

세 명의 작가는  카프카, 카뮈 그리고 쿤데라이다. 개인적으로 카프카와 카뮈는 언젠가 전작읽기를 해보리라, 늘 염두에 두고있던 작가들이고, 쿤데라는 뭔가 '어렵다'는 선입관같은게 있어서 슬쩍 미뤄두고 있던 작가이다. 결국 관심과 애정은 늘 있었지만 실제로 그들의 작품을 많이 읽어 보지는 못했다. 책 속에서 이미 읽었던 소설들을 만나면 반가우면서도 제대로(?) 다시 읽어보고 싶어졌고, 미처 읽지 못한 소설들은 숙제처럼 생각되었다. 이로써 쵸코렛 복근까지는 아니어도 내 생각의 근육들이 조금은 단단해질 젓 같은 착각을 해보면서.

이제 세 작가에 대한 짧은 정리를 해보려는데, 이 책에는 사실 너무 많은 내용들이 꽉 들어차있다. 그러니 감히 내용정리를 한다기보다 짧은 '감상'이라는 편이 맞을 것 같다.

먼저 카프가. 대학 때 한창 꽂혀있었던 작가인데, 지금 생각하면 20대의 내가 과연 무슨 생각을 하며 그의 작품들을 읽었을지.. 까마득할 뿐이다. 아마도 실존철학의 멋에 취해 읽었던 것 같기도 하고.. 사실 그의 소설은 해석적으로 다양하게 접근할 수 있다는 점에서 쉽다면 쉽고, 어렵다면 어려운 소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관점에서 봐도 '말이 되는' 소설, 어느 쪽에서 바라봐도 작품이 되는 입체 조형물같다. 이는 자신을 그저 '사건을 보는 사람'이라고 규정한 카프카의 자기인식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어떻게 바라봐도 말이 되는 세상, 하지만 조금 더 들여다보면 너무도 불확실하고 말도 안되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카프카의 소설은  이 세계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본 것을 그대로 증언하고 있고, 우리는 '카프카가 본 세상'을 보면서 내가 보지 못했던 부분을 확인하고, 또 다른 것을 보기 위해 시도하게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알베르 카뮈. 우리에게 '부조리의 작가'로 잘 알려진 그는 "자신의 창조에 미래가 없음을 아는 것" 그러면서 한편으로 그 예술을 찬양하는 이 두가지 사명을 동시에 실천하는 것이 바로 부조리한 창조자에게 열려진 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에게 세계는 이처럼 모순된 가치를 인정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부조리한 곳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놓치면 안된다고 그는 강조하고 있다.

살만한 가치가 없기 때문에 살만한 가치를 만들어 내어야 합니다. 여기서 삶은 그 자체로서 중요해집니다. 그러기에 카뮈는 '나느냐 죽느냐'의 문제로 인생을 허비하는 것보다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떠한 삶의 가치를 만들어 낼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답을 구해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102쪽)

그의 이러한 생각이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는 소설이 <페스트>라고 생각된다. 저자는 '투쟁'을 카뮈 작품을 설명하는 주요 키워드라고 말하며, 부조리한 상황을 자각하지 못하고 투쟁하지 않으면 그것은 거대한 폭력으로 바뀌어 인간을 억압하게 된다는 것이다. <페스트>에서 카뮈는 재앙 앞에서 '투쟁'하는 평범한 인간의 여러 모습을 통해 어떻게 부조리한 세계를 극복해 가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전락>은 아직 읽어보지 못한 소설인데, 심판을 못견뎌 하면서도 심판하기를 즐기는 우리들의 이중성과 함께 인간이 인간을 심판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고 한다. 생각해보고 싶은 솔깃한 주제여서 꼭 읽어보아야겠다.

마지막으로 밀란 쿤데라. 내게는 왠지 어렵게만 느껴졌던 작가인데 이 책을 통해 차근차근 공부를 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이제는 그의 작품을 좀더 자신있게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특히 소설을 어느 하나의 주제로 쟁점화시키는 것을 싫어했다고 하는데, 한 인간을 '어떤 사람'이라고 단순화시켜 말하는 것이 폭력적인 것처럼 한 작품을 '어떤 소설'이라고 말하는 것 역시 작가에게는 폭력적으로 느껴질 것이 분명하다. 소설을 읽으며 자꾸만 주제를 단순화시켜 하나로 수렴시키려는 나의 독서 태도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었다.

소설의 정신은 복잡함의 정신이다. 모든 소설은 독자들에게 "사실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복잡하다"라고 말한다. 소설의 영원한 진실은 이것이지만, 묻기도 전에 존재하면서 물음 자체를 없애 버리는 단순하고 성급한 대답들의 시끄러움 때문에 점점 들리지 않는다. (170쪽)

이 책에서 소개하는 소설은 <농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정체성> 그리고 <무의미의 축제> 이렇게 네 권이다. 이 중 아직 읽지 않는 <정체성>이 나를 가장 사로잡았다. 제목이 너무 본질적이어서 진부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쿤데라는 타인에게 주목받고 싶은 현대인의 욕망이 결코 충족될 수 없다는 진실을 여주인공 샹탈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왜? 그것은 인간은 결국 누구에게나 타인일 뿐이기 때문이라고. 인간이 타인에게 지니는 '그 의미 없음'에 대해 쓰고 있다고 한다. 쿤데라는 "당신은 타인에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서로에게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라고 냉담하게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나의 정체성이 존재할 자리가 과연 있을까? 참혹한 현실, 인생의 무의미함을 우리의 눈 앞에 아무렇지도 않게 들이미는 것이 바로 쿤데라의 소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가운데서 그가 말하는 희망은 있다.

"다수의 용광로 속에 당신의 개별성이 용해하면서 패배감을 맛보느냐, 아니면 황홀경에 빠지느냐는 당신 자유야. 우리 선택을 바로 황홀경이지."라는 소설 <정체성> 속 한대목처럼 무의미한 삶에서 어떤 삶을 살지 선택할 자유는 개인에게 있다고 그는 말한다. <무의미의 축제>에서 쿤데라가 무의미를 축제처럼 즐기라는 말로 소설을 마무리했던 것도 생각난다. 무의미의 의미를 생각해보라는 것이 쿤데라가 던지는 질문 중 하나가 아닐까.

 

 

어떤 질문이 우리 삶의 핵심을 관통한다면, 혹은 외면하고 싶은 주제에 대해 묻는다면 당연히 곤혹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그런 질문들에 답을 찾아보고, 새로운 나만의 질문을 만들어 보는 과정이 바로 소설읽기라는 생각을 해본다. 소설을 읽는 일은 현실이 아닌 곳으로의 도피가 아니라, 보다 생생한 현실을 들여다보는 일이며 현실 이면의 진실을 들여다보는 일이라는 걸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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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인간의 모험 - 1평 칸막이 안에서 벌어진 1천 년의 역사
이종서 지음 / 웨일북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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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몇 해 전 강신주가 한 강연에서 샐러리맨은 출근하는 노예라고 표현하는걸 들은 일이 있었다. 그리고 이 책의 뒷표지에는 이런 질문이 쓰여있다. "회사에 얽매이는 우리는 노예의 명맥을 이어온 것은 아닐까?"

사실 오늘도 열심히 학원을 전전하며 이른바 '공부'에 매진하는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최종 목표가 대기업 정직원인 경우는 의외로 많다. 이 책의 제목을 빌자면 '사무인간'이 되는 일, 육체노동보다 더 폼나고 가치있어보이고 더 많은 급여를 받을 수 있는 일 말이다. 그런데 '노예'라니? 사무인간의 역사와 사회, 현실 등을 넓고 얕게 다루고 있는 이 책은 그 질문에 대한 이해와 답을 찾아가고 있다.

'사무인간'이라고 하는 다소 한정적인 주제를 다룬다고 해도, 우리의 모든 이야기가 그러하듯 역사 이야기를 빼고는 논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의 직업군을 이야기하는 이 책 역시도 인류의 정치사, 경제사 나아가 과학사 등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 커다란 흐름 속에서 사무인간들의 이야기는 조각배처럼 작고 가볍게 떠나니고 있다. 역류라는건 감히 꿈꾸지도 못하면서.

이야기는 그리스 로마 시대, 다만 생존만을 조건으로 사무일을 했던 노예 이야기에서 시작되어 중세의 필경사들로 이어진다. 고대 그리스에서 필경사의 업무란 많은 노예를 동원하는 하급 행정사무였는데, 중세에는 필경사들의 지위가 상승하면서 쓰기 업무의 가치도 높아졌고, 이후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쓰기 작업은 점차 '생각하기를 포함한 쓰기'로 바뀌면서 행정 사무의 격이 좀더 높아졌다고 한다. 그리고 산업과 상업의 발달은 더 많은 사무 일거리의 증가로 이어졌고 이로써 사무원은 보다 높은 지위를 보장받게 된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과 같은 '화이트 칼라'가 처음부터 높이 평가받고 수용되었던 것은 아니라고 하는 점이 흥미로웠다. 은행이 생기고 회계사무가 도입되면서 화이트 칼라로 통칭되는 새로운 직업군이 본격적으로 등장했지만 사무실이라는 네모난 감옥에서 일하며, 아무런 생산물이 없으니 무엇을 생산하는지도 알 수 없이 육체노동에 무임승차하는 존재로 여겨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조서는 점차 영향력이 높아가는 사무원의 존재에 대한 긴장과 두려움의 한 표현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큰 정치, 경제의 흐름과 더불어 사무인간의 정체성 세우기에 영향을 미친 작은 흐름들도 있는데, 그중 개인적으로 가장 관심이 갔던 것이 문구의 발전이다. 타자기나 컴퓨터처럼 거창한 발명품이 아니어도, 그저 연필 뒤에 지우개를 붙이는 것만으로도 사무실 일이 얼마나 편리해젔을지를 상상하는 일은 즐겁다. 새의 깃털을 깍아가며 글을 쓰다가 만년필에 잉크를 가득 채워놓고 슥슥 써내려가게 되었을 때 수많은 서류를 수기로 써야했던 이들의 놀라운 기쁨은 어땟을까. 처음에는 아이디어 상품처럼 시작되었다가 어느새 사무직원들의 벗이 되어버린 물건들의 이야기도 (예전에 읽었던 <문구의 모험> 만큼 세심하게 다뤄지고 있지는 않지만) 이 책에서 만나볼 수 있어 반가웠다.

어쩌면 든든한 울타리일수 있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를 차단하기도 하는 파티션 뒤에서 무한경쟁에 내몰리며 오늘도 달리는 사무인간들. 눈에 보이는 땀을 흘리진 않지만, 생존을 위해 진땀을 빼며 일하고 있으니 현대의 노예라고 해도 완전히 틀린 말을 아닐테지만... 어쩌면 형태만 다를 뿐 일하지 않는 삶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일은 결국 생존과 이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왜 일하고 있습니까?"
이 책이 던지는 마지막 질문이다. 단지 생존을 위해 일하는지, 노동을 자아 표현의 도구로 규정할 수 있는지, 일할 의무와 개인적 성취는  얼마나 멀리 혹은 가까이 있는건지, 정신 노동이 과연 더 우월한 것인지 등등 질문의 답을 찾으려다보면 더 많은 질문들과 마주하게 된다. 이 책의 부제처럼 '1평 칸막이 안에서 벌어진 1천 년의 역사'를 짚어보며 일과 노동의 의미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하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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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노후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2
박형서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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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놓고보면 왠지 '노후생활'에 대한 가이드북같이 보이지만 소설책이다. 제발 소설같은 이야기로 끝나기를 바라며 읽게되는 소설이다.

설정은 이렇다. 멀지않은 미래(2031년)의 한국, 예상한대로 초고령 사회를 맞는다. 젊은이들을 노인부양의 부담에 아우성이고 노인혐오의 기운이 온 사회에 감돌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갈되어버린 연금'. 이렇게해서 비밀리에 국가적인 사업이 실행된다. 그것은 놀랍게도 너무 많은 연금을 받는 비생산 고령인구를 줄이는 것이다.

이것은 너무나 가혹한 일이다. 죽임을 당하는 노인의 입장에서야 당연히도 가혹한 일이고, 하나의 죽음이 담고 사라져버리는 하나의 세계에게도 가혹하며, 그 일을 직접 행해야하는 '공무원'에게도 말할 수 없이 가혹한 일이다. 영화 인터스텔라속 유명한 대사가 생각난다.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과연 초고령사회의 답도 어딘가에는 있을 것이고, 적어도 이 소설 속과 같은 방법은 아닐거라고 믿고싶다. 인간의 존엄성을 충분히 지키면서 과연 우리는 어떤 답을 찾을 수 있을까.

아무튼 소설의 첫 대목부터 인상적이었다. "충남 공주의 강 씨는 중학생 시절에 담배를 훔친 적이 있다."로 시작해 소심하고 비루한 그의 생이 단 세 쪽으로 짧게 요약된다. 그리고 죽음.

이렇게 이 책은 홀 수 장에서는 처리되는 각각의 인물들의 죽음, 동시에 생을 짧게 다루고, 짝수 장에서는 주인공이라 할 장길도와 아내 수련의 서사가 이어진다. 그는 전직 '공무원'으로 70세를 맞아 막 퇴직한 참이다. 그런데 아홉살 연상의 부인이 자신 몰래 연금에 가입했다는걸 알고 기겁한다. 그의 예상대로 이미 '제거 리스트'에 올라버린 부인을 살리기 위해 그는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게된다. 아내를 부정 수급자로 만들어 죽음을 면하게 하기 위해 그는 자신의 모든 역량과 모든 사랑과 모든 관계를 기울이게 된다. 그것은 결코 포기할 수도, 중단할 수도 없는 싸움이었고, 결국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서로간의 증오를 낳는 과학과 의술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문명이 과연 인류를 더 행복하게 했는가,라는 거창한 질문까지는 아니어도 생명연장의 다양한 기술 개발이 과연 노인들을 더 행복하게 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보게 된다. 가까이서 바라보는 노년의 삶이 그리 편안하지 않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러하다. 대부분의 경우 어쩔 수 없이 정서적으로 외롭고, 육체적으로 불편한 가운데서 하루하루를 보내야하는 것이 오늘날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노년의 삶'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이 보여주는 최악의 시나리오만큼은 당연히도 결코 우리의 선택지 속에 들어와선 안될 것이다. 결국 우리 모두 시간을 거스를 수 없고, '우리'가 곧 '그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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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래빗 전집
베아트릭스 포터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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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래빗을 처음 본 것은 오래전 작은 커피잔에서였다. 매끄러운 표면에 그려져 있던 밝은 초록 숲과 작은 토끼들의 모습이 너무도 앙증맞아서 소꿉놀이 때 살짝 꺼내쓰곤 했었다. 그리고 훨씬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것이 베아트릭스 포터의 문학 작품 캐릭터인걸 알게 되었다. 하지만 막상 그 글들을 읽어보지 않았다는걸, 더 오랜 시간이 지나 이 책을 마주하고서야 알게 되었다.

이 책을 말하려면 작가인 베아트릭스 포터에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그녀는 1866년 런던 상류층 가정에서 외동딸로 태어났다. 이로써 꽃길만 걸었을것 같지만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 앞에서 수없이 도전하고, 좌절을 겪게 된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식물학자의 꿈을 접어야했고, 신분제 탓에 힘겹게 맺어진 사랑의 인연 역시 약혼자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끝나고 만다. 이후 시골로 들어가 농부로 살아가다가 무분별한 개발에 반대하는 환경운동가로 활동하였고 그녀가 땅을 기증한 환경운동단체 '내셔널트러스트'는 세계적인 기구가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투쟁적으로 보이는 삶의 여정이 그녀를 얼마나 단단하게 만들었을까, 그럼에도 어떤 마음이 이토록 따뜻한 그림과 재미나고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쓰게 했을까.

1900년, 포터가 자신의 가정교사의 아들이 아프다는 소식을 전해듣게 되면서 이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녀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고 한다. "뭐라고 써야할지 모르겠어서 네 마리의 토끼 이야기를 들려주기로 했단다. 그 토끼의 이름은 각각 플롭시, 몹시, 코튼테일 그리고 피터야." 이렇게 해서 파란 쟈켓을 차려입은 어린 토끼 피터 래빗과 숲속 마을의 이야기는 시작되고, 이 전집의 첫 작품이 된다.

이야기는 다만 숲 속 생활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인근에는 사람들의 마을이 있어 농장의 이야기가 더해지고, 여러 동물들의 이야기 역시도 우리 사람들의 행태를 고스란히 닮아있다. 숲 속 동물들이라는 거울을 통해 우리를 바라볼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아이들을 위해 쓰여진만큼 아이들의 시선으로 바라본 어른들의 모습이나,  이솝 우화의 모티브, 세계 어디서나 발견된다는 동화적이고 설화적인 요소들, 우렁각시 이야기나 빨간 망토 이야기 같은 동화 씨앗들이 솔솔 뿌려져 있었다. 그리고 수수께끼같은 열린 질문들이 들어있어 자신만의 상상력으로 이야기를 이어가볼 수 있기도 했다.

모두 27편의 에피소드 속에는 교훈적으로 읽힐만한 것들도 있었고, 보다 직접적으로 인간들의 우스꽝스러운 행태를 묘사하는 것들도 있었지만 뭔가를 지적하고 가르치려는 느낌없이, 거창하지 않게, 덤덤히 쓰고 있는 점도 좋았다. 마치 우리들의 하루하루같은 숲 속 동물들의 이야기, 하지만 우리의 시간과는 조금 다르게 흘러가는 그들의 모습에서 우리가 장악하지 못한 무한한 시간과 공간들, 결코 보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볼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림들이 있다. 한 때 식물학자를 꿈꾸었던 만큼 풀과 나무들은 허투로 그려진 것이 없다. 동물들의 모습도 역시 허술하지 않다. 사랑스러운 관찰이 없다면 이런 그림은 나올 수 없을 것이다. 그림 속에도 정말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조금 건조한 글과 따뜻하고 세밀한 그림들이 조화롭다. 자신의 섬세한 그림들에 대해 포터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새롭게 만들어내는 일은 못하겠어요. 그저 보이는대로 따라 그릴 뿐이죠."

요즈음 어른들을 위한 동화를 표방한 여러 책들이 나오고 있는데, 이 이야기들이야말로 그 원조가 아닐까 생각된다. '엉큼한 고양이 이야기' 같은 작품은 애니메이션 '톰과 제리'를 고스란히 연상시키기도 했다. 수채화같은 그림들과 과장되지 않은 묘사들, 그 안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동화적 상상력들 그리고 우리를 꿈꾸게 하는 열린 질문들이 이 한 권에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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