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인간의 모험 - 1평 칸막이 안에서 벌어진 1천 년의 역사
이종서 지음 / 웨일북 / 2018년 6월
평점 :
절판


몇 해 전 강신주가 한 강연에서 샐러리맨은 출근하는 노예라고 표현하는걸 들은 일이 있었다. 그리고 이 책의 뒷표지에는 이런 질문이 쓰여있다. "회사에 얽매이는 우리는 노예의 명맥을 이어온 것은 아닐까?"

사실 오늘도 열심히 학원을 전전하며 이른바 '공부'에 매진하는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최종 목표가 대기업 정직원인 경우는 의외로 많다. 이 책의 제목을 빌자면 '사무인간'이 되는 일, 육체노동보다 더 폼나고 가치있어보이고 더 많은 급여를 받을 수 있는 일 말이다. 그런데 '노예'라니? 사무인간의 역사와 사회, 현실 등을 넓고 얕게 다루고 있는 이 책은 그 질문에 대한 이해와 답을 찾아가고 있다.

'사무인간'이라고 하는 다소 한정적인 주제를 다룬다고 해도, 우리의 모든 이야기가 그러하듯 역사 이야기를 빼고는 논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의 직업군을 이야기하는 이 책 역시도 인류의 정치사, 경제사 나아가 과학사 등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 커다란 흐름 속에서 사무인간들의 이야기는 조각배처럼 작고 가볍게 떠나니고 있다. 역류라는건 감히 꿈꾸지도 못하면서.

이야기는 그리스 로마 시대, 다만 생존만을 조건으로 사무일을 했던 노예 이야기에서 시작되어 중세의 필경사들로 이어진다. 고대 그리스에서 필경사의 업무란 많은 노예를 동원하는 하급 행정사무였는데, 중세에는 필경사들의 지위가 상승하면서 쓰기 업무의 가치도 높아졌고, 이후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쓰기 작업은 점차 '생각하기를 포함한 쓰기'로 바뀌면서 행정 사무의 격이 좀더 높아졌다고 한다. 그리고 산업과 상업의 발달은 더 많은 사무 일거리의 증가로 이어졌고 이로써 사무원은 보다 높은 지위를 보장받게 된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과 같은 '화이트 칼라'가 처음부터 높이 평가받고 수용되었던 것은 아니라고 하는 점이 흥미로웠다. 은행이 생기고 회계사무가 도입되면서 화이트 칼라로 통칭되는 새로운 직업군이 본격적으로 등장했지만 사무실이라는 네모난 감옥에서 일하며, 아무런 생산물이 없으니 무엇을 생산하는지도 알 수 없이 육체노동에 무임승차하는 존재로 여겨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조서는 점차 영향력이 높아가는 사무원의 존재에 대한 긴장과 두려움의 한 표현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큰 정치, 경제의 흐름과 더불어 사무인간의 정체성 세우기에 영향을 미친 작은 흐름들도 있는데, 그중 개인적으로 가장 관심이 갔던 것이 문구의 발전이다. 타자기나 컴퓨터처럼 거창한 발명품이 아니어도, 그저 연필 뒤에 지우개를 붙이는 것만으로도 사무실 일이 얼마나 편리해젔을지를 상상하는 일은 즐겁다. 새의 깃털을 깍아가며 글을 쓰다가 만년필에 잉크를 가득 채워놓고 슥슥 써내려가게 되었을 때 수많은 서류를 수기로 써야했던 이들의 놀라운 기쁨은 어땟을까. 처음에는 아이디어 상품처럼 시작되었다가 어느새 사무직원들의 벗이 되어버린 물건들의 이야기도 (예전에 읽었던 <문구의 모험> 만큼 세심하게 다뤄지고 있지는 않지만) 이 책에서 만나볼 수 있어 반가웠다.

어쩌면 든든한 울타리일수 있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를 차단하기도 하는 파티션 뒤에서 무한경쟁에 내몰리며 오늘도 달리는 사무인간들. 눈에 보이는 땀을 흘리진 않지만, 생존을 위해 진땀을 빼며 일하고 있으니 현대의 노예라고 해도 완전히 틀린 말을 아닐테지만... 어쩌면 형태만 다를 뿐 일하지 않는 삶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일은 결국 생존과 이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왜 일하고 있습니까?"
이 책이 던지는 마지막 질문이다. 단지 생존을 위해 일하는지, 노동을 자아 표현의 도구로 규정할 수 있는지, 일할 의무와 개인적 성취는  얼마나 멀리 혹은 가까이 있는건지, 정신 노동이 과연 더 우월한 것인지 등등 질문의 답을 찾으려다보면 더 많은 질문들과 마주하게 된다. 이 책의 부제처럼 '1평 칸막이 안에서 벌어진 1천 년의 역사'를 짚어보며 일과 노동의 의미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하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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