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래빗 전집
베아트릭스 포터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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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래빗을 처음 본 것은 오래전 작은 커피잔에서였다. 매끄러운 표면에 그려져 있던 밝은 초록 숲과 작은 토끼들의 모습이 너무도 앙증맞아서 소꿉놀이 때 살짝 꺼내쓰곤 했었다. 그리고 훨씬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것이 베아트릭스 포터의 문학 작품 캐릭터인걸 알게 되었다. 하지만 막상 그 글들을 읽어보지 않았다는걸, 더 오랜 시간이 지나 이 책을 마주하고서야 알게 되었다.

이 책을 말하려면 작가인 베아트릭스 포터에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그녀는 1866년 런던 상류층 가정에서 외동딸로 태어났다. 이로써 꽃길만 걸었을것 같지만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 앞에서 수없이 도전하고, 좌절을 겪게 된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식물학자의 꿈을 접어야했고, 신분제 탓에 힘겹게 맺어진 사랑의 인연 역시 약혼자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끝나고 만다. 이후 시골로 들어가 농부로 살아가다가 무분별한 개발에 반대하는 환경운동가로 활동하였고 그녀가 땅을 기증한 환경운동단체 '내셔널트러스트'는 세계적인 기구가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투쟁적으로 보이는 삶의 여정이 그녀를 얼마나 단단하게 만들었을까, 그럼에도 어떤 마음이 이토록 따뜻한 그림과 재미나고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쓰게 했을까.

1900년, 포터가 자신의 가정교사의 아들이 아프다는 소식을 전해듣게 되면서 이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녀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고 한다. "뭐라고 써야할지 모르겠어서 네 마리의 토끼 이야기를 들려주기로 했단다. 그 토끼의 이름은 각각 플롭시, 몹시, 코튼테일 그리고 피터야." 이렇게 해서 파란 쟈켓을 차려입은 어린 토끼 피터 래빗과 숲속 마을의 이야기는 시작되고, 이 전집의 첫 작품이 된다.

이야기는 다만 숲 속 생활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인근에는 사람들의 마을이 있어 농장의 이야기가 더해지고, 여러 동물들의 이야기 역시도 우리 사람들의 행태를 고스란히 닮아있다. 숲 속 동물들이라는 거울을 통해 우리를 바라볼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아이들을 위해 쓰여진만큼 아이들의 시선으로 바라본 어른들의 모습이나,  이솝 우화의 모티브, 세계 어디서나 발견된다는 동화적이고 설화적인 요소들, 우렁각시 이야기나 빨간 망토 이야기 같은 동화 씨앗들이 솔솔 뿌려져 있었다. 그리고 수수께끼같은 열린 질문들이 들어있어 자신만의 상상력으로 이야기를 이어가볼 수 있기도 했다.

모두 27편의 에피소드 속에는 교훈적으로 읽힐만한 것들도 있었고, 보다 직접적으로 인간들의 우스꽝스러운 행태를 묘사하는 것들도 있었지만 뭔가를 지적하고 가르치려는 느낌없이, 거창하지 않게, 덤덤히 쓰고 있는 점도 좋았다. 마치 우리들의 하루하루같은 숲 속 동물들의 이야기, 하지만 우리의 시간과는 조금 다르게 흘러가는 그들의 모습에서 우리가 장악하지 못한 무한한 시간과 공간들, 결코 보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볼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림들이 있다. 한 때 식물학자를 꿈꾸었던 만큼 풀과 나무들은 허투로 그려진 것이 없다. 동물들의 모습도 역시 허술하지 않다. 사랑스러운 관찰이 없다면 이런 그림은 나올 수 없을 것이다. 그림 속에도 정말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조금 건조한 글과 따뜻하고 세밀한 그림들이 조화롭다. 자신의 섬세한 그림들에 대해 포터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새롭게 만들어내는 일은 못하겠어요. 그저 보이는대로 따라 그릴 뿐이죠."

요즈음 어른들을 위한 동화를 표방한 여러 책들이 나오고 있는데, 이 이야기들이야말로 그 원조가 아닐까 생각된다. '엉큼한 고양이 이야기' 같은 작품은 애니메이션 '톰과 제리'를 고스란히 연상시키기도 했다. 수채화같은 그림들과 과장되지 않은 묘사들, 그 안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동화적 상상력들 그리고 우리를 꿈꾸게 하는 열린 질문들이 이 한 권에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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