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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근육을 키우는 질문하는 소설들 - 카프카 / 카뮈 / 쿤데라 깊이 읽기
조현행 지음 / 이비락 / 2018년 7월
평점 :
우리는 왜 소설을 읽을까? 나는 왜 소설을 읽는가? 거의 잊어가던 이런 케케묵은 질문을 다시 떠오르게 한 책 <생각의 근욱을 키우는 질문하는 소설들>. 실재로 존재하지 않지만, 충분히 존재할수 있을 법한 인물들의 삶을 나는 왜 그리도 집요하게 쫓아다니는걸까. 이 책은 '소설'은 우리의 삶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예리하고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던 세 명의 소설가들과 그들의 작품을 소개(분석)하고 있다.
세 명의 작가는 카프카, 카뮈 그리고 쿤데라이다. 개인적으로 카프카와 카뮈는 언젠가 전작읽기를 해보리라, 늘 염두에 두고있던 작가들이고, 쿤데라는 뭔가 '어렵다'는 선입관같은게 있어서 슬쩍 미뤄두고 있던 작가이다. 결국 관심과 애정은 늘 있었지만 실제로 그들의 작품을 많이 읽어 보지는 못했다. 책 속에서 이미 읽었던 소설들을 만나면 반가우면서도 제대로(?) 다시 읽어보고 싶어졌고, 미처 읽지 못한 소설들은 숙제처럼 생각되었다. 이로써 쵸코렛 복근까지는 아니어도 내 생각의 근육들이 조금은 단단해질 젓 같은 착각을 해보면서.
이제 세 작가에 대한 짧은 정리를 해보려는데, 이 책에는 사실 너무 많은 내용들이 꽉 들어차있다. 그러니 감히 내용정리를 한다기보다 짧은 '감상'이라는 편이 맞을 것 같다.
먼저 카프가. 대학 때 한창 꽂혀있었던 작가인데, 지금 생각하면 20대의 내가 과연 무슨 생각을 하며 그의 작품들을 읽었을지.. 까마득할 뿐이다. 아마도 실존철학의 멋에 취해 읽었던 것 같기도 하고.. 사실 그의 소설은 해석적으로 다양하게 접근할 수 있다는 점에서 쉽다면 쉽고, 어렵다면 어려운 소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관점에서 봐도 '말이 되는' 소설, 어느 쪽에서 바라봐도 작품이 되는 입체 조형물같다. 이는 자신을 그저 '사건을 보는 사람'이라고 규정한 카프카의 자기인식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어떻게 바라봐도 말이 되는 세상, 하지만 조금 더 들여다보면 너무도 불확실하고 말도 안되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카프카의 소설은 이 세계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본 것을 그대로 증언하고 있고, 우리는 '카프카가 본 세상'을 보면서 내가 보지 못했던 부분을 확인하고, 또 다른 것을 보기 위해 시도하게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알베르 카뮈. 우리에게 '부조리의 작가'로 잘 알려진 그는 "자신의 창조에 미래가 없음을 아는 것" 그러면서 한편으로 그 예술을 찬양하는 이 두가지 사명을 동시에 실천하는 것이 바로 부조리한 창조자에게 열려진 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에게 세계는 이처럼 모순된 가치를 인정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부조리한 곳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놓치면 안된다고 그는 강조하고 있다.
살만한 가치가 없기 때문에 살만한 가치를 만들어 내어야 합니다. 여기서 삶은 그 자체로서 중요해집니다. 그러기에 카뮈는 '나느냐 죽느냐'의 문제로 인생을 허비하는 것보다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떠한 삶의 가치를 만들어 낼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답을 구해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102쪽)
그의 이러한 생각이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는 소설이 <페스트>라고 생각된다. 저자는 '투쟁'을 카뮈 작품을 설명하는 주요 키워드라고 말하며, 부조리한 상황을 자각하지 못하고 투쟁하지 않으면 그것은 거대한 폭력으로 바뀌어 인간을 억압하게 된다는 것이다. <페스트>에서 카뮈는 재앙 앞에서 '투쟁'하는 평범한 인간의 여러 모습을 통해 어떻게 부조리한 세계를 극복해 가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전락>은 아직 읽어보지 못한 소설인데, 심판을 못견뎌 하면서도 심판하기를 즐기는 우리들의 이중성과 함께 인간이 인간을 심판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고 한다. 생각해보고 싶은 솔깃한 주제여서 꼭 읽어보아야겠다.
마지막으로 밀란 쿤데라. 내게는 왠지 어렵게만 느껴졌던 작가인데 이 책을 통해 차근차근 공부를 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이제는 그의 작품을 좀더 자신있게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특히 소설을 어느 하나의 주제로 쟁점화시키는 것을 싫어했다고 하는데, 한 인간을 '어떤 사람'이라고 단순화시켜 말하는 것이 폭력적인 것처럼 한 작품을 '어떤 소설'이라고 말하는 것 역시 작가에게는 폭력적으로 느껴질 것이 분명하다. 소설을 읽으며 자꾸만 주제를 단순화시켜 하나로 수렴시키려는 나의 독서 태도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었다.
소설의 정신은 복잡함의 정신이다. 모든 소설은 독자들에게 "사실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복잡하다"라고 말한다. 소설의 영원한 진실은 이것이지만, 묻기도 전에 존재하면서 물음 자체를 없애 버리는 단순하고 성급한 대답들의 시끄러움 때문에 점점 들리지 않는다. (170쪽)
이 책에서 소개하는 소설은 <농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정체성> 그리고 <무의미의 축제> 이렇게 네 권이다. 이 중 아직 읽지 않는 <정체성>이 나를 가장 사로잡았다. 제목이 너무 본질적이어서 진부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쿤데라는 타인에게 주목받고 싶은 현대인의 욕망이 결코 충족될 수 없다는 진실을 여주인공 샹탈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왜? 그것은 인간은 결국 누구에게나 타인일 뿐이기 때문이라고. 인간이 타인에게 지니는 '그 의미 없음'에 대해 쓰고 있다고 한다. 쿤데라는 "당신은 타인에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서로에게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라고 냉담하게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나의 정체성이 존재할 자리가 과연 있을까? 참혹한 현실, 인생의 무의미함을 우리의 눈 앞에 아무렇지도 않게 들이미는 것이 바로 쿤데라의 소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가운데서 그가 말하는 희망은 있다.
"다수의 용광로 속에 당신의 개별성이 용해하면서 패배감을 맛보느냐, 아니면 황홀경에 빠지느냐는 당신 자유야. 우리 선택을 바로 황홀경이지."라는 소설 <정체성> 속 한대목처럼 무의미한 삶에서 어떤 삶을 살지 선택할 자유는 개인에게 있다고 그는 말한다. <무의미의 축제>에서 쿤데라가 무의미를 축제처럼 즐기라는 말로 소설을 마무리했던 것도 생각난다. 무의미의 의미를 생각해보라는 것이 쿤데라가 던지는 질문 중 하나가 아닐까.
어떤 질문이 우리 삶의 핵심을 관통한다면, 혹은 외면하고 싶은 주제에 대해 묻는다면 당연히 곤혹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그런 질문들에 답을 찾아보고, 새로운 나만의 질문을 만들어 보는 과정이 바로 소설읽기라는 생각을 해본다. 소설을 읽는 일은 현실이 아닌 곳으로의 도피가 아니라, 보다 생생한 현실을 들여다보는 일이며 현실 이면의 진실을 들여다보는 일이라는 걸 알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