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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쇼핑 - 아무것도 사지 않은 1년, 그 생생한 기록
주디스 러바인 지음, 곽미경 옮김 / 좋은생각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사실 저는 몇 년 전에 <Not Buying It>이라는 제목에 끌려서 겁도 없이 덜컥 질러버린 전과가 있습니다. 아무 것도 사지 말라는 책을 사두고 더 슬펐던 것은 제가 그 책을 몇 페이지 읽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영어 실력이 별볼일 없기는 했지만, 도 닦는 기분으로 한페이지씩 읽어나가면 못읽을 것도 없겠다고 생각해서 구입했는데, 얼마나 무모한 행동이었는지.
이번에 번역된 책이 나오자 다시 구입했습니다. ㅠ.ㅠ 그리고 읽으면서 알게 되었죠. 제가 왜 이 책을 원서로 읽지 못했는지 말이어요. 그냥 돈 안쓰면서 생활한 사람의 신변잡기적인 얘기가 아니라 매우 정치적인 내용들(그것도 풍자가 가득한)이 많았던 것입니다. 원래부터 쉽지 않은 책이었던 것이지요.(이렇게라도 위안을 하고 나니 조금은 마음이 놓인다는...)

주디스 러바인은 정말 아무것도 안사면서 1년을 보낸 것은 아니고요, 생필품 이외에는 쇼핑을 끊으면서 1년을 보냈습니다. <소유와의 이별>처럼 급진적인 실천은 아니지만, 다들 아시죠? 이 또한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것 말입니다.

거의 400쪽에 달하는 두꺼운 책임데, 단숨에 읽었습니다. 시험 기간이라 일찍 퇴근한 지난 주 어느날 오후에 말입니다. 마음을 울린 구절 몇 군데 소개합니다.

"자신의 부동산 가치가 오르길 바라느냐고 묻는다면 거의 백이면 백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개발이 저조한 지역으로 또다시 이주하기를 바란다면 또 모를까, 내가 사는 브루클린 동네가 구급 주택지로 탈바꿈하고 부동산 가격이 상승하는 것이 노동계급 주택 소유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듯, 이곳의 부동산 가격 상승 역시 하드윅의 노동자들을 위한 것은 아닐 터이다. 하드윅에서는 부동산 가격이 오랫동안 낮게 안정된 덕택에 여러 세대에 걸쳐 주택을 구입하고, 부모의 가업을 물려받고, 정원을 가꾸고, 교회에서 자원봉ㅅ 활동을 하고, 방과 후에 아이들을 몇 집 건너에 사는 할머니 댁에 내려주는 일이 가능했다. 이제 처음으로 이곳에서 성장한 수많은 젊은이들이 이 도시에서 정착할 여유를 잃게 되었다."(245-246)

"가정용 수납은 공간의 문제만은 아니다. 태도의 문제다. 물건을 수납하는 물건이라는 것은 유쾌한 패러독스의 산실이다. 온갖 물건을 소유하는 편의를 누리게 해줄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물건을 치워두기 때문에 정작 그 물건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착각에 빠지게 만든다."(273)

"중국인 노동자와 차이나타운의 노동자가 함께 노동조합에 가입해 피차간의 얄팍한 봉투에서 서로 임금을 훔치는 일이 없는 세상을 공상한다. 스웨터 공장은 국제 오염방지협약의 규제를 받는다. 스웨터의 원가가 상승해도 중국산 스웨터와 차이나타운산 스웨터 비용 차이 때문에 스웨터 회사가 차이나타운의 공장을 폐쇄하고 멀리서 제품을 선박에 싣고 지구 반 바퀴를 돌아오는, 스웨터의 환경 비용에 기름값이 덧붙여지는 그런 일은 사라진다. 나의 작은 천국에 있는 은행은 채무자가 카드대금을 못갚으리라는 냉소적인 기대감으로 신용카드를 발급하지 않는다. 그리고 카드회사들이 힘없는 채무자들을 착취하기라도 할라치면, 정부가 나서서 강력한 규제로 이들을 혼쭐내준다. 그 여자애는 이러한 신용카드 대신 현금으로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으로 약간 더 비싸진 스웨터를 산다. 그래서 그녀는 스웨터 일곱 벌 대신 한 벌을 하고 그로 인해 빚을 지는 일이 없어진다."(331)

"어느 모로 봐도 소비자일 수밖에 없다면 세상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좀 더 책임 있는 소비를 하는 것이다. 유기농산품을 하고, 사회적으로 책임 있는 기업에 투자하고, 물건 사는 것을 줄여야 한다.
소비자로서의 역할만 거부하고 공식적인 다른 정체성, 즉 시민의 지위를 회복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쇼핑을 끊은 1년 동안 폴과 나는 시민으로서의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시간과 에너지와 돈을 얻었다. 게다가 그렇게 해야 한다는 개인적인 필요도 더욱 절실하게 느꼈다. 가게와 식당으로부터 스스로를 추방시킨 우리들이 머물 곳이라곤 오래된 공공장소 밖에 없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놀랍도고 풍성한 여러 가지 것들을 보았으며, 공공자산들이 심각하리만치 형편없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도서관, 학교, 다리는 무너져 내리는 중이다."(365)

"소박한 삶을 구가하는 대가들은 이렇게 장담하더군요. 쇼핑을 그만두고 '신변 정리'를 하면, 창고 구석의 낡은 테니스 라켓 상자 뒤에서 '진정한 자아'를 찾게 되리라고 말입니다.(중략) 하지만 쇼핑을 하지 않는 시간은 내면보다는 오히려 바깥 세상으로 눈을 돌리게 했습니다. 폴과 저는 도서관에서, 길거리에서, 그리고 산에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며 재미와 자극과 의미를 찾아야 했습니다.
처음 눈에 띈 것은 문 닫힌 도서관이며, 공원의 쓰레기, 허물어져가는 도시 외국의 지하철역까지, 열악한 공공 환경이었습니다. 그 순간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돈과 열정의 개인의 상품 소비에 써버리지 않는다면 공공의 이익을 위해 훨씬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겠다고 말이죠. 그렇게 되면 장기적으로 봤을 때 모두가 더 행복해지지 않겠습니까."(377-378)

책을 덮고 생각해봅니다. 학생들에게만 '체험'을 강조하지 말고 나도 뭔가를 해보아야 할 텐데. 어떤 것을 해보면 좋을까, 하고 말입니다.

5주짜리 돈의 인문학 강좌에서 제윤경씨의 강의를 들은 뒤 '신용카드 사용 억제하기'(안쓰기도 아니고 억제하기! ㅠ.ㅠ)와 같은 초라한 결심을 실천 중인 저로서는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사회교사모임에서 괜찮은 실천 주제를 제시하고 그에 따라 여러 사회샘들이 함께 동참하면서 경험을 나눈다면 서로의 성장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궁리. 또 궁리. 뭔가 좋은 생각이 나겠지요. 그렇게 되면 체험 과제를 제시하는 저도 학생들 앞에서 보다 떳떳해질 것이라는 부가효과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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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사이 전사 레마솔라이]라는 책을 보면 마사이 족 소년 레마솔라이가 학교 교육을 받는 과정이 나온다. 레마솔라이는 당시 케냐 정부가 추진한 ‘한 가족 한 아이 학교 보내기’ 정책에 따라 학교에 들어가게 된다. 책은 학교 교육이, 가난과 무지로 점철된 레마솔라이의 삶을 어떻게 바람직하게 바꾸어 놓았는가를 보여주고 있지만, 나의 관심을 끈 것은 레마솔라이가 아니라 그의 형이었다. 원래는 장남인 큰 형이 학교에 들어가야 하지만, 레마솔라이의 큰 형은 “학교에 가는 것은 사자와 홀로 맞서 싸우는 것보다도 더 무서운 일”이라며 학교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바람에 동생인 레마솔라이가 대신 학교에 가게 된 것이다. 근대화의 시스템을 경험해 보지 않은 채 수렵과 이동을 근간으로 살아가는 마사이 족 소년에게 하루 종일 건물 안에 갇혀서 글자와 셈을 배우는 것은 사자와 홀로 맞서 싸우는 것보다 두려운 일이었다는 점을 진지하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두려움을 이유로 학교를 거부한 레마솔라이의 형은 어쩌면 학교의 태생과 기능에 대해 본능적으로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며 겸허하고 진지하게 삶을 살아가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직관력이 발동된 것 아닐까? 산업 사회의 도래와 함께 등장한 근대적 학교는 산업 사회에 보다 잘 적응할 수 있는 인간을 키우는 데 온 관심을 집중한다. 학생들은 정해진 시간에 등교해서 정해진 자리에 앉아 정해진 공부를 한다. 학교는 온전한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데 필요한 것보다는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을 가르친다. 이것은 정해진 시간이 출근해서 정해진 자리에서 정해진 일을 하는 산업 사회의 일터의 모습과 놀랍도록 닮았다. 이때 사람들이 하는 일은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다. 신발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일생 수천만 켤레의 신발의 일부를 만들어내지만, 어떤 사람도 살면서 수천만 켤레의 신발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게토는 산업 사회의 산물인 학교 제도에서의 탈주를 모색하는 사람이다. 그의 실천에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는 그의 수업이 세련되고, 그의 강의가 탁월하기 때문이 아니라, 학교 제도 그 자체의 본성을 진지하게 성찰하고, 그 문제점들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들을 감행했다는 점 때문이다. 게토는 자신의 학생들에게 학교 밖에서의 배움을 허락한다. 사실 이것은 허락하고 말고의 성질이 아니다. 모든 곳에서 모든 순간에 모든 이로부터 배울 수 있는 인간의 본성, 이 배움의 과정에서 조금 더 좋은 나로 나아가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을 생각한다면 게토가 한 일은 그 본성을 충실히 실현하도록 길을 열어준 것일 뿐이다.

  그러나 그 본성을 억압하는 장벽을 무너트리고 교실 밖에서의 배움을 일구어내는 일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가 문제제기를 한 장벽이 우리 사회 전반의 시스템을 유지시키는 장벽과 정확히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학교는 산업 사회에서 쓸모 있게 사용될 수 있도록 사람을 변화시키는 일을 하고, 사회적 희소가치의 불공정한 배분을 공정한 것으로 위장하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어떤 노동력이 기업가에게 쓸모 있는 노동력인가? 그것은 신체 건강, 국어, 산수, 기술, 영어, 컴퓨터 등 노동 능력이 좋아야 하고, 성실성, 책임감, 신뢰성, 복종심, 충성심 등 노동 자세의 측면이 좋아야 한다. 이 모든 것은 학교가 추구하는 것과 일치한다. 노동 능력 측면은 졸업장과 자격증, 서열화 된 성적으로 측정되고, 노동 자세는 개근상, 생활 기록부 등으로 측정된다. 인간을 쓸모 있는 노동력으로 개조해 가는 과정은 매우 강압적으로 진행되는데, 대부분의 학생은 이 과정에서 자기 존중감을 배우기보다는 열등감과 좌절감, 불안감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교육은 열등감, 좌절감, 불안감과 만날 때 일단 뒷자리로 밀려난다. “두려움과 배움은 함께 춤출 수 없”기 때문이다.

  게토의 실천을 통해 같은 교사인 내가 배운 점은 바로 이것이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의 본질을 정확히 깨달을 것, 깨달음을 위해 내가 하는 일을 늘 진지하게 성찰하고 또 성찰할 것. 거대하고 힘센 시스템 앞에서 좌절하고 포기하지 말 것, 좌절의 정신적 상흔을 이겨내기 위해 스스로를 ‘강자와 동일시’하지 말 것. 한꺼번에 모든 것을 바꿀 수는 없지만, 그래도 바꿀 수 있다고 믿고 마땅히 가야 할 방향으로 반걸음이라고 걸어갈 것. 그리하여 조금씩 조금씩 교육의 영토를 넓혀 나갈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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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이아비 추장의 이야기는 나로 하여금 익숙하고 당연한 세계에 대해 질문하게 한다. 나에게는 그 익숙하고 당연한 세계가 학교였다. 나는 학교 교육의 적자(嫡子)이다. 초등학교 때에는 빠듯한 가정 형편 덕분에(그 당시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일체의 사교육 없이 오직 학교를 배움의 전부로 알고 살았으며 중학교에 입학하던 해에 시작된 5공화국의 “과외 금지와 교복 폐지” 정책 덕분에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내 배움 세계의 전부는 학교였다. 나에게 ‘교육=학교’이다.

이미 학교가 교육을 독점하던 시절은 지나갔다.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 중 많은 수가 매일 4시간 이상을 학원에 다닌다. 고민거리가 있을 때 친구 다음으로 학원 선생님을 찾는다. 학교 교사는 60만, 학교 밖 교사는 200만이다.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학교는 부분집합이다.

그가 빠빠라기의 당연한 세계에 질문을 던졌던 길을 따라가면, ‘학교’의 이상스러운 진실과 맞부딪힌다. 학교 교사에게는 외면하고 싶은 사실일지 모르지만, 학교가 교육의 전부는 아니다. 지난 100년 정도의 시기를 학교 교육이 제도적 우위를 점했다고 해서 그 우위가 계속될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학교 교사들은 자신들만이 이 세상 배움을 주도하는 유일한 존재라 믿는다. 이때 학교 밖 교사들의 존재는 학교 교사들의 믿음을 뒤흔든다. 익숙한 믿음의 세계가 흔들리는 것은 보통의 경우 유쾌한 경험은 아니다. 그러므로 학교 교사들은 생각해 버린다. 학교 밖 교사들은 교사로서의 자질이 부족하다고. 때로 이 ‘자질 부족론’을 위협할만한 증거 사례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개념 정리나 문제 풀이에 놀랄 만큼 능숙하거나, 개그맨이 울고 갈 만큼 재미있는 강의를 하는 학교 밖 교사들을 수시로 마주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생각한다. ‘그래도 학교는 전인교육이지. 진정한 교육은 학교에 있어.’ 아이들과 수시로 노래방에 놀러갈 만큼 친하게 지내고, 수시로 인생 상담을 해주고, 방학을 맞으면 함께 야유회도 가는 학교 밖 교사들을 보면서도 생각한다. ‘손님 떨어지면 안 되니까. 장사 속이라고! 학교도 학생 수 적고 돈만 많이 주면 그런 걸 왜 못하겠어?’

엄청난 수입을 올리는 것은 그들 중 정말 소수이고, 대부분은 박봉과 해고 위험에 상시적으로 놓여 있는 비정규직 교육노동자라는 엄연한 사실은 가볍게 외면해 버린다. 물론 돈 벌이, 장사 속으로 교육의 본연을 흐리는 학원들이 다수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학교 교사들 역시 돈 벌이를 위해 오늘도 칠판 앞에서 분필을 잡는 것 아닌가? 그들의 돈벌이는 장사 속이고 나의 돈벌이는 숭고한 사명으로 파악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엄연히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믿는 현실 인식은 스스로의 성장에 큰 장애가 된다. 학교 교사들의 수업에 큰 진보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평가를 받으라는 국민적 압력 앞에 놓이게 된 것은, 이 왜곡된 현실 인식에서 기인한 바 크다. 익숙한 믿음의 세계가 흔들리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고, 학교 교사들은 지금껏 이 불유쾌한 일을 참고 성장해야 할 만큼 절박한 상황에 놓이지 않았었다. 학교는 늘 옳고, 학교는 늘 중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봄날은 갔다.’

투이아비가 빠빠라기의 세계를 바라보듯, 학교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변하지 못할 것은 없고, 학교의 그 어느 하나도 영원불멸할 것은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학교를 낯설게 보아야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보이리라. 학교는 학교 밖에서부터 배울 필요가 있다. 학교 사회과가 지난 10여년 통합 논쟁을 하는 사이에 이들은 이미 통합 교육을 하고 있고, 학교가 토론 수업의 필요성만 공허하게 외치는 동안 이들은 이미 토론 수업을 하고 있었다. 애초에 추구하는 바가 영리라고 해서 사설 학원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의 성과 전체를 평가절하 할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있는 곳을 낯설게 바라보기, 내가 알고 있던 세계의 바깥을 바라보기, 그리하여 나의 세계를 확장하기. - 오늘 변화를 요구받는 학교 교사가 선택해야 할 전략이 이런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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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프린스 1호점은 실현 가능한 꿈인가?>>

공부를 하는 사람은 비정규직이 되지 않고서도 비정규직의 삶의 처지를 알 수 있다. 이주노동자로 살아보지 않아도 이주노동자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위대한 능력을 발현하는 일이다. 자신의 삶의 지평을 넘어서 다른 사람의 삶의 지평에서, 더 큰 세계의 지평에서 사고할 수 있는 능력. 이 능력이 오늘의 인간을 만들었다. 교육은 이같은 인간의 능력을 발현해주도록 돕는 일이다. 진정한 공부는 역지사지(易地思之)하는 것이다.

나는 고등학교에서 경제를 가르친다. 포스트 포디즘의 세계를 살아갈 아이들에게 다품종 소량 생산 사회에서 경쟁력을 갖기 위해서는 창의성이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내가 가르친 아이들이 만나는 경제 현실은 이렇다. 이렇게 배운 아이들은 대학에 진학했건, 아니건 상관없이 알바를 찾는다. 이들이 얻을 수 있는 알바는 대부분 시간당 3000여원의 최저임금을 지급하는 일들이다. 그래서 나는 편의점에서, 주차장에서, 프렌차이징 커피숍에서 최저임금을 받고 일하는 제자들을 만난다.

이렇게 번 돈으로 핸드폰 요금을 내고 나이키의 운동화를 사 신으며,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신다.(스타벅스에서 커피 한잔이면 1시간 분의 시급으로도 모자란다.) 이 20대들의 주머니에서 빠져나간 돈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거대 과점 기업으로, 다국적 기업으로 흘러들어간다. 이 돈의 흐름 속에서는 이 아이들을 위한 괜찮은 일자리가 창출될 기회가 생겨나지 않는다. 이동 통신 회사는 빈약한 성과급을 지급하는 ‘알바’를 동원하여 가입자 수를 늘린다. 나이키는 제3세계 국가의 어린이들을 동원하여 운동화를 만들게 한다. 하루 종일 고무와 가죽을 다루는 유해한 노동을 하고, 말레이시아의 어린이는 일당으로 1달러 내외의 돈을 받는다. 나이키가 매출이 신장하면서 한국에서 생겨나는 일자리는 하루 종일 매장에서 손님들에게 웃음 머금은 얼굴로 신발을 신겨주며 시간당 최저 임금을 받는 알바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스타벅스 커피를 마실 때, 꿈을 안고 차린 까페들이 문을 닫는다. 남은 일자리는 여전히 시급 3000여원이 불안정한 알바일 뿐이다. 비정규직이 전체 고용의 통상 30% 수준이던 ‘평상시’를 지나 빠른 속도로 50% 선을 넘어선 오늘, 많은 학자들은 지금의 10대가 직장을 찾는 시기가 되면 정규직의 괜찮은 일자리는 전체 고용의 10% 수준에 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내가 학교에서 경제를 가르치는 일이 ‘교육’이 되기 위해서는 아이들이 자신의 선택이 갖는 의미를 깨닫도록 하는 힘을 길러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자영업이 급속히 몰락하고 비정규직이 증가하고 있는 이유가 반드시 대한민국 경제의 구조조정 때문은 아니다. 더 나이를 먹었다고 해서 유명 브랜드와 프렌차이징을 선호하는 소비 취향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지금의 10대, 20대에게는 이 선호가 숨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이 문제 상황을 만들어 낸다. 어려서부터 대기업의 마케팅이 만들어낸 각종 문화에 효과적으로 길들여져 온 아이들은 대기업의 유명 브랜드와 프렌차이징이 아니면 돌아보지도 않는다. 그리고 이와 같은 문화가 새로운 세대의 삶을 지배하는 한, 이들 새로운 세대를 위한 괜찮은 일자리는 자꾸 자꾸 줄어들게 될 것이다. “공부하기 싫으면 다 관두고 장사나 배워!”하며 야단을 치시던 부모님의 이야기는 이제 철 지나간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공부를 해도 괜찮은 직장을 잡기 어렵지만, 장사를 한다 해도 거대 유통 기업과 프렌차이징이 판치는 구조 속에서 “커피 프린스 1호점”의 성공은 드라마 속에서만 가능한 얘기이다.

아이들이 자신의 삶을 지배하는 문화와 경제의 이 무서운 연쇄 작용을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교육을 생각하는 나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스타벅스, 이마트로 향하도록 만드는 문화의 힘은 너무나 세다. 이 큰 힘에 떠밀려 아이들은 오늘도 시간당 최저 임금의 비정규직 알바를 뛰고, 남은 시간에는 그나마 남은 괜찮은 일자리를 얻기 위해 토익 문제집을 붙든다.




1) 운이 좋아 학생 알바에게 법정 최저 임금을 지급하는 업소에서 일하게 된다면 얼마의 시급을 받을까? 2007년 기준 법정 최저 임금은 시간당 3,480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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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Y 2007-11-27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타벅스 커피 한잔이 시간당 법정 최저 임금보다 비싸다는 거, 탁 와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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