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이아비 추장의 이야기는 나로 하여금 익숙하고 당연한 세계에 대해 질문하게 한다. 나에게는 그 익숙하고 당연한 세계가 학교였다. 나는 학교 교육의 적자(嫡子)이다. 초등학교 때에는 빠듯한 가정 형편 덕분에(그 당시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일체의 사교육 없이 오직 학교를 배움의 전부로 알고 살았으며 중학교에 입학하던 해에 시작된 5공화국의 “과외 금지와 교복 폐지” 정책 덕분에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내 배움 세계의 전부는 학교였다. 나에게 ‘교육=학교’이다.
이미 학교가 교육을 독점하던 시절은 지나갔다.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 중 많은 수가 매일 4시간 이상을 학원에 다닌다. 고민거리가 있을 때 친구 다음으로 학원 선생님을 찾는다. 학교 교사는 60만, 학교 밖 교사는 200만이다.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학교는 부분집합이다.
그가 빠빠라기의 당연한 세계에 질문을 던졌던 길을 따라가면, ‘학교’의 이상스러운 진실과 맞부딪힌다. 학교 교사에게는 외면하고 싶은 사실일지 모르지만, 학교가 교육의 전부는 아니다. 지난 100년 정도의 시기를 학교 교육이 제도적 우위를 점했다고 해서 그 우위가 계속될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학교 교사들은 자신들만이 이 세상 배움을 주도하는 유일한 존재라 믿는다. 이때 학교 밖 교사들의 존재는 학교 교사들의 믿음을 뒤흔든다. 익숙한 믿음의 세계가 흔들리는 것은 보통의 경우 유쾌한 경험은 아니다. 그러므로 학교 교사들은 생각해 버린다. 학교 밖 교사들은 교사로서의 자질이 부족하다고. 때로 이 ‘자질 부족론’을 위협할만한 증거 사례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개념 정리나 문제 풀이에 놀랄 만큼 능숙하거나, 개그맨이 울고 갈 만큼 재미있는 강의를 하는 학교 밖 교사들을 수시로 마주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생각한다. ‘그래도 학교는 전인교육이지. 진정한 교육은 학교에 있어.’ 아이들과 수시로 노래방에 놀러갈 만큼 친하게 지내고, 수시로 인생 상담을 해주고, 방학을 맞으면 함께 야유회도 가는 학교 밖 교사들을 보면서도 생각한다. ‘손님 떨어지면 안 되니까. 장사 속이라고! 학교도 학생 수 적고 돈만 많이 주면 그런 걸 왜 못하겠어?’
엄청난 수입을 올리는 것은 그들 중 정말 소수이고, 대부분은 박봉과 해고 위험에 상시적으로 놓여 있는 비정규직 교육노동자라는 엄연한 사실은 가볍게 외면해 버린다. 물론 돈 벌이, 장사 속으로 교육의 본연을 흐리는 학원들이 다수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학교 교사들 역시 돈 벌이를 위해 오늘도 칠판 앞에서 분필을 잡는 것 아닌가? 그들의 돈벌이는 장사 속이고 나의 돈벌이는 숭고한 사명으로 파악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엄연히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믿는 현실 인식은 스스로의 성장에 큰 장애가 된다. 학교 교사들의 수업에 큰 진보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평가를 받으라는 국민적 압력 앞에 놓이게 된 것은, 이 왜곡된 현실 인식에서 기인한 바 크다. 익숙한 믿음의 세계가 흔들리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고, 학교 교사들은 지금껏 이 불유쾌한 일을 참고 성장해야 할 만큼 절박한 상황에 놓이지 않았었다. 학교는 늘 옳고, 학교는 늘 중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봄날은 갔다.’
투이아비가 빠빠라기의 세계를 바라보듯, 학교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변하지 못할 것은 없고, 학교의 그 어느 하나도 영원불멸할 것은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학교를 낯설게 보아야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보이리라. 학교는 학교 밖에서부터 배울 필요가 있다. 학교 사회과가 지난 10여년 통합 논쟁을 하는 사이에 이들은 이미 통합 교육을 하고 있고, 학교가 토론 수업의 필요성만 공허하게 외치는 동안 이들은 이미 토론 수업을 하고 있었다. 애초에 추구하는 바가 영리라고 해서 사설 학원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의 성과 전체를 평가절하 할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있는 곳을 낯설게 바라보기, 내가 알고 있던 세계의 바깥을 바라보기, 그리하여 나의 세계를 확장하기. - 오늘 변화를 요구받는 학교 교사가 선택해야 할 전략이 이런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