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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완동물 공동묘지 - 하 ㅣ 밀리언셀러 클럽 34
스티븐 킹 지음, 황유선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1월
평점 :
이 끄적이는 자는 비를 부르고 다니는건지 옮겨다니는 곳마다 비가 쏟아진다. 그것도 그냥 쏟아지는 것이 아니라 도저히 밖으로 나갈 수 없게끔 쏟아졌다. 비가 중간에 사그라드는 느낌이 들어서 나갈 채비를 하자면 엄청난 기세로 또 쏟아붓는다. 결국 오전 내내 집에서 비에 발이 묶이고 말았고 정말 사그라들었다는 느낌이 들어서 우산 쓰고 오후에는 밖으로 나갔으나 목적지에 도착할 때쯤 다시 그 기세를 올리려고 한다는 느낌이 든 건 왜일까?
어쨌든 무사히 잘 도착해서 오랜만에 학교 건물을 들어오니, 침수 피해를 입은게 아닌가. 설마 설마하며 실험실로 올라가니 다행히 우려하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관심있는 분들은 알겠지만 이 끄적이는 자가 있는 곳이 비가 좀 왔다하면 어떤 모습이 되는지 보신 분들도 계실 것이다. 게다가 학교 전체 정전이라 암흑과 정적 속에서 해야할 일을 마치고 다시 실험실에 올라오니 시간이 참으로 애매했다.
그냥 다시 돌아가자니 어차피 다시 저녁쯤 나와서 해야할 일을 하고 가야할 것이고, 그 때도 만약 지금처럼 비가 온다면 왔다 갔다 옷 젖고 귀찮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어 결국 저녁시간까지 남기로 하였다. 그 때까지 해야할 일로는 지난 겨울 방학에 사놓고 읽지 못한 채 처박혀 있던 책을 읽는 것으로 정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책을 읽어보게 된 것이다. 물론 그 전에도 책을 전혀 읽지 않은 것은 아니나 이 끄적이는 자 스스로 책을 읽고자 해서 읽은 책들은 아니었으니 그건 책을 읽은게 아니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오랜만에 '스티븐 킹'이 쓴 작품을 읽을 수 있었다. 한창 출간되었을 때 사서 그 때 읽는 기분과 지금에 와서야 읽는 기분이 같을까 비교할 수는 없지만 호기심은 약간 줄어든 것은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이다.
대도시에 살던 주인공 가족은 한적하고 경치도 좋은, 단 한가지 흠이라면 수 해 전부터 그 곳을 가로 지르는 고속도로가 생겼고 하루에 한 번씩 빠른 속도로 그 길로 엄청나게 큰 트럭이 지나가는 곳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주인공은 의사이고, 자신을 사랑하는 마누라와 귀여운 딸, 이제 말을 배워가는 막내 아들로 구성된 가족은 처음에는 새로운 곳에 대한 두려움이 앞섰지만 곧 너무나 편안한 그 곳 분위기에 이끌려 어울리게 된다.
그리고 집 뒤에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서 마을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을 도로 건너에 살던 노부부 중 노인에 의해 알게 되고 거기서 '애완동물 공동묘지'라는 곳을 보게 된다. 고속도로가 생기면서 도로에서 죽은 애완동물을 아이들이 불쌍히 여겨서 여기에 묻어서 죽음을 기린다는 곳이었다.
주인공이 이사오고 난 후 처음 근무한 날 머리가 깨져 죽어버린 대학생을 보게 되고 죽어가면서 자기 이름을 부르며 뭔가 메시지를 남기고 그 날 저녁 그 대학생이 꿈에 나타나서 주인공을 괴롭힌다. 그냥 꿈인 줄 알았으나 아침에 일어나보니 발에는 진흙이 팔에는 소나무 가지에 찔린 상처들이 남아있는 것을 보고는 의심을 하나 곧 몽유병이려니 하고 넘어가게 된다.
주인공을 제외한 가족들은 전부 장인, 장모댁에 간 추수감사절에 집에서 기르던 고양이가 죽은 것 같다는 노인이 건 전화를 받은 주인공. 거기까지 나가면서 부정에 부정을 거듭하였으나 막상 현실은 이미 죽은 시체 뿐이었다. 노부부 중 할아버지는 그 고양이가 딸이 무척 아끼는 고양이이고 주인공은 딸을 무척 아끼니 '애완동물 공동묘지'에 묻어주자고 하고선 주인공을 이끌고 묻었다.
다음 날 밤, 주인공 앞에 나타난 죽은 줄만 알았던 고양이. 분명 자신이 담아간 녹색 쓰레기 봉투 조각이 수염에 걸린 고양이가 다시 나타난 것이다. 다만 어딘가 이상한 분위기를 풍기는 동시에 썩은 냄새를 풍기면서 말이다. 이러한 비밀은 주인공과 그 노인만 무덤까지 들고가자며 서로 더 이상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
애완동물이 죽어가던 그 고속도로에 자신이 보는 눈 앞에서 사랑스런 막내 아들을 구하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잃고만 주인공. 처음에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고 가장으로서 가족들을 위하려고 노력하나 결국 자신도 나약한 사람일 뿐. 결국 부정을 하다 못해 말도 안 되는 꿈까지 아들을 묻기 전날 꾸는 너무나 평범한 모습을 보이기까지 한다.
노인과 약속까지 어기면서 결국 주인공은 아들을 묘지에서 파내서 '애완동물 공동묘지'에 묻기로 결정한다. 딸이 이상한 느낌을 받고서는 마누라도 막으려고 오고 노인도 막으려고 노력했으나 뭔가 보이지 않는 힘에 주인공이 하는 것을 막지 못하고 결국 주인공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뤘으나...
삶과 죽음은 한 직선 위에 있는 것일까? 아니면 절대로 만나지 않은 평행선에서 서로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스스로 죽음을 거부할 수는 없지만 죽은 것을 산 것이 있는 곳에 계속 있을 수 있게 하는 능력이 있다면 과연 그것을 써야할까? 정말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을 계속 자기 옆에 둘 수 있다면 아무리 부작용이 크다고 해도 감수해가며 그것을 선택할 것인가?
이번 '스티븐 킹' 작품인 『애완동물 공동묘지』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하게끔 하는 주제를 가지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비록 소재는 '죽음'과 '죽었으나 죽지 않은 그것'으로 인한 공포를 이끌었지만 말이다.
끄적이는 자는 삶과 죽음은 한 직선 위에 있는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그리고 그 직선이 어쩌면 '뫼비우스 띠' 위에 그어져 있음이 아닐까라고 추측해본다. 분명 한 직선 위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지만 그냥 멀리서 관망해서는 한 번에 그것이 한 직선이라고 보기 힘든 '뫼비우스 띠' 말이다.
누군가 그것을 바꾸려고 자르거나 붙이거나 한 번 더 꼬아버리기라도 한다면 그 결과는 처음과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미 건드려버린 '뫼비우스 띠'는 다시 원래 모습을 갖출 수 없다는 것.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이 항상 자신 옆에서 계속 사랑을 주고 받으면서 살고자 하는 욕심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대상이 더 이상 예전 그대로 모습이 아니라면 과연 그 욕심은 계속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일까? 아무리 소박한 욕심도 그 욕심이 현실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1%라도 있어야 그것을 가지고 있을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닐까?
東西古今(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죽은 자에 대한 존경과 그 휴식을 위해서 산 자들이 노력하는 모습은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은 죽음 그 자체에도 그것을 지켜야할 가치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며, 이번 큰 비로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너무 짧은 생을 살다간 남매의 넋을 기리며 이만 줄이고자 한다. 저 세상에서는 부디 편안히 지내길...
- 끄적이는 자, 우비(woobi@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