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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방 - 전2권 세트
앨런 폴섬 지음, 이창식 옮김 / 넥서스BOOKS / 2004년 12월
평점 :
절판
일기예보로는 주말에 비가 온다고 그러더니 이를 비웃기라도 하는듯 오랜만에 햇빛을 쬘 수 있는 날이었다. 계속 우울한 잿빛 하늘만 바라보다가 이렇게 잠깐이나마 쨍쨍한 햇살을 맞아보는 것은 행운이 아닐까나.
이 끄적이는 자는 '매니아' 기질이 너무나 강한 나머지, 책을 고를 때도 좋아하는 작가가 쓴 작품부터 먼저 보는 경향이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딱 그 작가만 쓴 책만 보는 것은 아니고, 특별히 보는 것에 대해서는 가리지 않는다. 그런데 이러한 선택을 하다가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히는 경우'가 정말 스무 작품 중에 한 번꼴로 어쩌다 한번씩 생기기도 한다.
너무나 읽고 싶어서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여러 서점을 뒤지고 다녔던 『모레』를 쓴 작가 '앨런 폴섬'이 수 년간 집필했다는 세 번째 소설 『추방』을 읽고서 난 발등이 아파오는 것을 느껴버렸다. 그래도 정말 대작이라고 불릴만한 『모레』를 쓰고서는 이번에는 '수 년간' 집필을 했다는 작품인데 아쉬움이 너무 크게 다가왔다.
간단한 줄거리 소개를 앞서서 아쉬움을 느끼게 한 몇 가지 부분을 이야기 하자면,
첫째, 현실성을 유도하려고 한 나머지 현실과 너무나 멀리 떨어져버린 점.
주인공이 근무하는 LAPD 특별기동대도 좋고, 옛 스페츠나쯔로 이뤄진 러시아 황실 친위대 FSO도 좋은데 주인공으로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다 '슈퍼맨'이고 그렇게 특출난 사람들이 신분을 바꿔도 남들한테 들키지 않는다는 점은 이야기를 너무 비현실적으로 몰고 가버렸다. 그리고 신분을 바꿔서 생활하면서 그런 큰 사건에 뛰어들 수 있는 자신감은 과연 어디서 나오는걸까나...
둘째, 사건 전개가 급속도로 진행되다가 끝부분에서 양파 껍질 벗겨지듯 밝혀지는 출생과 신분의 비밀들.
이 끄적이는 자는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외국에서 산 적이 없을 뿐더러 한국 드라마에 너무 오래동안 노출된 나머지 이러한 소재는 바로 거부 반응을 일으켜버렸다. 물론 다른 나라에서는 이러한 소재가 통할지도 모르겠다만 한국 사람으로 봤을 는 너무나 진부한 소재를 쓴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셋째, 사건 전개에 있어서 너무나 질질 끌어서 늘어지다가 후반부에 갑자기 마무리를 지으려고 한 흔적들.
『추방』 책 분량은 모두 2권으로 되어 있다. 『모레』가 3권으로 양이 더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사건 전개에 있어서 적절한 속도로 늘어졌다 빨라졌다를 조절하여 독자로 하여금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했으나, 이번 작품은 그 속도를 조절하지 못하고 전반부에서 세밀하게 전개한 이야기들이 후반부에는 어이없는 결말로 끝을 맺고 만다.
넷째, 주연들에 비해서 비중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나온다는 점.
주연을 돕는 조연들이 없으면 이야기가 시들해질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조연들이 너무 많이 나와버리면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버리는 경우'가 발생해버릴 수도 있지 않을까.
다시 돌아와 간략한 줄거리 소개를 한다면 양육원에서 양부모에게 입양된 후 양부모가 살해되어 남매 중 여동생이 충격으로 정신적으로 보호가 필요하고 남매 중 오빠는 그런 동생을 보호하기 위하여 원래 꿈을 접고 LAPD 경찰이 되었는데, 팀 내부에서 생긴 이상한 일로 인해서 양심의 가책을 느낀 주인공에게 살인을 너무나 쉽게 저지르는 사내가 나타나게 된다. 이 사내를 쫓아다니다 결국 팀은 좋지 않게 해체되고 자신도 죽은 자로서 신분을 숨겨 유럽으로 건너가서 동생을 치료하려고 한다.
그런데 팀이 해체되면서 같이 죽은 줄 알았던 살인범이 아직 살아있으며 미국에서는 자신이 팀 해체 원인이라며 이를 갈고 있는 동료 경찰들이 자신을 노린다는 사실을 알게된 주인공에게 러시아 황실 싸움이 얽어지게 되고, 이 황실 싸움 주인공이 바로 자신이 쫓아다니던 살인범이라는 사실과 그가 자기 여동생을 사랑하고 결혼하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주인공은 이를 막으려는 노력을 하게 되는데...
비록 책을 전부 다 읽고 나면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는 결론을 얻을 수도 있지만, 단순히 그러한 결론을 주기 위해서 이런 '슈퍼맨'들을 앞세울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또한 한 주제에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고 한 욕심이 이렇게 받아들이게 한건 아닐까 생각을 하게 된다.
로맨스도 약간, 스릴러도 약간, 액션도 약간, 추리도 약간씩 섞다보니 시선이 한 곳으로 집중되지 못하고 분산되어 버려서 흥미를 떨어뜨릴 뿐더러 이야기에 몰입시키기 위해서 그러한 장치를 꾸몄겠지만 정작 몰입도를 떨어뜨린 결과를 낳게 된 것이 아닐까?
過猶不及(과유불급)이는 말이 다른 어떤 감흥보다 먼저 떠오르게 한 작품이었다.
당장 내일부터 이 끄적이는 자가 신분을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꿔버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새로운 사람이 되어 나타난다면 과연 제대로 살 수 있을까? 이제까지 알고 지냈던 사람들, 나를 알고 있던 사람들은 하루 아침에 어떻게 되어버리는걸까? 그래도 한 가지 명백한 사실은 이 끄적이는 자에게는 바꿀 신분이라는 것은 없다는 것이 아닐까...
- 끄적이는 자, 우비(woobi@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