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일 코너의 문을 닫자 매서운 바람의 끈이 툭 끊어진다. 주리라면 수수료를 아끼기 위해 길 건 

너 맞은편의 국민은행을 이용했을 것이다. 가장 바깥쪽의 기기로 다가가 하나은행 카드를 밀어  

넣자 곧 잔고가 확인되었다. 잔고는 21원이었다. 엄마 친구 아들은 2년 전 은행에 입사해서 벌써 

 3천만이나 모았다고 하더라. 등 뒤에서 누군가가 한심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거 같아 저절로 제영 

은 자신의 몸이 움츠러드는 걸 느꼈다. 휴대폰을 꺼내든 그의 표정이 퉁명스런 말투처럼 점점  

굳어졌다. 활기를 불어줄 셈인 양 쾌활하게 과장된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찾아온 저항 

감 때문이다. 벽에 기대어 선 제영은 핸드폰을 왼쪽 귀로 옮기면서 어머니의 말허리를 끊었다. 

 “······어디에요?” “산에 가는 중이지. 일요일이잖아.”  


이 말을 듣는 순간 찾아오는 실망감이란. 제영으로선 이제 전화를 붙들고 있을 이유가 없었지만, 

 어머니는 그렇지 않았다. “주말인데, 엄마처럼 운동 좀 해. 청계천이 가깝다고 했었지? 거기 가 

서 조깅이라도 좀 해. 날씨 춥다고 방안에만 있으면 몸이 상하니까.” 어머니가 하는 모든 말에 제 

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한다. 말이 길게 늘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에 아랑곳없이 

 어머니는 몇 가지 사항을 더 추가한 다음 마지막으로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런데, 다음 

 주에 아버지 환갑인 거 알지?” 제영은 그렇다고 태연히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생뚱맞은 기분이 

 들었다. 아버지 환갑? “언제 내려올 거냐?” “······금요일 날 갈게요.” “참, 어제 계약은 어찌 되었 

어? 어제 저녁에 몇 번이나 전화 했는데 또 받을 수 없다고 나오데. 너 폰은 맨날 받을 수 없다고 

 나오냐?” “저번에 말했잖아요. 그거 원래 그렇다고.” “원래 그런 게 어딨어?” “원래 그런 거니까 

 원래 그런 거지, 원래 그런 게 어디 있긴.” “어떻게 좀 안 돼? 매번 전화할 때마다 그러니.” “원래 

 그렇다니깐, 원래 그렇다니깐 자꾸 그러내.” 제영은 애써 솟구치는 짜증을 억누르면서 입을 열 

고 있었다. “원래 그런 것도 있나.” “원래 그런 것도 있어.” 어머니는 0번을 1초간 꾹 누르면 설정 

되는 자동응답 기능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몰랐던 것이다. “날씨가 엄청 추우니까 엄마는 지금 

 모자 쓰고 있다. 너도, 옷 두껍게 입고 다니고.” 어머니의 마지막 언급이 제영에게 용건을 말할  

수 있게끔 자연스레 멍석 깔아주었지만 그는 전혀 고맙지 않았다. 오히려 퉁명스런 목소리가 새 

어나왔다. “······오늘 친구랑 옷 사러 가기러 했었잖아.” “아, 그렇구나. 그러고 보니, 오늘이 일요 

일이지. 어제 넣어준다는 걸 엄마가 바빠서 깜빡했네. 넣어준다, 넣어준다 하면서. 미안, 아들.  

요즘 엄마도 나이가 들었는지 건망증 때문에 큰일이다. 큰일이다. 요즘 나이든 사람들 치매가 얼 

매나 많은지. 엄마 친구들 아는 사람들 나이가 들면 온갖 병이 다 생긴다. 류머티즘. 허리디스크.  

당뇨. 하나 씩 안 가지게 없다. 그래도 엄만 건강하잖니. 부모님이 건강한 게 얼마나 다행이니.  

그것만 해도 얼마나 복인지 너는 모르지? 부모님 아파봐라. 건강한 부모 만난 것도 다 복이다, 이 

놈아.” 매사가 이런 식이다. “예. 예. 알겠어요. 지금 좀 바빠서······.” 길어진 어머니의 말에 다시 

금 슬슬 짜증이 올라온다. “그래, 돈은 작은 누나한테 좀 달라고 해. 아니면 친구한테 월요일 날  

갚아 줄 테니 좀 빌려달라고 하든지. 엄마도 요즘 정신이 없다, 정신이 없어, 어제 봉.” 
 

봉, 에서 띠리링 소리와 함께 어머니의 목소리가 끊어졌다. 핸드폰의 액정 가운데에 빨간 줄이  

그어지면서 배터리가 부족합니다, 라는 글이 깜빡이고 있었다. 또 다시 핸드폰 충전을 안 해 놓 

았던 것이다. 친구들과 통화를 하다가 매번 이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밖으로 나와 대리석 입구에 서서는 담배를 꺼내 무는데 대각선 건너편의 건물의 철제 셔터에서  

‘임대문의’가 펄럭이고 있는 게 보였다. 아니다. 테이프로 단단히 고정되었으니 펄럭여 떨어져나 

갈 리가 없지 않은가. 갑갑증이 의식을 왜곡시킨 것일까. 데굴데굴 굴러간 담배가 계단 끝의 하 

수구 창살 틈으로 사라졌다. 생각해보니 라이터가 없었던 것이다. 제영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 애써 생각의 물줄기를 다른 방향으로 이어보려 했지만, 이미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봉봉토 

스트>를 달고 있었던 ‘임대문의’를 향해 달음박질치고 있었다. 횡단보도 앞 샌드위치 가게. 신호 

등을 기다릴 동안 샌드위치를 구입하리란 계획이었을까. 가냘프게 생긴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아주머니도 처음에는 셔터가 차르르 올라가는 소리와 더불어 힘찬 하루를 열었으리라. 
 

돌아오는 골목길에서 제영은 16개의 말보로 라이트가 빼곡히 들어찬 담배 갑을 헌옷 수거함에  

넣어 버렸다. 상관없었다. 담배를 끊기 위해 담배를 부러뜨리거나 라이터를 버리는 게 습관이 되 

다시피 했으니까. 전봇대가 놓인 모퉁이에 접어들었다가 제영은 방향을 돌려 올라왔던 길을 따 

라 도로 내려 걷기 시작했다. 슬리퍼에다 맨발이어서 등짝까지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좀 더 신 

중했더라면 3층까지 올라간 참에 곧장 내려오지 말고 양말과 운동화를 같이 착용할 수 있었을  

터였다. 몸을 잔뜩 구기면서 제영은 대로로 나와 오른쪽으로 꺾어 장충족발거리를 통과해 6호선  

약수 역까지 걸어갔다. 편의점에 들러 티라미수 케이크를 사기 위해서였다. 빙 둘러감에 따라  

왕복 40분이 소요될 것임에도 원시적인 갈증이라 할 만한 욕구를 억누를 수 없는 제영이다. 매 

일 하루에 한 두 개씩 먹는 게 습관이 되었고, 취침 전에는 꼭 가나초콜릿을 위 속에 가득 흘려 

보냈다. 과식할 때마다 느끼는 만족감으로 깊고 달콤한 잠이란 동굴 안으로 기어들어갈 수  

있었다. 제영은 언제부터인지 취업 준비로 분주한 동기들과 달리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흘려보 

내고 있었다. 회사라는 생활의 중심이 없어서일까. 스트리퍼조차도 천장과 연결된 봉 하나에 의 

지해 춤을 추는 것이다. 하지만 제영은 아무 것도 하고 싶은 게 없었고, 휴학한 이래 타인들과  

별  교류가 없게 된 지도 몇 달 째였다. 2시에 명동에서 만날 K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기 

에 거의 한 달 만에 보는 것이었다. 나머지 친구들인 명과 Y와 O도 취업준비로 휴학 중이다. 그 

들 각자에겐 휴학의 뚜렷한 목적이 있었지만 제영은 그들을 따라 막연히 휴학을 하고서야 단지  

졸업을 늦추기 위해서였다는 걸 깨달았다. 때때로 제영은 아예 큰 누나처럼, 아니 누나를 대신 

하여 침대에 웅크려 누워 있었으면 싶었다. 혼자서 몇 개월을 죽이는 사이 잡초 같은 상념만 부 

쩍 돋아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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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이번에는 맞았다. 맞은 편 건물의 같은 층에서 들려오는 피아노 곡, 엘리제를 위하여. 학 

원에서 연습중인 곡인지 툭툭 끊어지며 벌써 대 여섯 번 반복되었다. 제영은 건반을 두드 

리는 수준을 가늠하여 10살 남짓한 여자아이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도 어릴 적 누나들을  

따라 피아노 학원을 졸졸 따라다녔다. 변기에 앉아 엄지발가락을 긁으면서 ‘워털루 전 

투’를 흥얼거리고 있다가 멈췄다. 바깥 거실에서 냉장고 문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숙여 가랑이 사이로 자신의 가늘고 긴 똥을 바라보고 있다가 딸깍 방문이 닫히는 소리에  

제영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달콤한 냄새가 콧속으로 잉크자국처럼 스며들었다. 가슴이  

답답해진 게 큰 누나 때문만은 아니었다. 제영은 다시금 발바닥에서부터 차오르기 시작한  

뿌연 상념의 잡초를 의자삼아 잠시 쭈그린 채 멍하니 수채 구멍을 바라본다. 어떻게 이 조 

그마한 구멍에서 바퀴벌레나 집게벌레가 따위가 올라올 수 있는 것일까. 그의 시선이 점 

점 흐릿해지다가 텅 비워졌다. 그때다. 문득 빳빳이 몸통을 치켜세운 흰 뱀이 나타난다.  

제영은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 한손으로 햇빛을 가릴 차양을 만들듯 얼굴을 막았고, 눈에  

초점을 주자 그것은 긴 호스와 거기에 연결된 머리로 구성된 샤워기였다. 얼른 근육을 움 

직여 현실 감각을 찾아야 했다. 머릿속의 안개를 털어버리기 위해 가장 도움이 되는 게 청 

 소다. 제영은 화장실에서 나와서 주방으로 갔다. 물컹거리는 음식물 봉투를 집어 들어 1 

층으로 내려올 동안 뚝뚝 흘러내린 누런 물이 바닥에 검은 점을 찍었다. 봉투 속의 음식물 

은 10일은 족히 지난 탓에 이미 형체 없는 관념처럼 썩어있었다. 또 다시 몰래 버려야 했 

기 때문에 골목을 내려가는 제영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두 달 전 즈음에 현관 앞의 음식 

물 쓰레기통이 사라진 이후로 골목 어귀의 어느 집 앞에다 몰래 버려오다가 집 주인에게  

걸린 게 막힌 수체구멍으로 작은 누나에게 화를 낸 날이었던 것이다. 한 번만 더 걸리면  

고발하겠다던 주인아주머니의 날선 경고가 살갗을 도려내는 칼바람에 섞여 있었다. 
 

제영은 빈손으로 서둘러 골목길을 빠져나와 잽싸게 되돌아왔다. 현관문 안으로 몸을 숨긴  

후 목격한 사람이 없는지 잠시 두리번거렸다. 3충까지 올라와 집에 들어서려는 데 문득 은 

행이 떠올랐다. 좀 더 신중했더라면 두 가지 일을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었을 텐데. 짜증 

이 찌르르 올라와 바닥에 뱉은 침이 음식물 봉투에서 떨어진 누런 물 위에 겹쳤다. 계단을  

내려오며 주머니를 더듬자 지갑 대신 핸드폰이 살갗에 닿았다. 오른쪽엔 어제 연장 계약 

을 완료한 서류가 구겨진 채로 주인아주머니의 나긋나긋한 목소리와 함께 만져졌다. 형제 

들 간에 참 우애가 좋은 거 같다고 주인아주머니는 말했던가. K와의 약속시간이 잠깐 떠 

올랐다 사그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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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음새가 느슨해져 물을 틀 때마다 빠져버리는 저 ‘주둥이’. 물줄기를 가느다랗게 조절하는 이 ‘주둥이’가 빠져도 수리하려고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 하나 없었다. 목마른 사람이 먼저 우물을 파겠지. 두터운 침묵과 그 위에 쌓이는 냉기는 쌀에 쌀벌레가 그대로 묻어 나온 여름을 기점으로 더욱 깊어졌다. 그는 집 안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누나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도 먼저 집에서 보내온 김장 김치를 먹기 쉽게끔 잘게 잘라 플라스틱 통에 넣어두지 않았다. 불가피한 대화나 싸움이 간간히 끼어들었다. 말을 중간에 끊어버리거나 퉁명스럽게 대꾸하거나 무뚝뚝하게 응수하거나.
수체구멍을 막은 다량의 머리카락을 또 다시 목격한 그가 작은 누나에게 화를 낸 게 사일 전이었다. 결국 청소와 진공청소기 청소로 초점이 확대된 것으로 싸움은 끝이 났다. 방으로 들어온 그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을 감았다. 누나가 진공청소기를 분해하여 부품 하나하나 끄집어내어 닦아주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요즘 들어 부쩍 늘어난 상념의 도움으로 그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진척시켰다. 진공청소기가 청소에 필요한 도구이고 수단이라면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청소보다 진공청소기를 청소하는 게 더 중요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진공청소기는 순수학문인 것이다. 빌어먹을 응용과학이 아니라 순수학문이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경시받는 게 아닌가. 작은 누나는 가시적인 성과만을 급급하게 갈구하는 이 빌어먹을 사회를 닮았다. 그런데 정말로 중요한 것은 순수과학인 기초학문이 아니던가. 더러운 진공청소기로 청소해봐야 바닥은 더욱 더러워질 뿐인데. 그리고 벽 틈에 낀 곰팡이를 식초로 닦아낸다던가, 새까매진 마우스 패드를 빤다거나 하는 것들은 모두 순수과학이다. 누구도 열쇠뭉치를 식초로 닦아내지 않는다. 보이지 않으니까. 돈육의 돈은 바로 돼지 돈, 바로 이것이 작은 누나를 초조하게 만든 진짜 이유이리라. 직장을 그만두고 30살에 다시 공부를 시작한지 2년이 되어가는 와중에 학비를 벌기 위해 모아놓은 돈을 다 쓴 이후에는 과외까지도 하고 있지 않은가. 일요일임에도 아침 일찍 나간 것은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그는 다 이해했고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그는 한 발짝도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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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밥솥의 밥은 반쯤 그대로였다. 누가 이기나 보자, 하는 심사가 만들어낸 결과로 싱크대엔 며칠 째 방치된 그릇이 가득했다. 주방세제 ‘한 방에 오케이, 한 방울’이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았다. 방으로 들어온 그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다시 눈을 감고 있었다. 겨우 11시 40분인 것이다. 와아, 하는 웃음과 박수소리가 거실에서 들려왔다. 눈을 뜨자마자 그는 보지도 않으면서 습관적으로 티브이를 틀곤 했다. 적막함보다는 나은 것이다. 자기네들끼리 한바탕 파티를 벌이는 모양인지 설정된 웃음소리가 방에까지 흘러들었다. 별안간 그의 표정이 밝아진 건 그 때문이 아니었다. 재빨리 몸을 일으켜 세워, 커튼을 젖히고, 오리털 이불을 털어 개고, 노트북의 랩을 닫고, 스탠드 불을 끈 후 어질러진 책상을 대충 정리한 다음, 널브러진 옷가지를 주워들어 녹색 옷걸이에 걸었다. 자신의 입 냄새를 맡아본 후 청바지를 입었다. 서둘러 통장에 입금되었을 잔고를 확인하고픈 기분이 찾아와서이기도 하지만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올라 잠시 활기를 불어넣어준 덕분이었다. 나란히 선반에 뒤집혀 놓여 있던 물 컵 두 개. 왜 물 컵에다 밥을 넣어 먹으면 안 되는가. 주방으로 나가 싱크대에서 물을 트는 순간까지 특허신청감이라는 스스로의 생각에 도취되어 그는 자신의 실수를 떠올리지 못했다. 수돗물을 트는 순간에야 그는 아차, 싶었다. 물줄기의 압력으로 ‘대가리’가 휙 빠져나가 개수대에 나뒹군 뒤였다. 그의 팔뚝과 옷이 일부 젖었다. 눈썹까지 튄 물기를 손으로 훔치면서 그는 ‘대가리’를 싸늘하게 쏘아보았다. 작은 누나처럼 ‘대가리’ 또한 그에 맞서는 것 같았다. 팽팽한 침묵이 둘 사이를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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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진호의 발걸음은 이제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

아니, 진보의 발걸음 말입니다. 크악, 크악. 내일 저는 꼬깃꼬깃 그레이 스키니 진 위에다 무릎까지 올라오는 물소 가죽 부츠를 신은 채 당당히 학교로 가겠습니다. 더 이상 숨기지 않겠습니다. 그 남자 봤어? 스키니 진에 롱부츠를 신은 남자 말이야. 물론이지. 그들의 시선을, 손가락질을 당당히 밀어내고 교정을 활보하겠습니다. 수백 명의 눈이 저의 물소 가죽 부츠를 바라보겠지요. 저는 혁명가가 될 것입니다! 크악, 크악.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 모두 나와 함께 혁명의 행진에 동참하십시오! 모두 스키니 진을 입고 부츠를 신고 거리를 활보합시다! 머리통이 커도 상관없고, 어깨가 좁아도, 갈비씨도 뚱뚱보도, 숏-다리도, 배불뚝이도, 젓가락질 못하는 자도, 다리가 휜 자도 상관없습니다. 크악, 크악. 모두 나에게 오십시오! 로베스삐에로를 위해! 나폴레옹을 위해! 레닌을 위해! 체 게바라를 위해! 세상의 모든 림보맨을 위해! 마지막으로 쭈욱, 원 샷! 



                                                             8

······벌써 3시간이 지났군요. 잉잉. 곧장 토하고 잠이 들었는데 다시 토하고 싶어 눈을 떠 보니 형광등 불빛 아래 모든 게 엉망이 되어 있더군요. 널브러진 나폴레옹 양 주 두 병. 안주로 찍어 먹던 토마토소스가 핏자국처럼 방바닥과 제 소맷자락에 묻어 있는데, 잠결에 이리저리 뒤척인 모양입니다. 잉잉.
양주인데도 오래간만에 먹어서 그런지 머리가 빠개질듯 하네요. 잉잉. 다시 화장실에 가서 모조리 게워내고 오니 정신이 좀 드는 기분이긴 한데, 뭐랄까, 약간은 공허한 느낌인데, 이 느낌, 그래요, 껍질만 남았다고 해야 할까, 잉잉, 뭐랄까, 하여튼, 뭔가가 빠져나간 기분이네요. 잉잉. 토하고 난 뒤여서 그렇겠지요. 잉잉. 어쨌든, 다시 피곤이 몰려오는군요. 18년 산 나폴레옹 양주를 혼자서 두 병이나 까버렸으니, 잉잉. 그런데, 제가 무슨 말을 한 것이죠? 무슨 삐에로라고 한 것 같은데······ 체······ 맞나? 림보맨? 도무지 헷갈리는군요. 원래 이렇게 횡설수설하지 않는답니다. 술에 너무 취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그만 흥분해 떠들어댄 것 같네요, 잉잉.
그런데, 갑자기 슬퍼집니다. 잉잉. <왜 너는 술만 들어가면 크악, 크악, 이라고 하는 거니?> <왜, 크악, 크악 하냐고?> <넌, 술만 취하면 말을 잘하는데, 평소엔 왜 그래?> <왜, 자꾸 크악, 크악 하는 거냐?> 하지만 누구든지 자기만의 술버릇이 있고, 자신만의 방식이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잉잉. 그러니 제발 제게 왜, 라고 묻지 마십시오. 왜 너는······ 왜, 왜, 외······ 그러면 저는 아주 슬퍼집니다. 잉잉.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제가 진정으로 그녀를 사랑하는 걸까요? 사랑하겠지요, 사랑하는 것이겠지요, 아마. 그렇겠지요? 잉잉.

여러분······ 제가 성공할 수 있을까요······? 잉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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