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램폴린 (Trampauline) - Trampauline
트램폴린 노래 / 엔티움 (구 만월당)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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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mpauline은 올해 들은 앨범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을것 같다. 우선 Star Troops are falling down 에 흠뻑 빠져 들었다. Air의 Moon Safari를 처음 들으면서, 아련한 추억을 상기시켜주는 듯한, 그 노스탤직한 감성에 귀를 맡기고 행복해 했던 오래전의 감흥이 고스란히 되살아 난다. 사실 이 앨범은 Moon Safari와 많은 점에서 닮았다. 단순하고 귀여운 일렉트로닉 비트와 음향이 따사롭게 감도는.

난 전자음악을 좋아한다. 70년대 탠저린 드림, 클라우스 슐체 등이 밭을 일구고 키운 베를린 스쿨의 아날로그 일렉트로닉 - 무그, 시퀀서, 아프, 멜로트론 등으로 만든, "전자악기에 의한 록 음악의 구현"이라는 모토 아래 완성된 음악들을 30년이 훌쩍 지난 지금에도 잊지 못하고, 마찬가지로 저 먼 엣날의 음악에 귀를 기울인 채 그 시절의 음악을 재현하는데 여념이 없는,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일부 뮤지션들 - 론 부츠, 에어스컬프춰 등의 음악을 찾아 듣는다. 그런 내게도, 예전의 Air가 그랬듯, 이렇게 기습적으로 다가와 나를 무장해제시키는 전자 음악이 있구나 싶다.

이 앨범의 곡들 대부분이 마음에 들지만 내 마음을 온통 빼앗아간 3번째 트랙과 "Regret", "Teresa" 등의 세곡만으로도 나는 트램폴린의 이 데뷰 앨범을 어느새 올해 들은 앨범 Top 5에 올린 준비를 하며 마음이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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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결혼 시키기
앤 패디먼 지음, 정영목 옮김 / 지호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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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썼다가 잃어버린 글인데, 다행히 몇몇분들이 블로그에 복사해 놓은것이 있어서 다시 가져왔습니다)

"서재 결혼 시키기"라는 책의 번역에 대해 어떤 분이 써내려간 긴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나 역시 흥미롭게 읽은 책이라 관심이 갔다. 주로 그 책에 숨어있는 오역들을 나열하고 자신의 평을 곁들인 글이었다. 의외로 그 책을 출판한 출판사의 편집자가 덧글을 붙이며 오역이라 지적당한 문제의 부분들에 대해 부분적 인정과 논박을 계속했고 자연히 덧글은 계속 길어졌다. 본문 못지않게 이어진 덧글도 아주 볼만했다. 그 글은 내게 좋은 번역이란 무엇인가, 또 훌륭한 번역가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나 는 좋은 번역가란 원저의 의미와 원문의 표현속에 담긴 뉘앙스를 왜곡하거나 빠뜨리지 않고 다른 언어로 (이경우엔 한국어로) 정확히 옮기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볼때 나는 누가 좋은 번역가인지 가려낼 힘이 모자란다. 그 판단을 위해서라면 적어도 원저를 어려움없이 의미를 파악하며 읽어내려갈 수 있는 능력과, 번역서를 읽고 원저와 대조하는 열의가 있어야 할 것이다. 둘중 어느것도 온전히 갖추지 못한 나로서는 그저 다른 이들의 평과, 번역서를 읽었을 때 받은 일차적인 느낌에 기대는 형편이다. 즉 문장이 유려하고 맥락의 적절한 흐름이 갖추어져 있으면 훌륭한 번역이고, 한국어 문법과 통사구조에만 겨우 들어맞는(또는 그에 어긋나는) 어색한 문장과 앞뒤의 의미를 이어나갈 수 없는 문장들이 돌출하면 나쁜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원저의 졸렬함을 역자가 뒤집어 쓸 가능성을 포함하게 되는 것이다.

위 에서 언급한 "서재 길들이기" 관련 글은 내 맘에 들면 "훌륭한 번역"이라고 추켜 세우거나 남의 평을 그대로 옮겨 담던 습관을 자성하게 한 좋은 계기가 되었다. 아는만큼 보인다는 말이 맞는것 같기도 하다. 나는 "서재 결혼 시키기"를 아무런 의구심이나 분노(?)없이 유쾌하게 잘만 읽었기 때문이다. 한가지 조촐하게 덧붙이고 싶은 것은, 최용준씨의 "개는 말할것도 없고"가 오역이 거의 없는 아주 드문 훌륭한 번역이라는 언급이 나오는데, 번역본에 정말 오역이 없음을 확인했을까 하는 점이다. 물론 최용준씨는 과학기술도서 번역상을 수상한 "보증받은" 번역가이고 그 소설에서는 수많은 각주를 통해 원저의 이해를 돕고 독자들이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점들을 일깨우고 있는 매우 성실한 번역을 했음을 한눈에 알수 있었다. 그러나 좋은(정확한) 번역과 성실한 번역은 다른 것 아닐까. 빅토리아 시대의 대화를 포함하고 있을 위트 넘치는 문장들을 정말 오역없이 소화한 것인지 궁금한 점으로 남는다.

이 글에서는 오역에 대한 지적이나 좋은 번역에 대한 내겐 버거운 내용이 아닌, 내가 좋아하는 번역가와 싫어하는 번역가, 그리고 그 근거에 대한 글을 한번 적어 보려고 한다. 그것은 위에 변명한 것과 같이, 좋은/나쁜 번역가라는 말과 일치하지 않을수도 있다.

나 는 이세욱씨를 좋아한다. 고등학교 2년동안 배우고 그친 후 지금은 기껏 단문 몇개를 간신히 해석할 수 있을 뿐인 내 프랑스어 실력으로 그의 번역이 정확한 것인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나는 그가 번역한 베르베르의 개미 시리즈를 비롯한 여러 소설과 그외 열린책들을 통해 내놓은 모디아노, 봉그랑, 상뻬 등의 프랑스 소설들을 읽으면서, 그가 원문의 의미와 뉘앙스를 살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우리말과 문장 공부를 했으며 또 그 결과를 작업에 얼마나 열심히 반영하고 있는지 보고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잘 쓰이지 않는 고유어를 찾아 번역에 쓰는 일이 바람직한 것인가 하는 평가는 - 나는 긍정적으로 생각하지만 -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겠다. 하지만 적어도 그가 번역해 놓은 프랑스 소설은, 한글을 모국어로 구사하는 소설가가 써놓았을 법한 우리말에 누구보다도 근접해 있다고 생각한다. 베르베르 등이 프랑스어가 모국어인 독자들에게 자연스러울 그네말로 썼듯 그 번역서는 우리말에 능숙한 사람이 자연스럽게, 또는 신선한 맛을 느끼며 읽을 수 있는 한국어여야 할 것이다.

외 국어를 번역해놓은 우리말이 풍요로움을 갖추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네들의 문법구조와 선호하는 어휘들을 크게 손상시키지 않은채 한국어 속으로 들여온 번역 문장들은 한국어로 가능한 표현 전체집합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함수 관계로 비유하자면 치역이 공변역의 작은 부분집합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세욱씨는 그 치역의 크기를 넓히고 또 넓혀서 번역이라는 사상(mapping)이 전사함수에 가깝게 되도록 하는 어렵고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는 작업을 해내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미국 출장중이라 책들을 직접 들여다 보며 구체적인 예를 많이 들지 못함이 안타깝지만, 그의 번역을 통해 생소하기만 하던, 잊혀져 가던 고유어들이 다시 문학작품속에 들어와 생명을 얻어 숨쉬고 있는 모습은 아름답기 그지 없었다. 그의 번역에 통해 풍요로움을 되찾는 국어어휘에 뿌듯함을 느꼈달까. 단어는 사전에 실림으로서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라, 문학작품과 대화에 쓰일때 비로소 살아 움직이는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그 의 노력가운데 가장 빛나는 장면은 개미혁명에 실렸던 것으로 기억되는 프랑스어 퀴즈의 번역이었다. 프랑스어 단어로 표기되어야만 의미를 가지는(우리말에도 그런 예가 많은데, 하나를 들자면 '책상에는 두개 있고, 강아지에는 하나 있고, 소쿠리에는 하나도 없는게 뭐지? 하는 수수께끼이다. 답은 "받침"이다. 이것을 외국어로 옮겨야 한다면 난 앞이 캄캄할것 같다), 과연 의미만 간신히 통하는 우리 수수께끼로 완전히 대치하지 않고서 가능할까 싶은 내용을, 원문의 단어와 의미, 그 문장들과 어감을 하나도 손상시키지 않은채 고스란히 한국어로 옮겨놓았다! 그러기 위해서 동원한 고유어들, 그 알맞은 단어를 찾기 위해 이세욱씨가 들였을 노고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나는 그 이상의 훌륭한 번역 표현을 아직까지 접해보지 못했다. 성실성과 언어에 대한 애착, 지식이 두루 갖추어지지 않았다면 결코 생각해낼수 없었을 경이로운 일이다.

물 론 그의 모든 번역과 시도가 맘에 드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들의 아버지"였나 "천사들의 제국"이었나? 거기서 이세욱씨는 "-것이다, -것이었다" 대신에 회화체로만 주로 쓰이던 "-거였다"라는 문장 종결체를 반복해서 쓰고 있다. 색다른 느낌은 들었지만 그렇게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던 듯하다. 그래도 나는 이세욱씨가 번역한 책들을 거의 모두 사본다. 원저의 내용과 수준에 상관없이 그의 번역 작업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을 얻기 때문이다.

잠 시 본인의 어설픈 번역에 대한 기억을 적어 보고 싶다. 대학교 시절 여름방학을 틈타 친구들 서넛과 책을 한권 번역한 일이 있었다. 물론 돈을 벌어보자는 순수한 목적이었다. 취미와 조금 관련이 있던 데이터 커뮤니케이션 관련 기술서적이라 문장의 아름다움보다는(저자는 재치넘치는 말을 많이 했었는데 다 깔아뭉개서 좀 미안했다) 정확한 의미 전달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번역 목표였으므로 나는 될수 있으면 원문의 문장구조가 흐뜨러지더라도 오해의 여지가 없는, 정확하게 동일한 의미를 지니는 우리 문장을 만들려고 애를 썼다. 사실 그것만 해도 대단히 힘겨운 일이었던 것으로 기억에 남는다.

대 학원때는, 미친듯이 읽고 싶었지만 아무도 번역을 안하는 일본어 서적("마르키 유로록 집성"이라는, 7~80년대 유럽 록음악의 대표적인 음반 해설식으로 된 소개서다)을 직접 우리말로 옮기기로 마음을 먹고, 웬만한 일어학원 교재보다 낫다고 누가 추천한 종로학원 일본어 교재를 사다가 2년가까이 공부하면서 번역했다. "일본어 대충 때려가며 그냥 읽기"와 "번역"은 정말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한자읽기때문에 일본어 한자 읽기 사전과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즈 일본어판을 구해야 했고(이 둘 없이는 불가능했다), 가다가나 오십음속에 갇혀 뭉툭해져버린 뮤지션과 앨범 제목을 각종 원 유럽어 철자로 복원하느라 너무나 고생을 많이 해서 이젠 그 책은 쳐다 보기만 해도 정나미가 떨어진다. 인터넷이라곤 텔넷과 FTP, Gopher 서비스가 전부였던 시절이라 다른 자료 구하기도 어려웠다. 그덕에 우리 회사에 출장왔던 선량한 일본인 엔지니어와 명동,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던 일본 여행객들도 고생을 많이 했다. 고유명사 한자 읽기는 일본인들도 서툴렀다. 모국어에 대한 질문에 제대로 답을 못하는 일본인들의 표정은 가끔 당황스러워 보였다.

어 쨌든 그 번역본은 여러 동호회 회원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속에 1,2차 제본 50부가 다 팔렸다(홍대에 있는 전문 레코드점 주인도 샀으므로 가면 한 부 레퍼런스 용으로 꽂혀 있는 것을 볼수 있었다). 그 성원에 그만 정신을 못차리고 "마르키 이탈리안 록 집성(이탈리아 록 레코드 감상만 따로 단행본이 나왔음)"도 얼떨결에 시작해서, 역시 말못할 고생을 해가며 번역했다. 회사일에 치여서 3년 가까이 걸렸다. 내 일본어 실력은 그래서, 그 책들에 평을 쓴 일본 오타쿠들의 이상한 문장들에 대한 해석력과, 음악 묘사 전용의 특이한 단어들로 이루어진 어휘력, 가다가나 보고 원어 때려 맞추기 실력 등등으로 요약할 수 있는 변태적인 꼴을 띠고 있다.

번 역은 반역이라는 이탈리아 격언은 상투적이긴 해도 한치의 거짓과 과장없는 눈물겨운, 번역가들의 하소연이다. 내가 어설프게, 너무도 힘겹게 해치운 번역과는 차원이 다른 일들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번역가들 아닌가. 그 뒤로 나는 문학작품(소설, 에세이, 시는 말할것도 없고)의 번역, 그러니까 단순한 의미뿐만 아니라 저자의 의도와 뉘앙스까지 살려야 하는 번역작업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잔뜩 겁을 집어먹고 있고 시도는 꿈도 못꾸고 있으며(그냥 읽기만 할란다), 그 번역일에 종사하는 번역가들의 노력을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한 경제활동의 수단으로 여기기에는 미안한, 무척이나 고되고 겉보기에 두드러지지 않는, 실로 매우 가치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창작 못지않게 번역을 통해 한국어는 거듭나고 풍요로와진다. 번역가들은 한국어문학의 개척자이자 수호자다.

그 런 훌륭한 번역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누구나 부정할 수 없는 인물이 안정효씨가 아닐까 한다. 그의 번역을 통해 접했던 숱한 20세기 문학의 정수들 -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뿌리, 가시나무새, 백년동안의 고독, 어쩌면 나는 안정효씨의 펜끝을 통해 지금의 독서세계의 일부를 구축하고 꾸려온 셈이다. 그의 번역작업은 한국의 번역사라는 나무를 이루는 굵직한 줄기와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안정효씨가 싫다.

그 모든 혐오는 "번역의 테크닉"이라는 제목으로 내놓은 그의 책에서 비롯되었다. 번역잡지(번역나라 아니면 번역세계였을것이다)에 간간이 실리던 그의 번역론에 마음을 뺏기고 있던차에, 그가 단행본으로 번역 지침서를 내놓았다는 소식은 내게 마치 사막을 헤매는 사람에게 낙타와 지도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과도 맞먹는 기쁨이었다. 그뒤 제목을 바꾸고 개정판이 나왔다는 사실은 아마도 그 책이 꽤 인기리에 판매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리라.

그 렇지만 한장한장 빨아들이듯 그의 번역론을 읽어나가던 나는 점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윽고 책을 책상위에 내려놓고 째려보듯 눈에 힘을 주고 있었다. 이 글이 안정효씨의 글인가? 하나둘, 나는 그의 글이 기분나쁘다고 여기기에 이르렀다. 잘난 이가 글로 부리는 횡포는 내가 안정효씨의 글에서 기대하던 것이 전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모국어로 쓰지 않는 언어에 우리가 어쩔수 없이 노출시키는 무지의 몇몇 단면들이 이렇게 그에게 조롱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과민한 것인가. 몇번이고 다시 읽어 보았지만 나만의 섣부른 오독은 아닌것 같았다. 그는 우리가 영어를 잘못쓰고 있다고 끊임없이 비아냥거렸다. 급기야 우리들이 엉터리로 고유명사들을 읽고있다고 마음껏 비꼬는 부분에서 얼굴이 붉어지는 모욕감마저 들었다.

사 실 고유명사 읽기의 어려움만큼 독서 애호가들과 번역가들을 괴롭히는 것이들이 또 있을까? 성실한 번역을 한다고 알려져 있는 이윤기씨도 도나 타트의 "비밀의 계절"을 우리말로 옮기면서 영국 지명 Leicester를 "레이체스터"라고 적었다. 당연하다는 생각과 자신감에 사전을 들추어 보지 않은 것이다. Gloucester를 "글루체스터" "글로체스터"로 읽고 싶으신 분도 한번 사전을 찾아보시기 바란다. 그런데 Cirencester는 이와 다르게 또 쓰인대로 발음을 한다. 원칙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영국사람들 맘대로다.

고 종석씨가 '불란서, 법란서, 프랑스'라는 글에서 예로 든 영어 Majoribanks(마시뱅크스), Featherstonehaugh(팬쇼)처럼 기이하다시피까지한 경우 외에도, 고유명사들은 지방성과 숨은 유래, 개인 또는 집단의 선호 등의 여러 이유로 대단히 읽기 어렵다(조사해보니 후자의 경우는 위의 발음외에도 다섯가지 방법으로 다르게 읽는다고 한다). 유태계 지휘자 Leonard Bernstein은 "레너드 번스틴"이고, 저명한 컴퓨터 과학자 Donald Knuth는 셰익스피어 시절을 그리워하는지 자신의 이름을 "도널드 크누쓰"로 읽는다. 따로 공부를 해야하는 외국어는 차치하고서라도 제법 익숙하다고 생각하는 영어도 영국영어로 넘어가면 예상과 상식을 벗어난다.

영 국의 소설가 Anthony Powell은 "안쏘니 폴"이고, Leveson-Gower는 "루슨 고어"이고, Hiscox는 "히즈코", Ruthven은 "리븐", Beauchamp은 ("보샹"이 아니라) "비챔", Cockburn은 "코번", 시인 William Cowper는 "윌리엄 쿠퍼", 캠브릿지에 있는 "Caius Coellge"는 "키스 칼리지", 옥스포드에 있는 Magdalene College는 "모들린 칼리지"이다. 스코틀랜드계 미국이민 McLeod 집안은 아무도 자신의 이름들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는 현실을 버티지 못하고 결국 "McCloud"로 성을 바꿔야 했고, "맥카이"였던 McKay 집안은 결국 조상들과 이제는 발음이 다른 성을 가지게 되었다.

고 유명사의 철자와 발음은 시공간에 따라 가늠할수 없이 바뀐다. 우리도 그렇다. 스페인명임이 명백하여 우리에게 "산호세"였던 샌프란시스코의 지명은 요즘들어 숱한 히스패닉들이 여전히 그 발음을 고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인들은 "새너제이"로 읽고 일부 한국 언론은 그것을 따라간다. 어떻게 읽어야 맞는가? 후자가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라스베가스가 위치하고 있는 주 이름 Nevada는 상당수 현지인들의 발음에 가까운 "너베이다"를 따르지 않고 "네바다"라고 쓴다. 어떤 표기가 바람직한 것인가? 알면 미국영어식, 모르면 스페인어식?

영 어라는 창문을 통해 읽어온 세계의 지명들은 또 어떻게 표기해야 맞는가? 역시 고종석씨가 같은 책을 통해 짚은것 외에도 아시는분들이 많겠지만 이탈리아의 아름다운 도시 플로렌스는 피렌체, 베니스는 베네치아라는 아름다운 원명을 가지고 있다. 덴마크의 수도는 코펜하겐이 아니라 쿠펜호웬이며,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네덜란드의 도시는 헤이그가 아니라 덴 하흐다. 영미인만 이런 전횡을 부리는것은 아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영국의 수도를 론드라(Londra)로, 프랑스의 수도를 파리지(Parigi)라고 멋대로 부른다. (이상의 예는 "The Mother Tongue: English & How it got that way", Bill Bryson, 1991과 "감염된 언어", 고종석, 1999 참조).

일 본어 책을 번역하면서 맞닥뜨린 이름 "坂本 理"를 무심코 "사카모토 리"라고 읽었다가 이게 아니다 싶어 일본인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두명이 모두 "사카모토 마코토"라고 자신있게 대답하길래 그런가보다 하고 그대로 써서 제본에 들어갔는데, 한참 뒤에야 그가 만든 캔터베리 패밀리 트리(영국 캔터베리 지방 뮤지션들의 계보) 한구석에 깨알만한 글씨로 직접 "SAKAMOTO OSAMU"라고 써넣은 것을 보고 아연해한 기억이 난다. 자국민들도 모르는 이름을 어떻게 우리가 쉽게 읽을수 있겠는가.

이 러운 고유명사 읽기의 어려움을 아는지모르는지, 안정효씨는 우리가 미국 영화 배우 닉 놀티를 닉 놀테로, 그리이스 소설가 카잔차키를 카잔차키스로 읽는다고 조롱한다(예가 많았는데 두개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과연 그는 위에 예로 든 이름들을 다 제대로 읽어낼 수 있을까? 아마 보통사람들보다는 많이 알것이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와 같은 교만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의 번역 실력에 불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예외일 수 없는 함정에 빠져 있는 우리들을 향해 뭐가 묻었다며 냉소하는 그의 말투와 태도가 싫은 것이다. 그것은 내가 그에게 이전에 품고 있던 호감을, 마치 한쪽으로 접혔던 종이가 반대쪽으로 더 잘 접히듯 오히려 반감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 의 헛점은 되돌아오는 부메랑처럼 결국 자신에게도 적용되어 무지를 폭로하게 만든다. 같은 책에서 그는 LG(금성)에서 내놓은 워크맨 아하(AHA)를, 감탄사 ah? ha! 두개의 얼치기식 한국형 조합이라며 비웃었다. 한마디로 어이가 없었다. 아시다시피 아하는 80년대 중반 Take On Me라는 곡과 환상적인 뮤직비디오로 전세계를 강타한 노르웨이 밴드의 이름이며, LG전자의 워크맨 아하는 그무렵 밴드의 이름을 따서 등장하여 지금까지도 장수하고 있는 브랜드명이다. 이게 시비를 걸 내용인가? 대중문화에 대한 자신의 무지를 현란하게 드러낸 꼴이다. 나는 안정효씨의 비아냥거림을 패러디해서, 역시 80년대 중반에 판매된 아이스크림 듀란듀란(Duran Duran)에 이렇게 시비를 걸 수도 있다: "보아하니 순 우리말 도란도란을 얼치기식 영어로 바꾼 것인데, 요즘 점점 심화되는 우리말의 왜곡과 외국어의 무분별한 선호 현상이 심히 우려스럽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이먼 르봉과 제임스 테일러의 수려한 외모, Reflex, Rio, Hungry Like the Wolf등의 히트곡들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사람에게 위의 비난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웃음거리이겠는가?

그 는 또 OK Corral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는 한국인들이 안쓰럽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가축우리(Corral)에서 밥을 먹으면 밥맛이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하는 어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OK Corral은 영화 제목에서 이름을 따온 미국계 레스토랑 체인이며, 한국사람들뿐만 아니라 미국사람들도 레스토랑에 걸린 버트 랭카스터의 사진을 보면서 잘만 밥을 먹는다. 안정효씨는 미국사람이 지은 레스토랑 이름도 기분 나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렇게 시비를 건다. 또 "-barn"이라는 이름의 한국 레스토랑을 들먹이면서 헛간(barn)에서 밥먹는 불쌍한 사람들 걱정을 또한다. 노스캐롤라이나에 회사일로 출장을 갔었는데, 앵거스 반(Angus Barn)이라는 스테이크 집에서 사람들이 신나게 고기를 썰며 맥주를 마시며 즐거워만 하더라. "외국에 한번도 나간 일이 없다"는 사실이 영문학을 번역하는 사람으로서 조금도 자랑할 일이 아니라는 점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브리트니 스피어스에게 "이름이 창꼬챙이라니 당신 조상은 영어를 아냐"고 따지는 것과 다름없는 글을 써놓았으니 안되어 보일 뿐이다. 그는 아마도 위의 이름들이 영어에 무지한 한국인의 어설픈 창작이라고 여기고 마음껏 공격한 듯하다. 안됐다.

또 안정효씨는, 가전제품의 명칭에 한때 유행처럼 붙었던 "퍼지" (퍼지세탁기, 퍼지카메라 등)라는 용어도 심히 맘에 들지 않았는지 펜끝을 들이대고 "아마 fursys라는 단어에서 따온듯한데 - " 라는 근거없는 주장으로 시작해서 사람들이 의미를 알고나 쓰는건지 모르겠다고 냉소하였다. 전산이론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가졌던 사람이라면 퍼지(Fuzzy)란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 공과대학 컴퓨터 사이언스 교수인 자데(Zadeh)가 집합론의 확장 개념을 내놓으면서 집합 원소에 부여한 소속도(원소는 집합에 속하거나 속하지 않거나가 아니라 0~1까지의 소속도를 가지게 된다)라는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표현이며, 한때 인공지능분야에서 각광을 받았던 이론의 이름임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지나친 비난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글을 보면서 "무식하면 참 용감하군"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래서 별다른 이유가 없었으면 냉큼 샀을 그의 "가짜영어사전"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 책에도 가득할 그의 조소는 생각하기도 싫은 것이었다.

안 정효씨에 대한 반감이 근거없는 흠집내기가 아니라는 점을 설명하고 싶어서 글이 좀 길어졌다. 윗글은 절대로 그가 오랜 시간동안 행해온 노고를 깎아 내리고자 한 말이 아니다. 나는 그저 겸손이라는 보편적 미덕이 그의 언행에서도 우러나오길 바라는 것이다. 나는 푸코의 추(장미의 이름이었나) 개정 번역판을 내놓던 무렵 이윤기씨의 고백을 기억한다. 자신의 전작업이 제대로 된것이 아니었음을 인정하고 자료를 추가 입수해서 새로 번역에 임한 그의 태도, 결코 인정하기 쉽지 않았을 일을 털어놓은 자세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 일로 이윤기씨의 자아성찰의 깊이를 가늠해 볼수 있었던 내가 그 못지 않은 번역가인 안정효씨에게 같은 깊이를 기대하는 것이 무리라고 생각지 않는다. 조롱과 비아냥이라고 받아들였던 안정효씨글속의 표현이, 실은 그의 의도가 아니라 쓰던 글의 흐름에 어쩌다 동원된 수사의 한 기법이기를 바란다.

에 잇. 누구 욕을 했더니 기분이 나쁘다. 어쨌든 아직 내게 안정효씨는 "싫어하는 번역가"다. 잘나고 잘난척하고 그래서 남들 비웃는 사람들 대학때 신물나게 많이 보았다. 안정효씨가 그런 사람이라면 번역한 책은 안볼란다. "이런건 내가 번역 안해주면 아무도 못하겠지" 생각하며 번역을 하는지 누가 아는가. 나는 이세욱씨의 번역서는 계속 살것이며 안정효씨의 책은 저작이건 번역이건 절대로 안 사고 저자 사인회 같은 데에도 절대로 안 갈 것이다 (200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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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06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안정효 씨 책 읽다가 의문이 든 구석이 한 두 군데가 아니었는데 과연 다양한 사례가 있군요. '가짜영어사전'을 읽다가 그분이 모 증권회사 TV 광고에서 사용한 'value investment' 라는 용어를 가지고 또 아마 이러 이러한 뜻으로 맘대로 조합한 콩글리쉬인 것 같다고 쓴 부분이 있었는데 저 용어는 증권계에서 사용한지 100년이 다 된 용어거든요. 물론 만든 사람은 미국사람들이구요. 다행히 제가 이 부분에 대해 알고 있어서 망정이지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안정효 씨 말이 다 맞다고 생각을 했겠지요. 저자 연락처를 알 수 없어서 출판사 편집자에게 메일을 보냈는데 답이 없네요 ㅎㅎㅎ 게다가 다양한 스포츠 용어에 대해서도 가차 없이 비판을 가하고 있는데 스포츠광인 남편한테 물어보니 잘못된 비판인 경우도 많았고요. 아무튼 저도 번역에 관심이 많습니다. 재미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jindor 2008-10-11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SPN 등 열심히 보실 부군의 스포츠 용어 지식이라면 안정효씨의 오류가 금방 눈에 들어오겠지요. '언어본능'의 서평에 붙은 번역에 대한 지적도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안 보셨으면 일독을 권해드립니다. 좋은 책 번역 많이 부탁드립니다.

몽돌 2010-06-09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안정효씨의 책은 거의 다 찾아서 읽어 본 적이 있는데 나름 스스로를 천재급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영어 관련 책들에서 몇가지 심각한 실수, 오류가 자주 보여서 당황스러운 적도 있었죠. 가짜 영어 사전에 나오는 상당 수의 예가 엉터리 설명으로 스스로의 오류에 빠져 있다는 거였습니다. http://blog.aladdin.co.kr/bryantkwon/472239 여기 보면 그 중 몇가지가 나옵니다.
 
비밀의 계절 2
도나 타트 지음, 이윤기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http://cafe.naver.com/livingwithnovel/312

2002 년은 소설 읽기 좋아하는 독자들에게(다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나에게) 아주 기억할만한 해였다고 생각한다. 도나 타트가 무려 10년만에 두번째 소설 "작은 친구"를 내놓았고(2001년에 내놓기로 했다가 늦어졌다), 제프리 유제니디스가 질세라 역시 무려 9년만에 두번째 소설을 내놓은 해였기 때문이다. 둘다 소포모어 징크스가 두려워 잠시 외도하다가 맘잡고 새책을 쓴것인지, 아니면 계속 꼼지락거리며 두번째 소설 구상에 신중에 신중을 기한것인지는 잘 모르겠다(좀 찾아 보니 꾸준히 단편들을 발표한 모양이다). 어쨌든 참 작가도 독자도 오랜 시간 잘 참고 기다렸던 것 같다.

두 작가가 내게 지니는 공통점은.... 둘 모두 데뷰 소설이 유일한 소설이었고 내가 추리소설에 푹빠져 있던 90년대 말, 독서 범위를 한껏 넓혀서 괜찮아 보이면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섭렵하던 중 미스테리/스릴러와 주류 문학이 만나는 점까지 이르렀을때 마주한 소설들을 쓴 사람들이라는 거다. 어쩌면 훌륭한 소설들이 장르문학적 속성을 공공연히 드러내던게 시대적인 유행(?)이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어쨌든 그 덕택에 내 취향은 루스 렌델의 콜드 블러디드 스릴러에서 조금씩 조금씩 핏빛을 잃어가고 다채로운 색을 머금기 시작했다.

독후감면에서 비교해 보자면 타트의 소설이 탁월했다. 워낙 좋아하던 바바라 바인의 스타일과 매우 유사했을 뿐만 아니라(특히 Fatal Inversion과 이야기 구도가 닮아 있다), "무구한 젊은 시절에 저지른 과오와 그에 대한 보상"이라는, 항상 관심을 품게 되는 주제를 낭만적이고도 이따금은 현학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매우 현실감 넘치게 쓴 책이기 때문이다. 펭귄에서 나온 페이퍼백 에디션에는 렌델의 서평이 책 뒤에 실려 있는데(As a profoundly serious examination of remorse and its effects... this book is as moving as it is insightful...) 아마도 바인이라는 필명으로 집필해 오던 렌델 여사가 자신이 즐겨 쓰던 회고담류의 미스터리를 갈데까지 밀어붙인 젊은 작가 타트의 솜씨에 감탄한 나머지 그런 찬사를 기꺼이 드러내 던진 것이 아닐까 한다.

그에 비해 사실 유제니디스의 "Virgin Suicide"는 아주 돋보이는 미스터리물도 아주 돋보이는 스토리도 아니었다. 재미있긴 한데 끝까지 읽어봐도 왜 그 꽃다운 리스본씨네 소녀들이 계속 목숨을 끊는지 잘 드러나지도 않는다. 소설이 아닌 영화 덕에 눈에 들어 온거였다(정확히 말하면 Air가 만든 영화음악덕에 알게 된것이지만). 

그러나 두 작가의 두번째 작품에 대한 내 반응은 180도 바뀌었다. 타트도 그렇고 유제니디스도 그렇고 첫 소설과는 완전히 다른 소재와 색깔로 쓰여진 소설을 들고 나와서(사실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서 그동안 작가의 성향이 변하지 않을수 없었을 것이다) 비교가 무의미하기도 하다. 어쩌면 나는 서로 다른 네명의 작가의 소설을 비교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조금 객관적으로 보려고 애쓰며 둘의 소포모어 텍스트를 비교해본다면 유제니디스의 것이 더 매력적인 것을 숨길수 없다. 수상 여부를 떠나서. "작은 친구"는 그 책을 읽는 시점에서, 왠지 모르게, 어린 소녀를 화자로 내세우는 것 자체가 좀 진부하다고 느꼈다. 그 사실이 소설을 더 매력적으로 만들려면 뭔가 색다른 시도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반면 양성인간이라는 색다른 소재를 들고 나와 위트넘치는 문체로 장대한 한 인간의 일대기를 써내린 "미들섹스"는 소설 읽기의 기쁨을 한껏 들이마시게 해준 맛있는(?) 작품이었다.

타 트의 데뷰작은 이윤기씨의 솜씨로 번역되었지만 작은 친구는 그럴 기회를 얻지 못했고, 유제니디스는 반대로 두번째 소설 "미들섹스"만  송은주씨의 멋진 번역으로(송은주씨의 번역 솜씨는 나중에 따로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으면 한다. 반가운 마음에 초판을 사서 보관하고 있다가 번역본과 교대로 보던중, 훌륭한 번역에 마음을 빼앗겨 마음 푹 놓고 번역서로 다 보았다) 소개되었다.

이번엔 과연 얼마 정도 기다리면 둘의 세번째 소설을 볼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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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틀 매드니스 - 책, 그 유혹에 빠진 사람들
니콜라스 A. 바스베인스 지음, 표정훈.김연수.박중서 옮김 / 뜨인돌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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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화한 광기 - 애서가, 장서광, 책을 향한 끝없는 열정 / 니콜라스 베스베인스
Gentle Madness - Bibliophile, bibliomanes, and Eternal Passion for Books

(다른 곳에 썼던 글이라 약간의 편집을 했습니다)

못보고 놓친 7월 19일자 KBS 1TV의 "TV, 책을 말하다" 프로그램을 온라인으로 보던 중 조각가 최은경씨의 책조각 작품 사이로 이 책의 시커먼 등이 화면 오른쪽에서 나타났다가 왼쪽으로 사라졌다. 화들짝 놀란 나는 읽고 있던 이놈의 책이 마침내 책장에서 모니터 화면 속으로 날아 들어오는 못된 장난을 쳤다고 믿고, 확인을 해보려고 프로그램을 앞으로 다시 돌려 보았다

 

물론 나의 착각이었다(우연처럼 정말 읽고 있던 책이 TV에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따금 이런 말도 안되는 생각도 별다른 의심없이 당연히 사실로 여기고 지내곤 한다. 그것은 주로 내가 만든 컴퓨터 프로그램들이 마치 생명이라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독창적인(?) 동작을 해대는 바람에 무의식적으로 애니미즘을 신봉하게 됨으로써 생겨난 습성인데(프로그래머들은 이해해 줄것이다), 그래서 마르케스 등의 소설속 풍경도 '뭐가 마술적인 환상이야. 그럴 수도 있는거지' 하는 생각으로 읽어 내려가는 지경에 이르게 되기도 한다. 점점 복잡해지고 감당하기 힘들어지는 세상을 내 머리는 이렇게 "미혹과 마법으로 차있는 곳"으로 규정짓고 퇴행하는 것 같다.

 

이광주 교수의 "지상의 아름다운 책 한권"을 통해 알게 된 이 책은, 돌돌말린 양피지의 모양으로 세상에 책이 처음 태어난 이후로 거기에 환장하여 비정상적인 삶을 산 여러 인물들의 광기어린 모습의 기록이다. 저자 베스베인스 역시 그러한 부류 가운데 하나인 듯 이들을 매도하거나 조소하는 일 없이 내내 따뜻하고 진지한 시선으로, 어쩌다가 잠시 찬양하는 들뜬 어조로 써 내려 가고 있다. 마치 고종석씨가 복거일씨의 글을 읽고서 "내 반공주의, 자유주의, 개인주의를 짓누르고 있던 수치심에서 해방"되었다고 말하였듯, 나 역시 이런저런 책들을 역시 이런저런 핑계를 열심히 만들어서 사들이며 품지 않을 수 없었던 죄의식(이라고까지 하기엔 좀 뭐한데 어쨌든)에서 말끔히 해방되어 계속 살던대로 살겠다는 용기를 스스로 북돋을 수 있었다. 다른 분들도 어서들 보고 마찬가지로 광명을 얻기 바란다.

 

책을 사랑한 나머지 높은 안목을 바탕으로 전국의 도서관을 돌면서 26,000권의 알토란같은 책들만을 훔쳐서는 집에다 첩첩이 쌓아놓고 행복해하다 결국은 체포되어 철창신세를 진 한 미국사람의 이야기로 시작하는데, 이것은 수세기에 걸쳐 "책이 좋아서" 내내 책 생각만 하다 살다간 수많은 이들의 이야기의 서막에 지나지 않는다. 이 많은 사람들의 "광기"가 책을 통해 세상과 잇닿았다는 사실은, 만일 책이 아니라 다른 엽기적인 행위(살인 같은거)로 드러났을 때의 사회적인 문제의 심각함을 상상해 본다면 아주 바람직한 현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애서가들의 스케일은 내 어렴풋한 상상의 범위를 다들 훌쩍 뛰어 넘고 있어서 사실 일주일에 두세권, 많을 때도 열권을 넘지 못하는 수의 책을 사들이는 나는 그 축에 끼기엔 턱없이 모자라, 내가 품었던, 대상도 뚜렷하지 않고 굳이 갖지 않아도 될법한 그 미안한 감정은 그들 가운데 하나가 알게 되었다면 아마도 "괜찮아 괜찮아 그냥 사" 하며 가볍게 웃고 지나갈 수준일 것이다. 어머니께도 들고가서 "보세요 어머니 전 아무것도 아니예요" 하고 자랑스레 이야기하고 싶은 충동을 꾹 눌러 참는다. 누군가 번역할 때까지 기다리자 일단 :)

 

이 좁은 나라 안에서만 쓰이는 한국어가 내 모국어이고, 그래서 가지고 싶은, 읽고 싶은 책의 범위도 외서라고는 호기심에 이끌리거나 아니면 번역되지 않아 불가피한 경우에 그치고 마는 현실이 이따금 아쉽게 느껴진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닐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좁은 땅안에서 펴내는 책들의 양만 해도 내가 감당하기엔 벅찰 정도로 많지만 관심을 갖는 분야의 책들은 대부분 영미권의 필자에 의해 쓰여져 있어서 만사에 별 욕심없는 내가 책에 대해서만은 호사스런 취미와 관용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품는다. 조기 영어 교육에 대한 찬반논란과 나들이하듯 아이들 외국 연수를 다녀오게 하는 젊은 부모의 열성으로 이땅이 온통 떠들썩한데, 내눈에 그것이 매우 부담스럽게 보이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긴 하지만, 만일 아무것도 모른채 부모의 손에 이끌리는 어린아이 가운데 내가 있고 그래서 계속 지금처럼 책보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자라게 된다면 아마도 영미권의 그 수많은 책들을 자신이 자유롭게 읽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부모에게 감사하게 될 것 같기도 하다.

 

책을 보다가 사회적으로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는 애서가, 장서광들 가운데 한국인들은 누가 있었는지, 그래서 이땅을 언제 어떻게 살았는지가 무척 궁금해졌다. 어제 XX일보의 책섹션을 보니 실학자 혜강 최한기도 그러한 사람 가운데 하나였었나 보다. 누군가 그들의 묻혀진 이야기를 세상에 드러내 주었으면 좋겠다. 몇십년 남짓 시간이 더 흐른 후라면 아마 xx 회원들 가운데에도 적어도 한 두명의 이름이 그 목록에 오를지 누가 아는가. 그때 얼마나 그 이름이 반가울까 싶다.

 

8월이면 베스베인스가 이 책의 속편격이 될 할 두툼한 책을 한권 더 내놓는다. 그 책도 보고서 완벽한 "해방의 기분"을 맛보고 싶다. 모 온라인서점에 어느 서치가 이책의 서평을 쓰면서 별 5개를 주고 "책이 페이지마다 아름다운 이야기로 가득 차 있어서 읽으니 꼭 책과 섹스를 하는 기분이다!" 라고 해놓았다. 어디 정말 그런지 좀 더 두고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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