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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틀 매드니스 - 책, 그 유혹에 빠진 사람들
니콜라스 A. 바스베인스 지음, 표정훈.김연수.박중서 옮김 / 뜨인돌 / 2006년 1월
평점 :
온화한 광기 - 애서가, 장서광, 책을 향한 끝없는 열정 / 니콜라스 베스베인스
Gentle Madness - Bibliophile, bibliomanes, and Eternal Passion for Books
(다른 곳에 썼던 글이라 약간의 편집을 했습니다)
못보고 놓친 7월 19일자 KBS 1TV의 "TV, 책을 말하다" 프로그램을 온라인으로 보던 중 조각가 최은경씨의 책조각 작품 사이로 이 책의 시커먼 등이 화면 오른쪽에서 나타났다가 왼쪽으로 사라졌다. 화들짝 놀란 나는 읽고 있던 이놈의 책이 마침내 책장에서 모니터 화면 속으로 날아 들어오는 못된 장난을 쳤다고 믿고, 확인을 해보려고 프로그램을 앞으로 다시 돌려 보았다
물론 나의 착각이었다(우연처럼 정말 읽고 있던 책이 TV에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따금 이런 말도 안되는 생각도 별다른 의심없이 당연히 사실로 여기고 지내곤 한다. 그것은 주로 내가 만든 컴퓨터 프로그램들이 마치 생명이라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독창적인(?) 동작을 해대는 바람에 무의식적으로 애니미즘을 신봉하게 됨으로써 생겨난 습성인데(프로그래머들은 이해해 줄것이다), 그래서 마르케스 등의 소설속 풍경도 '뭐가 마술적인 환상이야. 그럴 수도 있는거지' 하는 생각으로 읽어 내려가는 지경에 이르게 되기도 한다. 점점 복잡해지고 감당하기 힘들어지는 세상을 내 머리는 이렇게 "미혹과 마법으로 차있는 곳"으로 규정짓고 퇴행하는 것 같다.
이광주 교수의 "지상의 아름다운 책 한권"을 통해 알게 된 이 책은, 돌돌말린 양피지의 모양으로 세상에 책이 처음 태어난 이후로 거기에 환장하여 비정상적인 삶을 산 여러 인물들의 광기어린 모습의 기록이다. 저자 베스베인스 역시 그러한 부류 가운데 하나인 듯 이들을 매도하거나 조소하는 일 없이 내내 따뜻하고 진지한 시선으로, 어쩌다가 잠시 찬양하는 들뜬 어조로 써 내려 가고 있다. 마치 고종석씨가 복거일씨의 글을 읽고서 "내 반공주의, 자유주의, 개인주의를 짓누르고 있던 수치심에서 해방"되었다고 말하였듯, 나 역시 이런저런 책들을 역시 이런저런 핑계를 열심히 만들어서 사들이며 품지 않을 수 없었던 죄의식(이라고까지 하기엔 좀 뭐한데 어쨌든)에서 말끔히 해방되어 계속 살던대로 살겠다는 용기를 스스로 북돋을 수 있었다. 다른 분들도 어서들 보고 마찬가지로 광명을 얻기 바란다.
책을 사랑한 나머지 높은 안목을 바탕으로 전국의 도서관을 돌면서 26,000권의 알토란같은 책들만을 훔쳐서는 집에다 첩첩이 쌓아놓고 행복해하다 결국은 체포되어 철창신세를 진 한 미국사람의 이야기로 시작하는데, 이것은 수세기에 걸쳐 "책이 좋아서" 내내 책 생각만 하다 살다간 수많은 이들의 이야기의 서막에 지나지 않는다. 이 많은 사람들의 "광기"가 책을 통해 세상과 잇닿았다는 사실은, 만일 책이 아니라 다른 엽기적인 행위(살인 같은거)로 드러났을 때의 사회적인 문제의 심각함을 상상해 본다면 아주 바람직한 현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애서가들의 스케일은 내 어렴풋한 상상의 범위를 다들 훌쩍 뛰어 넘고 있어서 사실 일주일에 두세권, 많을 때도 열권을 넘지 못하는 수의 책을 사들이는 나는 그 축에 끼기엔 턱없이 모자라, 내가 품었던, 대상도 뚜렷하지 않고 굳이 갖지 않아도 될법한 그 미안한 감정은 그들 가운데 하나가 알게 되었다면 아마도 "괜찮아 괜찮아 그냥 사" 하며 가볍게 웃고 지나갈 수준일 것이다. 어머니께도 들고가서 "보세요 어머니 전 아무것도 아니예요" 하고 자랑스레 이야기하고 싶은 충동을 꾹 눌러 참는다. 누군가 번역할 때까지 기다리자 일단 :)
이 좁은 나라 안에서만 쓰이는 한국어가 내 모국어이고, 그래서 가지고 싶은, 읽고 싶은 책의 범위도 외서라고는 호기심에 이끌리거나 아니면 번역되지 않아 불가피한 경우에 그치고 마는 현실이 이따금 아쉽게 느껴진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닐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좁은 땅안에서 펴내는 책들의 양만 해도 내가 감당하기엔 벅찰 정도로 많지만 관심을 갖는 분야의 책들은 대부분 영미권의 필자에 의해 쓰여져 있어서 만사에 별 욕심없는 내가 책에 대해서만은 호사스런 취미와 관용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품는다. 조기 영어 교육에 대한 찬반논란과 나들이하듯 아이들 외국 연수를 다녀오게 하는 젊은 부모의 열성으로 이땅이 온통 떠들썩한데, 내눈에 그것이 매우 부담스럽게 보이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긴 하지만, 만일 아무것도 모른채 부모의 손에 이끌리는 어린아이 가운데 내가 있고 그래서 계속 지금처럼 책보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자라게 된다면 아마도 영미권의 그 수많은 책들을 자신이 자유롭게 읽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부모에게 감사하게 될 것 같기도 하다.
책을 보다가 사회적으로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는 애서가, 장서광들 가운데 한국인들은 누가 있었는지, 그래서 이땅을 언제 어떻게 살았는지가 무척 궁금해졌다. 어제 XX일보의 책섹션을 보니 실학자 혜강 최한기도 그러한 사람 가운데 하나였었나 보다. 누군가 그들의 묻혀진 이야기를 세상에 드러내 주었으면 좋겠다. 몇십년 남짓 시간이 더 흐른 후라면 아마 xx 회원들 가운데에도 적어도 한 두명의 이름이 그 목록에 오를지 누가 아는가. 그때 얼마나 그 이름이 반가울까 싶다.
8월이면 베스베인스가 이 책의 속편격이 될 할 두툼한 책을 한권 더 내놓는다. 그 책도 보고서 완벽한 "해방의 기분"을 맛보고 싶다. 모 온라인서점에 어느 서치가 이책의 서평을 쓰면서 별 5개를 주고 "책이 페이지마다 아름다운 이야기로 가득 차 있어서 읽으니 꼭 책과 섹스를 하는 기분이다!" 라고 해놓았다. 어디 정말 그런지 좀 더 두고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