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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메이커 - 남북관계와 북핵문제 20년, 임동원 회고록
임동원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08년 6월
평점 :
절판
피스메이커 – 임동원 회고록, 남북관계와 북핵문제 20년
임동원 / 중앙북스 / 2008
국민의 정부 당시 통일부장관, 국정원장, 외교안보통일특보 등을 역임한 임동원의 회고록의 제목은 ‘피스메이커’이다. 이 단어는 마태복음 5장 9절(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peacemaker)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에서 따온 것으로 남북관계가 평화적으로 유지될 수 있도록 노력한 저자의 업적을 한 마디로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책의 내용은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의 감격적인 순간부터 출발한다. 박지원-송호경의 물밑 작업, 북한 사업 독점권을 따내기 위한 현대의 무리수, 정상회담에 앞선 저자의 김정일 내방 등을 간략히 설명한 다음 6월 14일 남북정상회담과 6•15 남북공동선언의 내용과 의의를 서술한다. 남측이 부담하는 북의 침략에 대한 위협, 북측이 부담하는 북침의 위협을 정치, 군사적 신뢰조성을 통해 해소하고자 하는 욕구에 당시의 시대적 운과 김정일의 개혁에 관한 의지 등등이 잘 맞아 떨어져 나온 작품이 바로 6•15 남북공동선언. 두 정상은 핫라인 설치, 서로를 향한 비방방송을 그만둘 것은 물론 ‘통일이 목표인 동시에 과정’이며 ‘점진적 단계적으로 추진’해야 할 사업임을 합의한다.
다음으로, 임동원 자신의 개인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평북 위원군 출신으로 1950년 17살의 나이로 단신 월남, 1953년 육사 13기로 입교한 후 1961년 육사교수요원으로 선발, 교수로 재직하던 중 출간한 <혁명전쟁과 대공전략>으로 대공전략 최고 전문가로 등극한다. 이후 율곡계획의 실무자로 일하며 군사전략, 안보정책개발에 참여한 후 1980년 육군 소장으로 예편 후 나이지리아, 호주 대사로 일한다(여기엔 정치에 관여하지 않으려 하며 쿠데타는 옳지 않다고 주장한 그의 성향이 전두환에게 맞지 않아 물먹은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이후 저자가 남북관계개선에 본격적으로 뛰어드는 때는 노태우 정권 때이다. 당시는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가 변화하여 북방외교를 추진할 수 있었던 때였다. 소련과 동구권은 시장경제체제로 돌입하며 한국과 수교를 맺고, 서독은 동독을 흡수 통일, 중국은 개혁과 개방의 기치를 높이 올리던 때. 이 시기 북한은 정치, 사회, 심리적으로 수세에 몰리며 경제위기까지 겪게 되어 개방의 압력과 흡수통일의 공포증이 극에 달할 때였다. 북한은 미국과의 적대적 관계를 해소하여 생존을 보장받고 싶었고, 일본과는 조속한 수교 후 식민통치 배당금을 받아 경제를 회생하려 했다. 이에 남북관계의 평화적 개선은 북한에게도 생존이 달린 문제였기에 비교적 잘 진행될 수 있었던 것. 그리고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북방외교 및 남북관계 개선에 실질적인 노력을 보탠 많은 사람들이 있어 화해와 소통의 분위기가 이루어졌는데, 그 중심역할을 한 저자가 평화정착을 자신의 신조로 삼아 남북관계와 관련된 많은 일들을 진행했음은 다행이라 여겨진다. 걸프전, 남한의 팀스피리트 훈련 등을 이유 삼아 북한이 대화를 중단하기도 했지만 1991년 12월 13일 남북기본합의서(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교류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 같은 해 12월 31일 한반도 비핵화선언 같은 굵직한 업적이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1992년, 노태우 정권의 레임덕 현상으로 인해 국내 보수파들이 대북문제를 걸고 넘어지기시작하고, 이인모를 비롯한 175명의 비전향좌익수 송환희망자를 북으로 돌려보내는 문제도 강경파의 반대로 실패로 돌아가지만, 북한의 경제위기 타개의지와 남한의 협상의지, 그리고 적절한 협상기법의 결과 1992년 9월 남북교류협력 부속합의서 타결에 이르나 이동복 안기부장특보가 저지른 훈령조작사건으로 이산가족상봉문제가 결렬되어 버린다.
1992년 9월 핵문제를 협상카드로 쓰고 있던 북한은 미국과의 마찰이 생기자 1993년 3월 핵확산방지조약을 탈퇴하고, 1994년 1차 북핵위기 대두, 한반도엔 전운의 긴장감이 감돌지만 6월 16일 지미 카터 전대통령의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으로 문제해결의 돌파구를 마련한다. 같은 해 10월, 북한과 미국은 ‘제네바 북미기본합의서’를 채택하여 북한은 핵활동 동결, 핵시설의 단계적 폐기와 국제원자력기구 사찰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미국은 북한의 안전보장과 제재 해제, 관계정상화와 경수로형 원자력발전소 건설제공, 중유제공 등을 약속한다.
1995년, 김대중 당시 아태평화재단 이사장의 삼고초려 끝에 아태평화재단 사무총장직을 수락, 김대중의 3단계 통일론의 기초를 마련한다. 이 인연은 1998년 출범한 국민의 정부때에도 이어져 남북교류와 관계개선의 중심역할을 담당한다. 국민의 정부의 대북정책의 기조는 포용정책으로 평화공존과 화해, 협력 통해 북한의 점진적 변화를 도모하는 것이었다. 이후 햇볕정책이라 불리는 이 정책은 사실상의 통일상황을 지향하는 것으로 화해와 협력을 통한 북한 개방, 시장경제로의 개혁 그리고 평화공존을 통해 법적인 통일에 앞선 사실상의 통일 상태를 이루어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세계정세의 변화로 인한 북한의 고립과 그로 인한 경제적 파탄, 이어진 자연재해 등 악재의 상황이 가장 큰 요인이었으며, 유화정책이 아닌, 북한보다 우월한 강자로서 당근과 채찍을 함께 쓰겠다는 정책이기도 했고, 또한 이 기조를 외교적 노력과 아울러 평화와 공존공영의 상황으로 이끌어가려 했던 당시 정부의 노력엔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당시가 IMF 금융위기로 인해 남한 역시 어려웠던 상황임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또한 이 정책은 포괄적 정책이기도 하여서 최고당국자 접촉과 설득을 통한 위로부터의 변화, 인도적 지원과 민간교류를 통한 아래로부터의 변화, 경제협력을 통한 기능주의적 접근, 비무장지대의 평화적 이용과 군사적 신뢰구축, 군비감축을 통한 평화정착 등 다방면에서 ‘사실상의 통일’을 단계적으로 향하고 있다. 더구나 김영삼 정부 당시 남북관계의 악화로 5년을 허비한 것을 생각하면 더욱 빛나는 정책이 아닌가 싶다. 결실 또한 알차서, 1998년 판문점장성급회담 개최, 정주영 회장이 500마리의 소를 이끌고 방북하여 김정일을 만남, 금창리 지하핵시설 의혹에도 굴하지 않았던 금강산관광사업, 미국•일본•중국•러시아와의 외교로 북한을 개방하기 위한 여건을 만들어 낸 일, 2000년의 남북정상회담, 남북장관급회담, 북미공동코뮤니케 등등 화려하게 이어진다.
하지만 2000년 말 부시의 당선, 공화당 다수의석 차지로 화해분위기는 장애를 만나 위기를 겪는다. 부시 행정부는 미국이 루마니아처럼 갑작스럽게 붕괴될 것으로 내다봤고 딕 체니 부통령, 로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 등 네오콘의 압력과 지원에 힘입어 북한에 대해 강경한 적대정책과 봉쇄를 통한 몰락을 원했다. ‘역풍을 만난’ 상황에서도 국민의 정부는 평화를 주장했다.
“우리의 대북정책은 북한이 궁지에 몰려 자살적 도발을 감행하게 되는 사태를 방지하고 북한이 변화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화해와 협력을 통해 북한의 변화를 유도하여 남북경제공동체를 형성하는 한편 군비통제를 실현하고자 합니다.”
부시 행정부는 이전 클린턴 행정부의 평화적 대북외교를 ‘저자세의 극치’라 폄하하며 북한을 ‘믿을 수 없는 나라’라 규정, 대북미사일협상을 하지 않고 요격미사일 개발구축의 명분으로 삼았다. 그런 부시에게 김대중 대통령의 대북정책은 한없이 순진하게 보였을 것이다. 북한 역시 모멘텀을 잃고 북미관계 경색을 부추겼다. 일례로 2001년 6월 6일, 북한과의 대화를 재개하며 제네바 합의 개선을 진행할 의사를 보내지만 북한은 거부하며 때를 놓친다. 또한 남한에서도 DJP공조가 깨지며 대북관계정책에 제동이 걸리던 중 미국에서는 9•11사태로 많은 민간인의 목숨이 사라졌다. 2002년 부시는 연두교서에서 이라크, 이란,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선제공격으로 정권교체 시켜야 할 것임을 역설한다. 북한은 이를 선전포고로 받아들이며 정세는 위축된다.
이 해 2월, 부시가 방한하여 한미 단독정상회담이 개최되고, 이 자리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해 부시를 설득한다. 북한의 대량살상무기와 미사일문제, 무기상으로서의 모습, 인권유린독재자로서의 김정일 위원장의 위험 등 미국의 근거에 맞서 김대중 대통령은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남한의 의지, 대화와 교류를 통해 북한이 개방되고 경제가 회생에 따른 무기수출 감소와 실제 최근 무기수출액의 현격한 감소, 레이건과 닉슨의 소련과 중국에 대한 태도 등을 들어 응수한다. 햇볕정책은 단순한 유화정책이 아니라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한 화해정책이며,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 미군 5만, 한국군 50만, 민간인 100만의 사상자는 물론 산업시설이 거의 다 파괴될, 이겨도 상처만 남을 전쟁임을 설득한다. 이 토론을 통해 부시는 연두교서의 내용을 뒤집고 햇볕정책을 지원할 것을 약속한다.
그리고 4월, 저자는 평양을 방문 북미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하며, 북한에게 미국과의 관계를 우호관계로 돌릴 것을 최대한 설득한다. 2002년 김대중 대통령은 김정일 위원장에게 보낸 친서에서, 남북관계 활성화를 통해 미국 강경책을 완화할 것과 그로 인해 북한이 얻게 될 이득에 대해 다시 한번 설명한다. 김정일 위원장은 여전히 북한 경제회생을 위해 남한의 도움이 필요했고, 경의선과 동해선을 통해 남북을 잇는 문제, 서울 답방을 통한 제2차 남북정상회담 개최문제, 이산가족방문단 교환사업, 남북경협추진, 남북군사당국과 회담 재개 등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다. 2002년 6월엔 서해교전이란 난관이 있었으나 북한은 유감을 표시했고 남북관계가 그로 인해 크게 경색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북일 관계도 우호적으로 진행되고 남북경협문제 역시 진전을 보임에 대해 미국의 네오콘들은 크게 반발하며 북한에 대한 적대적 발언, 즉 북한이 고농축우라늄을 개발하고 있다는 정보를 흘린다. 그리고 남북관계에 있어 기존의 단계적 접근이 아닌, ‘대담한 접근’을 하겠다고 선언하며 병행전략이 아닌 연계전략, 즉 먼저 북한이 변화하면 후에 협상하겠다는 선언을 하며 무리한 강경책을 펼친다. 이는 결국 북한의 핵개발이라는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여기엔 국민의 정부 측의, 부시의 대북정책에 대한 안일함이 사태 진전을 방관하는 측면도 있었다. 2002년 9월 25일에 부시는 김대중 대통령에게 전화하여 북한이 핵문제를 해결하고 전력을 후방으로 이동할 것을 주장했다. 다음은 이에 대한 임동원의 말이다.
“이 전화를 받은 우리는 어리둥절했다. 부시 대통령이 갑자기 입장을 바꾼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라크 침공에 전력을 다해야 할 부시 대통령이 최근 남북관계의 눈부신 진전, 북한의 개방과 경제개혁 추진, 일본 고이즈미 총리의 평양방문과 일북 수교회담 재개,ㅡ 미국에 대해 대북대화를 권고한 ASEM의 ‘한반도 평화선언’ 등에 영향을 받아 드디어 북한과 대화를 시작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낙관적인 해석과 함께 기대감에 부풀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판이었다.”(660쪽)
오히려 미국은 북한의 고농축우라늄 개발을 확증없이 주장하며 전쟁 분위기를 부추겼고 미국은 이를 빌미로 중유공급을 중단, 제네바합의를 파기하며 북한을 더욱 고립시켰다. 이에 맞춰, 세계여론은 미국의 강경책을 환영하지 않았고, 남한에서도 효순•미선 사건을 계기로 반미감정이 고조되었다. 북한은 핵동결을 해제하며 핵카드를 사용한 벼랑끝전술을 펼치고, 그 와중에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가 출범한다. 국민의 정부는 저자를 중심으로 북미관계 개선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부시 행정부의 네오콘 강경파들의 영향력, 핵개발로 강경대응하려는 북한의 태도, 국내의 냉전사고와 보수우경화 추세, 미국에 대한 사대주의로 어려움을 겪는다.
2005년 북한은 핵무기보유를 선언하고 미사일발사 유예조치를 철회하며 미국에선 부시 행정부가 재선한다. 경색의 분위기가 풀리는 것은 9월, 미•중•일•러•남한•북한이 참여한 6자회담에서 한반도 비핵화, 관계정상화, 에너지 지원, 경제협력에 대한 북미합의를 이끌어낸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여전히 금융제재, 인권개선 압력, 경제제재•봉쇄로 북한을 수세로 몰고 있었다. 이에 북한은 2006년 10월, 핵실험을 강행하고, 11월 미국에선 부시 공화당이 참패, 민주당이 의회를 장악하면서 네오콘들이 물러나게 되며, 이를 계기로 부시는 대북정책을 적대에서 포용으로 180도 선회하게 된다. 2007년 부시는 베를린에서 북한측과 직접협상을 시도하고 2월, 미국은 금융제재를 풀고 북한은 핵시설가동중단과 폐쇄를 합의한다.
남북관계에 대한 역사는 여기까지 서술되어 있다. 이후 내용은 참여정부당시 대북송금과 국정원불법감청문제로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다시 사면복권된 사연을 자세히 서술하며 노무현 정부에 대한 섭섭함을 감추지 않는다. 그럼에도 노무현 정부가 정권말기까지 6•15 남북공동선언의 내용을 재확인하며 실천하려 노력한 점에 대해서는 치하하고 있다. 그리고 그 뒤에서 저자는 강연과 조언 등을 통해 정부의 대북사업을 간접적으로 도왔다.
그리고 책의 말미엔 남북관계와 통일에 대한 비전을 정리해놓았다. 20여 년 간 저자가 걸어온 통일에 대한 철학과 어긋나지 않는 것으로, 북핵 문제는 미국과의 관계의 부산물이므로 두 나라 간의 관계 정상화를 위해 남한이 외교적 노력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는 것과, 정치적•군사적•경제적 교류는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닌, 서로 연결된 문제로 포괄적•단계적으로 접근할 것을 주장하며, 법적 통일에 앞선 사실적 통일의 단계가 당면과제임을, 그를 위해 한반도에서 특수하게 유지되고 있는 냉전체제를 종식시킬 것을, 통일은 목적이 아닌 과정이며 미래형이 아닌 현재진행형임을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