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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슬픔, 말하는 사랑 - 우리가 시를 읽으며 나누는 마흔아홉 번의 대화
황인찬 지음 / 안온북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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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찬 시인의 첫 산문집이 안온북스에서 출간되었다. <읽는 슬픔, 말하는 사랑>은 네이버 오디오클립에서 연재되었던 <황인찬의 읽고 쓰는 삶>의 원고 일부를 엮은 것이라고 한다. 시인의 시를 오래 좋아했고 타인의 감상을 읽는 일을 좋아하는 나는… 도무지 이 책을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책은 기대한 것 이상으로 아름다웠다. 아름다움은 무언가 나와 영영 같아질 수 없음을 실감하는 순간에서 발생하는 슬픔과 맞닿아 있다고 책의 말미 시인의 말에 적혀 있는데, 이런 깊이 있는 사유와 문장이 나의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어서 더욱 슬프고 아름답게 읽힌 거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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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읽는 슬픔, 말하는 사랑’이라며 시가 작동하는 방식을 일러주지만, 황인찬 시인의 시론을 슬쩍 엿보게 되다니…. 나에게는 이 책이 읽는 기쁨이었네. 2010년대 이후 출간된 시집을 위주로 읽어 온 나에게 이 책에 수록된 작품들은 시대와 주제 면에서 스펙트럼이 제법 넓게 느껴졌다. 잘 알고 있는 시도, 시인의 이름마저 처음 접한 낯선 시도 있었지만 황인찬 시인의 감상과 함께 곱씹으면 모든 시가 고르게 좋았다. 한 권의 책으로 몰랐던 좋은 시와 멋진 시인을 손쉽게 알 수 있다니. 정말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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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된 작품들 자체도 무척 수려하지만, 시를 소개하는 황인찬 시인의 산문 덕에 책의 울림은 깊어진다. 산문 속의 문장들이 도리어 너무 아름다워서 슬퍼지기도 했다. 어떤 시가 왜 탁월한지, 이 시를 읽고 어렴풋하게 느껴지던 슬픔은 어디에서 발생하는 마음이었는지. 이 책은 그런 것들을 나보다 시에 대해 오래 생각하는 사람이 다정하게 해설해주는 책이다. 평론보다는 친숙하고 주접보다는 고상하다고 하면 좋을까? 아주 어렵고 전문적인 언어로 쓰인 시론은 아니라 쉽게 읽히면서도, 시인의 풍부한 어휘와 통찰이 읽는 내내 나를 충만하게 했다. 표현할 방법을 몰라서 고작 ‘짱…!’ 정도의 감상을 끄집어낼 수밖에 없었던 시간이 전생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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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드는 시를 찾기란 정말 힘들다. 시집은 수천 권이 쌓여 있으니 대체 어떤 것부터 읽어봐야 할지 막막하고, 읽는다 하는 타인의 추천에만 기대기에도 무리가 있다. 시를 읽고 느끼는 정말이지 미묘한 감수성의 영역인데, 그건 아무리 나와 비슷한 사람이라 해도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떤 시를 어떻게 읽어야 할지 없음이 시라는 갈래의 커다란 진입 장벽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읽는 슬픔, 말하는 사랑> 좋은 시의 세계로의 입문이 되리라 믿는다. 검증된 큐레이션, 수록된 작품의 다양한 스펙트럼, 이런 시는 이렇게 읽으면 깊이 느낄 있다고 조곤조곤 알려주는 산문까지. 입문자뿐만 아니라 시를 많이 읽는 독자들에게도 분명히 반갑고 즐거운 경험일 것이다. 꼭지가 그렇게 길지도 않아서 오고 가는 시간에 읽으며 현실을 잠시 환기하기도 좋다. 표지에 적힌 김겨울 작가님의 추천사처럼 시를 어렵게 느꼈던 주변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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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별을 떠나기로 했어
천선란 외 지음 / 허블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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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작가 라인업만 들어도 설렌다. 천선란, 박해울, 박문영, 오정연, 이루카. 다섯 명의 여성 SF 작가가 모여 우주에 관련된 다섯 편의 이야기를 써 냈다. 원래 알고 있던 작가도, 처음 접하는 작가도 있었는데 균형 있는 좋은 조합이었다. 우주라는 큰 주제 안에서도 각자가 관심 있게 다루는 분야가 모두 달라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천선란, <뿌리가 하늘로 자라는 나무>


<천 개의 파랑>으로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부문 대상을 수상한 천선란 작가는 워낙에 유명하니까. 그의 단편 소설도 나는 무척 좋아한다. <어떤 물질의 사랑>에서 여러 편의 좋은 단편을 보여준 작가의 역시나 좋은 단편, <뿌리가 하늘로 자라는 나무>.


천선란 작가는 단편 <뿌리가 하늘로 자라는 나무>에서 팬데믹이 휩쓴 지구에 또 다른 고난을 선사한다. 바로 외계 생명체의 침공이다. 주인공 이인은 그것들과 맞서 싸우는 대원이다. 이 이야기는 이인이 미지의 그것들과 맞서던 나날의 기록이자, 종을 넘어선 교감의 증거다.


전작에서도 느꼈지만 나는 사소한 부분을 놓치지 않는 천선란 작가의 치밀함이 정말 좋다. 큰 주제 의식을 따라가면서도 인물의 심리를 묘사하는 부분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이라든지, 핍진성을 위해 충실하고 탄탄하게 설계한 배경이라든지. 삶의 곳곳에서 생각할 거리를 포착하고 화두를 던지는 작가 덕에 심심할 틈 없이 여러 고민을 하며 읽었던 단편이다. 외계인 같은 소재에 흥미가 없어도 충분히 즐겁게 읽을 수 있다. 소설 속 인물들이 폐허가 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주목하며 읽는 것만으로 흥미진진하다.




박해울, <요람 행성>


박해울 작가도 <기파>를 통해 알고 있던 작가였다. <기파>도 남겨진 이의 사명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요람 행성>도 그런 점에서 결을 같이 한다. 인간의 이주를 목적으로 외계 행성을 지구화하는 과정에서 토착 생태계가 파괴되고 있다면, 그리고 이를 관련 기관에서 은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주인공 리진은 가난한 가족의 행성 이주권을 대가로 지구를 두고 떠나와 요람 행성의 지구화 과정에 투입된 인물이다. 리진은 가족의 안위와 자신의 양심 사이에서 갈등한다. 리진의 동생과 딸의 목숨줄을 쥐고 있는 기관은 개인적인 관계에서도 사회적인 권위로 봐도 절대적인 강자다. 이 딜레마 속에서 리진이라는 개인이 자신을 압도하는 권력에 대항해 어떤 선택을 하는지가 무척 인상 깊게 그려진 이야기였다. 행성과 행성 간의 이주라는 은유로 표현되었지만, 제국주의 수탈 같은 주제와도 충분히 연결지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박문영, <무주지>​


박문영 작가의 작품을 읽어본 적은 없다. SF와 페미니즘이 교차하는 지점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작가로, SF 어워드에서 여러 차례 수상한 바 있다고 한다. 책에 실린 <무주지>라는 단편은 클론과 양육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주인공 연음과 기정은 클론이다. 그들이 살아가는 세계에서 생명공학과 우주과학은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윤리관은 불쾌하지만 현실적인 방향으로 비틀렸다. 작가는 이야기 속에서 굵은 고딕체로 쓰인 어딘지 찝찝한 인공지능의 음성을 계속해서 들려준다. 보이지 않는 권력은 그럴 듯한 핑계를 대며 양육의 책임을 비롯해 진짜 인간이 경험하지 않아도 될 위험을 클론에게 전부 전가한다. 이게 맞는가, 싶은 궤변을 따라가다 보면 불편한 마음으로 이야기가 끝난다. 클론은 아니지만, 우리 사회에도 이러한 방식으로 타인의 위험을 떠안는 계층의 사람들이 분명 존재하지 않는가? 짧지만 힘 있는 단편이었다.




오정연, <남십자자리>


이번 단편집에서 가장 좋았던 단편이다. 오정연 작가의 단편집 <단어가 내려온다>도 정말 즐겁게 읽었는데, 이번 단편도 그의 관심사가 탁월하게 맞물리며 아름다운 결론까지 이끌어냈다. 기억, 단어, 가족, 우주. <남십자자리>는 내게 기억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 단편이었다.


주인공 해리는 고령 인구의 안전과 복지를 위해 맞춤 설계된 양로 행성으로 이주한 노인이다. 그의 손에 길러진 미아는 양로 행성의 휴머노이드가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자아와 '기억'을 제공하는 일을 하고 있다. 해리와 미아 사이의 애정이 이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축이 된다.


기억을 조작하거나, 편집하거나, 여러 기억을 짜깁기하여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 이식하는 등의 아이디어는 오정연 작가의 다른 단편에도 잘 드러난다. 이 단편은 이런 상상력에 더하여, 오래된 기억과의 트레이드오프를 통해 치매 환자의 기억력 저하를 막을 수 있는 기술이 막 개발된 시점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암흑으로 별자리를 만들기도 하는데 말이야. 그 조약돌, 꼭 반짝거리지 않아도, 보이지 않는 까만 돌이어도 괜찮지 않을까. 오정연, 남십자자리 p.204


호주의 원주민들은 빛나는 별이 아닌 유독 어두운 하늘의 어떤 부분들을 이어 기억하며 길을 찾기도 했다고 한다. 사라질 기억을 하늘의 그늘에 비유하며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을 이야기하는 방식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등장하는 모든 인물의 다정함을 오래오래 곱씹게 되었다.




이루카, <2번 출구에서 만나요>


<2번 출구에서 만나요>는 주인공 알리가 외계에서 온 신호를 좇으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이루카 작가는 <독립의 오단계>로 알고 있던 작가인데, 이 단편에도 인공지능 유니가 등장한다. 육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의식 수준의 교감도 작가가 좋아하는 소재인 것 같았다.


미지의 존재로부터 전해온 이야기를 이해할 힘이 사실은 우리 안에 원래부터 있었다는 것. 다만 우리가 이를 너무나 오랫동안 잊은 채 살아왔기 때문에 '다름'의 존재조차 깨닫지 못하고 지내고 있다는 것. 이야기는 이런 소통의, 이해해보려는 시도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우리 시대의 여성 SF 작가들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을 선보인 청사진 같은 단편집이었다. 그들이 어떤 문제 의식을 갖고 있는지, 인간과 사회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지가 잘 드러났다. 다섯 작가들이 앞으로 보여줄 행보가 무척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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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에 그런 정답은 없다 - ‘오늘의 식탁’에서 찾아낸, 음식에 관한 흔한 착각
정재훈 지음 / 동아시아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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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먹기 위해 사는 사람인 내 삶에서 음식은 정말 큰 부분을 차지한다. 미식을 즐기지 않는 친구들도 좋아하는 음식 한두 가지는 꼭 있고, 사실 식생활은 건강과도 직결되기에 잘 먹는 방법은 늘 고민거리다. 결국 누구나 음식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기에 먹거리에 대해 정확히 아는 일은 무척 중요하다. 하지만 그 중요성에 비례하게 세간에는 먹거리를 둘러싼 가짜 정보와 뉴스가 즐비하다.

약사이자 푸드 라이터 정재훈의 책 「음식에 그런 정답은 없다」는 음식판 mythbusters 같았다. 생명과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인 나도 책을 읽으며 내가 갖고 있던 몇몇 오개념을 바로잡을 수 있었는데, 조금의 배경 지식도 없는 독자들에게 이 책이 얼마나 필요하다는 뜻일까...? 특히 건강한 식생활에 관심은 많지만 각종 유튜브 및 인터넷발 찌라시에 지친 사람들에게 이 책을 무척 권하고 싶다. 마치 우리 부모님 같은 분들께.... TV 건강 프로그램만 봐도 특정 과일이 특정 질병 예방에 좋다는 근거 부족한 정보가 넘치는 상황에 대체 어디서부터 부모님의 믿음을 바로잡아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는데, 이 책이면 많은 부분이 해결될 것 같다.

책의 1부 <오늘의 식탁을 생각하다>는 배달 음식, 먹방, 달고나 커피 등 정말 '오늘의 식탁'을 휩쓴 음식과 현상에 대해 고찰한다. 2부 <거짓은 그럴듯해 보여도 거짓이다>는 음식과 건강에 관련된 수많은 미신을 다룬다. 개인적으로는 이 챕터가 가장 재미있었고 유용한 정보로 가득했다. 3부 <음식은 사회를 반영한다>에서는 음식과 연결된 사회문화적 담론을 다루고, 4부 <미식에 그런 정답은 없다>도 약간은 그 연장선상에서 식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담는다. 각 챕터에 담긴 이야기가 골고루 흥미로웠고, 특히 환경적으로도 건강을 생각하는 면에서도 지속 가능한 식생활을 고민하던 나에게 많은 영감을 줬다.

저탄고지(저탄수화물 고지방) 식단을 필두로 한 키토제닉 다이어트라든지, 김치를 먹으면 면역력이 높아져 사스를 비롯한 호흡기 질환을 피해갈 수 있다든지. 알 만한 사람들이 왜 이런 얘기에 심취하냐며 역정을 내고 싶었지만 명확한 근거를 대지 못해 속만 터지던 날들.... 조금 더 일찍 이 책이 나왔으면 좋았을걸.... 위에언급한 예시들 뿐만 아니라 간헐적 단식 다이어트의 효과, 채식주의를 둘러싼 담론, 유기농 농산품의 효과나 기능성 음료의 효능까지. 누구나 한 번쯤은 궁금해 했을 것들에 정재훈 작가는 객관적인 태도로 답한다. 어떤 것들이 부풀려져 있고 어떤 것들이 위험한 발상인지를 조목조목 짚어준다.

책을 읽기 전에도 궁금해 할 사람을 위해 하나만 얘기하자면, 키토제닉 다이어트는 인터넷의 후기만큼 극적인 효과를 내지 못한다.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은가. 탄수화물과 단백질 섭취를 제한해 지방을 에너지원으로 사용하게끔 몸을 독촉하겠다니. 발상은 참신하지만 몸에 좋을 게 하나도 없어보이고 근손실의 지름길 같기만 했는데, 실제로도 근손실이 나타난다고 한다. 각종 미디어에서 각광받았던 것과는 달리 그냥 딱 다른 다이어트 방식만큼만 효과가 있는 것이다. 책에는 실제로 진행된 연구 결과와 좀 더 자세한 과학적인 설명이 덧붙여져 있다. 채식을 하면 정말 몸에 좋은지, 유기농 상품이 정말 더 몸에 좋을지, 간헐적 단식은 과연 효과가 있을지 궁금하지 않은가? 궁금하다면 이 책을 꼭 읽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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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가 내려온다
오정연 지음 / 허블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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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정연 작가의 「단어가 내려온다」를 읽은 뒤 체에 거른 듯 마음에 남은 세 단어다. 일곱 개의 단편이 수록된 첫 SF 소설집에서 오정연 작가는 에 대해 이야기한다. 제 2회 한국과학문학상 가작을 수상한 단편인 <마지막 로그>가 책에 실려있기도 하다.


앞서 언급했듯이 책에 수록된 단편 중 대부분의 이야기가 우주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특히 화성으로의 이주에 성공한 뒤를 상상하는 이야기가 많다. 오정연 작가가 상상하는 근미래의 우주는 정말이지 그럴듯하고 여전히 씁쓸하다. 다른 행성으로 이주한 뒤에도 꾸역꾸역 치르는 차례라든지(<분향>), 사라지지 않는 여성의 경력 단절과 차별 문제(<미지의 우주>), 운명을 향한 기이한 집착(<단어가 내려온다>)과 끝을 모르는 인간중심주의(<행성사파리>). 장소만 달라졌을 뿐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곳의 모순을 정교하게 지적한다. 하지만 그런 착잡함 속에서도 천구를 수놓는 별처럼 누군가의 선의와 서로를 향한 마음은 반짝인다. 그 마음은 읽는 이를 다정하게 어루만진다.


나는 수록작 중 <분향>이 가장 좋았다. 작가는 이야기의 큰 흐름 사이사이에 그 흐름과 관련된 어떤 사건이나 인물의 일화를 문헌이나 인터뷰의 형식으로 끼워 넣어 보여준다. 그렇게 교차되는 짧은 꼭지들은 화성에서마저 꾸역꾸역 진행되는 차례 지내기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담고 있다. 인습에 희생되고 소외되는 여성들의 모습이 그려지며, 본래의 취지는 퇴색되고 허례허식만 남은 현재를 비판하는 방향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하지만 이 인터뷰를 진행한 '나'의 이야기가 끼어들며 소설에는 깊이가 더해진다. '내'가 회상하는 연인과의 추억은 너무나 아름답게 묘사된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일련의 의식이 아닌 누군가를 진심으로 기억하고 떠올리는 일임을 작가는 '나'의 경험을 통해 이야기한다. 주제 의식과 연결되는 마무리도 훌륭했지만, 무엇보다 문장의 아름다움이 남긴 여운이 짙었다. 먼 우주를 건너오는 마음을 자꾸만 먹먹하게 곱씹게 되었다.


작가는 단편 <미지의 우주>와 <행성사파리>에서 가족과 어린아이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특히  그려나간다. 주양육자 여성이 육아 과정에서 경험하는 감정은 일관적이지 않다. 이다. 하지만 이들의 감정은 좀처럼 골고루 다루어지지 못했던 것 같다. 무턱대고 모성을 신성화하거나 육아를 선택한 여성을 비난하는 방향의 이야기가 아닌 정말로 그들이 느끼는 감정에 대한 이야기를 유려한 문장으로 읽을 수 있어 좋았다. 


<당신이 좋아할 만한 영원>에 등장하는 기억 아카이빙 인공지능 '영원'의 이야기도 정말 좋았다. 인간이 아닌 존재의 시선으로 바라본 인간성에 대한 고찰이 흥미로웠다. 결국은 작가가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읽은 것이나 다름없는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시선이었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외로운 존재. 기억하고, 기억되고 싶은 욕망을 가진. 이 단편에서도 문장의 아름다움이 빛났다.


마지막으로 기억 아카이빙에 대해 다룬 <일식>에서 행복하게 읽은 단락을 소개하며 글을 마치려고 한다. 작가는 <마지막 로그>, <당신이 좋아할 만한 영원>, <일식> 등 다양한 단편에서 '기억'을 향한 인간의 집착과 욕망을 다룬다. 정교하게 설계된 기억 아카이빙에 대한 SF적 세계관도 흥미진진하고, 그로 인해 일어나는 사회적 현상도 재미있었다. 하지만 결국은 을 작가는 이야기한다. 

 지루할 틈없이 흘러가는 이야기들이었다. 진짜 이걸 안 읽으면 올해 하반기의 손해가 아닐까... 작가의 다음 작품이 무척이나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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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 장도연·장성규·장항준이 들려주는 가장 사적인 근현대사 실황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1
SBS〈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제작팀 지음 / 동아시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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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를 챙겨 보지 않아서 <꼬꼬무>의 본방송을 챙겨 본 적은 없지만 유튜브 알고리즘이 띄워 준 요약본은 몇 번 본 적이 있다. SBS에서 방영하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는 장도연, 장성규, 장항준 세 명의 MC가 진행하는 시사 교양 프로그램이다. <그것이 알고 싶다>처럼 의미심장하고 미스터리한 사건을 주로 다루는데, 최근의 화젯거리보다는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주목할 만한 사건을 다룬다. MC들은 각각 한 명의 게스트에게 자신이 공부한 사건을 자신의 방식으로 1대 1로 들려준다. 셋 다 입담이 좋아서 흥미진진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최근 동아시아 출판사에서 <꼬꼬무> 시즌 1 중 7편이 책으로 엮여 세상에 나왔다.

프로그램이 차용한 스토리텔링의 방식을 책도 그대로 따라간다. 책의 모든 문장은 독자에게 직접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처럼 구어체로 쓰여 있다. 만약 다른 교양서처럼 딱딱한 문장으로 적혀 있었다면 <꼬꼬무>의 매력이 반감되었을 것 같다. MC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라는 독특한 형식으로 자칫 지루하거나 어렵게 느껴질 수 있는 근현대사로의 진입 장벽을 허물었다는 점이 <꼬꼬무>의 영리한 차별점이니까. 그리고 나는 영상처럼 시간을 들여서 봐야 하는 매체보다 나의 속도대로 자유롭게 오가며 읽을 수 있는 글을 더 선호하는데, 그런 점에서도 책으로 <꼬꼬무>가 출간되었다는 점이 참 반갑다. 셀룰러 데이터 사용이 걱정되는 애청자들에게도 좋은 선택지가 생긴 것 같다.

거의 모든 이야기가 인상 깊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많은 생각을 하며 읽었던 에피소드를 몇 편만 소개하려고 한다. 우선 첫 번째 이야기로 엮인 여성 상대 사기꾼 박인수 사건. 5~60년 전 한국 사회에 자리하고 있던 숨막히는 여성 혐오를 생생히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사실 지금의 한국 사회에도 여전히 그 망령이 드리워져 있지 않은가. 재판부가 피해자에게 정숙함과 피해자다움을 강요하고 가해자에게 이입한 판결을 내리는 모습은 당장 오늘날의 뉴스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과거의 사건과 사회적 분위기에서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낀다면 거기에서 멈추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현재에 이르러 더욱 교묘해진 차별과 잘못된 통념을 날카롭게 알아봐야 할 것이다.

무등산 박흥숙 사건을 읽으면서도 많은 생각을 했다. 한 인간이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기까지 방조하고 책임은 회피하던 사회의 모습을 보며 무척 심란해졌다. 책에 실린 박흥숙을 위한 탄원서가 잊히지 않는다. 최근에도 젠트리피케이션과 재개발을 둘러싼 논란이 많다. 하지만 그런 문제 제기의 대부분은 결국 도시 개발을 강행하고자 하는 더 큰 목소리에 묻혀 묵살되고 만다. 박흥숙 사건처럼 언론과 공권력의 선동 하에 구조적인 문제는 가려지기 일쑤다. 하지만 사람들의 꾸준한 관심과 정의를 향한 열망은 판을 뒤집기도 한다. 박흥숙 사건의 진상을 밝힌 것도 끈질기게 취재를 이어간 한 대학생이었다. 사회의 구조적 병폐를 가리고 개개인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권력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꾸준히 관심을 가져야 한다.

위의 일화처럼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정의에 대해 고찰하게 만드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인간의 내면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게 한 에피소드도 있었다. 서진룸살롱 살인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조직폭력배의 말단 칼잡이이자 산골 아이들의 키다리 아저씨였던 고금숙을 보면 완벽한 선인도 악인도 없다는 문장이 무겁게 다가온다. 두 모습 중 어떤 면이 그의 진짜 모습이었을까를 재고 따지려는 건 의미 없는 시도 같다. 인간의 내면에는 선과 악이 모두 있으니 우리는 항상 경계해야 한다는 서늘하고 안타까운 귀감을 준다.

이 프로그램과 책의 시선에서 가장 좋은 점은, 개인을 조명하면서도 개인 너머를 환기한다는 점이었다. 역사 속의 한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이야기하지만 안타까운 속사정을 그의 악행을 정당화하거나 미화하기 위한 장치로 사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단순히 개인을 악인으로 규정하고 쉽게 사회에서 도려내기보다는 앞서 이야기한 그의 삶을 환기하며 사회의 책임과 우리의 역할을 묻는다. 따분하지 않고 흥미로우면서도 유익한 근현대사 교양을 쌓고 싶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아직 출간되지 않은 <꼬꼬무>의 에피소드도 차근차근 출간되기를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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