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 별을 떠나기로 했어
천선란 외 지음 / 허블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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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작가 라인업만 들어도 설렌다. 천선란, 박해울, 박문영, 오정연, 이루카. 다섯 명의 여성 SF 작가가 모여 우주에 관련된 다섯 편의 이야기를 써 냈다. 원래 알고 있던 작가도, 처음 접하는 작가도 있었는데 균형 있는 좋은 조합이었다. 우주라는 큰 주제 안에서도 각자가 관심 있게 다루는 분야가 모두 달라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천선란, <뿌리가 하늘로 자라는 나무>


<천 개의 파랑>으로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부문 대상을 수상한 천선란 작가는 워낙에 유명하니까. 그의 단편 소설도 나는 무척 좋아한다. <어떤 물질의 사랑>에서 여러 편의 좋은 단편을 보여준 작가의 역시나 좋은 단편, <뿌리가 하늘로 자라는 나무>.


천선란 작가는 단편 <뿌리가 하늘로 자라는 나무>에서 팬데믹이 휩쓴 지구에 또 다른 고난을 선사한다. 바로 외계 생명체의 침공이다. 주인공 이인은 그것들과 맞서 싸우는 대원이다. 이 이야기는 이인이 미지의 그것들과 맞서던 나날의 기록이자, 종을 넘어선 교감의 증거다.


전작에서도 느꼈지만 나는 사소한 부분을 놓치지 않는 천선란 작가의 치밀함이 정말 좋다. 큰 주제 의식을 따라가면서도 인물의 심리를 묘사하는 부분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이라든지, 핍진성을 위해 충실하고 탄탄하게 설계한 배경이라든지. 삶의 곳곳에서 생각할 거리를 포착하고 화두를 던지는 작가 덕에 심심할 틈 없이 여러 고민을 하며 읽었던 단편이다. 외계인 같은 소재에 흥미가 없어도 충분히 즐겁게 읽을 수 있다. 소설 속 인물들이 폐허가 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주목하며 읽는 것만으로 흥미진진하다.




박해울, <요람 행성>


박해울 작가도 <기파>를 통해 알고 있던 작가였다. <기파>도 남겨진 이의 사명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요람 행성>도 그런 점에서 결을 같이 한다. 인간의 이주를 목적으로 외계 행성을 지구화하는 과정에서 토착 생태계가 파괴되고 있다면, 그리고 이를 관련 기관에서 은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주인공 리진은 가난한 가족의 행성 이주권을 대가로 지구를 두고 떠나와 요람 행성의 지구화 과정에 투입된 인물이다. 리진은 가족의 안위와 자신의 양심 사이에서 갈등한다. 리진의 동생과 딸의 목숨줄을 쥐고 있는 기관은 개인적인 관계에서도 사회적인 권위로 봐도 절대적인 강자다. 이 딜레마 속에서 리진이라는 개인이 자신을 압도하는 권력에 대항해 어떤 선택을 하는지가 무척 인상 깊게 그려진 이야기였다. 행성과 행성 간의 이주라는 은유로 표현되었지만, 제국주의 수탈 같은 주제와도 충분히 연결지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박문영, <무주지>​


박문영 작가의 작품을 읽어본 적은 없다. SF와 페미니즘이 교차하는 지점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작가로, SF 어워드에서 여러 차례 수상한 바 있다고 한다. 책에 실린 <무주지>라는 단편은 클론과 양육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주인공 연음과 기정은 클론이다. 그들이 살아가는 세계에서 생명공학과 우주과학은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윤리관은 불쾌하지만 현실적인 방향으로 비틀렸다. 작가는 이야기 속에서 굵은 고딕체로 쓰인 어딘지 찝찝한 인공지능의 음성을 계속해서 들려준다. 보이지 않는 권력은 그럴 듯한 핑계를 대며 양육의 책임을 비롯해 진짜 인간이 경험하지 않아도 될 위험을 클론에게 전부 전가한다. 이게 맞는가, 싶은 궤변을 따라가다 보면 불편한 마음으로 이야기가 끝난다. 클론은 아니지만, 우리 사회에도 이러한 방식으로 타인의 위험을 떠안는 계층의 사람들이 분명 존재하지 않는가? 짧지만 힘 있는 단편이었다.




오정연, <남십자자리>


이번 단편집에서 가장 좋았던 단편이다. 오정연 작가의 단편집 <단어가 내려온다>도 정말 즐겁게 읽었는데, 이번 단편도 그의 관심사가 탁월하게 맞물리며 아름다운 결론까지 이끌어냈다. 기억, 단어, 가족, 우주. <남십자자리>는 내게 기억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 단편이었다.


주인공 해리는 고령 인구의 안전과 복지를 위해 맞춤 설계된 양로 행성으로 이주한 노인이다. 그의 손에 길러진 미아는 양로 행성의 휴머노이드가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자아와 '기억'을 제공하는 일을 하고 있다. 해리와 미아 사이의 애정이 이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축이 된다.


기억을 조작하거나, 편집하거나, 여러 기억을 짜깁기하여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 이식하는 등의 아이디어는 오정연 작가의 다른 단편에도 잘 드러난다. 이 단편은 이런 상상력에 더하여, 오래된 기억과의 트레이드오프를 통해 치매 환자의 기억력 저하를 막을 수 있는 기술이 막 개발된 시점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암흑으로 별자리를 만들기도 하는데 말이야. 그 조약돌, 꼭 반짝거리지 않아도, 보이지 않는 까만 돌이어도 괜찮지 않을까. 오정연, 남십자자리 p.204


호주의 원주민들은 빛나는 별이 아닌 유독 어두운 하늘의 어떤 부분들을 이어 기억하며 길을 찾기도 했다고 한다. 사라질 기억을 하늘의 그늘에 비유하며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을 이야기하는 방식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등장하는 모든 인물의 다정함을 오래오래 곱씹게 되었다.




이루카, <2번 출구에서 만나요>


<2번 출구에서 만나요>는 주인공 알리가 외계에서 온 신호를 좇으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이루카 작가는 <독립의 오단계>로 알고 있던 작가인데, 이 단편에도 인공지능 유니가 등장한다. 육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의식 수준의 교감도 작가가 좋아하는 소재인 것 같았다.


미지의 존재로부터 전해온 이야기를 이해할 힘이 사실은 우리 안에 원래부터 있었다는 것. 다만 우리가 이를 너무나 오랫동안 잊은 채 살아왔기 때문에 '다름'의 존재조차 깨닫지 못하고 지내고 있다는 것. 이야기는 이런 소통의, 이해해보려는 시도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우리 시대의 여성 SF 작가들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을 선보인 청사진 같은 단편집이었다. 그들이 어떤 문제 의식을 갖고 있는지, 인간과 사회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지가 잘 드러났다. 다섯 작가들이 앞으로 보여줄 행보가 무척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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