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가 내려온다
오정연 지음 / 허블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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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정연 작가의 「단어가 내려온다」를 읽은 뒤 체에 거른 듯 마음에 남은 세 단어다. 일곱 개의 단편이 수록된 첫 SF 소설집에서 오정연 작가는 에 대해 이야기한다. 제 2회 한국과학문학상 가작을 수상한 단편인 <마지막 로그>가 책에 실려있기도 하다.


앞서 언급했듯이 책에 수록된 단편 중 대부분의 이야기가 우주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특히 화성으로의 이주에 성공한 뒤를 상상하는 이야기가 많다. 오정연 작가가 상상하는 근미래의 우주는 정말이지 그럴듯하고 여전히 씁쓸하다. 다른 행성으로 이주한 뒤에도 꾸역꾸역 치르는 차례라든지(<분향>), 사라지지 않는 여성의 경력 단절과 차별 문제(<미지의 우주>), 운명을 향한 기이한 집착(<단어가 내려온다>)과 끝을 모르는 인간중심주의(<행성사파리>). 장소만 달라졌을 뿐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곳의 모순을 정교하게 지적한다. 하지만 그런 착잡함 속에서도 천구를 수놓는 별처럼 누군가의 선의와 서로를 향한 마음은 반짝인다. 그 마음은 읽는 이를 다정하게 어루만진다.


나는 수록작 중 <분향>이 가장 좋았다. 작가는 이야기의 큰 흐름 사이사이에 그 흐름과 관련된 어떤 사건이나 인물의 일화를 문헌이나 인터뷰의 형식으로 끼워 넣어 보여준다. 그렇게 교차되는 짧은 꼭지들은 화성에서마저 꾸역꾸역 진행되는 차례 지내기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담고 있다. 인습에 희생되고 소외되는 여성들의 모습이 그려지며, 본래의 취지는 퇴색되고 허례허식만 남은 현재를 비판하는 방향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하지만 이 인터뷰를 진행한 '나'의 이야기가 끼어들며 소설에는 깊이가 더해진다. '내'가 회상하는 연인과의 추억은 너무나 아름답게 묘사된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일련의 의식이 아닌 누군가를 진심으로 기억하고 떠올리는 일임을 작가는 '나'의 경험을 통해 이야기한다. 주제 의식과 연결되는 마무리도 훌륭했지만, 무엇보다 문장의 아름다움이 남긴 여운이 짙었다. 먼 우주를 건너오는 마음을 자꾸만 먹먹하게 곱씹게 되었다.


작가는 단편 <미지의 우주>와 <행성사파리>에서 가족과 어린아이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특히  그려나간다. 주양육자 여성이 육아 과정에서 경험하는 감정은 일관적이지 않다. 이다. 하지만 이들의 감정은 좀처럼 골고루 다루어지지 못했던 것 같다. 무턱대고 모성을 신성화하거나 육아를 선택한 여성을 비난하는 방향의 이야기가 아닌 정말로 그들이 느끼는 감정에 대한 이야기를 유려한 문장으로 읽을 수 있어 좋았다. 


<당신이 좋아할 만한 영원>에 등장하는 기억 아카이빙 인공지능 '영원'의 이야기도 정말 좋았다. 인간이 아닌 존재의 시선으로 바라본 인간성에 대한 고찰이 흥미로웠다. 결국은 작가가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읽은 것이나 다름없는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시선이었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외로운 존재. 기억하고, 기억되고 싶은 욕망을 가진. 이 단편에서도 문장의 아름다움이 빛났다.


마지막으로 기억 아카이빙에 대해 다룬 <일식>에서 행복하게 읽은 단락을 소개하며 글을 마치려고 한다. 작가는 <마지막 로그>, <당신이 좋아할 만한 영원>, <일식> 등 다양한 단편에서 '기억'을 향한 인간의 집착과 욕망을 다룬다. 정교하게 설계된 기억 아카이빙에 대한 SF적 세계관도 흥미진진하고, 그로 인해 일어나는 사회적 현상도 재미있었다. 하지만 결국은 을 작가는 이야기한다. 

 지루할 틈없이 흘러가는 이야기들이었다. 진짜 이걸 안 읽으면 올해 하반기의 손해가 아닐까... 작가의 다음 작품이 무척이나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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