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이름들의 낙원
허주은 지음, 유혜인 옮김 / 창비교육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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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교육에서 가제본을 지원받아 자유롭게 작성하였습니다.

열여섯 소녀의 목숨을 건 호기심을 좇아 사건의 실마리를 이어 직조한 조선의 역사를 엿보다.


 이야기가 가진 힘을 다시 한번 경험한 소설입니다. 용기 있고 충성스러운 설이를 따라 18세기 조선으로 가면 우리의 역사가 낯설게 보입니다. 노비제도, 신분제, 천주교 박해 등 지금의 기준과는 전혀 다른 가치의 세상이죠.


 조선 시대 가장 미천한 신분의 노비인 설이는 포도청에서 다모(茶母)로 일합니다. 포도청 남성 관원들 대신 여성과 관계된 일을 하는 것이죠. 한 양반가의 아가씨가 살해당한 사건에 의문을 갖게 된 주인공 설이는 더 깊이 관여하게 됩니다. 수수께끼 같은 사건을 하나씩 풀어나가다 보면 충성은 배신으로 믿음은 거짓으로 알 수 없는 혼란에 빠지죠.


자유를 갈망하는 주인공 설이가 참 마음에 듭니다. 비록 노비의 신분으로 태어났지만 신의를 지키려는 노력이 독자의 가슴을 뜨겁게 합니다. 오라비의 무덤을 찾겠다는 언니와의 약속을 굳게 지키고, 자신의 상관이자 주인인 한 종사관을 호랑이의 위협으로부터 목숨을 걸고 구해냅니다.

내가 뭐라고 생각하느냐고요?
활을 제대로 들 줄 아는 여자요. 본인이 표적을 맞힐 능력이 없다고 나를 탓하지 마세요.
P. 119



 비천한 여성이라 무시당하고 조롱당하는 설이를 보고 있으면 열이 씩씩 나서 세찬 콧김을 내뿜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아슬아슬하게 사건의 실마리를 풀 때마다 진심으로 응원하게 되고, 한편으론 주제넘는 짓을 했다고 벌을 받거나 공격을 당할 때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따뜻한 마음을 지닌 설이를 보면서 저 스스로에게 타인에게 조금 더 친절하자고 도닥이기도 했어요.

나처럼 낙인이 찍힌 사람이구나. 태어날 때부터 이마에 첩의 자식이라는 보이지 않는 낙인이 찍힌.
더 친절하게 대해야겠다. 나 같은 외톨이가 또 있었네.
P. 114



가여운 아이가 마주한 살인사건 뒤로는 역사적, 종교적, 정치적 대립이 깔려 있습니다. 두 세기를 건너와 지금의 우리가 마주한 문제와 다를 바 없어요. 비록 가제본이라 전체 내용의 반 정도만 읽었지만 뒤에 나올 그림의 윤곽선이 희미하게 보입니다.


 허주은 작가님은 다른 작품으로 2023년 에드거 앨런 포 상을 수상하셨어요. 한국에서 태어나 캐나다에서 자란 작가님은 영어로 작품을 쓰셨고 한국어로 번역되서 나왔습니다. 해외에서 활동하는 한국계 작가님들이 주목받아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어요. 작가님들이 한국을 널리 알릴 수 있는 문화가 지닌 힘을 키워주고 있어 감사할 따름입니다.

 

 빨리 뒷이야기를 읽고 싶어요. 설이의 추리는 과연 맞았을지, 자유는 얻게 될 것인지, 포졸 견이와 최도령의 코는 납작해졌는지, 한 종사관은 범인을 잡을 수 있을 건지, 정치 싸움에서 천주교는 어떻게 살아남을지 궁금증이 가득합니다.


 허주은 작가님께서 한국에 머물고 계시던데 빠른 시일 내에 북토크로 만나 뵈면 좋겠네요. 매력적인 이야기로 즐거움을 선사해 주는 작가님의 다른 작품도 기대됩니다.



#문장수집

이 책은 제가 한국 역사에 바치는 첫 번째 러브레터입니다.
P. 11 l 한국 독자들에게


이 책의 본질에는 조금 더 개인적인 가정사가 담겨 있습니다. 흩어져 사는 가족에 관한 이야기지요.
P. 12 ㅣ 한국 독자들에게


나는 노비로 태어났고, 따라서 '가장 낮은 여덟 부류의 천민'을 뜻하는 팔천에 속했다. 승려, 무당, 광대, 백정, 등도 우리 노비와 같은 신세다. 뭐가 됐든 다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았다. 그럼에도 나는 이 사람들이 내게 절을 하는 상상을 했다.
P. 25


주의하라. 누구도 거스르지 마라. 언제나 복종하라. 눈에 보이지 않아도, 이 대문이 내건 경고문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등껍질 안으로 몸을 숨겼다.
P. 37


하루하루가 해결되지 않은 사건같이 저물었다. 비록 내 삶의 해답은 찾지 못했지만, 혜연이 시신의 이상한 점들을 찾아나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가슴속 응어리가 스르르 풀리는 듯했다. 모든 멍과 상처에는 사연이 있었다. 그런 증거들을 꿰맞추면 분명 삶도 정상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P. 46


"자, 어서 도망치거라. 떠나고 싶으면 떠나야지."
당황스러운 말이었다.
"왜 저를 보내주시는 겁니까, 마님?"
"나는 노비 제도를 믿지 않으니까. 그처럼 낮은 계급은 지배하고자 하는 세력이 만든 것일 뿐."
P. 63 ㅣ 강 씨 부인


정해진 운명은 없단다, 아이야.
P. 65 ㅣ 강 씨 부인


네 가장 큰 소망이 무엇이냐? 내가 이뤄주겠다고 약속하마.
P. 70 ㅣ 한 종사관


네가 까치처럼 호기심이 많다고 한 종사관님께 들었는데 정말이구나.
P. 83 ㅣ 심 부장


최 도령 같은 사람을 잘 알았다. 견도 같은 부류였다. 자기가 대단하다고 여기는 남자들, 수치심을 겪을 일이 거의 없어 명예에 조금이라도 흠집이 나면 그냥 넘기지 못하고 복수의 칼을 꺼내 드는 남자들.
P. 83


하지만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은 오만함으로 인해 실수를 저지르기 마련이야.
P. 83 ㅣ 심 부장


"너는 질문이 참 많구나."
"그냥 호기심이야."
"아니,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야."
P. 89 ㅣ 소이와 설의 대화 중에서


믿음은 우리가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붙잡는 행위란다. 하지만 확신은 진실이 우리를 붙잡고 놓지 않는 것이지.
P. 100 ㅣ 강 씨 부인


이곳 조선에서는 남과 다른 삶을 사는 것은 위험하지.
P. 103 ㅣ 강 씨 부인


무슨 결정을 하든 훗날 돌아보면 다시는 되찾지 못할 무언가를 잃었다는 사실을 깨닫기 마련이야. 그러니 다모 설아, 신중하게 임해야 해. 더없이 신중하게.
P. 105 ㅣ 강 씨 부인


어둠이 다가올 거야. 하지만 두렵다고 선행을 포기하지는 말아, 설아. 누구나 결국에는 죽는다. 하지만 의미 있게 죽기는 어려운 법이지.
P. 107 ㅣ 강 씨 부인


나처럼 낙인이 찍힌 사람이구나. 태어날 때부터 이마에 첩의 자식이라는 보이지 않는 낙인이 찍힌.
더 친절하게 대해야겠다. 나 같은 외톨이가 또 있었네.
P. 114


내가 뭐라고 생각하느냐고요?
활을 제대로 들 줄 아는 여자요. 본인이 표적을 맞힐 능력이 없다고 나를 탓하지 마세요.
P. 119


"다모 설, 네 덕목은 무엇이지?"
"충성입니다. 흔들릴 때도 있지만 늘 그 마음을 되찾으려 노력합니다."
P. 141 ㅣ 한 종사관과 설이의 대화 중에서


"시기심 때문이야."
"누구를 시기해요?"
"견은 너를 시기하고 있어."
"저요?"
"설이 너보다 두 살밖에 안 많잖아. 자기에게 망신을 준 네가 밉고, 자기 활을 빼앗아 종사관님의 목숨을 구한 네게 상을 주신 종사관님도 미운 거지. 하지만 그걸 다 해낸 네가 여자라서 더 견딜 수 없는 거야."
"여자라서."
P. 150 ㅣ 혜연과 설이의 대화 중에서


"이름이 뭐야?"
"설."
"하늘에서 내리는 눈 설?"
"이야기 설."
P. 177 ㅣ 련과 설의 대화 중에서


우리는 돌다리를 지나 한강을 건넜다. 한양을 끼고 동해로 흐르는 강으로, 오라버니가 말하기를 '위대하고 신성하다'는 의미에서 '한'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고대에는 백제, 고구려, 신라 세 왕국이 한강을 점령하려고 쟁탈전을 벌이기도 했다.
P. 179


남쪽의 폐궁에는 죽은 사도세자의 서자들, 그중 하나와 혼인한 송 씨 부인, 그 며느리 신씨 부인이 함께 머물렀다. 으리으리한 북쪽의 창덕궁이야말로 진정한 왕족들의 거처로, 연못과 전각과 푸르른 풀밭과 수많은 별채가 위용을 뽐냈다.
P. 179


태양이든 땅이든 달이든, 너는 유능한 아이다. 내게는 그래. 너는 복잡하게 꼬인 이 사건의 실타래를 이해할 수 있는 머리를 가지고 있지. 그런 사람은 많지 않다, 다모 설. 남자든 여자든.
P. 182 ㅣ 한 종사관


나는 다시 태어나면 한 종사관이 되고 싶었다. (중략)
이 사람이 내 주인이고, 나는 그의 수족이었다.
P. 182


정조대왕께서는 살해당한 아버지 사도세자가 지옥 근처를 배회하실까 봐 괴로워하셨어. 그래서 용주사를 재건해 묘소를 그 곁으로 옮기신 거야. 아버지가 절의 보호를 받아 영원토록 편히 쉬실 수 있게.
P. 186


동생아.(중략) 이 나라 어디를 가도 가족만큼 너를 깊이 아끼는 사람은 찾을 수 없어.(중략) 만 개의 강이 끊임없이 흘러들지만 바다는 절대 넘치지 않아. 그것이 어머니와 누나와 내가 너를 사랑하는 마음의 크기야. 우리 사랑은 바다와 같아. 깊은 바다.
P. 203


어리석은 계집애 주제에 자기가 대단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착각하면 이렇게 되는구나.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네.
P. 208 ㅣ 다모 혜연


하지만 이제 짜릿함은 온데간데없고 가슴의 중압감 때문에 숨을 쉬기도 힘들었다. 뒤엉킨 진실과 거짓을 구분할 수 없었고, 어둠은 점점 더 짙어졌다. 이대로라면 밝은 아침은 오지 않을 성싶었다.
P. 227


"나리처럼 죽음을 목격한 사람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나요?"
"우는 사람도 있고, 애써 다른 일에 몰두하려는 사람도 있고, 하지만 대부분은...... 대부분은 미쳐버리지."
P. 231 ㅣ 설과 심 부장의 대화 중에서


"그리고 글을 쓸 때는 붓을 단호히 움직여야 돼. 돌이킬 수 없거든."
"꼭 인생 같네요. 돌이킬 수 없다는 게."
P. 255 ㅣ 애정과 설의 대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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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어서 도망치거라. 떠나고 싶으면 떠나야지."
당황스러운 말이었다.
"왜 저를 보내주시는 겁니까, 마님?"
"나는 노비 제도를 믿지 않으니까. 그처럼 낮은 계급은 지배하고자 하는 세력이 만든 것일 뿐."
P. 63 ㅣ 강 씨 부인 - P63

정해진 운명은 없단다, 아이야.
P. 65 ㅣ 강 씨 부인
- P65

최 도령 같은 사람을 잘 알았다. 견도 같은 부류였다. 자기가 대단하다고 여기는 남자들, 수치심을 겪을 일이 거의 없어 명예에 조금이라도 흠집이 나면 그냥 넘기지 못하고 복수의 칼을 꺼내 드는 남자들.
P. 83 - P83

하지만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은 오만함으로 인해 실수를 저지르기 마련이야.
P. 83 ㅣ 심 부장
- P83

믿음은 우리가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붙잡는 행위란다. 하지만 확신은 진실이 우리를 붙잡고 놓지 않는 것이지.
P. 100 ㅣ 강 씨 부인 - P100

무슨 결정을 하든 훗날 돌아보면 다시는 되찾지 못할 무언가를 잃었다는 사실을 깨닫기 마련이야. 그러니 다모 설아, 신중하게 임해야 해. 더없이 신중하게.
P. 105 ㅣ 강 씨 부인 - P105

나처럼 낙인이 찍힌 사람이구나. 태어날 때부터 이마에 첩의 자식이라는 보이지 않는 낙인이 찍힌.
더 친절하게 대해야겠다. 나 같은 외톨이가 또 있었네.
P. 114 - P114

"다모 설, 네 덕목은 무엇이지?"
"충성입니다. 흔들릴 때도 있지만 늘 그 마음을 되찾으려 노력합니다."
P. 141 ㅣ 한 종사관과 설이의 대화 중에서 - P141

동생아.(중략) 이 나라 어디를 가도 가족만큼 너를 깊이 아끼는 사람은 찾을 수 없어.(중략) 만 개의 강이 끊임없이 흘러들지만 바다는 절대 넘치지 않아. 그것이 어머니와 누나와 내가 너를 사랑하는 마음의 크기야. 우리 사랑은 바다와 같아. 깊은 바다.
P. 203 - P203

"그리고 글을 쓸 때는 붓을 단호히 움직여야 돼. 돌이킬 수 없거든."
"꼭 인생 같네요. 돌이킬 수 없다는 게."
P. 255 ㅣ 애정과 설의 대화 중에서 - P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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