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의 찻상 - 차의 템포로 자신의 마음과 천천히 걷기
연희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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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 말고 다이제를 사와 얼그레이 밀크티와 함께 먹었다. 차에 담긴 나만의 추억을 떠올리며 한입, 한 모금 넘어가는 차는 평소에 마신 차와 사뭇 맛이 달랐다. 저자의 추억을 상상하며 마셔서 그런가. 오늘 차에 얽힌 나만의 추억이 하나 더 생겼다.



상자에 담겨 있던 찻잔과 접시를 꺼내면서 차 한잔 여유 있게 마실 시간도 없이 살고 있다는 생각에 조금은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곧바로 생각을 털어내고 지금 나의 찻상을 차리를 이 시간에 집중하기로 했다. 매일 마시는 라테를 만드는 것은 무척이나 익숙했으나 차를 타는 일은 그것도 찻상을 차리는 일은 미숙한 손을 주춤거리게 만들었다. 평소에 쓰지 않아 치워뒀던 찻잔을 꺼내고 티백 상자에서 얼그레이를 골라냈다.












『돌봄의 찻상』저자이신 연희님은 플루트 전공자이다. 런던에서 유학을 하고 미국인 배우자를 만나 파리, 뉴욕을 오가는 생활을 10년 넘게 하셨다고 한다. 오랜 시간 이방인으로 살아오면서 차를 우리고 찻상을 차리는 일이 위로가 되어 글을 쓰셨다. 외래어가 난무하는 요즘에 찻상이나 다방 같은 잘 사용하지 않은 단어가 주는 새로움과 아련함이 있다. 차분한 어투에 부드러우면서 힘 있는 글이 굉장히 매력적이다.











담담하고 차분하게 차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 이야기로 시작한다. 200쪽도 안되는 그리 길지 않은 에세이지만 후루룩 빨리 읽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차를 우려내고 음미하는 시간을 갖듯 천천히 그리고 차분히 읽고 싶었다. 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 즉시 해야 된다는 명언(?)이 떠올라 당장 나가 통밀 쿠키를 사 왔다. 연희 저자님이 런던에서 먹은 다이제스티브는 구할 수 없었고, 초콜릿이 한쪽에 발린 다이제를 만지작거리다 처음으로 평범한 다이제를 사 왔다. 밀크티의 맛을 온전히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설탕이나 휘핑크림을 섞은 밀크티 맛에 익숙해서 그런지 데운 우유만 섞은 밀크티는 뭐라고 해야 할까 너무 평범했다. 그러나 통밀 다이제를 한 입 먹고 밀크티를 한 모금 마시기를 두어 번 반복하니 '일상의 맛'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허기를 달래고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 평범하지만 소중한 맛이었다.




그렇게 오후 티타임을 가지면서 그동안 마셨던 몇 안 되는 차의 맛을 떠올리기도 했고, 책에서 생전 처음 보는 차를 알게 되면서 마셔보고 싶기도 했다. 그전에는 그저 팔팔 끓는 뜨거운 물에 우려 호호 식히며 먹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차마다 저마다의 온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니 차 본연의 맛을 잘 살릴 수 있는 방법으로 온전히 마셔보고 싶다는 욕심도 생겼다.




무언가에 관심을 갖고 사랑하게 되면 온전히 즐기는 법을 탐구하고 즐기고 싶어진다. 나에겐 커피와 와인이 그러했고 이제는 『돌봄의 찻상』 덕분에 차에 세계에도 슬쩍 발을 들여놓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홍차 수업>의 문기영 저자님의 홍차 수업에 참가했던 추억이 떠올랐다.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매일 즐기면 된다고 말씀해 주실 때 뒤로 보이던 수많은 차 상자가 아른거렸다. 나도 나중엔 한쪽 벽면엔 아끼는 책을 채우고, 한쪽엔 차와 다기를 채워두면 어떨까 하는 즐거운 상상도 해봤다.













차에 얽힌 이야기를 하나씩 읽다 보면 가슴이 몽글해지지도하고 울컥해지기도 하고 따스해지기도 했다. 여유롭지 않은 유학 생활에 서로를 이어주는 끈이 되기도 하고 헛헛한 주말 허기진 배를 채워주는 위로가 되기도 하고 뜻하지 않게 만난 기쁨이 되기도 했다. 책을 읽는 내내 런던으로 파리로 교토로 뉴욕으로 햄프턴으로 차향 가득한 여행을 떠난 기분이다.









그중에서도 통영 여행에서 우리나라 차 문화를 이야기하는 부분이 가장 흥미로웠다. 커피가 너무나도 익숙한 우리도 예전에는 오랫동안 차를

마셨고 제사상에 차를 올리는 다례도 있었다고 한다. 동양문화권에서 차를 떠올리면 중국과 일본이 자연스레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맑은 물과 아름다운 자연 생태계로 차 맛도 좋을 우리나라인데 우리 또래에겐 주스 병에 담겼던 보리차가 차와 관련된 추억의 전부가 되어버렸다니. 선진국의 문화를 빨리 받아들이는 유연함도 좋지만 고유문화를 간직하는 고집스러움도 한편으론 가져야 할 같다.




일제강점기에도 무역업으로 오히려 호황을 누리는 곳이 통영이었기에 당시 일본 문화가 지리적으로 가까운 통영으로 넘어오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도쿄 유학생이었던 문인과 화가가 쉴 틈 없이 들락거렸던 통영에 살롱 문화가 형성된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으리라. P. 129



한반도의 차 의식은 국가 안녕을 위해 제례와 왕실행사이기도 했는데, 신라의 헌다 의식이 있었다면 고려에는 진다의 식이 있었다. 이러한 고유의 민족정신을 기반으로 한 관습이 조선에서는 제례상에 차를 올리는 다례로 이어졌다. P. 133





유럽 도자기의 역사를 알게 되면서 유럽식 차 문화에 대한 맹목적 동경심이 사라졌다. 찬란했던 문화를 지키지 못하고 열강의 침략에 의해 타국의 문화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안타까웠다. 지금은 우리가 제대로 알고 선택하여 받아들일 수 있는 위치에 있기에 다양한 문화를 포용하고 경험하는 방식의 하나로 차를 경험하면 좋겠다. 그리고 연희 저자님처럼 차를 우리는 그 시간 나와의 교감을 하나씩 쌓아가 위로를 얻고 나를 돌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으로 한 단계 더 나아가면 좋겠다.



찻잔에 차를 붓는 소리와 퍼져나오는 그윽한 차향과의 교감 속에서 나는 내가 살아 있음을 느낀다. P. 184





랜선 찻상 북토크를 해주시면 참 좋을 거 같다. 한국에 오셔서 직접 뵈면 제일 좋겠지만 유럽과 미주를 오가는 생활을 하신다니까 작은 홍차 가게에 독자들이 오순도순 모여 차를 마시면서 연희 저자님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그리고 파리 로톤드 카페 직원에게 책 출간 소식을 전하셨는지 궁금하다. 습작의 추억을 응원한 단골 다방이라니! 영화에서 나올법한 따뜻한 추억의 뒷이야기가 무척이나 궁금하다.







#문장수집


어느 날부터인가 지친 몸을 이끌고 찻상 앞에 앉으면 보잘것없고 미약한 자신에게 연민의 감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자신을 사랑하게 되었더니 세상에 느낀 서러움과 야속함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P. 6



지금 이 순간의 자신을 온전히 보지 못한 채 걷는 길은 자신에게 등을 돌리고 걷는 길이나 마찬가지며 결국 넘어지게 되어 있다. P. 7



순간에 집중하며 살아가면서 어느덧 우리 스스로가 힘겨웠던 시간들을 어떤 의미 있는 것들로 재창조했음을 자연스레 알아차릴 때 느끼는 이 불가사의한 '설렘'이야말로 비록 무섭도록 아름다운 삶의 미학이라고 생각한다. P. 37



어쩌면 그래서 나는 차를 우려내는 삶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차를 우려 마시는 순간만큼은 모든 것을 비워낼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한 힘을 여리게나마 훈련한다 그 힘 자체가 자신이 되어 있음을 느끼는 순간 또한 오기를 몹시 고대하고 있다. P. 64



찻상 앞에 앉은 나를 느끼고 상대방과 명랑한 교감을 나누는 데서 비롯된, 그간 인생에서 경험해본 적 없던 충만감과 행복감은 나를 찻상의 세계에 몰입하게 만들었다. P. 89



나는 찻상미학과 관련해 그 나라와 문화에 정의를 내리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차는 본디 인간이 만들어낸 소유물이 아니고 자연의 것이기 때문이다. P. 95



그러나 차의 본질이 무엇인지 이해한다면 찻상의 정신적 가치는 누구나 누릴 수 있는 특권임을 알게 된다. P. 95



내가 찻상문화에서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정신도 이렇다. 단 몇 분이라도 의식의 흐름을 조용히 관찰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내어 내면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중략) 찰나에 집중하고 주위에 펼쳐진 모든 것과 함께 호흡할 때, 그 주변까지 에워싸는 명랑한 기운이 무작위로 쏟아져나온다. P. 97



예술가와 그의 작품을 탄생시킨 장소의 인연은 단순한 끌림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떤 절대적인 무언가에 의해 이루어 지는 것 같다. P. 124



1900년대 중반까지 이곳에는 예술인들의 메카로 불린 다방 세 곳이 존재했다. P. 125



물질주의가 일찍부터 팽배한 도시임에도 무조건 개발을 하기보다는 전통과 개성을 함께 살려내는 통영의 정신은 스스로의 가치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있기에 똑똑해 보인다. P. 126



바닷바람이 아무리 매서워도 탁 트인 항구와 동피랑 언덕까지 한눈에 보이는 계단이 그 순간 나에게는 최고로 근사한 찻상이 되었다. P. 128



그 공간이 사라졌다고 해서 그 예술 혼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P. 129



중국 대륙과 한반도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자지 제조 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독창적인 문명성을 바탕으로 차를 학문이자 예술로 승화하여 유례없는 찻상문화를 창조해냈다. P. 130




동아시아의 찻상은 유럽인들에게조차 단순히 음료가 놓인 공간이 아닌 문화 현상이었다. P. 135



중국 차는 맛으로 마시고 일본차는 눈으로 마시며 한국차는 마음으로 마신다는 표현이 있다. P. 135




혼자 마실 때는 자신과의 소통이며 둘이 마실 때는 상대방과의 소통이고 그 이상은 흥겨움의 소통이 되는 것이 아닐까. P. 136




순간을 산다는 것은 현재의 시간에 집중함으로써 삶의 주체자가 되는 것이다. P. 144



삶과 죽음이란 극과 극으로 분리된 형태가 아니라 하나임을, 바로 지금 here and now 이 전부일 수 있음을, 생의 매 순간에 집중하는 능력이란 얼마나 중요하고 소중한지를 소렌토에서 보내는 하루 동안 새삼 실감했다. P. 156




내일도 차를 우리기 위해 오늘의 찻잔을 비워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내일이라는 또 다른 시간이 채워질 수 있도록 비워지는 오늘을 겸허히 알아차리는 것 또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P. 189






메디치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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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잔에 차를 붓는 소리와 퍼져나오는 그윽한 차향과의 교감 속에서 나는 내가 살아 있음을 느낀다. P. 184 - P184

어느 날부터인가 지친 몸을 이끌고 찻상 앞에 앉으면 보잘것없고 미약한 자신에게 연민의 감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자신을 사랑하게 되었더니 세상에 느낀 서러움과 야속함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P. 6 - P6

어쩌면 그래서 나는 차를 우려내는 삶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차를 우려 마시는 순간만큼은 모든 것을 비워낼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한 힘을 여리게나마 훈련한다 그 힘 자체가 자신이 되어 있음을 느끼는 순간 또한 오기를 몹시 고대하고 있다. P. 64 - P64

찻상 앞에 앉은 나를 느끼고 상대방과 명랑한 교감을 나누는 데서 비롯된, 그간 인생에서 경험해본 적 없던 충만감과 행복감은 나를 찻상의 세계에 몰입하게 만들었다. P. 89 - P89

나는 찻상미학과 관련해 그 나라와 문화에 정의를 내리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차는 본디 인간이 만들어낸 소유물이 아니고 자연의 것이기 때문이다. P. 95 - P95

내가 찻상문화에서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정신도 이렇다. 단 몇 분이라도 의식의 흐름을 조용히 관찰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내어 내면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중략) 찰나에 집중하고 주위에 펼쳐진 모든 것과 함께 호흡할 때, 그 주변까지 에워싸는 명랑한 기운이 무작위로 쏟아져나온다. P. 97 - P97

중국 차는 맛으로 마시고 일본차는 눈으로 마시며 한국차는 마음으로 마신다는 표현이 있다. P. 135 - P135

혼자 마실 때는 자신과의 소통이며 둘이 마실 때는 상대방과의 소통이고 그 이상은 흥겨움의 소통이 되는 것이 아닐까. P. 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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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도 차를 우리기 위해 오늘의 찻잔을 비워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내일이라는 또 다른 시간이 채워질 수 있도록 비워지는 오늘을 겸허히 알아차리는 것 또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P. 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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