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칠리아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 여행자를 위한 인문학
김상근 지음, 김도근 사진 / 시공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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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시칠리아를 향한 내 애정이 더욱 깊어졌다. 연민이기보다는 뭐랄까, 속속들이 알게 되어 깊이감 있는 애정이 생겼다고나 할까. 겉모습을 보고 사랑에 빠졌는데 내면을 알고 나니 더욱더 사랑스러운 곳. 긴 세월 속 간직한 아픔까지 알고 나니 평면적인 애정의 빛이 공간감 있게 입체적으로 쏟아져 내리게 됐다.






찬바람이 몹시 불던 날 북 콘서트 <삶이 축제가 된다면!>에서 김상근 교수님을 만나 뵈니 무척 설렜다. 시칠리아로 다음 책을 집필하러 가신다길래 마음은 이미 교수님 가방에 들어가 아름다운 삼각형의 섬으로 떠나고 싶었다.




『시칠리아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를 기다린 이유는 시칠리아를 무척이나 사랑한 것도 있지만, 김상근 교수님이 가진 인문학적 통찰력이 매우 기대됐다. 김상근 교수님은 신학을 전공하고 신학을 가르치는 대학교수이면서 이탈리아 역사 문화를 굉장히 사랑한다. 교수님은 신학뿐만 아니라 마키아벨리를 비롯해 카라바조 등 이탈리아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굵직한 인물에 관한 책을 썼다. 또한 여행자를 위한 인문학 시리즈로 로마, 베니스, 피렌체에 대한 책을 집필했고 『시칠리아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가 그 네 번 여정이다.








이 책은 서문부터 서글프다. 2,800년 동안 시칠리아는 자주적인 국가를 운영할 수 없었다. 수많은 외부 침입을 받고 식민 지배를 받았다. 시칠리아를 거쳐간 14개의 민족, 왕족, 국가를 여행자로 칭하며 아픈 역사를 하나 둘 풀어나간다. 책을 다 읽고 나면 가장 먼저 착잡함이 밀려온다. 침략의 아픔, 변방의 슬픔, 살아남으려는 몸부림. 그러면서 자연스레 우리가 가진 '한의 정서'에 맞닿아 있다고 느꼈다. 외부와 내부의 수탈로 한을 품고 살았지만 그래도 자신의 고국을 사랑하는 마음이 어딘가 닮아 있는 것 같다.




『시칠리아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의 묘미는 시칠리아를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그물망 같은 짜임이다. 책의 구성은 시간 순이지만, 각각의 시기마다 시칠리아가 가진 의미가 다르다. 시칠리아를 다스린 참주와 군주의 인식, 일반 농노의 바람, 주변 강대국의 변화와 국제 정세까지 덧붙인 덕분이다. 저자의 해박한 지식을 통해 시칠리아의 역사와 문학을 아울러 입체적인 관점을 엿볼 수 있다. 가장 재밌게 읽었었던 부분은 신약성경에 기록된 시라쿠사와 시칠리아에 있는 카라바조의 작품, 마피아의 생기게 된 배경을 추측해 보는 거였다. 성경에 기록된 시칠리아 지명을 쉽게 알 수 없었던 건 Syracuse(시라쿠스)를 '수라구사'라고 번역해놨기 때문이었다. 카라바조의 작품 중에 시라쿠사 오르티지아에 있는 <산타 루치아의 매장>을 못 보고 온 게 내 수많은 아쉬움 중에 하나이다.








그리스의 흔적을 찾으러, 아름다운 휴양지의 기대하며 찾아간 시칠리아에서 실망스러운 모습을 발견했다는 이야기는 이제 익숙하다. 아름다운 명성에 비해 낙후된 도시, 중앙 도로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페인트칠이 벗겨진 벽에 아무렇게나 써진 그레피티가 가득하고 그늘진 골목에서는 오래된 쿰쿰한 냄새가 난다. 잘 보존된 고도시를 기대한 여행자들은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시칠리아를 가봐야 하는 이유는 시칠리아만의 정체성이 있기 때문이다. 뉴욕을 멜팅 팟 (Melting Pot)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전 세계의 다양한 사람들이 몰려와 부대끼고 어울리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뉴욕이 근현대 200여 년의 멜팅 팟이라면 시칠리아는 2800여 년의 세월이 만들어낸 멜팅 팟이라고 할 수 있다. 긴 세월 동안 거처 간 지배자의 언어와 문화에 전적으로 동화되지 않고 시칠리아만의 정체성으로 만들어냈다. 빨강, 노랑, 파랑의 화려한 채색도 이탈리아 남부 지역에 비해 시칠리아의 채색은 좀 더 선명하고 경쾌하다. 스페인에서 온 인형극도 시칠리아에서는 오페라 데이 푸피(Opera dei Pupi)라고 불리며 유네스코 무형문화재로 등재됐다. 화려하게 채색된 마차(카레토 Caretto)에서 상영되기도 하고 마차에는 시칠리아의 기사단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




기원전 그리스식 유적부터 마피아 소탕작전을 펼치다 안타까운 죽임을 당한 팔코네-보르셀리노의 그레피티까지 모든 게 공존하는 곳이 시칠리아다. 그리스 신화를 품은 에트나 화산 자락에 현대적 와이너리가 자리 잡고 있고,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를 등에 얹은 코끼리가 카타니아 도시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으며 조금만 외곽으로 나가면 반도체 공장이 돌아가고 있기도 하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북유럽과 아프리카, 중동까지 여러 문화 뒤섞여 눈부신 지중해의 햇살을 받아 제각각의 색깔을 뽐내며 반짝거린다.







아마 김상근 교수님도 이런 끈질긴 생명력을 품고 있는 시칠리아의 매력에 이끌려 『시칠리아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를 쓰신 것 같다. 아픈 역사를 품고 있지만 그래서 더욱더 찬란한 빛을 발할 수 있는 시칠리아는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역사를 좋아하는 많은 독자들이 숨은 보석 시칠리아의 진가를 알기를 바라면서 『시칠리아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를 추천해 본다.







#문장수집




한편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피로스가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 원정에 실패한 이유를 특별한 관점에서 분석하고 있다. 피로스의 개인적 역량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단지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의 정치 체제가 '1인 통치'가 아닌 여러 세력이 존재하는 '다원화된 사회'였기 대문이라는 것이다. P. 109




키케로는 시칠리아를 "로마 공화국의 곡물 창고이며, 로마인을 위한 유모와 같은 땅"이라고 묘사했다. 키케로가 사용해서 유명해진 이 표현은 시칠리아에 대한 찬사처럼 들리지만, 로마의 수탈을 정당화하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P.134




지중해 동쪽의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태동했던 유대인의 종교가 제국의 수도 로마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시칠리아는 다시 중간 교두보 역할을 했다. 이 역사적 과정은 <사도행전>의 마지막 28장에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P. 151




중세 시칠리아에서 펼쳐졌던 사라센 문명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시칠리아가 중세 유럽의 관심권 밖으로 밀려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170년 동안 펼쳐진 사라센의 시칠리아 통치(902~1072)는 기존의 그리스, 로마, 비잔틴 문명의 진수를 수용하고 발전시킨 사라센의 특별한 감수성으로 인해, 다른 어떤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이슬람 문명을 탄생시켰다. P. 166




사라센 문명은 시칠리아 문화의 한 지층을 이루면서 고유의 DNA로 정착되었다. 시칠리아에서 사라센 문화는 사라진 게 아니라 잠복했을 뿐이다. (중략) 팔레르모 대성당 입구 기둥에 코란의 구절이 새겨져 있는 것이나, 노르만 왕궁의 왕실 성당 천장에 모스크에서 볼 수 있는 벌집 모양의 장식이 남아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P.173




사라센이 사탕수수를 처음 들여왔기 때문에 시칠리아의 대표 후식인 칸놀리가 만들어졌다. 칸놀리에 고명처럼 올려 먹는 아몬드나 피스타치오를 처음 소개한 것도 사라센이었다. 처음으로 쌀을 들여왔던 사라센 덕분에 시칠리아를 대표하는 요리 아란치니도 만들어졌다. P. 175




시칠리아에서 사라센을 몰아냈던 노르만의 정복 과정은 특유의 인형극으로 발전되어 지금까지 전해진다. 시칠리아에서 상연되는 인형극은 당나귀가 끌고 다니는 화려하게 채색된 마차 위에서 펼쳐진다. P. 195




비록 대관식 당일 착용하지는 않았지만, 로저 2 세가 공식 행사에서 착용했던 왕의 가운은 시칠리아의 문화적 개방성과 이를 통제하는 노르만 정복자의 의도가 동시에 드러나 있다. 동로마 제국에서 수입된 붉은 비단에 아라비아 걸프만에서 채집한 최고급 진주로 장식된 가운의 하단에는 아라비아어로 된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낙타를 제압하는 2마리의 사자 문양은 시칠리아의 다양한 문화를 힘으로 장악한 로저 2세의 위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P. 202




팔레르모 왕궁 성당은 로저 2세 시대의 문화 융합 현상을 압축적으로 설명해 주는 공간이다. 현존하는 중세 이슬람 양식의 건물 중 가장 섬세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는 천장 장식은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무카르나스로 덮여 있어 장관을 이룬다. (중략) 스페인 그라나다의 알람브라 궁전에서 잘 볼 수 있는 무카르나스 장식은 이슬람 문화가 시칠리아까지 깊게 파고들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P. 208




화려한 표범 장식은 진귀한 동물의 상징인데, 이는 왕의 고귀함을 의미한다. P. 209





로저 2세는 생애 마지막 14년 동안 과학과 수학, 지리학에 대한 관심을 확장했고 많은 종이책을 발간해서 연구 결과를 보존했다. 그의 통치기에 제작된 문헌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아랍의 지리학자 이드리시(1100~1165년)가 1154년 팔레르모에서 제작한 <로저의 책>이다. P. 215




항저우의 유리그릇과 광저우의 비단뿐만 아니라 섬으로 그려진 신라의 모습도 묘사해, 한반도를 방문했던 아랍 상인들의 기록이 처음으로 보존되어 있다. P.217




몬레알레 대성당은 시칠리아의 숨겨진 보물이다. 전형적인 노르만 양식의 성당 외곽은 투박한 성채처럼 보이지만, 성당 내부로 들어가면 아름다운 별천지가 펼쳐진다. (중략) 약 6,500제곱미터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의 모자이크 화가 보는 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내게 만든다. P. 223




공포에 질린 카롤리나 왕비는 남편과 함께 나폴리에서 시칠리아로 도주하게 되는데, 여기서 시칠리아의 유명한 포도주 브랜드인 돈나푸가타 Donnafugata 가 탄생하게 된다. 즉 '도망간 여인'은 나폴레옹 군대의 침공을 받고 나폴리에서 시칠리아로 도피해야만 했던 왕비 마리아 카롤리나를 지칭한다. P. 297



결국 교황청의 결정에 따라 시칠리아 왕위는 윌리엄 2세의 사촌인 레체의 탄크레디 Tancredi of Lecce (1138~1194년)에게 넘어갔다. P. 229


아들 만프레디의 평가대로 타고난 지능과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을 가졌던 프리드리히 2세는 비록 혈혈단신 고아로 성장했지만 시칠리아와 남부 이탈리아, 그리고 신성 로마 제국과 예루살렘을 통치했던 중세의 계몽 군주였다. 그는 '법에 의한 통치'라는 개념을 최초로 실천에 옮긴 근대의 선구자였다. (중략) 프리드리히 2세가 평생 교황청과 대립했기 때문에, 이탈리아 문학은 그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남기기도 했다. 단테는 <신곡> '지옥' 편에서 에피쿠로스 철학을 신봉하는 이교도의 지옥 형벌을 받은 자 중에 프리드리히 2세를 등장시키고, '천국' 편 제19곡에서 "그리스도를 믿지만, 위선적인 나쁜 군주"의 사례로 프리드리히 2세를 언급하고 있다. P. 244




18세기 후반의 시칠리아 역사는 특별히 기록할 것이 없을 정도다. 아무런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미 희망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힘 있는 자들만 사적인 권력을 휘둘렀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저 그들에게 굴종하며 숨죽이는 삶을 살아가야 했으니, 시칠리아는 가히 무법천지였다. P. 288




시칠리아 주민들의 미국 이민은 188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중략) 1930년까지 이탈리아를 떠난 이민자 450만 명 중 4분의 1이 시칠리아 출신이었다. P. 325




1943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미국과 영국이 이끄는 연합군이 시칠리아에 상륙했을 때, 놀랍게도 그 선두에는 시칠리아 출신 마피아들이 서 있었다. P. 328




마시모 극장에서 상연된 작품은 소설가로 유명한 조반니 베르가(1840~1921년)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즉 <시골의 기사>란 오페라였다. 이 작품 역시 시칠리아를 배경으로 한다. (중략) <대부> 3편의 마지막 마시모 극장 계단 장면에서 사용된 음악이 바로 이 오페라의 간주곡이다. P. 356




뉴욕에서는 리틀 이탈리아, 시카고에서는 리틀 시칠리아, 뉴올리언스 주에서는 리틀 팔레르모 타운이 형성되었다. 당연히 이탈리아 식당들이 속속 문을 열었고, 피자와 파스타가 세계적인 음식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P. 325




이 책은 '공포에 질린 섬의 심리 상태'를 정확하게 보여준 그 사진의 주인공에게 바친다. 당신의 모습에서 공포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한 인간의 진정한 용기를 보았다고 말해주고 싶다. (중략) 또 눈물은 믿지 않아도 되는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P.364






시공사에서 책을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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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피로스가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 원정에 실패한 이유를 특별한 관점에서 분석하고 있다. 피로스의 개인적 역량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단지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의 정치 체제가 ‘1인 통치‘가 아닌 여러 세력이 존재하는 ‘다원화된 사회‘였기 대문이라는 것이다. P. 109 - P109

키케로는 시칠리아를 "로마 공화국의 곡물 창고이며, 로마인을 위한 유모와 같은 땅"이라고 묘사했다. 키케로가 사용해서 유명해진 이 표현은 시칠리아에 대한 찬사처럼 들리지만, 로마의 수탈을 정당화하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P.134 - P134

지중해 동쪽의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태동했던 유대인의 종교가 제국의 수도 로마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시칠리아는 다시 중간 교두보 역할을 했다. 이 역사적 과정은 <사도행전>의 마지막 28장에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P. 151 - P151

중세 시칠리아에서 펼쳐졌던 사라센 문명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시칠리아가 중세 유럽의 관심권 밖으로 밀려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170년 동안 펼쳐진 사라센의 시칠리아 통치(902~1072)는 기존의 그리스, 로마, 비잔틴 문명의 진수를 수용하고 발전시킨 사라센의 특별한 감수성으로 인해, 다른 어떤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이슬람 문명을 탄생시켰다. P. 166 - P166

사라센 문명은 시칠리아 문화의 한 지층을 이루면서 고유의 DNA로 정착되었다. 시칠리아에서 사라센 문화는 사라진 게 아니라 잠복했을 뿐이다. (중략) 팔레르모 대성당 입구 기둥에 코란의 구절이 새겨져 있는 것이나, 노르만 왕궁의 왕실 성당 천장에 모스크에서 볼 수 있는 벌집 모양의 장식이 남아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P.173

- P173

사라센이 사탕수수를 처음 들여왔기 때문에 시칠리아의 대표 후식인 칸놀리가 만들어졌다. 칸놀리에 고명처럼 올려 먹는 아몬드나 피스타치오를 처음 소개한 것도 사라센이었다. 처음으로 쌀을 들여왔던 사라센 덕분에 시칠리아를 대표하는 요리 아란치니도 만들어졌다. P. 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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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칠리아에서 사라센을 몰아냈던 노르만의 정복 과정은 특유의 인형극으로 발전되어 지금까지 전해진다. 시칠리아에서 상연되는 인형극은 당나귀가 끌고 다니는 화려하게 채색된 마차 위에서 펼쳐진다. P. 195 - P195

비록 대관식 당일 착용하지는 않았지만, 로저 2 세가 공식 행사에서 착용했던 왕의 가운은 시칠리아의 문화적 개방성과 이를 통제하는 노르만 정복자의 의도가 동시에 드러나 있다. 동로마 제국에서 수입된 붉은 비단에 아라비아 걸프만에서 채집한 최고급 진주로 장식된 가운의 하단에는 아라비아어로 된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낙타를 제압하는 2마리의 사자 문양은 시칠리아의 다양한 문화를 힘으로 장악한 로저 2세의 위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P. 202 - P202

팔레르모 왕궁 성당은 로저 2세 시대의 문화 융합 현상을 압축적으로 설명해 주는 공간이다. 현존하는 중세 이슬람 양식의 건물 중 가장 섬세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는 천장 장식은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무카르나스로 덮여 있어 장관을 이룬다. (중략) 스페인 그라나다의 알람브라 궁전에서 잘 볼 수 있는 무카르나스 장식은 이슬람 문화가 시칠리아까지 깊게 파고들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P. 208 - P208

화려한 표범 장식은 진귀한 동물의 상징인데, 이는 왕의 고귀함을 의미한다. P. 209 - P209

로저 2세는 생애 마지막 14년 동안 과학과 수학, 지리학에 대한 관심을 확장했고 많은 종이책을 발간해서 연구 결과를 보존했다. 그의 통치기에 제작된 문헌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아랍의 지리학자 이드리시(1100~1165년)가 1154년 팔레르모에서 제작한 <로저의 책>이다. P. 215 - P215

항저우의 유리그릇과 광저우의 비단뿐만 아니라 섬으로 그려진 신라의 모습도 묘사해, 한반도를 방문했던 아랍 상인들의 기록이 처음으로 보존되어 있다. P.217 - P217

몬레알레 대성당은 시칠리아의 숨겨진 보물이다. 전형적인 노르만 양식의 성당 외곽은 투박한 성채처럼 보이지만, 성당 내부로 들어가면 아름다운 별천지가 펼쳐진다. (중략) 약 6,500제곱미터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의 모자이크 화가 보는 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내게 만든다. P. 223 - P223

공포에 질린 카롤리나 왕비는 남편과 함께 나폴리에서 시칠리아로 도주하게 되는데, 여기서 시칠리아의 유명한 포도주 브랜드인 돈나푸가타 Donnafugata 가 탄생하게 된다. 즉 ‘도망간 여인‘은 나폴레옹 군대의 침공을 받고 나폴리에서 시칠리아로 도피해야만 했던 왕비 마리아 카롤리나를 지칭한다. P. 297 - P297

결국 교황청의 결정에 따라 시칠리아 왕위는 윌리엄 2세의 사촌인 레체의 탄크레디 Tancredi of Lecce (1138~1194년)에게 넘어갔다. P. 229 - P229

아들 만프레디의 평가대로 타고난 지능과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을 가졌던 프리드리히 2세는 비록 혈혈단신 고아로 성장했지만 시칠리아와 남부 이탈리아, 그리고 신성 로마 제국과 예루살렘을 통치했던 중세의 계몽 군주였다. 그는 ‘법에 의한 통치‘라는 개념을 최초로 실천에 옮긴 근대의 선구자였다. (중략) 프리드리히 2세가 평생 교황청과 대립했기 때문에, 이탈리아 문학은 그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남기기도 했다. 단테는 <신곡> ‘지옥‘ 편에서 에피쿠로스 철학을 신봉하는 이교도의 지옥 형벌을 받은 자 중에 프리드리히 2세를 등장시키고, ‘천국‘ 편 제19곡에서 "그리스도를 믿지만, 위선적인 나쁜 군주"의 사례로 프리드리히 2세를 언급하고 있다. P. 244 - P244

18세기 후반의 시칠리아 역사는 특별히 기록할 것이 없을 정도다. 아무런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미 희망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힘 있는 자들만 사적인 권력을 휘둘렀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저 그들에게 굴종하며 숨죽이는 삶을 살아가야 했으니, 시칠리아는 가히 무법천지였다. P. 288 - P288

시칠리아 주민들의 미국 이민은 188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중략) 1930년까지 이탈리아를 떠난 이민자 450만 명 중 4분의 1이 시칠리아 출신이었다. P. 325 - P325

1943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미국과 영국이 이끄는 연합군이 시칠리아에 상륙했을 때, 놀랍게도 그 선두에는 시칠리아 출신 마피아들이 서 있었다. P. 328 - P328

마시모 극장에서 상연된 작품은 소설가로 유명한 조반니 베르가(1840~1921년)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즉 <시골의 기사>란 오페라였다. 이 작품 역시 시칠리아를 배경으로 한다. (중략) <대부> 3편의 마지막 마시모 극장 계단 장면에서 사용된 음악이 바로 이 오페라의 간주곡이다. P. 356 - P356

뉴욕에서는 리틀 이탈리아, 시카고에서는 리틀 시칠리아, 뉴올리언스 주에서는 리틀 팔레르모 타운이 형성되었다. 당연히 이탈리아 식당들이 속속 문을 열었고, 피자와 파스타가 세계적인 음식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P. 325

- P325

이 책은 ‘공포에 질린 섬의 심리 상태‘를 정확하게 보여준 그 사진의 주인공에게 바친다. 당신의 모습에서 공포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한 인간의 진정한 용기를 보았다고 말해주고 싶다. (중략) 또 눈물은 믿지 않아도 되는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P.364 - P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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