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쓴다는 것 - 일상과 우주와 더불어
다니카와 슌타로 지음, 조영렬 옮김 / 교유서가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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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오고 있음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5월이다.

이 계절의 문턱에서 60년간 시를 쓴 시인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니, 연둣빛 새싹 같은 어린아이가 되어 어르신 발치에 앉아 길고 긴 세월이 쌓아온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었다.




책 중간중간 삽입된 흑백의 사진 저편으로 맑은 오월의 하늘이 비치는 것 같았다. 시 한 구절을 읽고 창문으로 옅은 하늘을 봤다.






'아, 이것이 시구나.


    아, 이것이 시가 가진 정취.


         아, 이것이 내가 이 순간 누릴 수 있는 것.'










『시를 쓴다는 것』은 일본의 국민 시인 다니카와 슌타로의 에세이다.

일본 방송에서 〈100년 인터뷰, 시인 다니카와 슌타로〉라는 제목으로 2010년에 방영된 프로그램을 바탕으로 쓰인 책이다. 다니카와 슌타로의 시와 함께 시를 쓰는 것에 관한 인터뷰를 담았다.







책을 읽다 보면 시인이 가진 특유의 유쾌함과 연륜이 주는 즐거움이 있다.

78세(인터뷰 당시 나이)라는 연세만이 가질 수 있는 삶의 여유가 느껴진다. 본질을 꿰뚫는 통찰력과 사유가 엿보이는 대답을 읽고 있자니 내 팍팍한 삶에 자그마한 여유가 생기는 기분이다. 긴장이 풀리고 웃음이 나왔다.











시를 쓰는 것에 관해 시작한 이야기는 어느새 시인의 인생관에 닿는다. 언어라는 도구를 통해 즐거움과 웃음을 찾는 다니카와 슌타로의 삶의 자세를 마주할 수 있어 참 좋았다. <바카(바보)>라는 시는 얼핏 장난처럼 들리지만 언어가 주는 즐거움을 극대화한다. 듣자마자 웃을 수 있는 시라니 얼마나 좋은가. 나도 어린아이처럼 웃고 있었다.





뭔가 세상이 유쾌하다면 그것으로 좋아, 아름다우면 그것으로 좋다. 그런 유형이거든요. P. 36





제 안에 있는 언어가 매우 빈약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겁니다.(중략) 참으로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풍부하고 거대한 세계지요. 거기에서 말을 길어올리면 되지 않을까,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한 겁니다. (중략) 그것을 잘 조합해서 세공품을 만들 듯이 만든 겁니다. P.42







시를 짓는 사람을 나는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자문해 봤다.

시인은 글을 다듬고 고심하는 과정에서 모든 삶의 태도를 진지하게 대할 거라고 은연중에 고정관념을 갖고 있었나 보다. 언어를 아름답게 정제하고 언어가 가진 함축적이고 감성적인 면을 다루는 마법사이니 언어를 통해 세상을 보는 법도 다양할 것인데.









시인은 생계를 유지하는 도구로의 ’시‘는 굉장히 차갑고 이성적으로 대하고, 언어를 표현하는 도구로의 ‘시’는 가볍고 즐거운 것으로 대한다. 상호 간에 약속한 마감일이 있는 '일'이기 때문에 한 달 전에 글을 쓰고 계속해서 퇴고를 한다니, 이 얼마나 성실하고 안정적인 업무방식인가! 최근에 '미리 하는 안정감'을 맛본 나로서는 영감에 의존하지 않고 노력을 덧입히는 방식으로 일하는 시인의 모습에 감탄했다.




심지어 시를 만드는 '창작'이란 영역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고객의 요청에 따라 맞춤형으로 시를 뽑아내는 놀라운 모습을 보여준다. 60년 전부터 말이다.






언어라는 게 모순을 싫어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현실은 모순되어 있지 않으면 현실이 아닌 거지요. P. 118




언어에 의지하는 것은, 어떻게 하더라도 인간의 현실을 놓칠 가능성이 있으니까, 늘 신경을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언어에는 실체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늘 의식하지 않으면, 왠지 언어가 겉돌아버린다. P. 119




제 생각에 우주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무의미한 것이었고, 거기에 인간이 언어를 통해 의미의 옷을 입혔다. 이런 식으로 말해도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P.112

















시대가 얼마나 살벌해지든, 어떠한 시대가 되든, 인간의 혼이 시정을 찾는 경향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P. 151





시인의 유쾌함과 유연함이 좋다. 긍정적인 삶의 자세에서 나오는 밝은 에너지가 느껴진다.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다. 특히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세상 사는 법을 터득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일수록 직접 겪은 인생의 교훈에 굉장한 믿음을 가지기 마련이다. 시인은 시와 이를 이루는 본질적인 언어가 지닌 시대적 변화를 인정하고 지지한다. 매체가 다양하게 변화함에 따라서 언어의 형태가 달라지고 소비자들의 요구가 달라지기 마련이다. 자신이 경험해온 것에만 한정 짓지 않고 더 넓게 보고 변화를 수용할 줄 아는 자세가 시인을 60년이 넘게 독자와 소통할 수 있게 해준 것 같다.




시인은 시를 낚는 앱도 만들고, 우편으로 시를 배달하는 등 새로운 도전을 계속해서 하고 있다. 시인에게 나이는 전혀 문제 될 게 없다. 그저 변화를 거부하지 않고 흐름에 몸을 맡기고 흐름을 이용해 더 멀리 나갈 수 있게 고심하는 사람인 것 같다.




이런 시인의 이야기를 들으니 내가 가진 생각의 틀을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시라는 것은 내 안의 것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다. 종이에 정형화된 ‘시’를 쓰는 시대가 있었을 뿐이다. 현재의 우리는 온라인에 글을 써서 나를 표현하고, 유행하는 밈을 빌려 공감대를 만들고, 앱과 우편으로 다니카와 슌타로의 시를 받아보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라고.





시작품이 아니라 시정(poesie)이라 생각하면, 오히려 그런 것에 대한 욕구가 강해진 거 아닌가, 저에게는 그렇게 보이는 것이지요. (중략) 그런 게 제 눈에는 시정에 대한 일종의 갈증으로 보이는 겁니다. (중략) 시정이라는 면에서 생각하면 온갖 것에 시가 침투하고 있는 시대라고 생각할 수 있는 거지요. P. 150











이 책을 읽으면서 다니카와 슌타로는 파도를 타는 서퍼 같다고 생각했다. 변화의 흐름에 자신을 맡기고 그 흐름 속에 있어도 자신은 안전하다는 믿음이 있는 분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나이를 먹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고 받아들이는 여유. 『시를 쓴다는 것』의 마지막 쪽에 실린 <100년 뒤의 세상에 보내는 메시지>에도 100년 후 이 시를 읽을 독자의 행복을 묻는 마음이 따스하다. 네, 저는 당신의 시를 만나서 그리고 이 책을 읽어서 행복합니다.










교유서가에서 책을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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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세상이 유쾌하다면 그것으로 좋아, 아름다우면 그것으로 좋다. 그런 유형이거든요. P. 36 - P36

제 안에 있는 언어가 매우 빈약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겁니다.(중략) 참으로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풍부하고 거대한 세계지요. 거기에서 말을 길어올리면 되지 않을까,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한 겁니다. (중략) 그것을 잘 조합해서 세공품을 만들 듯이 만든 겁니다. P.42 - P42

언어라는 게 모순을 싫어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현실은 모순되어 있지 않으면 현실이 아닌 거지요. P. 118 - P118

언어에 의지하는 것은, 어떻게 하더라도 인간의 현실을 놓칠 가능성이 있으니까, 늘 신경을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언어에는 실체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늘 의식하지 않으면, 왠지 언어가 겉돌아버린다. P. 119 - P119

제 생각에 우주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무의미한 것이었고, 거기에 인간이 언어를 통해 의미의 옷을 입혔다. 이런 식으로 말해도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P.112 - P112

시대가 얼마나 살벌해지든, 어떠한 시대가 되든, 인간의 혼이 시정을 찾는 경향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P. 151 - P151

시작품이 아니라 시정(poesie)이라 생각하면, 오히려 그런 것에 대한 욕구가 강해진 거 아닌가, 저에게는 그렇게 보이는 것이지요. (중략) 그런 게 제 눈에는 시정에 대한 일종의 갈증으로 보이는 겁니다. (중략) 시정이라는 면에서 생각하면 온갖 것에 시가 침투하고 있는 시대라고 생각할 수 있는 거지요. P. 150 -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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