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철북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3
귄터 그라스 지음, 장희창 옮김 / 민음사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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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마체라트는 정신병원에 갇힌 환자다. 그는 간호사 브루노에게 순결한 종이 500장을 달라고 하고는 그 종이에다 무언가를 막힘없이 써나가기 시작한다. 그 내용은 진술서 같기도 한데, 마침 그에게 어떤 혐의가 적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스카는 자신의 혐의를 서술하지 않고 50년 전, 그러니까 1899년의 어느 감자밭의 풍경으로 거슬러 올라가 자신의 할머니 안나 브론스키의 치마에 대해서부터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그런 수고를 마다않는 것은 그가 쓰는 글이 자신의 혐의를 넘어 세상의, 세계의, 유럽의, 독일의 혐의에 대한 글이기 때문이다.

소설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소설이 워낙 방대한 만큼 여러 방식으로 소개할 수 있을 것 같다. 1부는 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2차 세계대전 발발까지를, 2부는 2차 세계대전을, 3부는 종전 후를 다루고 있다. 또 1부는 단치히 자유시의 이야기를, 2부는 독일에 점령되었다가 러시아군에게 장악된 단치히 시(그단스크 시)의 이야기를, 3부는 독일의 뒤셀도르프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1부는 오스카가 양철북을 고집하는 이야기, 2부는 양철북을 단념하는 이야기, 3부는 양철북을 되찾고 예술가로 거듭나는 이아기라고도 할 수 있고, 또 다르게는 1부는 오스카가 스스로 추락하여 난쟁이가 되는 이야기, 2부는 아들 혹은 의붓동생인 쿠르트에 의해 또 한번 추락하여 조금 성장한 꼽추가 되는 이야기, 3부는 등에 자란 혹을 행운의 상징물로 여기게 되는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오스카 이야기를 할 차례다.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소설의 주인공 오스카는 난쟁이다. 오스카는 태어나자마자 자신이 이미 다 자랐다는 걸 깨닫고는 세 살이 되면 양철북을 선물하겠다는 어머니의 말 말고는 아무것도 세상에 바라지 않게 된다. 그는 자라면 가게를 물려주겠다는 아버지(가 아닐 수도 있는데) 알프레트 마체라트의 말을 거역하고, 세 살 생일 날, 더 이상 성장하지 않기 위해 자신을 지하실에 추락시켜 버린다. 그 후로 소리를 질러 유리를 깨부수는 능력을 갖게 된 오스카는, 자신의 능력과 선물 받은 양철북 연주가 조화를 이루게 되고서부터는 여기저기서 난동을, 깽판을 부리기 시작한다.

이 범상치 않은 인물은 독일 나치의 연단에 몰래 숨어들어 양철북을 연주해서 군가를 따라부르는 군중을 왈츠에 맞춰 노래 부르고 춤추는 사람들로 바꿔버리고, 가톨릭 교회에 가서는 불륜에 관해 고해성사를 하는 어머니 아그네스를 두고 제단에 올라가 소년 예수 조각에게 자신의 양철북과 북채를 쥐어주고는 예수가 연주를 하지 못하자 실망하기도 한다. 그밖에도 온갖 외설적인 행동들을 주위 사람들에게 감행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말을 삼가겠다.

이 이상의 열거도 가능하지만 그러면 이 이야기는 끝이 없을 것이다. 주목해야 할 건 이 소설이 다분히 신성모독적이며 동시에 악과 죄의 냄새를 풍긴다는 사실이다. 그건 오스카의 행동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나방과 전구로 계시를 받은 오스카, 예수를 모독하는 오스카, 악마와 대화하는 오스카, 괴테와 라스푸틴을 교본으로 삼은 오스카, 밤중에 쇼윈도를 깨뜨려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 안의 물건을 훔쳐가는지 지켜보는 오스카, 먼지떨이단이라는 불량 소년 무리들을 데리고 교회의 물품을 훔치며 예수 행세를 하는 오스카, 두 아버지의 죽음을 초래한 오스카, 불리할 땐 어린아이를 연기하는 오스카, 망상에 빠져 간호사를 강간하려 했던 오스카, 양철북 연주로 사람들을 세 살 아이처럼 쥐락펴락하는 오스카. 처음엔 선악에 대한 분간 없이 행동하던 오스카는 성장하며 분간할 수 있게 됐음에도 불구하고 무의식 중에 그런 행동을 벌인다(그래서 후회도 한다만…).

오스카는 너무나 문제적인 악동이다. 그러나 그가 일관적으로 보여주는 기이한 행동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듯 보이는 주변사람들에 대해 의문을 품게 만들기도 한다. 이야기에서 오스카를 잠시 빼면 확연하게 나타난다. 스스럼 없이 불륜을 저지르는 어른들, 전쟁에 무관심한 어른들, 스스럼 없이 나치를 지지하는 어른들, 아이들 앞에서 강간을 하는 군인들, 명령 때문에 수녀들을 총으로 쏴 죽이는 군인들, 죄책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전쟁 후의 동부 피난민들, 죄책감을 과거에 묻어두려는 사람들, 스스로 울 수 없어 양파를 썰어가며 우는 사람들.

이러한 풍자와 역설, 비판은 오스카가 줄곧 양철북을 두드리고 소리 질러 유리를 깨뜨리는 행동에도 담겨 있는 듯하다. 사람들은 현실과 자신 사이에 유리벽을 세워 자신을 유리시키고 있다는 걸 쉽게 잊는다. 그 벽이 유리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현실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스카는 그것들을 깨뜨리는 것이 아닐까. 유리벽을 넘고 깨뜨리는 소리의 울림으로 사람들의 내면을 건드리고 그 이상한 현실의 리듬을 느끼게 만드는 게 아닐까.

소설의 막바지 장면, 오스카가 친구에게 자신을 거짓으로 고발하도록 부탁하고선 스스로 도망자 신세가 되었을 때 그가 참지 못하고 마구 웃어대는 모습은 그 모든 악과 죄를 쉬쉬하고 묵인하고 유리하는 사람들을 비웃고 풍자하는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이 장면은 소설의 시작인 할아버지 요제프 콜야이체크의 도망과 수미상관을 이룬다).

소년 예수가 석고가 된 채로 힘을 잃은 시대에 그 지위를 이어 받아 그 스스로가 악의 예수(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가 되어 예술가(그는 연주자, 모델, 조각가 등으로 활동한다)로 군림하는 오스카의 모습은 그래서 전후 독일사회에 대한 진한 아이러니를 남긴다.

굉장히 지루하고 어려운 소설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긴장하고 펼쳐들었지만 이렇게 재밌는 소설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술술 읽었다(연단 파트부터 확실히 재미를 느꼈다). 소설이 친절한 면도 있었다. 한 파트당 20~30 페이지 안팎으로 분량이 일정하며, 파트마다 이야기가 완결성을 갖추고 있다. 게다가 오스카가 우리 독자를 자주 언급하며 묘사의 완급을 조절하기도 하고 몇몇 사건은 요약해서 보여주기 때문에 독자로서 배려 받는 느낌도 든다.

물론 세계대전이 배경인 만큼 읽어나가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세계사 지식은 필요한 것 같다. 나같은 세계사 초보자에게는 맥락을 알기 어려운 사건들이 암시가 많이 되어 있어서 대략 어떤 느낌이구나 하면서 넘어갔다. 그런 지식적인 측면에서는 확실히 어렵다. 그래서 각주를 상세하게 달아줄 법도 한데(특히 지명에 관해) 그렇지 않다는 게 의외였고 아쉬웠다. 어떤 단어의 경우, 앞에서 언급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뒤에서 다시 언급될 때 각주가 등장해서 당황하기도 했다.

문장이 아니라 문단을 보아야 비로소 읽을 수 있는 소설 같기도 했다. 문단을 보면 무슨 말을 하려는구나, 짐작이 가기 시작하는데, 그 순간부터 이야기가 즐거워진다.

그래도 소설적 재미가 없는 건 전혀 아니다. 강렬한 이미지(말 대가리와 뱀장어, 비등산, 얀과 마체라트, 그레프의 죽음)가 연달아 나타나고 기상천외한 사건들(탑에 올라가서 소리를 질러 극장의 유리창을 깨트리는 장면, 초등학교 입학식 날 담임 선생과 싸우고 자퇴하는 오스카, 니오베 목각에 관해 대대로 내려오는 저주), 마술적 리얼리즘이 연상되는 상황들(할아버지 요제프 콜야이체크가 항구에서 도주하는 모습, 달 아래서 폴란드 기병대가 나타나는 모습), 여러 상황을 신들린 듯이 섞어버리는 문장들(믿음 소망 사랑 파트, 다이빙이 언급되는 부분, 30세 파트)이 문학력을 한껏 끌어올린다. 이야기적 구성도 뛰어나서 떡밥 회수도 잘해낸다. 앞에서 등장했다 사라진 인물이 다시 나타났을 때 너무 반가웠다.

무엇보다도 인물이 족히 60명은 넘게 등장하는데 저마다 워낙 캐릭터성이 강해서 누가 누군지 금방 파악된다(이건 정말 엄청난 장점이다). 몇몇 장면은 인물한테 애착을 가지고 읽기도 했던 것 같다. 특히 폴란드 우체국 전투 장면과 그 후의 스카트 카드 놀이 장면은 긴박감과 슬픔이 가득하다. 오스카의 친구 헤어베르트, 하얀 장갑의 슈거 레오, 오스카처럼 난쟁이이나 나이가 많고 전선극장의 지도자이기도 한 스승 베브라, 죽은 가족들을 살아있다고 믿고 말을 거는 파인골트 씨, 그리고 이 이야기의 시작인 안나 브론스키가 인상적이다.

읽으면서 여러 소설이 떠올랐던 것 같다. 특히 자우메 카브레의 <나는 고백한다>가 떠올랐는데 지독하게 악의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고 주인공이 그 악에 물들어 가기 때문이다. 이런 문학이 굳건히 자리해 있다는 게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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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에 빚을 져서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4
예소연 지음 / 현대문학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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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에 빚을 져서 / 예소연

초연결 시대, 그로 인한 몰이해의 시대다. 사람들은 서로한테서 기꺼이 멀어지면서 동시에 지독하게 가까워지고 있다.

언젠가부터는 비극, 참사를 목격할 때에도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게 되었는데, 초연결의 느낌과는 많이 다르다. 초연결은 굳이 보지 않아도 되는 해롭고 무가치한 것들을 눈앞에 징그러울만치 들이민다면, 비극으로 인해 촉발되는 연결의 감각은 우리를 잇고 있던, 아주 얇아 보이지 않는 실의 존재를 깨닫게 해준달까.

그래서 비극을 목격한 어떤 순간에, 아주 잠시였지만, 죽음만이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게 아닐까 의문을 품은 적도 있다. 비극으로 연결된 실이 모두를 태우지 않을까-무기력에 압도된 나머지-상상하기도 했다.

죽음이 살아있다면, 살아있는, 남겨진, 혹은 살아 남은 경우는 뭐라 해야 할까. 죽음 같은 무력감을 느끼는 경우를 뭐라 이름 붙일 수 있을까. 비극은 죽음과 삶의 영역을 역치시키고 그 근간을 뒤흔들며 우리를 고통스럽게 할 뿐이다. 고통엔, 고통 말고 다른 이름이 없다.

소설에 나타나는 여러 비극들-캄보디아의 압사 사고,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 동이 엄마의 투병과 죽음, 혜란의 불행 등-은 그 숨어있던 실을, 투명에 가까웠던 실의 실체를 드러낸다. 나름대로 그 일들에 괴로워하고 슬퍼했지만 동이는 외면했다. 외면하며, 외면하지 않으려던 친구 석이마저도 외면했다. 하지만 석이의 실종과 석이를 찾으러 간 캄보디아에서 만난 삐썻의 이야기를 통해, 그 실과 이어진 석이를 새롭게 알아가기 시작한다. 그 실을 잡아당기며 석이를 찾아가기 시작한다.

분량이 적기도 하고 중반부터 결말이 예상이 가서 조금 아쉬웠지만, 그 ’실‘에 대한 이야기로서 읽을 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 실은 나와 너를 동시에, 그 존재를 동시에 감각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나를 알아가고, 타인을 발견하고, 또 타인이 하나가 아니란 사실을 깨닫고, 그렇게 그 실의 무한한 연결을 타고 가다보면 영원한 무언가(죽음도 초월하는 무언가)에 닿을 수도 있다는 걸 소설이 말하고 있다. 아득한 만큼 더 많이 더 길게 들여다볼 수 있는 심연을. 그 심연을, 슬픔을 믿어보기로 한다. 그 실에 믿음이라고 이름 붙여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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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에 관한 역설 문지 스펙트럼
드니 디드로 지음, 주미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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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프랑스의 계몽주의자이자 배우, 소설가, 극작가였던 드니 디드로의 후기 연기예술론.

제목대로 배우에 대한 이야기인데, ‘역설’이란 단어가 붙은 것은 위대한 배우의 자질이 ‘메소드 연기’처럼 감성에 몰두해서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감성을 뺀 철저한 관찰자로서 연기해야 할 이상적인 모델을 습득하고 한치의 오차없이 모방해내는 연기를 하는 거에 있기 때문이다. 관객을 느끼게 하는 사람들이 정작 느끼고 있지 않다는 역설이 바로 배우에 관한 역설인 것이다.

그 누구도 연기해야 할 역할의 내면은 절대 알 수가 없으며(타인의 내면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 역할의 외면만을 가늠할 수 있기 때문에 위대한 배우에게는 관찰과 통찰, 기억력이 중요하며, (만일 감성에 몰두하면 연기가 오히려 우스꽝스러워지고 말기 때문에) 감성과 거리를 둬야 한다고 디드로는 말하고 있다.

책은 1과 2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는데 1이 주로 이야기 한다. ‘역설의 인간’이라고도 불리는 1은 아무래도 작가 디드로로 보인다. 본인이 감성을 극히 꺼려하나 섬세한 감성을 가진 사람, 역설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대화를 보다보면 알 수 있지만 그는 사람들의 감성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니다. 무대에 올라선 배우의 연기에 감성이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1은 앞에서 말했던 위대한 배우의 자질을 여러가지 사례를 들어가며 반복적으로 제시하는데(무대에서 실제 그 사람과 그 사람이 맡은 역할이 서로 충돌하는 상황 같은, 즉 서로 구분되어야 하는 고유한 맥락들이 충돌하는 이중적인 상황) 그 과정에서 배우의 자질 뿐만 아니라 무대와 거리, 희극과 비극, 배우와 관객의 성질과 그 차이 등이 드러난다.

흥미로웠던 부분은 사회의 무언가가 무대의 무언가로 옮겨지면 그것에 대한 평가가 뒤바뀐다는 점이었다. 감성, 진실이 그러한데, 1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눈물을 보러 오는 게 아니라 바로 그 눈물을 뽑아내는 말을 들으러 오는 것이고, 그런 자연의 진실은 관례적 진실과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지.”(122p)

이러한 한계는 사회라는 양식, 무대라는 양식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나타난다. 그는 각 양식에서 드러나는 재능이 서로를 훼손하지 않고자 이러한 한계가 설정된 거라고도 말한다. 이는 픽션과 실제를 가르는 이유와도 같다. 소설의 문어체를 실제로 말하면 어색한 경우가 있고, 실제 대화의 말을 소설로 옮기면 소설 같지 않게 되는 경우가 있으니까.

자연 상태의 인간보다 뛰어난 게 극작가, 극작가보다 뛰어난 게 배우라고 말하는데, 이는 극작가까지가 객석에 앉아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고, 배우는 본인이 느끼지 않고서 사람들한테 느끼게 해주는 감성의 모방자이기 때문이며, 결국 인간은 죽음이란 막이 내려오기 전까지 사회라는 무대 위에서 살아가는 배우이기 때문이다.

1과 2의 대화는 첨예한 논쟁이라기 보다는 각자의 생각을 풀어놓는 대화에 가깝다. 외부 상황에 의해 대화가 중단되기도 하고, 결론 없이 다음 주제로 넘어가기도 하며, 혼자 둘이 되어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대화의 자기분열), 어떨 땐 혼자 생각하느라 상대방의 말을 듣지 못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 대화가 교훈을 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구성된 픽션이라기 보다 18세기 프랑스 사람들의 생각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서 재미가 있다. 후기작인 만큼 디드로의 여러 작품들이나 논증들이 충분한 설명 없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디드로를 모르는 사람에게 도움이 될만한 각주가 정말 많아서 이해하기도 수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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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의 구원
한병철 지음, 이재영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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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의 구원 / 한병철

문장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접할 때마다 자유로움과 고양감, 한계 없음, 선명함, 나 자신의 작아짐을 느끼곤 한다. 그렇게 미의 현현에 압도되는 와중에도 그것들이 어떻게 기능하고 감각될 수 있는 건지, 그것들에 숨겨진 함의는 무엇인지가 궁금해서 미와 미학을 알아보기 위해 서점을 거닐다 이 책을 만났다.

한병철은 오늘날이 긍정사회이며 매끄러움을 추구하는 사회이기에, 미도 긍정성으로 소비된다고 전제한다. 그는 미가 긍정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부정성과 결합하는 속성을 지녔는데, 이성이 대두되기 시작한 근대사회에서 미(긍정성)와 숭고(부정성)가 분리되었고, 오늘날엔 숭고마저도 긍정성으로 환원되었다고 지적한다(이 점이 내가 예상하던 미와 미학과는 다른 부분이라 흥미로웠다). 그래서 오늘날의 미는 주체의 만족을 추구하기만 할 뿐이라고. 이런 비판이 책 내내 다양한 개념의 대비(정보-지식, 애로틱-포르노그래피, 기억-데이터, 사진-영화, 디지털 미-자연미, 미술관-축제, 별-재앙, 동일성-비동일성)로 전개된다.

한병철은 근대의 철학자 칸트와 헤겔(그들의 한계였던 주체와 이성의 우월성을 지적하기도 한다), 미의 부정성에 주목하던 현대 철학자 아도르노, 하이데거, 블랑쇼 등을 불러서 미를 재조명한다.

미는 고통에서 온다. 고통은 부정성이지만,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경험이다. 경험을 통해서 주체는 주체의 위치를 내려놓고 객체와 타자를 볼 수 있으며 타자와 연결되고 화해할 수 있다. 그것이 미다. 그래서 미는 단순한 아름다움에서 그치지 않고 윤리와 진리,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다. 찰나가 영원이 되고 순간이 머무름이 되어 인간과 인생의 한계를 허문다.

문장이 현학적이고 시적이라서 읽는 내내 즐겁게 밑줄을 쳐가면서 읽었다. 인용된 철학자들의 문장도 시적이라서 철학자들은 다 시인이구나 생각하면서 재밌게 읽었다.

미의 복고운동을 주창하는 듯 오늘날을 가열차게 비판하는데, 2016년작임에도 최근의 숏품 문제까지 아우를 정도로 비판이 워낙에 날카로워서 오늘날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기대하게 하나, 그런 부분은 ‘구원’이라는 단어로 모호하게 처리되어 아쉽기도 하다.

철학자의 ‘긍정’사회라는 말은 ‘무비판적인’ 사회라고 수정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오늘날은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은 부정사회이자 긍정성이 귀해진 사회이기 때문이다(사회가 이 모양인데도 불구하고 긍정하는 사람들에게는 내적인 비판을 통해 긍정성을 추구하기로 선택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주체의 만족에만 만족하게 된 것은 구조적인 면이 큰 듯하다. 집단과 권력이 여전히 교묘하게 힘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집단과 권력, 타인에게 지쳐버렸고 겨우 나 자신이라도 지키기로 마음먹은 상태다. 지킬 수 있는 최전선은 나 자신이며, 나 자신에게 줄 수 있는 보상은 만족이다. 만족에만 만족하는 현대인보다는, 만족에만 만족하게 만드는 구조에 대한 비판이 보충되어야 할 듯 하다. 그래야 철학서가 현재성을 띨 듯하다.

또한 오늘날의 예술이 가진 긍정적인 측면도 분명히 존재할 테니(벤야민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영화를 주목한 듯) 그런 부분의 이야기도 만나고 싶다. 그의 비판하는 관점이 나의 관점과 상당히 일치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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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사원 풍요의 바다 3
미시마 유키오 지음, 유라주 옮김 / 민음사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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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 유키오의 장편 시리즈 ’풍요의 바다‘ 3권 <새벽의 사원>. 관능적인 에너지가 느껴져 <봄눈>(1권), <달리는 말>(2권)보다 그의 다른 작품들(<오후의 예항>, <짐승들의 유희>, 그리고 아마 <금각사>)이 떠오른다. 물론 시리즈에 요구되는 유기적 연결성이나 이야기의 총체적인 진행이 이전 소설보다 더 뚜렷해져서, 소설의 초반부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더 집중해서 읽을 수 있었다. 문장이 훌륭한 건 말할 것도 없다.

이전 이야기와 달리 불교적 색채와 회의주의적인 분위기가 강한데, 그건 ’환생자(기요아키-1권, 이사오-2권)‘를 바라보는 ‘인식자’에 불과했던 ‘혼다’가 중년에 이르러 소설의 완전한 초점 화자로 등장하고, 이국의 공주로 태어난 환생자가 혼다에게 타자처럼 멀어지기 때문일 것이다(여기서 타자는 비판적으로 말하자면 대상화, 작가만의 미학적 관점으로 말하자면 절대화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성’을 믿던 혼다, 그러나 환생자로 인해 이성의 균열을 느끼고 ’감성‘과 ’순수‘의 본질, ‘윤회 사상’의 의미에 대해 천착하지 않을 수 없었던 혼다는 이사오의 죽음 후 십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출장 차 태국에 방문했다가 자신이 이사오의 환생자라 주장하는 일곱 살 태국 공주 ‘잉 찬’을 만난다.

역사에 관여하려는 의지야말로 인간의 본질이라 믿는 혼다, 그래서 환생자들이 시대에 맞서 보였던 태도(불가능에 매혹당한 감성의 기요아키와, 극도의 순수를 추구해 행동으로 보인 이사오)와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지금의 혼란을 비교하며 역사와 환생에 대해 곱씹던 혼다에게 환생자가 넙죽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이 너무 쉽게 성사된 만남은 어떤 뚜렷한 결과 없이 끝난다. 공주가 너무나 어리기 때문이기도 하고, 우연찮게 얼핏 본 잉 찬의 알몸에서 환생자의 증표와도 같은 왼쪽 옆구리의 점 세 개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사오를 통해 환생의 존재를 알아버린 지금 시점에서 도대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무엇을 도모하고 추구할 수 있을까?

일을 해결한 혼다는 인도로 넘어가 바라나시와 갠지스강 유역의 힌두교 사원, 그리고 인도에서 오래전 추방된 불교의 성지 아잔타 동굴 유적을 방문한다.

죽음에조차 무관심한 듯한 사람들, 죽은 듯이 보이나 살아있는 사람, 강 앞에서 시체를 화장하는 사원 불 등 삶과 죽음이 한 들판을 이루고 있는 세계 같은 갠지스강 유역의 분위기는 혼다에게 감성과 이성 너머, 윤회라는 ‘초이성’의 존재를 공포스럽게 실감하게 하는 체험이 된다.

반면 불교 성지인 아잔타 석굴에서 혼다는 친근감을 느끼며 그 마지막에 만난 폭포에서는 이사오가 기요아키의 환생임을 깨달았던 미와산의 삼강 폭포, 기요아키가 죽기 전 언급했던 폭포를 떠올린다(이후 혼다가 ‘야뢰야식’의 실체를 깨달을 때도).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자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다. 나라는 격랑에 휩싸이는데, 혼다는 그때부터 서재에 박혀 본격적으로 윤회사상을 탐구하기 시작한다.

윤회의 목격자인 혼다의 의문은 하나다. 불교는 자아와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윤회 사상에 관계된 ‘업’ 사상을 계승해서 인과적인 윤회(선에는 선업, 악에는 악업을 주는 식의)가 이루어진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윤회의 주체는 누구인가.

디오니소스, 오르페우스 이야기부터 인도 설화까지, 기나긴 탐구와 성찰 끝에 혼다는 불교의 모순을 그대로 안고 간 소승불교에 ‘종자훈습’ 개념을 제시해 철학적 결실을 맺은 대승불교의 ‘유식론’에다가, ‘무아의 흐름’이라 할 수 있는 ‘야뢰야식’이라는 궁극적 의식을 설정해 앞선 수수께끼를 푼다. 야뢰야식이 윤회환생의 주체이며 그것이 생사를 윤회하는데, 인과의 방식보다는 시간과 공간이 동시에 맞닿은 듯 동시공적으로 현현한다. 야뢰야식은 그 의식의 거처인 ‘세계’와 존재적으로 상호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이는 현재가 순간순간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폐기되는 폭포의 모습과 같다. 그런 흐름 속에서 ‘깨달음’이 발생하여 윤회는(그리고 세계는) 의미를 가지게 된다. 혼다는 이렇게 초이성의 실체를 도출한다.

여기까지가 1부의 내용인데, 2부는 이와 또 다르게 다르게, 말하자면 ‘의아하게’ 전개된다.

전쟁이 끝난 뒤 혼다는 1900년대 초부터 진행되던 한 소송에서 쉽게 승소해 변호사로서 거액의 돈을 얻고 별장을 꾸린다. 바란 적 없던 우연한 기회로 삶의 안정이 확보된 것이다. 이는 패전한 뒤 연합군이 주둔하고 일왕이 힘을 잃는 일본의 모습과 대비되는데, 뒤로 갈수록 이러한-나라 현실과 혼다의 삶의 대비-는 극대화된다.

별장에서는 일본 정신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후지산’이 뚜렷이 보인다. 후지산은 혼다의 기억 속 태국의 새벽의 사원, 인도의 갠지스강 유역의 사원과 묘하게 겹쳐진다. 신성한 대상이 건축물에서 자연물로 바뀌면서 혼다에게는 때아닌 쾌락, 욕망의 충동이 일기 시작한다.

그건 나이가 들어 불가능이 확정된 그에게 환영처럼 솟아난, 불가능을 쫓고자 하는 쾌락이다. 세속적인 쾌락, 지적인 쾌락 등 다양한 쾌락 중에서 혼다는 불가능한 쾌락을 꿈꾸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대상은 열여덟 살이 되어 일본에 유학을 온 월광 공주 ‘잉 찬’이다.

친구, 서생의 아들로 모습을 드러냈던 윤회자에게 어떻게 이런 마음을 품을 수 있을까 싶어 의아하다.

기요아키와 이사오의 경우, 혼다가 그들이 가고자 하는 길(죽음)을 막지 못했기 때문에, 이번엔 애초부터 윤회자와 거리를 두고 허무에 대비해 이런 욕망을 발명해둔 게 아닐까 싶다. 윤회자의 입장으로 전개되던 이야기가 윤회 주체를 타자화하고 윤회의 목격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로 바뀐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아마) 윤회를 못하는 인간이기에 이런 식으로 목격할 수밖에 없는 거라고.

그는 한껏 아름다워진 잉 찬에게 그 세 개의 점이 있는지를 다시 확인하고 싶어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이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을 도우면서 동시에 방해하기 때문이다(이렇듯 혼다가 천착하던 윤회는 혼다에게 어느새 걸림돌이자 디딤돌이 되어 있다).

욕망에 눈 뜬 혼다. 당혹스럽긴 하나, 사실 혼다가 쾌락을 추구할 거라는 징조는 소설 여기저기에 드러나 있다. 이성의 문지기로서 법을 수호하던 그는 소설 초반에 법의 규제에 인간성의 장난이 있다고 통찰하기 하고, 자신이 그 어떤 물질도 쥐어본 적 없다는 걸 사뭇 깨닫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변 인물들이 탐미적인 예술가들(히시카와, 쓰바키하라 부인, 이마니시, 마키코)이고 또 그런 호칭에 걸맞은 행동들(불륜, 관음)을 보여서 혼다가 영향을 받은 것도 같다.

혼다는 잉 찬 자신이 모르게 잉 찬을 관찰함으로써 그 세 점의 존재 여부를 알고 싶어 한다. 몸서리쳐질 정도로 관음증적인데, 그런 데엔 또 이유가 있다. 그런 관음의 형식이야말로 초이성적인 쾌락에 가깝기 때문이다. 미시마 유키오 특유의 탐미주의가 윤회, 불교와 결합하는 순간이다.

혼다는 인식자라는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고 이런 욕망을 설계한 뒤로부턴 잉 찬의 부재를 즐기기도 하고 일부러 거리를 두기도 한다. 다데시나로부터 받은 서적에서 본 공작명왕의 이미지를 잉 찬에게 대입하기도 한다. 다만 1대 월광 공주의 반지를 잉 찬(2대 공주)에게 끼게 해 그녀와 ‘연결’돼 있고 싶어한다. 그건 반지가 그 둘 다 이 세계에 존재함(한쪽은 윤회를 거쳐)을 증명하는 도구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이 가능성을 향해서 치열하게 달려가는 질주라면, 치열하게 가능성으로부터 멀어짐으로써 불가능성에 닿으려하는 혼다의 사랑, 그 불가능을 완성하고 보존하려는 사랑은 사랑보다 훨씬 더 비현실적인 이름이 필요할 것이다. 그것은 윤회다. 혼다는 잉 찬을 욕망하고 그를 통해 소유할 수 없는 윤회를 욕망하는 걸지도 모른다.

이런 욕망을 예민하게 알아챈 이웃 주민 게이코, 잉 찬이 유일하게 의지하는 게이코를 통해 혼다는 이 욕망을 성취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 욕망은 애초에 불가능을 전제하고 있다. 불가능을 꺼뜨리는 순간 불가능을 포함해 모든 가능마저 무너지는 모순. 결국 이 욕망은 실현되면 그가 원했던 것과 달리 세속적인 쾌락으로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물론 그렇게 수준이 격하되는 쾌락에도 혼다는 유혹을 느끼는 듯하다, 워낙에 완벽을 일구며 살아왔기 때문에).

그런 모순은 잔인하게도 ‘자살’로서만 극복할 수 있다고 혼다는 생각한다. 인식의 촛불이 꺼져가는 순간에야 진정한 어둠을 볼 수 있는데, 애초에 인간이 그 촛불 자체이기 때문이다. 의식과 세계라는 상호의존에서 육체는 가장 먼저 버려질 껍데기다. 그리고 인간은 너무나 껍데기다. 혼다는 이런 사실을 알고서, 나른하게 앉아 그 불가능이 성사되는 지고지순한 행복을 꿈꾸기만 할 뿐이다.

하지만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결국 혼다는 구멍 엿보기를 시작하나, 잉 찬이 게이코와 동침하면서 왼쪽 옆구리의 세 점을 드러내 혼다를 배반해버린다(잉 찬은 자신이 혼다를 배반한 것조차 모르겠지만).

결국 혼다에겐 초이성적인 쾌락만큼이나 초이성적인 허무가 남는다(혼다를 집요하게 의심하던 혼다의 아내 리에에게도). 그리고 그런 허무를 세상에 내보이듯, 혼다가 꾸었던 기나긴 황금빛 꿈에 대한 미학적인 완결이 치러진다. 사원 화장장의 불타는 모습이 갠지스 강물에 비치는 것처럼, 불타오르는 혼다의 별장이 수영장 물에 비친다. 새벽에 이르러서야 나라의 현실과 혼다의 삶이 드디어 일치를 이룬다.

한 시대의 종말, 거대한 저녁노을을 상징하던 예술은 새벽까지 미뤄져, 점점 눈에 띄는 빛으로 어둠에 가려져 있던 세상의 모든 종말, 초이성의 허무를 반사하기 시작한다.

새벽에 달이 순식간에 사라지듯 잉 찬의 삶도 소설의 말미에 짧게 끝나버린다. 윤회조차도 그렇게 멀어지고 덧없어지는 것일까.

이제 마지막 <천인오쇠>만이 남는다. 여기선 혼다가 어떤 모습을 보일지, 또한 환생자가 어떻게 나타날지 예상이 가지 않아 더욱 기대된다. 앞선 소설마다 다음 환생에 대한 예언이 나왔는데 이번 소설에선 그런 예언조차 없기 때문이다. 잉 찬의 죽음을 여기선 짧게 처리한 대신 <달리는 말>에 미리 이사오의 꿈으로 상세히 서술해둔 것도 윤회가 점점 인식자에게서 멀어지고 있다는 것처럼 느껴져서 인상적이다. 저번 소설보다 어려워진 듯하나 이것이 미시마 유키오가 하고자 하는 말인 듯 느껴져서 그 어려움조차 면밀히 들여다보면서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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