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움큼의 외로운 영혼들 - 세기전환기의 멜랑콜리
강덕구 지음 / 을유문화사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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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은 모르는 것도 흥미를 갖게 하지만, 아는 거는 더더욱 흥미롭게 만든다. 20세기와 21세기의 남성적인 영웅상을 문화적 측면으로 훑어가는 이 비관적이면서도 집요한 비평문 <한 움큼의 외로운 영혼들>에서 모르는 부분은 80%, 아는 부분은 20%였던 것 같다. 모르는 부분이 더 많았지만, 모험을 하는 것 같은 비평적 전개며 비평에서 다뤄지는 작품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또 이 책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키워드들-어둠, 멜랑콜리, 허무-과도 연결되어 있어서 흥미롭게 읽었다. 읽을 때는 악마적인 글을 읽는 것 같아서 누가 훔쳐 볼까 주변을 두리번거렸는데, 다 읽고 나니까 여태 혼자 캄캄한 어둠을 지나왔다는 고독한 기분이 든다.

이 글에서는 영웅이 자주 언급되는데, 이 영웅은 사람들을 구하고 칭송받는 영웅이라기보다 시대의 변화를 가장 먼저 감지하는 사람, 때론 예언자 같은 사람, 시대가 요구하는 전진, 변화의 선두에 서서 고뇌하는 사람 같아서, 폭풍이 몰아치는 배의 갑판에 홀로 선 선장이나 신 앞의 단독자 같은 이미지로 보인다. 20세기에서 그들은 폭풍에 휘말리며 나름의 항해를 계속했다면 21세기에서 그들은 목적지,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 목적지에 이르러서 지나가버린 황금 같은 시간과 앞으로 지내야할 막다른 벽 같은 시간 사이에서 고뇌한다. 우린 뭘 더 할 수 있을까?

20세기에서는 필름누아르와 서부극이라는 장르를 비틀거나 활용한 영화 거장들이 등장하고, 팝음악의 역사를 훑는다. 나에게 가장 흥미로웠던 건 90년대 감독들의 이야기다. 쿠엔틴 타란티노나 웨스 앤더슨, 폴 토머스 앤더슨 같은 감독은 지금도 활동을 하는 감독이니만큼, 그들의 결과물들이 시대적 풍토를 어떻게 비틀고 대항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21세기에서는 힙합을 오션, 드레이크의 측면에서 볼 수 있었는데 힙합 음악에 전혀 흥미가 없는 내가 보기에도 이야기들이 흥미로웠다. 유아인, 하정우의 분석에서는 그들의 비쥬얼적인 측면과 연기적 측면을 엮어서 다루고 있는데 이런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구나 싶었다. 검정치마에 대해서는 여성혐오적인 입장의 비판을, 노래들이 그러한 가면-가학과 피학의 가면-을 씀으로서 남성들을 비판하고 있다는 의견을 피력하는데, 이는 드레이크에 대한 분석과도 일정 부분 유사해 보인다. 그러한 특징은 그들의 자아라기보다는 그들이 쓰려는 가면, 이미지로 변환되고 그들은 그렇게 왜소해지고 점점 사물이 되어간다. 어떨 땐 괴물이 되어 막무가내로 폭력을 저지르기도 하지만은.

21세기 부분에서 당연 흥미로웠던 건 정지돈에 관한 비판이다(내가 아는 20%가 여기였다). 정지돈의 잘못은 오토픽션적 글쓰기 때문이 아닌, 현실의 모든 걸 소설로 활용하려던 방식 때문인 듯하다. 그는 정지돈이 도망가는 글쓰기를 해왔다고 말하며, 현실보다 글을 우선하는 이야기들을 써나갔다고 말한다. 정지돈의 글에서 인물들의 삶은 아카이빙을 위해 도구적으로 다뤄질 뿐이며 서사에 드라마가 아닌 여담만이 담겨있다고 비판한다. 이는 서사를 거부하는 글쓰기라고. 내가 예전에 정지돈의 글에서 매력적이고 새롭다고 생각했던 부분들, 그러나 뭐라 설명하기 어렵던 부분들을 비판적으로 다루어서 인상적이었다. 정지돈의 서술 방식이 여러모로 제발트와 동일하다고 이야기하는데, 제발트를 읽으려다 실패한 나로서도 둘의 방식이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제발트는 현재 인정받고 있고 정지돈은 인정받고 있지 못한다면, 그건 왜 그런 건지도 궁금했다. 또한 정지돈이 이 책의 뒤에 등장하는 아리 애스터 감독 같은 관객 착취적인 영화, ‘닭지방’ 같은 영화와는 어떤 차이가 있는 건지도 궁금했다. 더불어 정지돈의 서술 방식에서 나타나는 문제를 그가 어떻게 타개해갈 수 있는지를 다뤄주길 바랐다. 그러나 그것을 정지돈과 같은 후장사실주의자이지만 다른 길을 간 박대겸, 현실로 돌아오는 글쓰기, 공포를 대면하는 글쓰기를 하는 박대겸의 소설로만 약소하게 다룬 것 같았다.

이 책으로 음악에 관한 비평을 이번에 처음 접했는데, 이런 식으로 음악을 이해하고 글을 적을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해줘서 좋았다. 특히 좋았던 건 현대의 문화 양식이 과거의 어떤 기점, 사건들로부터 파생되었던 것인지 흐름을 짚어준 부분들이다. 문화란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여러 원인과 흐름을 타고 생겨났다는 걸 이해할 수 있어서 도움이 되었다. 또한 다양한 문화적 양식에 들어있는 이야기 자체를 다루는 부분에서는 이야기는 자고로 어떤 형태여야 하는 건지, 어떻게 만들어가야 하는 건지도 배울 수 있어서 유익했다.

좋은 만큼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총체적인 시대에 관해 다루려면 좀 더 다양한, 이야기들이 동원되어야 할텐데, 이 책이 남성성과 영웅에 한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더 주제적으로 도드라지긴 하지만 나는 더 많은 다양한 분야와 주제의 비평을 보고 싶다. 그래서인가 이 작가가 쓴 다른 글들이 궁금해지기도 하고 앞으로 쓸 글들에 기대를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부분부분 모두 재밌게 읽었지만 워낙 낯설고 많은 고유명사들이 등장해서인지 머리에 완전히 들어온 기분은 아니다. 천천히 다시 읽으며 흐름에 대해서 정리해야 이 책을 완전히 이해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서평단 제공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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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곳의 전수미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3
안보윤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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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학 서포터즈 제공 도서)

단편집 <밤은 내가 가질게>에서 느꼈던 마력, 과거에 일어난 사건과 지금의 사건이 겹쳐지면서 문제의식이 거대하게 불어나는 마력이 중편 <세상 모든 곳의 전수미>에서는 태풍처럼 휘몰아친다. 소설의 1장부터 마지막 9장까지 손을 놓을 수가 없을 정도로 엄청나다.

어린 시절 언니 전수미의 악행에 고통 받았던 동생 전수영은 악착같이 돈을 벌어 전수미로부터 독립한다. 이제 좀 살만해지는 줄 알았는데, 그때부터 사회가 전수영에게 갖은 악행을 저지르기 시작한다. 전수미만이 아니라 세상 자체가 전수영을 마치 달력의 뒷면처럼 만들려고 한다.

전수미는 어린 시절 돌연 나타난 부조리의 끔찍한 형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전수미는 타인들 위에 군림한 채 시시덕거리다가 우연히 목격한 타인들의 비밀로 타인들을 억누른다. 전수미가 과격하고 돌발적이라면, 사회는 쾌적하고 교묘하다. 거대한 구조로 촘촘하게 얽혀 있어서 누군가 문제를 제기하면 그건 모두가 합의한 사항이라고 적힌 계약서를 들이민다. 합의라는 말 속에 많은 것들이 묵인된다. 목격은 방관이 되고, 돈은 방법이 된다. 그렇게 개인을 억누른다.

이 소설에서 과거의 사건과 현재의 사건은 ‘돌봄‘을 관통하고 있다.

부모는 전수미가 저지른 짓들을 수습하느라 바빴기에, 전수영은 마니또 같은 놀이로만 잠시 돌봐질 뿐이었다. 밖에서 전수미로 오해받아 전수미가 한 것보다 더한 폭력을 당한 전수영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가상의 더듬이를 만들고 신경을 곤두세우게 된다. 그 아이는 방어적으로 자기를 돌보며 성장한다.

속은 예민하지만 겉은 방어적인 성격의 어른이 된 전수영은 반려동물돌봄센터에서 일하며 노견들, 아픈 개들을 돌보게 된다. 전수영은 그만의 예리한 촉으로 반려동물돌봄센터의 목적이 ‘돌봄’이 아니라 깔끔하고 알맞은 죽음, 이별이라는 걸 알아챈다. 센터의 구 원장은 죽음의 끔찍한 외면을 외면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업화한 것이다. 이를 알릴 방법을 궁리하던 전수영은 그 또한 죽음의 방관자라는 그물에 걸려버리고, 살려주는 대가로 묵인을 강요당한다. 자신이 서명한 계약서의 모르고 있던 뒷면이 드러난 것만 같은 순간이다.

반대로 어린시절 전수미는 돌봄의 독식자, 수혜자였다. 가족 모두가 쩔쩔 매며 그를 돌봤다. 그렇게 어른이 된 전수미는 요양원에서 노인들을 돌본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노인들의 죽음을 방관한 일로 살인 용의자가 된다. 증거는 불충분하다. 그러나 전수미가 살아온 이력은 살인자가 되기에 알맞은 자기소개서 같다. 누구라도 그걸 알게 되면 (전수미와 부모와 변호사를 제외하면) 모두 전수미가 그 노인들을 죽였다고 생각할 것이다.

어릴 땐 누군가로부터 돌봄을 받다가 어른이 되면 누군가를 돌보게 되는 이 과정 자체가 삶이다. 그 점에서 보면 전수미와 전수영의 돌봄의 삶은 완전히 대조적이다. 그러나 용의자 선상에 오른 이 일은 전수미만의 일이 아니다. 전수영 또한 개들의 부자연스러운 죽음을 계속 방관하면 어느새 그렇게 혼자서만 용의자가 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그 또한 결국 전수미가 될 것이다.

그래서 전수영은 ‘전수미 되지 않기’를 택한다. 전수미와 달리 방관한 사실을 부정하지 않을 것이고 전수미와 달리 비밀 같은 걸로 타인을 괴롭히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동료 직원 소란의 도와 전수영은 결국 센터를 무너뜨린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센터의 몇몇 개들은 버려지고 누군가는 직장을 잃게 된다. 전수영은 그걸 알고 있다. 진실하기 위해 견고한 거짓을 무너뜨린 자신이 한편으론 이기적이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거짓은 영원했을 것이다. 영원은 구조를 갖춰 절대로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속에서 또다른 전수영은 또다른 전수미가 되었을 것이다. 이제 전수영은 자신이 낳은 그 모든 이기심을 돌봐야한다.

전수영은 전수미가 있어서, 전수미의 존재를 알고 전수미 되지 않기를 선택해서, 세상 모든 곳의 전수미로부터 진실될 수 있었다. 아프더라도 외면하지 않을 수 있었다. 속이지 않을 수 있었다.

암담한 이야기라서 읽으면서 세상에 대한 신뢰가 전부 벗겨져 나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그러나 그렇게 신뢰가 벗겨져서야 알게 되었다. 신뢰란 사실과 다르다고. 신뢰는 언제나 안온하지만 사실은 언제나 적나라하다고. 그 때문에 대부분 신뢰에 기댄다고. 그러나 신뢰가 아니라 사실 속에 언제나 내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나를 보지 않으려고 세상을 무턱대고 신뢰해버린 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소설로 꽤 아팠기에 이제 어쩌면 내가 나를 쳐다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전수미 같은 내가 아니라 전수영 같은 내가 되려면, 달력의 숫자가 아니라 그림을 볼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 모든 뒷면을 뒤집어 앞면이 되게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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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말 풍요의 바다 2
미시마 유키오 지음, 유라주 옮김 / 민음사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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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 유키오가 말년에 집필한 ‘풍요의 바다’ 시리즈 중 2권 <달리는 말>. 1권 <봄눈>에서는 사랑의 화신, 감정의 화신이던 아름다운 ‘기요아키’가 주인공이고 ‘혼다’는 이성에 몰두해서 기요아키를 바라보는 그의 친구 정도로만 여겨졌는데, 20년이 지난 시점을 다루는 2권에서는 기요아키의 서생이었던 ‘이누마’의 아들 ‘이사오’가 기요아키의 환생이라 믿고 그를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혼다가 진정한 주인공이며 ‘시대의 목격자’라는 생각이 굳어졌다. 기요아키/이사오는 시대 자체이며, 혼다는 시대의 관찰자, 서술자다. 그리고 이 시리즈는 ‘시대’에 대한 이야기다.

1권에서는 1910년대, 다이쇼 시대의 몰락의 기운 속에서 기요아키에게 찾아온 ‘사랑’이 기요아키를 정열로 이끌다가 햇빛이 스러져가며 깃드는 어둠처럼 죽음으로 수렴하게 했다면, 2권에서는 쇼와 시대, 외국 문명과 자본에 휘둘리며 백성이 궁핍해져가는 나라(기업가와 정치인)에 불만을 가진 이사오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신풍련사화’처럼 정치적 혁명(유신)을 일으키고자 자신의 순수한 ‘충의’에 올라타 마치 말을 타고 달려나가듯 한층 더 맹목적으로, 혁명과 그 혁명의 최종장인 죽음을 향해 달려나가고 있다.

이사오는 허약했던 기요아키와 달리 검도에 뛰어나며, 정치 혁명을 일으키고 할복을 하고자하는, 순수에 대한 고집이 더욱 드센 인물이다. 그 순수는 일왕에 대한 충성과 우국을 상징하기도 한다(그래서 소설에 일본의 상징과 문화가 많이 등장한다). 혁명을 위해 또래 동지를 모으고 군인들과 교류하는 이사오의 모습은 거대한 집안에 틀어박혀 있던 기요아키가 아니다. 하지만 기요아키가 사랑이란 감정에 순수하게 달려들었듯이 이사오 또한 충의란 감정에 순수하게 달려든다.

이사오의 순수는 악을 처단하는 것에 향해 있다. 그 점에서는 정의와 닮아 있기도 하다. 그러나 거리가 멀고 추상적이며 모호해서 더욱 악다웠던 악은 제거 대상이던 신카와 남작, 구라하라 등의 인물이 아버지 이누마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이사오가 가진 순수를 더럽히기 시작한다. 이사오는 자신의 발밑에 깔린 악에서 부유해 순수의 하늘로 승천하고자, ‘인버네스’를 씌우려는 어른들의 세계에서 악을 쓴다.

그러나 그의 혁명은 누군가 그들을 밀고하는 바람에조기에 진압된다. 누군가의 배신, 자신을 아껴준 마키코의 시적인 사랑에 포함된 거짓, 여론과 국가가 그의 진지함을 받아들이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동정하는 모습은 이사오의 순수가 장난감처럼 취급되고 있음을 보여줄 뿐이다. 이사오는 자신의 순수가 환상이었음을, 그리고 지금 자신이 그 대가로 벌을 받고 있는 중임을 깨닫는다. 그러나 혼다는 다르게 생각한다. 사랑 받아본 적 없는 그가 처음으로 느낄 미움이 그가 가진 맹목적인 순수에 균열을 일으키고 그보다 더 큰 세계에 대한 자각으로 이어져, 그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게 해줄거라 생각한 것이다.

마키코의 위증(그것은 마키코와 이사오 모두를 구하는 증언이기도 한데)으로 동료들을 배신했다는 거짓을 인정해야만 하는 위기에 빠진 이사오가 위증 속에서 또 하나의 거짓을 만듦으로써 스스로 구원의 길을 내는 그 모습은 그 성장의 증거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한 이 장면은 1권에서 사토코에 대한 사랑을 위해 처음으로 편지에 거짓말을 적은 기요아키를 연상시킨다. 소설에서 주요하게 등장하는 ‘거짓’은 현실에서 또다른 현실로 도약하기 위한 도움닫기이며, 또다른 현실 속에서 전의 현실과 마찬가지로 재현되는 이러한 장면들은 그 도약이란 과정 자체, ‘환생’을 믿도록 만든다. 거짓의 진실함, 소설만이 갖는 특성이 가감없이 드러난다.) 그러나 그 성장의 증거, 씨앗은 배신의 주인공이 아버지와 마키코라는 게 밝혀지면서 한순간에 시들고, 이사오의 내면을 망가뜨린다. 망설이던 이사오는 결국 자신 스스로에게 부과한 임무, 순수를 실천하기 위해 실종되기에 이른다.

한편, 판사가 되어 이성의 요새에서 살아가는 혼다에게 느닷없이 나타난 이사오라는 ‘환생’은 법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세계의 존재를 느끼게 한다. 이사오의 순수의 생몰을 지켜보면서 혼다의 굳어져가던 이성 또한 균열이 가는 것이다. 1권에서는 법을 공부하는 학생으로서의 ‘의문’으로 그쳤다면 2권에서는 법을 판단하고 집행하는 집행자로서의 ‘균열’로 발전한 것이다. 의문이 비로소 균열이 되는 순간의 그 비이성적인, 반이성적인, 초이성적인 그 떨림을 나도 같이 목격한 듯하다. 그 초이성적인 환생, 윤회의 세계관은 마치 계속해서 꾸며지고 부풀려지는 ‘이야기’ 자체를 표상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이성도 감성도, 순수도 악도 아닌 이야기 그 자체에 전율했던 것 같다.

이사오가 일으키려 했던 쇼와의 유신은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여러 성격이 다른 혁명, 정치적 테러, 반란을 연상시키는데, 특히 전두환이 일으킨 반란이 연상된다. 만일 이사오가 군인이었다면 그 반란은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사오가 충성이 임무인 군인으로서가 아닌 학생으로서 충성을 가지고 반란을 도모했다는 것 자체, 그리고 반란을 일으킨 뒤 죽으려 한 사실은 반란으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과 달리 이사오가 ‘순수’했음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사오의 그 순수가 피로 맺어진 ‘혈맹’이었다는 점은 안타깝기도 하다. 하지만 이사오가 혈맹을 비웃는 사람들을 향해, 이를 아득바득 갈며 속으로 내뱉는 비판-돈에 의한 결탁은 얼마든지 허용되는 현실, 법이 정의를 수호하지 못하고 소수의 혁명이 사기나 도둑질 같은 형편없는 악으로 취급되는 현실, 불만은 가지되 지켜만 볼 뿐 행동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할 말이 없어진다. 이사오는 죽음만이 인간이 가진 순수의 동기이자 귀결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순수를 극도로 추구해야 했을만큼 그 시대는 악과 혼돈으로 가득한 시대이기도 했던 것이다.

순수는 깨끗함과 어리석음을 동시에 상징한다. 이사오가 열아홉에 일으키려던 순수의 바람은 어리석었을지 몰라도 깨끗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순수는 그 기간이 짧듯이 이사오의 순수도, 생애도 짧았다. 찰나였다. 그럼에도 그 찰나가 길었으면 하는 바람을 혼다도 나도 했던 것 같다. 어떤 악과 절망, 분노에서도 고결하게 살아남아 어리석지 않고 현명하게 시대를 이끌어갔으면 했다. 이사오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씨앗을 가진 인물이었다.

이 작품은 육군 자위대를 찾아가 극우파로서 정치적 궐기를 촉구하고 할복으로 자결한 미시마 유키오의 마지막을 암시하는 것 같기도 하다. 정말로 어리석다고 생각하는 한편, 이 작품을 읽으면서는 안타깝게까지 느껴졌는데, 이 소설에서 극우파적인 사상, 할복에 집착하고 욕망하는 이사오의 어리석음이 혼다나 다른 인물들에 의해 드물지 않게 관찰되기 때문이다.

사상이 어쨌건 간에 소설 속 검사가 이사오의 견해에 비약이 있다고 비판했듯이, 혁명은 소수가 아닌 평범한 모두가 힘을 합쳐 이뤄야 마땅한 듯하다. 촛불혁명처럼.

각각의 권이 독립적인 이야기를 가진다는 게 이 시리즈의 독특한 점이기도 한데, 1권에서 약간은 불분명하게 느껴지던 기요아키와 혼다의 관계가 2권에서 잘 정리되어 있어서 좀 더 집중이 잘 되었다. 1권에 나온 인물들이 2권의 서사에서 퍼즐조각처럼 잘 맞춰서 등장하는 것도 놀랍다. 추상을 정확하게 포착해 현실로 가져오는 문장, 현실을 추상으로 가감없이 밀어내는 문장은 이젠 말할 것도 없고… 인덱스를 붙이려다 보니 이 책은 인덱스는 오만 개는 써야할 듯 싶어서 밑줄을 치기 시작했는데, 책은 곧 선뜻 누구한테도 빌려주기에 미안할 정도로 밑줄로 도배가 되고 말았다.

꿈 이야기로 다음 환생이 암시되는 건 1권과 마찬가지인데, 2권 <달리는 말>에서는 이사오가 남성의 한순간을 위해 휩쓸듯이 살아가는 일시성과 반대되는 여성의 영원성을 체험하는 꿈이 등장한다. 이 대비가 독특한데, 3권 <새벽의 사원>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어떻게 기요아키의 환생이 혼다와 만날 것인지, 혼다는 또 어떤 시대를 목격하고 있을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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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하나는 거짓말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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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작해지기 쉬운 불행을 그렇지 않게 진심으로 쓰는 김애란 작가의 장편소설. 고등학생 시절 단편집 <바깥은 여름>을 읽었을 때의 그 빠져나갈 길 없는, 너무나 선명하고 묵직한 불행들에 한동안 가슴이 저몄다는 것을 잠시 잊은 채 호기롭게 이 소설을 들어버렸다.

같은 반이지만 서로 친하게 지낸 적 없는 세 아이-지우, 소리, 채운-의 이야기가 소설에서 번갈아 등장한다. 시간의 흐름을 타지 않고 겹겹의 거짓과 밝혀지지 않은 사실들로 꼬리에 꼬리를 물어가며 현재에 도달하는 이야기라서 복잡한 데다, 인물들의 사연이 비슷해서 반복되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갈수록 이런 공통점, 유사점이 결국 하나의 흐름이 되어 이야기를 아프고 아릿하게 만들었다. 별것 아닌 덤덤한 문장들이, 마치 소설 속 가난에 대한 비유처럼, 머리통이 터질 듯한 눈송이 마냥 천천히 마음속에 내려앉았다.

세상이 부여하는 거대한 체념을 부모라는 보호막 없이 습득한 세 아이는 자신들에게 서둘러 찾아온 불행(부모의 불화, 부재) 앞에서 체념으로부터 본능적으로 터득한 거짓말로 자신을 숨긴다. 채운은 엄마가 아니라 자신이 아버지를 찔렀다는 사실을, 소리는 자신이 손으로 죽음을 예상할 줄 안다는 것을, 지우는 학교로 돌아갈 생각 없이 공사판 노동을 하러 간 사실을 감춘다.

하지만 거짓은 또 다른 거짓을 창조해야만 유지할 수 있다. ‘없어도 되는 것(거짓)’의 탄생은, 그 즉시, 그것이 진짜처럼 ‘있어야만 하는’ 수많은 이유를 요청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수많은 이유는 언제까지나 ‘거짓’이라는 이름으로 통한다. 진실의 잔혹함을 회피하고자 세 아이가 각자 만든 하나의 거짓은 서로 교환되고 공유되며 부풀려진다.

거짓말을 하는 것만 알지 그걸 어떻게 유지하고 감당해야 하는지를 몰랐던 아이들은 저마다 벌을 받는다. 채운은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친척들이 건네는 위로를 벌처럼 느끼고, 소리는 투병 중인 엄마가 이대로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는 것으로 괴로워하며, 지우는 공사판의 고된 노동, 엄마의 의문스러운 죽음과 반려동물 용식이를 소리에게 맡겨두고 온 것에 대한 죄책감을 갖는다.

진실이 잔혹한 만큼, 거짓은 그것보다 두 배 고통스럽다. 거짓이라는 막의 허위뿐만 아니라, 그 허위 속에 본인만이 알고 있으며 떨쳐낼 수 없는 진실이란 알맹이가 웅크리고 있다는 사실까지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아이들에게 숨 쉴 틈을 주는 건 다름 아닌 ‘이야기’다. 이야기는 아직 세상을 보는 ‘시야’와 세상과 소통하는 ‘언어’를 배우고 있는 아이들에게 마음 놓고 자유롭게 고백할 수 있는 ‘형식’이 되어준다. (진실의 내용이 포함된) 거짓의 무게에 짓눌리던 아이들은 애초에 거짓이라고 약속된 ‘틀’ 속에 진심과 진실을 몰래 털어놓게 된다.

지우는 만화라는 형식으로 자신의 가족에게 닥쳤던 불행을 풀고, 채운은 ‘바람영어’라는 인공지능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서툰 영어 문장으로 불행과 죄를 고백한다. 이 소설이 가슴이 아팠던 가장 큰 이유는 그런 고백이 말하지 못하는 존재들에게 향하기 때문이다. 지우가 키우는 도마뱀 용식이, 채운이 키우는 리트리버 뭉치, 소리가 찾아간 어머니의 봉분… 아이들은 답을 들을 수 없는 그들에게 의지한다. 아이들은 인간이 아닌(혹은 더 이상 살아있지 않은) 그들에게 진심과 진실을 위탁한다. 자신이 견딜 수 없는 무게를, 자신이 무엇을 견디고 있는지도 모르는 대상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위로를 받는다.

거짓 자체가 주는 긴장감과 그 거짓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밝혀질지 하는 불안한 예감에 소설의 서사는 추동된다. 그리고 그런 서사를 ‘이중 하나는 거짓말’이라는 (소설의 제목과 동일한) 게임이 꿰뚫는다. 다섯 개의 문장 중 한 문장에만 거짓을 섞는 게임. 그 거짓을 알아맞히는 게임. 거짓을 알아맞히면 진실이 자연스럽게 밝혀지는 게임. 진실(4)의 비중이 거짓(1)보다 압도적으로 높다. 소설에서 이 게임은 학교 교실에서 소개되는데,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추측하게 된다. ‘진짜 삶’을 사는 아이들과 ‘가짜 같은 삶’을 사는 세 아이는 이 게임을 다르게 대할 것이라고.

‘진짜 삶’을 사는 아이들에게 그 게임은 황당하고 신기한, 마치 ‘가벼운 거짓말’ 같은 진실을 밝히는 ‘게임’일 것이다. 게임이 끝나면 거짓은 자연스레 사라지고 즐거운 진실들만 남을 것이다. 반면 ‘가짜였으면 하는 삶’을 살고 있는 세 아이에게 그 게임은 사람들을 향해 마치 ‘무거운 거짓말’ 같은 진실을 고백하는 ‘무대’가 될 것이다. 무대가 막을 내리면 거짓은 유일하게 붙들고 싶은 문장이 되고 나머지 진실은 모두 지워버리고 싶은 문장으로 남을 것이다. 거짓과 진실에 부여하는 무게의 차이 때문이다. 무게가 달리자, 거짓과 진실은 모습을 뒤바꾸며 혼란을 야기한다. 어느 걸 선택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게 한다. 부정하고 싶은 진실을 거짓이라 여기고 달콤한 거짓을 진실이라 여기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세 아이에게 이 단순한 게임조차 게임으로 대할 수 없을 거라는 예감이야말로, 이 소설의 불행이 납작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로 읽힌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무거움이 느껴졌던 건, 그리고 그 무거움에 마음이 기울었던 건, 세 아이에게 찾아온 거짓 같은 불행이 일시적이지 않으며, 엄정한 현실임이 와닿았기 때문이다. 또한 독자인 나 아니면 그 셋 모두를 응시할 시선이 없다는 걸 느꼈기에. 삶에 닥친 불행의 기운을 별다른 노력 없이 웃어넘길 줄 아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삶에 닥친 불행을 도저히 웃어넘길 수 없는 아이들도 있다. 전자의 아이들에게 응원이 필요하다면, 후자의 아이들에게는 경청이 필요하다. 김애란의 시선이 그 경청에 특화되어 있다는 걸 나는 느꼈다.

아이들만 진실을 거짓으로 감추고 견디고 살까. 어른들도 거짓을 견디고 산다. 대신 어른들은 언젠가 그 거짓을 찢고 그 속의 알맹이, ‘진실’을 ‘고백’한다. 거짓의 형식이 아닌 진실의 형식으로. 자신과 온전한 소통이 가능한 이들에게. 채운의 엄마 태선은 채운에게 아버지 말고 다른 사람을 만났었다고 고백하고, 소리의 아빠 호민은 소리에게 투병 중일 때 엄마가 조력사를 원했다는 것을 알리고, 지우의 새 아빠 선호 아저씨는 지우에게 자신이 겪은 불행과 어머니 지연의 죽음이 사고였음을 알린다. 선호 아저씨는 진실을 고백할 때 ‘이중 하나는 거짓말’ 게임을 이용하는데, 게임 규칙을 어기고 진실인 다섯 문장을 말해버린다. 그 장면에서 어른이란 규칙에 무조건 자신을 가두는 사람이 아니라 때로는 자신을 위해 규칙을 부수기도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 어른의 고백 과정이 나는 사뭇 슬펐는데, 아이가 감당한 불행을 알고 있던 어른들이 아이가 자신들을 ‘버리도록’ 선택권을 줌으로써 스스로 벌을 받으려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어른이란 잘못에 대한 벌을 부정하지 않고 마주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소한 거짓말을 만든 세 아이는 결국 거짓의 끝, 감당할 수 없는 끝에 다다른다. 그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거짓이 죄다 벗겨지고 진실의 알맹이만 남게 된다. 그러자 아이들은 묵묵했던 전과는 다르게 서로에게 말을 건다. 진실은-스스로를 감추려는 속성을 가진 거짓에게 포획되더라도 결국-스스로 드러나려는, 말해지려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했던 건, 감출 수 있는 거짓이 아니라 드러낼 수 있는 진실이었다. 거짓의 허위에 자신을 기만하며 진실을 한없이 유예하는 것보다, 진실을 그것이 잔혹하더라도 감당하며 드러내는 것이었다. 먼저 거짓을 찢고 진심을 고백한 어른들이 은연중에 그 사실을 알려준 것이다. 그렇게 서로에게 말을 거는 순간이야말로 미약하지만 확실한, 보이지 않으나 느껴지는, ‘성장’의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소전서림 이달의 소설 다섯 번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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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심장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41
조지프 콘래드 지음, 황유원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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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심장 / 조지프 콘래드 (휴머니스트 제공 서평 도서)

아프리카 오지에서 대상인 커츠를 만났던 여정을 회고하는 영국인 선장 말로의 이야기. 처음엔 흥미롭다가 서서히 어두워져 결국 모든 게 분간이 안 가는 암흑에 놓였다 온 기분이다. 이 책은 그야말로 악몽의 생생한 체험이다.

대항해시대, 다시 말하자면 대약탈의 시대, 제국은 암흑을 내쫓기 위해 기어이 세상의 모든 암흑을 찾아들어갔다. 그 당시의 삶-기록된 것보다 더 많은 상처가 인간들에게 새겨졌을 텐데-이 굉장히 궁금했었는데 텍스트만으로 그 체험을 다 한 것 같다. 빽빽한 문단, 형이상학적인 문장들에 어지러움을 느끼면서도 어둠을 비집고 빠져나가려는 사람처럼 끈질기게 읽었다. 그러다보면 이 소설을 고전이라 칭할 만한 섬세한 묘사와 통찰이 드러나 잠시 숨을 쉴 수가 있었다.

탈식민주의, 제국주의, 인종차별에 대한 비판을 서슴치 않게 하는 부분들이 인간의 평등을 일깨워주는 것 같다. 말로가 메모에 적힌 러시아어를 야만인들의 언어라 오해한 것, 식인종이 선원들을 먹으려 하지 않고 도운 것, 흑인 조타수가 죽기 직전 말로에게 보인 숭고한 믿음의 얼굴, 원주민들이 말로가 타고 온 배를 공격하도록 명한 커츠, 야만인에 동화되어 그들을 지배한 커츠의 모습이며… 조건이 사라진, 조건이 무화된 인간은, 자연의 인간은 서로에게 평등했다. 사실 인간은… 지극히 평등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커츠가 머물던 오지가 어둠의 심장을 의미한다면 지구 자체가 이미 어둠 속에 잠겨 있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소설 초반부에 등장하는 영국 템스강도 상당히 어둡다).

돌아가는 길에 커츠가 죽고 그의 짐을 인계받은 말로가 그의 약혼자에게 찾아가 커츠가 한 유언을 사실대로 밝히지 않고 ‘당신의 이름을 말했다’고 거짓말한 부분에서는 사무치는 슬픔이 있었다. 그토록 거짓말을 혐오하는 말로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건, 그 어둠의 심장에서 커츠가 마지막으로 외친 말이 “끔찍하구나! 끔찍해.“였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는 결국 어둠만 있었다. 커츠가 그곳을 찾아간 이유가 상대적 가난과 정의 때문이었음이 암시되는 후반부에서 신처럼 보이던 그에게서 문명의 타락을 떨쳐내려는 시도가 있었음을 가늠해볼 수 있었다.

어려운 이야기라 도움이 될 만한 부록이 많이 실려있는데, 그중 콘래드에 대해 쓴 버지니아 울프의 글에서 애정이 느껴졌다. 둘의 인연을 여기서 처음 알았다. 두 남녀가 대화하는 식으로 조지프 콘래드를 비평한 울프의 텍스트도 새로웠다. 이런 방식을 차용해서 글을 써볼까 싶어진다. 역자이자 시인이기도 한 황유원의 해설에서는 그의 작품에 대한 애정과 어렵다고 인정하는 솔직함, 간단하면서도 치밀한 분석력이 느껴졌다. 이런 어려운 소설의 경우 해설이 정말로 이해에 가닿는 한줄기 빛이 되는 것 같다. 어려운 이야기이니만큼 부록에서 이야기에 대한 두꺼운 논문 같은 분석도 할 수 있었을 텐데, 작가에 대한 풍부한 정보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구성해 독자들에게 해석의 자유를 앗아가지 않게끔 해서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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