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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 (반양장)
E.H.곰브리치 지음, 백승길 외 옮김 / 예경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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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작품들을 역사적인 배경 속에서 파악하고 그것을 통해 이해하는 방향으로 유도하고 있다. 각 세대는 어느 시점에서는 그 전 세대의 규범에 반대하게 마련이다. ...
남과 다르게 하려는 충동이 예술가가 갖추어야 할 최고의, 또는 가장 본질적인 요인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이러한 요소를 무시하는 경우도 드물다. ... 나는 이 끊임없이 변하는 미술가들의 의도를 이 책을 써나가는 관건으로 삼아 모방에 의해서든지, 아니면 반대에 의해서든지 한 작품이 그 이전의 거들과 어떤 관련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 주려고 노력했다. -9쪽

우리는 한 작품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은 그 소재가 갖고 있는 아름다움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된다.
...
그림의 정확성을 가지고 흠을 잡으려면 두 가지를 자문해 보아야 한다. 첫째는 미술가가 그가 본 사물의 외형을 변형시킨 이유를 가지고 있는냐 없느냐의 문제이다. 둘째는 우리가 옳고 화가가 그르다는 확신이 서지 않는 한 작품이 부정확하게 그려졌다고 섣불리 그것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 -18쪽

원시 미술. 우리의 것과 다른 것은 그들의 기술의 수준이 아니라 그들의 착상인 것이다. 미술의 모든 역사는 기술적인 숙련에 관한 진보의 이야기가 아니라 변화하는 생각과 요구들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44쪽

번개의 힘을 상징하는 신성한 뱀의 몸뚱아리를 가지고 비의 신의 형상을 만들어 낸 것은 확실히 타당한 일이다. 만약 우리들이 이 이상한 우상을 만들어낸 정신 상태 속으로 들어가 본다면 초기의 문명에서 형상을 만든다는 것이 마술과 종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들 문자의 최초의 형태에도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고대 멕시코 미술에서 이 신성한 뱀은 방울뱀의 그림일 뿐만 아니라 번개를 나타내는 기호로, 뇌우를 기념하거나 불러오는 기호로 발전할 수도 있다. 우리가 미술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림과 문자는 매우 밀접한 혈연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두는 편이 좋을 것이다. -53쪽

마술의 힘으로 왕의 영혼이 그 형상 안에, 그리고 그 형상을 통해서 영원히 살아가게 도와주도록 했다. 실제로 조각가를 나타내는 이집트 말 중의 하나는 '계속 살아 있도록 하는 자'였다. ...
그들에게 가장 중요시되었던 것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완저함이었다. 모든 것을 가능한 한 아주 분명하게, 그리고 영원히 보존하는 것이 미술가의 과업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처음부터 어떤 우연한 각도에서 보이는 대로의 자연의 모습을 그리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림에 들어가야 할 모든 것이 극명하게 나타나도록 보장해 주는 엄격한 규칙에 따라서 그렸다. -58쪽

이집트 미술의 가장 위대한 점 가운데 하나는 모든 조각, 회화, 그리고 건축의 형식들이 마치 한 가지 법칙에 따라 배치된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우리는 인간의 모든 창조물들이 반드시 따라야만 되는 것으로 보이는 그러한 규칙을 양식이라고 부른다. 이집트 미술을 지배하는 규칙들은 개개의 작품에 균형과 엄숙한 조화라는 효과를 주고 있다. -65쪽

헬레니즘 미술은 이와 같이 거칠고 격렬한 작품을 선호했으며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기를 원했고 또 확실히 보는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준다. ...
헬레니즘 시대에 와서는 미술이 오래 전부터 유지해왔던 주술적, 종교적 연관성을 거이 상실했던 것 같다. 미술가들은 그들의 기술 자체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모든 움직임, 표정, 긴장 등을 담고 있는 그러한 극적인 싸움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표현해 내느냐 하는 문제는 한 미술가의 솜씨를 시험하는 가장 적합한 과제였다.
... 부자들이 미술 작품들을 수집하고, 원작품을 손에 넣을 수 없으면 그 유명한 작품을 복제하게 하고, 그들이 손에 넣을 수 있는 작품에 대해서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때이며 또 이러한 분위기에서였다. 저술가들은 미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여 미술가들의 생애를 글로 썼...-108쪽

회화에 포함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폼페이의 벽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정물화나 동물의 그림들, 심지어는 풍경화도 있다. 이것이 아마도 헬레니즘 시대의 가장 위대한 혁신이었을 것이다. 페이디아스나 프락시텔레스 시대의 그리스 미술에서는 인간이 미술가들의 주된 관심의 대상이었다. -113쪽

그리스 건축으로부터 자신의 취향에 맞는 것을 따다가 그것을 자신들의 필요에 맞게 응용하는 것이 로마인들의 특징이었다. 그들이 주로 원했던 것 중의 하나는 실물을 꼭 닮은 초상이었다. 초기 종교에서 한 역할을 했다. 당시 장례 행렬에는 선조의 밀랍 초상을 들고 가는 것이 하나의 관례였다. 이는 우리가 고대 이집트에서 본 바와 같이 실제 인물을 닮은 것이 영혼을 보존시켜 준다는 믿음과 연결되어 있음이 틀림없다. 그리스인들처럼 이상화하지 않음...-121쪽

미술의 성격을 변화시켰다. 미술의 주된 목적이 이제는 조화나 아름다움, 또는 극적인 표현에 있지 않았다. 로마인들은 대단히 현실적인 사람들로 공상적인 것에 관해서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 명확성과 단순성의 개념이 충실한 모방이라는 개념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 요는 이 시대의 미술가들은 헬레니즘 시대의 단순한 묘기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효과를 이룩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122쪽

311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정하고... 일단 교회가 국가의 최대 세력이 되자 미술과의 모든 관계는 재검토되어져야만 했다.
바실리카.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커다란 실물과 같은 조각상은 반대했지만 회화에 대해서는 생각을 달리했다. 6세기 말의 대교황 그레고리우스는 이 방침을 택했다.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에게 책이 해주는 역할을, 그림은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에게 해줄 수 있다"라고 했다.
이처럼 막강한 권위를 가진 사람이 회화를 옹호하고 나섰다는 사실은 미술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133쪽

이 그림이 우리에게 다소 원시적으로 보인다면 그것은 이 화가가 단순함을 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교회가 명확성을 강조했기 때문에 모든 사물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명확성을 중시했던 이집트의 관념이 되살아났다. 그러나 화가들이 이 새로운 시도에 사용한 형식들은 원시 미술의 단순한 형식이 아니라 그리스의 회화에서 한층 더 발전된 것이었다. 중세의 기독교 미술은 원시적인 방법과 세련된 방법이 기묘하게 혼합된 것이다. -134쪽

새로운 중세 양식의 출현을 보게 된다. 이집트인들은 대체로 그들이 존재한다고 '알았던' 것들을 그렸고, 그리스인들은 그들이 '본' 것을 그린 반면, 중세의 미술가들은 그들이 '느낀' 것을 그림 속에 표현하는 방법을 배웠던 것이다. -164쪽

1066년이라는 연대. 영국에 상륙한 노르만인들이 노르망디 및 그 이외의 지방에서 그들 세대 중에 형태를 갖추었던 발전된 건축 양식을 들여왔다. 수도원과 교회당을 건립해서 그 힘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영국에서는 노르만 양식으로, 유럽 대륙에서는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알려져 있다. 이 양식은 노르만 침략 이후 백 년 이상이나 번창하였다.
... 암흑시대라고는 해도 최초의 교회로 사용된 바실리카의 기억과 로마인들이 그들의 건축에 사용한 양식이 완전히 잊혀진 것은 아니었다.
... 로마네스크 건축. 대체로 육중한 각주가 받쳐주는 둥근 아치들. 내부와 외부의 전체적인 인상은 중후한 힘이다. 장식도 거의 없고 창문도 몇 개밖에 없었으며 중세의 성채를 연상시키는 견고하고 잇달은 벽과 탑뿐이었다. '전투적인 교회'라는 관념, 즉 이 지상에서 최후의 심판날 승리의 여명이 밝을 때까지 암흑의 세력과 싸우는 것이 교회의 의무라는 관념을 표현하고 있는 것같이 보인다. -171쪽

우리는 12세기가 십자군의 세기라는 것을 기억한다. 자연히 12세기는 이전보다 비잔틴 미술과의 접촉이 많아져서 그 시대의 많은 미술가들은 동방 교회의 장엄하고 성스러운 성상들을 모방하고 지지 않으려고 애썼다.
사실상 로마네스크 양식의 전성기 외에는 유럽 예술이 이런 종류의 동방 미술의 이념에 접근했던 시대는 없었다.
이 시기의 회화는 사실 그림을 통해 글을 쓰는 형식으로 되어가고 있었다. 보다 단순화된 표현 방법으로의 복귀는 중세의 미술가들에게 보다 복잡한 형식의 구성을 실험하는 새로운 자유를 주었다. 이러한 방법들이 없었더라면 교회의 가르침은 결코 가시적인 형상으로 번안될 수 없었을 것이다. -180쪽

서유럽의 미술은 언제나 새로운 해결책과 새로운 이념을 찾아 한시도 쉬지 않았다. 로마네스크 양식은 12세기를 넘기지 못하였다. 궁륭 천장을 만들어 새롭고 장엄한 방식으로 조각상을 배치하는 데 성공하자마자 또 다른 이념이 노르만과 로마네스크 양식을 구식으로 만들어버렸다. 이는 프랑스 북부에서 시작되었다. 바로 고딕 양식의 원리였다. 육중한 도롤 벽을 쌓을 필요가 없어지고 그 대신 큰 창문을 낼 수 있었다. 첨형 아치. 공중 부벽. -185쪽

육중하고 엄격한 과거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들은 '전투적인 교회'라는 인상을 주었을 테지만... 새로운 고딕 성당들은 육중하고 세속적이고 단조로운 것은 모두 다 제거되었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 돌더미의 무게를 잊게 되며 건물 전체가 신기루처럼 눈 앞에 떠오르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 그들은 다시 한 번 자연을 모사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형상을 실감나게 보이게 하기 위해 자연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 그리스 미술과 고딕 미술사이에는 대단히 큰 차이가 있었다.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 미술가들은 아름다운 육체의 이미지를 어떻게 형상화하느냐에 관심을 기울인 반면 고딕 미술가들에게는 이 모든 방법과 기교가 하나의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으며 그 목적은 성경의 이야기를 한층 더 감동적으로, 신빙성 있게 전달하는 것이었다. -188쪽

고딕 조각의 실물과 같은 조각상들을 회화에 대입할 수가 있었다. 이처럼 천재적인 이탈리아 미술은 피렌체의 화가 조토 디 본도네. 조토는 평평한 평면에서 깊이감을 느끼게 하는 기술을 재발견한 것이다. 회화의 개념 전체를 변경하게 만들었다. 그는 그림으로 기록하는 수법을 쓰지 않고 그 대신에 성경의 이야기가 바로 눈 앞에서 전개되는 것과 같은 환영을 창조해 낼 수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회화는 기록된 문자의 대용품 이상의 것이었다. 우리는 마치 무대 위에서 행해지고 있는 실제 사건을 보고 있는 느낌을 받게 된다.
조토의 명성은 널리 세상에 퍼져서 그의 생애에 흥미를 가졌으며, 이것 역시 상당히 새로운 현상이었다. 조토의 시대 이후 처음에는 이탈리아에서, 뒤이어 다른 나라에서도 미술사란 위대한 미술가들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201쪽

12세기 중반의 유럽은 아직 인구가 적은 농부들의 대륙이었고 권력과 학문의 중심지는 수도원과 귀족들의 성이었다. 자신의 위세당당한 대성당을 갖고자 하는 대주교들의 야심은 도시의 시민적 자부심이 일깨워졌음을 알리는 최초의 징후였다. 그러나 약 150년 뒤 도시들은 상업의 번화한 중심지로 성장했고 시민들은 점차로 교회와 봉건 영주들의 권력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14세기의 취향이 장대한 것보다는 세련된 것들을 추구했다고 말할 수 있다.
영국에서는 소위 '초기 영국 양식'이라고 알려진 순수한 고딕 양시고가 그후에 생긴 '장식적 양식'이라고 얄려진 것으로 구분된다. 장식과 복잡한 트레이서리를 통해 솜씨를 과시하고자 했다.
... 많은 세속적인 건물들이 필요했다.
... 우아하고 섬세한 세부 묘사에 집착했다.
.. 우아한 설명과 충실한 관찰이라는 두 요소들이 점차 하나로 융합하기 시작한 것은 14세기에 들어와서였다.
-207쪽

가장 명료하고도 인상적으로 성경 이야기를 전달하는 가장 좋은 방식이 무엇인가 하는 것으로부터 자연의 일면을 가장 충실하게 재현하는 방식에 대한 것으로 점차 변해왔다. -218쪽

이탈리아인들은 고트족 때문에 로마 제국이 몰락했다고 생각했으므로.. 그 중간 시기의 미술을 고딕 미술이라고 부르고 '야만족'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게 됐다. 예술과 과학이 고전 시대에 번창했으나, 이 모든 것들이 거의 다 북쪽의 야만인들에 의해 파괴되었기 때문에 스스로가 이 영광스러운 과거를 다시 부흥시켜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 이러한 자신감이 강하게 나타난 곳은 바로 단테와 조토의 출생지이며 부유한 상업 도시인 피렌체였다.
브루넬레스키는 르네상스 건축의 창시자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원근법의 발견은 그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짐작된다. 미술가들에게 이 문제를 수학적으로 해결하는 수단을 제공해 준 사람이 바로 브루넬레스키였다.
마사초의 <성 삼위 일체>는 수학적인 법칙에 근거하여 그려진 최초의 그림 중 하나이다. 이 그림의 인물상들은 사실 조각상처럼 보인다. 원근법적인 틀 아래 배치함으로써 강조한 것은 바로 이런 효과였다. 우리는 손으로 그들을 만져볼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된다. -224쪽

과학과 고전 미술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은 얼마 동안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미술가들의 전유물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과거에 존재했던 어떤 것보다 더 자연에 충실한 새로운 미술을 창조하려는 정열적인 의지는 북쪽에 사는 동 세대의 미술가들에게도 영감을 주었다.
북유럽의 사실성의 정복을 최종적으로 완수한 사람은 얀 반 에이크였다. 전혀 새롭고도 '세속적인' 표현 방식. 가장 놀라운 부분은 타락 이후의 아담과 이브의 모습. 정말로 벌거벗은 모습. 반 에이크는 그리스와 로마의 미술 전통을 결코 완전히 버리지 않았던 이탈리아의 초기 르넹상스 대가들과 진정으로 대치된다. 반 에이크는 인물의 형상을 '이상화'하려고 하지 않았다. 마사초만큼 급진적으로 국제 양식의 미술 전통과 결별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랭부르 형제 같은 미술가들의 방법을 추구해서 그것을 완벽한 경지로 이끌었기 때문에 중세 미술의 개념에서 한 걸음 앞으로 전진하게 되었다. 자연에 대한 관찰은 인내심 있었고 세부 묘사도 정확했다. 그림 세부까지도 정확하게 재현하는 데 골몰.
-235쪽

같은 세대의 남유럽의 미술가들은 원근법적인 선으로 틀을 짜는 것으로 시작해서 해부학과 단축법의 법칙에 관한 지식을 통해 인체를 구축해 갔다. 반면 반 에이크는 정반대의 방법을 사용했다. 그는 그림 전체가 가시적인 세계의 거울처럼 될 때까지 미세한 세부까지 묘사하면서 자연의 환영을 만들어 갔다. 북유럽과 이탈리아의 미술은 이런 면에서 오랫동안 중요한 차이를 보여왔다.
세세한 부분을 분명하게 창조하기 위해 반 에이크는 회화의 기법을 개량해야 했다. 유화의 발명자.
반 에이크의 예술은 초상화에서 가장 위대한 승리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현실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전달하고자 하는 이러한 시도를 위해 반 에이크는 마사초와 마찬가지로 국제 고딕 양식의 쾌적한 형식과 유려한 곡선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239쪽

15세기 후반: 이탈리아

15세기 초 화가들과 후원자들은 미술을 성경의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표현하는 데만 사용하는 게 아니라 현실 세계의 한 단면을 거울처럼 반영하는 데에도 이용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매혹되었다. 아마도 미술에 있어서 이 거대한 혁명의 가장 직접적인 결과는 모든 곳의 미술가들이 새롭고 놀라운 효과를 얻기 위해 실험과 탐구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모험 정신은 중세와의 진정한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다.
1400년까지는 유럽 각지의 미술이 비슷한 수준으로 발전해 갔다. 국제 양식.
... 중세 말기에 이릊, 시민과 상인들로 구성된 도시가 점차 봉건 영주의 성보다 중요한 것으로 발전하게 되자 이러한 모든 점들도 변해갔다. -247쪽

알베르티.
고전적인 건축 양식을 집과 주택 건축에 절충시켜 냄. 건물의 구조를 변경시키지 않으면서 고전적인 양식의 벽기둥과 엔타블레이처를 건물 벽에 덮었다. 또한 고딕식 설계 방식을 고전적인 형식으로 번안했다.
새로운 것과 낡은 것, 고딕 전통과 근대적인 양식 사이의 절충은 15세기 중엽의 많은 거장들의 특징이었다. -249쪽

미술이란 과학과 전혀 다른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미술가의 수단이나 그의 기술적인 방법은 발전할 수 있으나... 어떤 한 방향으로의 새로운 발견은 다른 방향에서의 새로운 어려움을 낳는다. 중세 화가들은 정확한 소묘의 규칙은 알지 못했으나 바로 이러한 결함이 그들로 완벽한 구성을 창출하기 위해 좋아하는 방식대로 화면 전체에 인물을 배치할 수 있도록 허용했던 것이다. ... 현실 세계를 거울과 같이 반영하는 그림을 그리는 새로운 관념이 채택되자마자 인물들을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이전처럼 용이하지 않았다. -260쪽

15세기: 북유럽

북유럽과 이탈리아의 차이점을 가장 분명하게 보이는 것은 건축이었다. 이탈리아 이외의 나라에서 고딕 양식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한 세기나 뒤의 일이었다. 15세기 내내 고딕 양식을 계속 발전시켜 갔다. 15세기에는 복잡한 트레이서리와 환상적인 장식에 대한 취향이 더욱 강해졌다.
고딕 양식의 마지막 단계.
프랑스의 플랑부아양 양식
영국의 수직 양식.
이탈리아 미술에 비해서 이상적인 조화와 아름다움을 성취하는 데 관심을 적게 가졌던 북유럽 미술은 일상 생활을 매력적으로 묘사하는 표현법을 더 선호하게 되었다. 사물의 질감과 표면에 관심. 고딕 미술의 주요 개념들을 새로운 사실적인 양식으로 번안.
-269쪽

15세기 중엽 목판화 기법, 동판화 기법 발명. 목판술과 동판술은 순식간에 전 유럽에 전파되었다. 판화는 유럽의 예술가들에게 서로 다른 유파들의 미술 개념을 배울 수 있게 해준 또 하나의 새로운 수단이 되었다. 마치 인쇄술의 발명이 사상의 교환을 재촉하여 종교 개혁이 일어났듯이 그림의 인쇄는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의 승리를 보장해 주었다. 그것은 북유럽의 중세 미술에 종지부를 찍게 만든 여러 원동력 중의 하나였다. -281쪽

16세기 초: 토스카나와 로마.

자연의 신비 탐색, 우주 법칙 밝혀 내면서, 미술가들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졌다. 이전에는 군주가 미술가에게 호의를 베풀었다면, 이제 그 역할이 바뀌었다. 마침내 미술가가 자유인이 된 것이다.
-288쪽

라파엘로는 그림이 불안정하거나 균형을 잃지 않게 하면서 화면 전체에 끊임없는 움직임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인물들을 배치하는 이러한 탁월한 솜씨, 구도를 만드는 최고 극치에 달한 그의 숙련된 솜씨.
미켈란젤로가 인체의 묘사에 있어서 최고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인정되듯이, 라파엘로는 이전 세대의 화가들이 이룩하려고 그처럼 노력했던 것, 즉 자유롭게 움직이는 인물들을 완벽하고 조화롭게 구성해 낸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경탄해 마지 않는 또 하나의 특징은 인물들의 완전한 아름다움. '이상적인 아름다움'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떻게 도식화된 형태에서 천천히 자연과 비슷하게 되어가면서 생겨나게 되었는지 기억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 과정이 반전되었다. 미술가들은 고전 시대의 조각을 보고 자신의 머릿속에 형성된 아름다움의 이념에 따라 자연을 수정시키려고 노력했다. 모델을 이상화한 것이다. 하지만 라파엘로는 생명력과 성실성을 잃지 않고도 이상화시켜 냈다. -319쪽

16세기 초: 베네치아와 북부 이탈리아.

베네치아는 동방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어서 르네상스 양식을 다른 이탈리아 도시보다 더디게 받아들였다.
빛 속에 둘러싸인 해변의 분위기가 다른 곳보다 더 민감하게 색채를 사용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 인물과 형태들을 하나의 통일된 구성으로 결합시키는 데 색채를 주된 수단으로 생각한 화가는 매우 드물었다. 베네치아는 색채를 그림 위에 덧붙이는 부가적인 장식으로 여기지는 않았던 것 같다.
... 중부 이탈리아의 고전기 화가들이 완전한 화면 구성과 균형잡힌 구도로써 그들의 그림 속에 새롭고 완전한 조화를 이룩했다고 한다면, 베네치아의 화가들이 색채와 빛을 그처럼 행복하게 사용하여 화면 전체에 통일성을 부여한 조반니가 보여 준 모범을 따르는 것은 당연하다. -325쪽

조르조네의 폭풍.
분명히 화면 전체에 스며 있는 비초가 공기에 의해 하나의 전체로 융합되어 있다. 풍경이 이제 단순한 배경으로만 보이지 않으며, 그 나름대로 진정한 주제가 되고 있다. ...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거의 원근법의 창안과 맞먹는 새로운 영역을 향한 하나의 발돋움이었다. 이제부터 회화는 소묘에 채색을 더한 것 이상의 의미가 되었다.
... 티치아노. 물감을 다루는 뛰어난 솜씨는 미켈란젤로의 소묘 솜씨에 필적했다. 그 솜씨로 하여금 전통적인 구도의 규칙을 무시하게 했으며 파괴한 듯이 보이는 통일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색채에 의지하게 만들었다. 구도의 오래된 규칙들을 과감히 뒤엎은 대담성. 이 예기치 않은 구도는 전체적인 조화를 깨트림 없이 오히려 그림을 생기 있고 활기차게 만들어 주었다. 이는 빛과 공기와 색채로 장면을 통일시켰기에 가능하였다. -329쪽

북부 이탈리아의 소읍인 파르마에서도 후대 사람들에 의해 16세기 초 이탈리아에서 가장 '진보적'이고 가장 과감한 혁신가로 평가되었던 한 화가가 외롭게 생활하고 있었다. 일명 코레조. 코레조는 색과 빛을 사용하여 형태에 균형을 주고, 보는 사람의 시선을 일정한 방향으로 인도할 수 있다는 발견을 티치아노보다 더 잘 활용하였다. -337쪽

16세기 초: 독일과 네덜란드

이탈리아 거장들의 위업인 과학적 원근법, 해부학, 고전 시대의 건축 형식에 관한 지식을 접한 북유럽인들은 충격을 받게 됨.
뒤러는 환상적이며 환영적인 세계를 그리는 거장이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끊기 있게, 충실하게 자연의 아름다움을 관조하고 자연을 모사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
그뤼네발트. 그는 이탈리아 미술의 위대한 발견들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가 생각하는 미술의 이념에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한도 내에서만 그것들을 활용했다. 그에게 있어서 미술은 아름다움의 숨겨진 법칙을 찾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목적, 중세의 모든 종교 미술의 목적인 그림으로 설교를 제공해주고 교회가 가르친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었다. ... 그는 르네상스 이래로 발전되어 온 근대 미술의 법칙들을 거부하고 인물들의 중요성에 따라 그 크기를 변화시켰던 중세와 원시 시대의 원칙들로 의도적으로 되돌아 간 것이 분명하다.
... 이 시기의 위대한 네덜란드 미술가는 새로운 양식을 따르는 미술가가 아니라 그뤼네발트처럼 남유럽에서 밀려오는 새로운 물결에 휩쓸리기를 거부한 이들 가운데 찾아볼 수 있을-341쪽

16세기 후반: 유럽

1520년경 이탈리아 도시들의 모든 미술 애호가들은 회화가 완성의 극에 달했다는 사실에 의견의 일치를 본 것 같다. ... 그 당시의 젊은 미술가들이 미켈란젤로의 ㅈ가품의 유행에 휩싸여 단순히 그의 수법만을 모방했기 때문에 잘못되었다고 보는 후대의 비평가들은 이 시기를 가리켜 매너리즘이라고 불렀다. 사실 많은 미술가들은 미술이 마침내 정지해 버린 것인지, 또는 그 이전 시대의 거장들을 능가하는 것이 정말로 불가능한 것인지, 인체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는 그들을 능가할 수 없다 하더라도 다른 방면에서도 과연 그러할 것인지 등에 대해 의심해 보았다.
... 즉 거장들의 작품은 완벽하다. 그러나 완벽한 것이 영원히 흥미로운 것은 아니다. 일단 거기에 익숙해지면 그러한 작품은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인가 놀랍고, 기발하고, 전에는 들어보지도 못한 그런 것을 추구하려고 한다. 괴상하고, 기교에 치우친 쓸데없이 복잡한 실험. 흥미있고 비범한 것을 만들려는 당대의 불안정하고 열광적인 노력들.
파르미자니노. 완벽한 조화에 관한 고전적 해결 방식만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361쪽

16세기 후반 베네치아 출신의 틴토레토. 그도 역시 티치아노가 베네치아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던, 형태와 색채에 있어서의 단순한 아름다움에 진력이 나 있었다. ... 그의 그림들은 감동적이라기보다는 쾌감을 주는 경향이 더 많다고 느꼈던 것 같다. 그는 이 성경의 이야기들을 아주 다른 방식으로 보여 주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가 그린 사건의 긴장감과 극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하고자 결심했음이 분명하다.
<성 마르코의 유해 발견>, 극단적으로 대조되는 빛과 어둠, 원경과 근경 및 조화가 결여된 몸짓과 동작. 그는 엄청난 기적의 인상을 창조하기 위해 조르조네와 티치아노가 이룬 원숙한 색채의 아름다움까지 희생해야만 했다. <용과 싸우는 성 게오르기우스>에서도 음산한 빛과 불안정한 색조가 어떻게 긴장괌가 흥분감을 고무시키는지를 보여 준다. ... 틴토레토와 같은 사람은 사물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고자 했으며 또 과거의 전설과 신화를 표현하는 새로운 방법을 탐구하고자 했다. 세심한 마무리 손질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368쪽

엘 그레코. 크레타 섬 출신으로 베네치아로 왔다가 스페인으로 감. 격정적이고 신앙심이 깊은 사람. 성경을 새롭고 감동적인 방법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충동. 자연적인 형태와 색채를 대담하게 무시하고, 감동적이고 극적인 환상을 창조하는 데 있어서 엘 그레코가 틴토레토를 능가하게 만든 이유. -373쪽

북유럽에서는 이탈리아나 스페인의 미술가들이 겪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고 있었다. 회화가 계속 존속할 수 있는 없느냐는 심각한 문제. 종교 개혁에 의해서 초래되었다. 많은 신교 교도들은 교회 안에 서인들의 그림과 조각상을 두는 것을 반대하고 그것을 구교의 우상 숭배로 간주했다. 신교 지역에 사는 화가들은 그들의 가장 큰 수입원, 즉 제단화를 그리는 일을 잃게 되었다.
... 독일의 한스 홀바인. 초상화. -374쪽

유럽의 신교 국가 중에서 종교 개혁이 불러일으킨 위기를 무사히 넘긴 유일한 나라는 네덜란드였다. 네덜란드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회화가 번창했으며 미술가들은 그들이 처해 있는 곤겨에서 빠져나갈 길을 발견했다. 초상화에만 매달리지 않고 신교 교회들이 반대하지 않을 주제를 찾아 그러한 모든 유형을 전문화하였다. ... 전문화는 사실 이 나라의 미술가들에게는 그렇게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히에로니무스 보스가 예술의 위기가 시작되기 전부터 지옥과 악마의 그림을 전문적으로 그렸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북유럽 화가들이 주제를 어떤 종목 또는 부분으로 한정해서 의도적으로 개발한 그림, 특히 일상 생활의 장면들을 묘사한 그림들을 뒤에 가서 소위 '풍속화'라고 부르게 되었다.
16세기 최대의 풍속화가는 브뢰헬. 농민들의 생활 장면. -380쪽

17세기 전반: 가톨릭 교회권의 유럽

르네상스를 뒤이은 양식을 보통 바로크라고 부른다. 이전의 양식들은 각각 뚜렷한 특징을 가지고 있어서 식별하기 용이하였으나 바로크의 경우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 바로크라는 말은 터무니없다든가 기괴하다는 의미로, 그리스와 로마 인들이 채택한 방법 이외의 다른 식으로 고전 건축의 형식을 차용하거나 채택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던 사람들이 사용하던 단어였다.
... 유럽 전역에 걸친 종교 개혁에 대항해서 싸우려는 드높은 기대를 걸고 설립된 예수회 교단의 교회. -387쪽

... 매너리즘의 막다른 골목에서 벗어나 회화가 그 이전 시대의 거장들의 양식보다 더 풍부한 가능성을 지닌 양식으로 발전하게 된 과정은 여러 모로 바로크 건축의 발달사와 비슷하다. 틴토레토아 엘 그레코의 작품들 속에 새로운 이념이 성장했음을 보았다. 빛과 색의 강조라든가, 단순한 균형을 무시하고 보다 복잡한 구도를 선호한다든가 하는 것이다. 17세기 회화는 미술이 매우 위험한 상투적인 방식에 빠졌으며 거기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사람들은 미술에 관해 이야기하기를 즐겨했다. 미술가들 사이의 다양한 동향이나 운동에 관해 토론하고... 그러한 논쟁 자체는 미술의 세계에서 처음 있는 현상이었다. 16세기에는 회화가 조각보다 나은 예술이냐, 또는 구도가 색채보다 더 중요하냐 아니면 그 반대인가 하는 식의 문제로 논쟁을 벌였다(예컨대 피렌체 사람들은 구도를, 베네치아 사람들은 색채를 높이 평가했다). -390쪽

안니발레 카라치와 카라바조라는 정 반대의 수법으로 작품을 제작하는 두 화가.
둘 다 매너리즘에 진력이 났던 것 같다. 하지만 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대단히 달랐다. 카라치는 베네치아 파였으며, 라파엘로의 작품에 매료되었다. 그는 매너리즘 화가들이 의도적으로 거부했던 라파엘로의 단순성과 아름다움을 다시 회복시키고자 했다. ... 그림 자체는 초기 르네상스 화가의 그림처럼 구도가 단순하고 조화롭다. 하지만 구세주 몸 위에 아른거리는 빛의 묘사 방식이라든가 감정에 호소하는 표현 방식은 르네상스 양식과는 아주 다른, 말하자면 바로크적이다. -390쪽

카라바조에게는 추한 것을 두려워하는 것(카라치의 방식)이 경멸할 만한 약점으로 보였다. 그가 원하는 것은 진실, 즉 그가 본 그대로의 진실이었다. 그는 고전적인 규범을 좋아하지 않았고, 또 '이상적인 아름다움'이라는 것도 신통치 않게 생각했다. 그는 인습을 타파하고 미술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고 싶었다. 그는 쏟아지는 비난을 받은 최초의 화가들 중 한명이었으며, 또한 그의 예술관이 비평가들에게 하나의 문구로 집약되었던 최초의 화가이기도 했다. 그들은 그를 '자연주의자'라고 불렀다. <의심하는 토마>
카라바조의 자연주의, 다시 말하면 우리가 그것을 추하다고 생각하든 아름답다고 생각하든 간에 자연을 충실하게 모사하려는 그의 의도는 아마도 아름다움에 중점을 두는 카라치의 태도보다 더 돈독한 신앙심에서 우러나온 것 같다. -392쪽

자연의 숭고한 아름다움에 처음으로 사람들의 눈을 뜨게 만든 화가는 바로 클로드 로랭이었고...
루벤스, 안토니 반 다이크, 벨라스케스...
자연을 새로운 눈으로 보고 관찰하며 색채와 빛의 새로운 조화를 끊임없이 발견하고 그것을 누리는 것이 화가의 기본적인 과제가 되었다. -397쪽

17세기: 네덜란드

네덜란드의 북쪽 지방 사람들은 그들을 지배하는 스페인의 가톨릭 군주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 부유한 상업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신교를 믿었던 것이다. 이들의 태도는 경건하고 근면 절약하며 대부분 남쪽 지역의 호사스러운 허식을 싫어하는 사람들이었다. .. 17세기 네덜란드 시민들은 유럽의 가톨릭 국가들을 휩쓴 바로크 양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건축에 있어서조차도 이들은 수수하고 절제된 양식을 선호했다.
신생 네덜란드에서 최초로 출현한 거장 프란스 할스. 그의 초상화들은 화가가 주문한 사람을 어떤 특정한 순간에 '포착해서' 그의 화폭에 영원히 고정시켰다는 인상을 준다. ... 바로크 시대의 다른 거장들과 마찬가지로 할스도 규칙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면서도 훌륭하게 균형감을 이룩해내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 네덜란드 화가들은 중세나 르네상스의 대가들과 달리 먼저 그림을 그려놓고 나서 구매자를 찾아나서야 했다. ... 화상에게 의뢰할 수밖에 없었다. 화가들 사이의 경쟁도 치열했다. -413쪽

렘브란트 반 레인. 할스는 실감나는 스냅 사진 같은 느낌을 주는 반면, 렘브란트는 인물의 전생애를 다 보여주는 것 같다. 할스와 마찬가지로 렘브란트도 그의 예술적인 기량, 즉 끈의 광택이나 주름깃에 아롱거리는 광선 등을 표현하는 기량을 마음껏 과시했다. 그는 하나의 그림이 완성되었다고 판단할 권리는 화가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한 완성은 '화가가 그의 목적을 달성한 때'라고 했으며...
전에 뒤러가 그랬던 것처럼 렘브란트도 화가로서뿐만 아니라 판화가로서도 역시 위대한 거장이었다. 에칭.
당대의 다른 미술가들처럼 렘브란트도 카라바조의 교훈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 역시 조화와 아름다움보다는 진실과 성실성을 더 중요시했다. -422쪽

네덜란드 화가들은 유쾌하고 소박한 방식으로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상을 묘사하는 북유럽 미술의 전통을 따르고 있었다. 이러한 전통은 중세의 세밀화-브뤼헬로 이어진다. 이런 전통의 흐름을 완성시킨 17세기 화가는 얀 스텐.
이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 렘브란트 정신에 가까운 풍경화 전문가인 야콥 반 로이스달.
정물화 그림들은 대개 식당에 걸리게 마련이었고 그래서 꾸준히 구매자를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식탁의 즐거움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화가들이 그리고 싶은 물건을 자유롭게 선택해서 배치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정물화는 미술가들이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훌륭한 실험장이 되었다. ... 그림의 주제란 과거에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 보여 주기 시작했다.
... 중요한 주제가 없는 위대한 그림도 있을 수 있다. 17세기 화가들이 가시적인 세계의 순수한 아름다움을 발견했을 때 모색했던 것은 중요한 주제가 없이도 그림이 될 수 있다는 이 새로운 발견이었다. 주제라는 것은 부차적인 것이 될 수도 있음을. -427쪽

이러한 네덜란드의 전문화가들 중 가장 위대한 사람은 얀 베르메르 반 델프트. 베르메르와 함께 유머러스한 요소는 풍속화에서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그의 그림은 사실 인물이 들어 있는 정물화이다. -430쪽

17세기 후반과 18세기: 이탈리아

바로크 건축의 시작인 델라 포르타는 보다 많은 다양성과 인상적인 효과를 살리기 위해 소위 고전적인 건축 규칙이라는 것을 무시해 버렸다. 다양하고 인상적인 효과가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면 그 이후 미술가들은 더 복잡한 장식과 더 놀라운 아이디어를 고안해 내야만 했다. 17세기 중엽에 가면 소위 바로크라고 불리는 양식은 완전하게 발전하게 된다.
보로미니. 바로크 양식의 소용돌이 장식과 곡선이 건물의 전반적인 설계와 장식적인 세부까지 지배하고 있다. 지나치게 장식적이고 극장의 무대와 같이 과장되어 있다는 평을 들어 왔다.
... 눈부신 장식이 너무 세속적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신교가 교회의 외면적인 치장에 반대하는 설교를 하면 할수록 로마 교회는 더욱 열렬하게 미술가이 힘을 빌리려고 했다. 우상 숭배의 문제. 가톨릭 세계는 중세 초기 미술에 부여했던 단순한 임무, 즉 글을 못 읽는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역할 이상으로 미술이 종교에 공헌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찬란함과 아름다움으로 보는 이를 거의 압도해 버리는 거대한 장식물로 만들..-435쪽

이러한 현란한 미술은 주로 베르니니라는 미술가에 의해 발전되었다.
가울리.
18세기 이탈리아 미술가들은 대부분 뛰어난 실내 장식가들이었으며...
이탈리아 미술은 18세기 초에 단 한 가지의 특수한 분야에서만 새로운 이념을 창조해 냈다. 그것은 대단히 특징적인 것으로 풍경을 묘사한 유화와 동판화였다. 과거 이탈리아의 위대한 영광을 감탄하기 위해 유럽 전역에서 모여든 여행객들은 흔히 돌아갈 때 갖고 갈 기념품을 원했다. 그런 유파가 생겨났다. -437쪽

17세기 말과 18세기 초: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17세기 말의 가장 강력한 통치자였던 프랑스의 루이 14세의 경우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는 왕권의 화려함과 영화를 과시하기 위해... 베르니니를 파리로 초빙... 베르사유 궁전.
베르사유가 바로크 양식인 것은 장식적인 세부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거대한 규모 때문이다.
... 1700년을 전후한 시대가 건축에 있어서는 가장 위대한 시대였으며 그것은 비단 건축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모든 예술은 환상적이고 인위적인 세계의 효과를 높이는 데 기여해야만 했다. 소도시 전체가 마치 무대 장치처럼 이용되었으며...
이러한 교회의 건물 안에서는 '자연스럽'거나 '정상적인' 것이 하나도 없으며 또 그런 것을 의도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보는 사람에게 천국의 영광을 미리 맛보게 해주기 위한 것이었다. -447쪽

... 이탈리아에서와 마찬가지로 알프스 북쪽에서도 미술의 각 분야가 이러한 장식의 북새통에 휩쓸려 들어가버렸으며 각 분야의 독자적인 중요성을 많이 상실했다. 18세기의 거장은 앙투안 바토밖에 없는 것 같다. 환상적인 생활을 그리기 시작...
그것은 로코코라고 알려져 18세기 초의 프랑스 귀족들의 취향을 반영하는 것이 되었다. 로코코는 바로크 시대의 호방한 취향을 이어받아 들뜬 경박함 속에 표현되는 화려한 색채와 섬세한 장식의 유행을 말한다. 바토는 단순히 당대의 유행의 대변자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위대한 예술가였다. -454쪽

18세기: 영국과 프랑스

18세기 즈음하여 유럽의 가톨릭 국가에서는 바로크가 절정에 달해 있었다. 신교 국가들에서도 이 유행에 무관심할 수는 없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채용하지는 않았다. 심지어 영국의 왕정 복고 시기(청교도적 취향과 세계관을 싫어했던)에도 그랬다.
크리스토퍼 렌. 세인트 폴 대성당은 강인함과 안정감. 괴상한 것이나 환상적인 면이 하나도 없다. 모든 형태들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최고의 모델들을 엄격하게 따르고 있다.
그 목적은 이 세상이 아닌 천국의 환상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신도들의 생각들을 집중시키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18세기 영국에서 건축에 관한 모든 취향을 규정하는 최고의 권위서, 팔라디오가 쓴 교과서.
... 그 이유는 벌링턴 경과 알렉산더 포프 시대의 영국에서는 취향의 척도가 이성의 척도였기 때문이다. 영국의 전반적인 기질은 바로크 식 장식에 나타난 공상의 비약에 반대했고 또 감정을 압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그런 예술에도 반대했다. 베르사유 궁의 정원은 불합리하고 인공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들이 생각하는 정원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반영해야-457쪽

클로드 로랭의 그림에서 유래한 정원관이 유행.
신교의 승리와 성상이나 사치에 대한 청교도들의 적대 의식이 영국의 미술 전통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유일하게 수요가 여전하던 초상화 영역에서도 주로 홀바인이나 반 다이크 같은 외국 화가들이 충족시켰다. 영국으로 초청된 화가들.
옛 거장의 작품을 수집하는 감정가들.
이러한 현상에 윌리엄 호가스는 분노. 그는 의도적으로 국민들의 관심을 끌 새로운 양식을 창조해내고자 함. 그는 사람들이 '그림의 효용이 무엇인가'라고 묻고 싶어한다는 것을 깨닫고 청교도적인 전통에서 성장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 교훈적인 내용을 그릴 것을 계획했다.
<탕아의 편력>-461쪽

18세기 영국의 상류 사회를 만족시킬 수 있는 그림을 그린 영국의 화가 조슈아 레이놀즈 경이 탄생. 이탈리아 여행, 르네상스 거장들이 진정한 미술의 모범이라고 생각. 라파엘로의 소묘와 티치아노의 채색을 연구하고 모방하고자 함. 영국 왕립 미술원의 초대 원장. 레이놀즈는 거창하고 감동적인 것만이 위대한 예술이라고 불릴 가치가 있다고 믿었다. 그는 역사화의 우월성을 진지하게 믿었으나 ... 영국 상류사회가 필요로하는 것은 초상화라는 사실을 인정. -464쪽

토머스 게인즈버러. 레이놀즈의 적수. 게인즈버러는 레이놀즈에 비해 창안에 훨씬 관심을 덜 가지고 있었다. 자수성가한 사람. 레이놀즈와 게인즈버러는, 카라치(라파엘로를 부활시키고자 함)와 카라바조(자연 외에는 어떤 스승도 인정하지 않았음)의 관계를 연상시킴. 대가들의 수법을 답습하기를 거부한 천재. 레이놀즈는 역사화를 갈망, 게인즈버러는 풍경화를 갈망.
호가스에게 만족했던 대중, 레이놀즈, 게인즈버러에게 초상화를 의뢰한 이들은 모두 일반 사람들. 이제 귀족풍의 몽상적인 세계는 퇴조하기 시작. 당대의 보통 사람들에게 눈을 돌리고 이야기로 엮어 낼 수 있는 감동적인 에피소드 그리기 시작. 대표적 화가는 장 밥티스트 시메옹 샤르댕. -468쪽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영국, 미국 및 프랑스

근대는 1492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으로 시작한다. 이 시기는 화가나 조각가가 일종의 천직으로서 별도로 취급되던 르네상스 시대였다. 또한 종교 개혁으로 종교 성상이 필요치 않게 되어 미술가들이 새로운 시장을 찾을 수밖에 없었던 시기였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변화는 없었다. 그들은 여전히 길드와 협회를 조직했고 도제를 거느렸으며, 귀족들의 초상화 주문에 의존하고 있었다. 1492년 이후에도 유한 계급의 생활 속에 당연히 있어야 할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이상주의자'들도 미술가가 자연을 연구해야 하고 나체화로 그림을 공부해야 한다느 ㄴ점에는 동의했으며, '자연주의자'들도 고대의 작품들이 최고의 미를 지니고 있다는 데는 동의했다.
하지만 18세기 말에 이르러 공통된 기반은 점점 무너지기 시작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으로. -475쪽

프랑스 혁명은 이성의 시대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미술에 대한 관념이 변화한 것도 이 시기부터였다.
첫째로, '양식'에 대한 미술가들의 태도. 양식을 의식하기 시작. .. 건축상의 관례와 전통을 미심쩍은 눈으로 보게 되었다. 많은 관례들이 고대 그리스 건축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발견. 올바른 양식을 먼저 찾아야만 했다. '그리스 복고'.
혁명기의 사람들은 자신들을 새로 태어난 아테네의 자유 시민이라고 생각했다. 신고전주의 건축 양식은 제정 양식이 되었다.
고딕 양식의 부활도 나란히 존재했고, 이는 이성의 힘에 실망하고 '신앙의 시대'로 돌아가자는 낭만주의자들의 호응을 얻었다. -476쪽

이제 그림 그리는 일은 장인으로부터 도제로 전승되는 보통의 직업이 아니었다. 그림이란 아카데미에서 가르쳐야 하는 철학과 같은 과목이 되어 버렸다. 16세기 이탈리아 거장들은 자신들의 위대한 업적이 학자들과 맞먹는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자신들이 모이는 장소를 아카데미라고 불렀다. 이러한 아카데미가 학생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는 장소가 된 것은 18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왕실의 후원을 받았다. -480쪽

그림과 조각을 사려는 구매자들과 관련하여 문제가 생겼다. 사람들은 당대의 작품이 아니라 옛 거장의 작품을 사고자 했기 때문. 이에 생긴 것이 연례 전시회. 이제 미술가들은 요구하는 것이 무언지 분명한 개인 후원자들이나 취향을 짐작할 수 있는 일반 대중을 위해 작품을 만드는 대신 전시회에서 성공하기 위한 작품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에 대한 뚜렷한 결과는, 미술가들이 도처에서 새로운 종류의 주제를 찾아냈다는 것. 18세기 중반 이전에는 주제의 폭이 좁았다. .. 프랑스 대혁명 이후로 급속히 변해버렸다. 미술가들은 셰익스피어 작품의 한 장면에서부터 시사적 사건에 이르기까지 상상력에 호소하고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모든 것을 그들의 주제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고 느꼈다. -481쪽

프랑스 대혁명은 역사적 사건에 대한 관심, 영웅적 주제에 관한 그림을 등장시켰다. 로마 풍의 장려함이라고 부르는 취향을 반영. 신고전주의 양식의 지도자는 자크 다비드.
구태의연한 주제를 내팽개친 이로는 스페인의 고야. 이미 알려진 주제는 일절 그리지 않았다는 것. 대개 마녀, 요괴들의 환상이 주제. 이것이야말로 전통이 가져온 뚜렷한 결과. 이제 미술가들은 오직 시인들만이 누렸던 개인적 환상의 세계를 펼쳐낼 자유를 얻게 된 것.
영국의 시인이자 화가인 블레이크. -482쪽

주제를 마음대로 선택하는 새로운 자유를 얻게 된 화가들이 가장 많은 혜택을 입게 된 분야는 풍경화였다. 그때까지 풍경화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져왔다. 이러한 태도는 18세기 말 낭만주의 정신을 통해 다소 바뀌었으며 위대한 화가들은 풍경화를 새로운 권위로 끌어 올리는 것을 일생의 목표로 삼았다.
영국 풍경화가 터너와 컨스터블. 레이놀즈와 게인즈버러 사이의 대조를 연상시키는 무언가. 터너도 레이놀즈처럼 전통의 문제에 사로잡혀 있었다. 로랭의 풍경화를 능가하지는 못해도 같은 수준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 그의 일생의 야심이었다. ... 터너에게 자연은 항상 인간의 감정을 반영하고 표현한다.
컨스터블의 생각은 터너와는 매우 달랐다. 그에게 전통은 단지 장애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로랭의 눈이 아니라 자신의 눈으로 본 것을 그리려고 했다. 그는 게인즈버러가 그만둔 곳에서 다시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컨스터블은 진실만을 원했다. "오늘날의 가장 큰 악덕은 허세야." 컨스터블은 모든 틀에 박힌 수법들을 경멸했다. 자신의 눈에 충실하려고 한 것뿐. -490쪽

전통과의 단절은 화가들에게 두 가지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시인이 되어 감동적이며 극적인 효과를 추구하게 됐고, 소재를 성실히 묘사하며 탐구하려는 결심이 가능하게 됐다.
독일의 프리드리히. -497쪽

19세기

아카데미와 전시회, 비평가와 감식가들은 예술과 기술 간의 차이를 명확히 하고자 했다. 산업혁명은 장인 기술의 전통을 무너트려 기계 생산이 수공업을 대신하게 되었으며, 소규모 작업장은 대공장으로 바뀌어 갔다.
...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 건물들은 자연스러운 양식을 지니지 못했다. 여러 양식이 마구 혼재됨.
화가 생활의 안정감이 19세기 들어 무너지게 되었다. 화가들에게 선택의 폭이 넓어지고 모든 결정이 화가들에게 맡겨지게 된 반면, 화가의 취향과 대중의 취향 간의 간극은 점차 벌어져갔다. 19세기 미술가들은 관례를 따르고 대중의 요구에 부합하는 부류와 스스로 선택한 고립을 자랑스러워하는 부류로 크게 나뉘었다.
미술가들은 스스로를 별개의 인종으로 여기기 시작하였으며... 사상 처음으로 미술은 개성 표현의 완벽한 수단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 미술이 추구하는 참된 목적이 개성의 표현이라는 생각은 그 밖의 다른 목적들이 모두 포기되었을 때에만 근거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 프랑스 대혁명 이후 예술이라는 말은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499쪽

유럽 미술의 중심지는 15세기 피렌체, 17세기 로마를 거쳐 19세기 파리로 이동했다.
앵그르와 들라크루아.
들라크루아는 소묘보다는 색채가, 지식보다는 상상력이 더 중요하다고 믿었다. 베네치아 파와 루벤스에 주목. 아랍 세계의 색채와 풍속 연구. 들라크루아가 찬양한 미술가는 풍경화가 코로.-503쪽

고상한 인물이나 주제 타파의 경향.
1849년 바르비종파 등장. 컨스터블의 지도 아래 새로운 시각으로 자연 탐구. 밀레.
쿠르베는 스스로 사실주의전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쿠르베는 오직 자연의 제자이기를 원했다. 아름다움이 아니라 진실을 원했다.
-507쪽

영국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관전파 미술에 대한 관심이 프랑스에서는 사실주의와 바르비종파로 이어졌다면, 영국에서는 라파엘전파로 이어졌다. 진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자연을 이상화하는 것은 라파엘로의 영향이라고 보았고, 미술이 개혁되기 위해서는 라파엘로 훨씬 이전의 시대, 즉 '신앙의 시대'로 되돌아가야 했다.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의 <수태 고지>. 중세 거장들의 정신을 따르려고 했지만 단순히 그림을 모사하지는 않았다. -511쪽

하지만 라파엘전파의 목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소위 프리미티브 화가들(15세기 이탈리아 화가들)의 소박한 견해를 직접 해내는 것은 별개의 문제. 순수해지기 위한 그들의 노력은 자기모순적이어서 성공하기 힘들었다. -511쪽

마네의 혁명. 무의미해진 회화의 인습을 찾아내려 했다. 자연을 묘사하는 방법을 발견했다는 전통 미술의 주장이 그릇되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 표현 방법은 기껏해야 인공적인 조건하에서나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 그리스인들이 단축법을 사용하였고, 르네상스 시기와 그 이후의 위대한 미술가들은 시각 세계의 실감나는 모습을 그릴 수 있는 연이은 발견을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대상이 일정한 형태와 색을 가지고 있다는 확신에 감히 도전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512쪽

마네는 전통적인 부드러운 명암법을 포기하는 대신, 강하고 거친 대조를 추구했다. 낙선전에 출품. <발코니>. 야외의 환한 빛 속에서 보면 둥근 형태들은 때때로 평면적으로 보인다. 그의 그림은 과거의 어떤 거장의 작품들보다 훨씬 더 사실적으로 보인다. ... 이 새로운 이론들은 외광, 옥외의 자연 광선에서의 색의 취급뿐 아니라 형태들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이 일례는 마네가 형태를 재현함에 있어 얼마나 그의 지식에 영향 받기를 거부했는가 하는 사실을 훨씬 더 명확히 알려 준다. ... 실제로 우리의 시각은 한순간에 오직 한 장소에 초점이 맞추어질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마네의 그림은 '진실한' 것이다. -513쪽

모네. 친구들을 종용해서 모두 스튜디오를 박차고 나와 소재 앞에서가 아니면 결코 붓에 손도 안 댄 사람. 자연을 그리는 모든 회화는 반드시 '바로 그 현장'에서 마무리되어야 한다는 모네의 생각은 오래된 습관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일 ㅃ누 아니라 안이한 제작 방법을 거부한 것이기에 필연적으로 기법상 새로운 방법들을 발전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5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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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겔루스 노부스 진중권 미학 에세이 2
진중권 지음 / 아웃사이더 / 2003년 5월
구판절판


에로스는 중간자다. 가난한 어미의 피를 받은 그는 맨발로 다니고 하늘을 지붕 삼아 잠들며 늘 결핍 속에 살지만, 풍요한 아비의 고귀한 피를 받았기에 선과 미를 그리워하고 진리를 사랑한다. 지의 사랑. 그는 곧 철학의 정신이다. 모든 것을 아는 신은 철학을 할 필요가 없다. 진리를 알 피룡를 느끼지 못하는 우둔한 자들 역시 철학을 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에로스는 지와 무지의 중간자. 그리하여 그는 끊임없이 지를 그리워하고 사랑한다. 에로스는 인간으로 하여금 진리를 추구하게 만드는 정신적 욕구의 의인화다. -16-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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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에 반대한다 이후 오퍼스 7
수잔 손택 지음, 이민아 옮김 / 이후 / 2002년 9월
품절


해석은 예술작품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잔인한 호전 행위로 보인다. 진짜 예술에는 우리를 안절부절못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해석자는 예술 작품을 그 내용으로 환원시키고, 그다음에 그것을 해석함으로써 길들인다. 해석은 예술을 다루기 쉽고 안락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해석의 호전성은 특히 문학에서 한층 더 극성이다. 카프카, 베케트...프루스트, 조이스, 포크너, 릴케, 로런스, 지드 등.
예술가들이 자신의 작품이 해석되기를 의도했는 안 했느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의 작품이 지닌 가치는 필시 거기에 담긴 '의미'가 아닌, 어딘가 딴 데에서 찾아야 한다. -26쪽

해석은 예술작품이 일련의 내용으로 구성된다는 심히 미심쩍은 이론을 토대로 예술을 어지럽힌다. 예술을 지적 도식의 범주에 포함되는 일종의 실용 품목으로 만드는 것이다.
해석에서의 탈주는 현대 미술의 특징으로 나타난다. -29쪽

오늘날에는 어떤 종류의 비평이, 어떤 종류의 주석이 바람직한가?
첫째로 필요한 것은 예술의 형식에 더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내용만으로 문학작품을 평가하는 편협한 태도는 해석의 오만을 야기하는 동시에, 형식에 대한 더욱 확장되고 더욱 철저한 설명을 간과하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형식을 위한 어휘, 규정적인 것이 아니라 묘사적인 어휘다. 흔치 않긴 하지만, 최상의 비평이라 함은 내용에 관한 언급 안에 형식에 대한 언급을 녹여낸 비평이다. -32쪽

투명성은 오늘날의 예술, 그리고 비평에서 가장 고상하고 가장 의미심장한 가치다.
지금 중요한 것은 감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우리는 더 잘 보고, 더 잘 듣고, 더 잘 느끼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의 임무는 예술작품에서 내용을 최대한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작품 속에 있는 것 이상의 내용을 더 이상 짜내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임무는 내용을 쳐내서 조금이라도 실체를 보는 것이다.
오늘날, 예술에 대해 뭔가를 말하려 한다면 우리는 예술작품이 우리에게 훨씬 더 실감나도록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비평의 기능은 예술작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예술작품이 어떻게 예술작품이 됐는지, 더 나아가서는 예술작품은 예술작품일 뿐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다. -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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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과 시대정신
김영나 / 열화당 / 1998년 6월
절판


미국 미술사학의 역사적 발전 과정, 미국의 대학과 대학원에서 시행되고 있는 미술사 교육제도 및 전공 분야의 교수 분포, 1980년대 이후의 미국 미술사학계의 특징과 현황을 다루고자 한다. -320쪽

모든 문화와 지역의 기대에 부합할 만한 미술사적 방법론이 있는가.
하버드 대학의 이슬람미술 전문가 그라바에 의해 요약되고 있다.
history of art, 즉 미술작품에 초점을 두면서 양식과 도상적 분석을 하는 이제까지의 경향을 art history, 즉 작품을 토대로 사회적 문화적 역사를 조명하려는 새로운 방법으로 대치하려 시도하고 있다.
신미술사학은 작품이 제작되었던 당시의 물질적 조건, 그 시대의 심리적 정신적 틀을 연결해, 미술작품은 미적 산물이기 이전에 사회의 여러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고 그 기능이 작품의 성격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미술은 문학과 달리 국경을 초월한 언어이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종적, 횡적 교류를 이해할 수 있는 지적 용어와 방법론을 개발해야 한다고 조심스럽게 결론짓고 있다. -1쪽

미술사학자 클라인바우어는 <미술사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미술 이론을 미술사, 미학, 미술평론과 같이 놓으면서 '미술 작품을 형성하거나 영향을 미친 이론에 관한 것'이라고 정의한다.
미술이론의 다의성은 미술이론이 하나의 독립된 학문 분야라기보다는 혼성적이며 열린 개념을 갖기 때문에 생겨난다. -2쪽

본격적인 미술이론이 자리잡기 시작하는 것은 르네상스 시기부터. 르네상스 미술 이론가들은 주로 인문주의자이거나 미술가 자신들. 미술가들을 위한 이론적 서술이 대부분.
알베르티, 레오나르도 다 빈치. 원근법, 색채, 동작과 표정의 적절성에 대한 문제 등을 다루었다. 이와는 달리 바자리는 르네상스 미술을 생성, 발전, 완숙, 쇠퇴의 시기로 보면서 각 미술가들의 전기를 생생하게 기록해 미술사학자로서의 의식을 보여 주었다. -3쪽

르네상스 미술이론가들의 강조는, 미술이 장인적 기술이 아니라 지성적인 작업이므로 그림을 그릴 때는 탄탄한 이론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
1563년 아카데미아 델 디세뇨 설립.
수학, 해부학, 골상학에 후에 역사, 문학이 포함.
18세기 이전에는 미술사, 교육이론, 미학, 평론 등 경계가 불분명했으나, 그 이후 계몽주의는 지식을 체계적으로 구성하려고 함.
빈켈만은 고대 미술품을 유파와 시대에 따라 정리하고 그 양식적 특성의 역사적 변천 과정을 고찰하는 미술사를 쓰면서 미술사학의 시조가 됨.
빈켈만 이후 미술사학이 조형 예술의 역사적인 변화 추적하고 미술품들의 제작 과정 연구/ 비역사적 불변 요소를 탐구하고 미술의 본질을 묻는 태도는 미학을 성립시킴.
18세기에 미술 전시와 미술품 해석에 관한 출판물이 등장하면서부터 미술비평 시작. 18세기에 학문적 틀 형성, 19세기와 20세기 전반에 방법론에 대한 논의. 정신사적 접근과 실증적 접근. 정신사적 접근은 헤겔의 관념론적 역사관 반영한 것으로 미술의 형태는 시대정신의 표현이라는 것. 리글과 드보르작. 반면, 실증적 접근을 한 학자는 부르크하르트. 사실과 기록 중요시.
-4쪽

20세기 전반 뵐플린과 파놉스키
뵐플린: 시대 양식이란 사회나 문화적 외적 요인과 상관없이 자체적으로 변하는 것.
파놉스키: 하나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계층, 종교, 철학 등의 기본 태도를 이해하고 맥락 속에서 작품 내용이 파악되어야 한다.
하지만 모더니즘 발전하면서 미술이 역사, 종교, 문학적 텍스트를 벗어나 시각 양식의 심미적 힘이 강조되면서 미술은 그 자체의 언어를 가지고 있다는 뵐플린 주장이 부상. -5쪽

뵐플린의 방법론은 로저 프라이, 클라이브 벨, 그린버그에 의해 형식주의 평론으로 연결. 역사적, 정치적, 서술적인 내용을 배제한 모더니즘의 추상미술에서 창조적인 개인의 독창성에 대한 평론과 연구에 집중. 20세기 전반에는 개개 미술가에 대한 많은 단행본 출간.
미술가의 독창성과 엘리트 의식이 모더니즘 미술과 형식주의 미술사의 특징. 바우하우스에서 반영. 역사화나 문학적 내용을 담은 작품 중심의 교육에서 탈피. -6쪽

미술사학에서의 미술이론은 이제까지 미학에서 다루던 개념의 미술이론을 포함시킬 뿐 아니라, 철학, 역사, 언어학, 문학비평 등 인문학과 인류학, 심리분석학 등의 사회과학적 이론에 근거한 연구와 연결시키는 문화 이론의 경향을 띠게 됨.
그동안은 미술가의 생애연구, 양식 발전, 양식의 연원, 도상학적 연구, 연대 판정, 작품의 진위 여부 판단이었다. 사실과 기록을 확보하고 당대의 평이나 후원자와의 관계, 전통과의 관계 규명에 열중했다.
하지만 1960년대 들어오며 이제까지의 문화가 엘리트 위주의 문화연구였음을 지적하고 문화의 선택적 전통의 독점에 반발했다. 계급간, 지역간의 문화 차이, 대중문화의 새로운 형태, 청년 문화, 반문화, 언론매체, 문화외 교육의 상관관계에 관심을 보임. 문화를 갈등과 투쟁으로 보면서, 문화 연구에 정치적 사회적 움직임을 연관시키는 등 문화 분석에 여러 학문의 경계를 연결시키고자 함. -71쪽

성, 계급, 인종이 주요 주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관심으로 연결.
페미니즘에서의 가부장적인 제도와 성 차별 비판.
장 보드리야르의 복제와 독창성의 문제. 시뮬레이션 이론.
다문화주의, 후기 식민주의, 비교 문화연구, 문화의 이동과 혼합, 무노하 지배와 종속 관계, 문화 정책, 과학과 종교 문화의 연구 등. -8쪽

영국에서 일어난 신미술사학: 미술작품의 사회적 측면과 미술사에서의 문화 이론의 적용. 미적 판단이 작용하는 양식 분석보다는 주제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이미지의 재현 이유를 탐구했다.
초창기에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적용한 사회사적 도상에 대한 관심. 클라크. 19세기 중후반 작품들에 드러난 농부나 부르주아, 도시, 댄스 홀 등의 도시적 모더니티의 재현 문제.
경제적, 정치적 상관관계 등에 대한 연구로 발전. -9쪽

1980년대 이후 프랑스 후기 구조주의와 문학비평의 영향을 따라 페미니즘, 심리분석학, 해체, 기호학 등의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을 근거로 연구 진행. 형식주의로는 시각문화의 다양성을 이해할 수 없다고 봄. 지금까지의 형식주의와 실증주의는 감정가적인 역할만을 강조, 미술 시장의 하수인이자 고급 취향의 공급자가 되었다고 공격. 창조자로서의 미술가보다 사회작 산물인 미술품에서 사회, 정치, 경제적 제도와 질서가 어떻게 재현되는가.
가장 문제시한 것은, 심미적 기준, 작품의 질에 대한 기준. 지금까지의 기준은 뿌리깊은 지배계급의 편견. 고급미술뿐 아니라 대중문화, 디자인, 공예, 만화, 삽화, 영화 등 일반이 공유하는 문화를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 시각 이미지가 언어보다 문화의 중심이 되고 있다는 자각 때문. -10쪽

전통적 미술사와 새로운 미술사의 첨예한 의견 대립은 미술작품에 대한 정의. 전통적 미술사학자들은 문화연구 미술사가 미술품의 감각적 질을 무시했다고 주장한다. 미적 가치를 고려하지 않고 미술사 연구가 가능한지, 미술사학 자체가 존립 가능한지 문제 제기. -11쪽

자연에 대한 인간의 관심을 화폭에 담기 시작한 데서 풍경화 시작. 즉, 자연관이 반영되기 마련. 가령, 동양에서는 자연을 경이적인 대상, 신비로운 대상으로 그림. 동양미술에서는 풍경화 비중이 서양에 비해 높음.
서양에서는 자연보다 인간의 활동에 관심 더 많았기에 풍경화나 정물화는 높게 평가되지 못함.
하지만 동서양의 공통점도 있다. 실경화는 드물었다는 점.
19세기 후반, 풍경화의 전성기를 이룬 인상주의에 이르기까지, 외광풍경화의 발전 과정을 추정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 서양 풍경화사에서 외광풍경화의 전통, 19세기 풍경화의 전재. -113쪽

*서양 풍경화사에서 외광 풍경화의 전통
1. 고대에서 16세기
고대. 풍경화는 인물의 배경으로 사용. 인간상 창조에 주력.
중세. 자연이란 미지의 세계, 두려운 대상. 정신 세계가 중시된 탓에 풍경화는 미미하게 그려짐. 황금빛으로 채색.
고딕 후기. 자연에 대한 관심 시작. 장식적이고 도식화된 모습. 클라크 "중세 풍경화의 특징은 꽃, 정원, 나무들이 종교적 상징성을 갖는다"
랭부르 형제 <베리 공의 호화로운 기도서>는 풍경화의 한 획. 실질적인 계절의 풍경을 담음. 얀 반 아이크의 <예수의 세례>에서 사실적 풍경화 시도.
르네상스. 과학의 발달로 자연에 대한 호기심 증가. 원근법. 현실의 세계란 항상 변하므로 이상적인 인물에 걸맞은 이상적인 자연의 모습 고안. 베네치아에서 풍경화 발달. 벨리니, 지오르지오네, 티치아노를 중심으로, 목가적이며 시적인 분위기의 풍경화.
실제 풍경에 대한 관심은 플랑드르, 독일을 위시한 북유럽 르네상스 회화에서 많이 보임. 사실주의 경향 덕에 자연과 더 밀접한 관계 유지 가능했음. 콘라드 비츠 <기적적인 물고기의 낚음>. 독일인 뒤러의 여행 기록.
16세기 말. 종교화 숫자가 줄어들고 회화 주제가 세속화. -115-118쪽

2. 17세기: 야외 사생 시대
풍경화사에 일대 전기 마련.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는 고전주의 정착되며 이상화된 풍경화 계승. 플랑드르와 네덜란드에서는 사실적 묘사에 충실.
17세기 시대 분위기는 공간과 활동을 확장하고자 함. 미술에서도 제한된 종교 주제에서 벗어나 풍경화, 장르화, 정물화 등이 본격적으로 등장.
이탈리아의 카라치. 고전적 풍경.
프랑스의 푸생. 이상적인 자연 그림.
로랭. 캄파냐 관찰하여 그림.
플랑드르의 루벤스. 전형적인 바로크 양식.
풍경화를 독자적으로 발전시킨 곳은 네덜란드. 가톨릭이 아닌 신교 국가이며,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중산 계급층이 많았기에, 그들이 원하는 실내에 걸어 놓을 수 있는 조그마한 정물화, 초상화, 풍경화 수요가 높았다. 특징은, 사실에 충실하고 미화하지 않는다는 것. 수평선을 낮춰서 강조함으로써 전경과 원경을 자연스럽게 이어줌. -119-124쪽

3. 18세기: 풍경 전문화가의 등장
이탈리아에서는 베두테라는 새로운 종류의 풍경화 등장. 유적을 세밀하게 그린 그림. 여행 기념품 역할. -124-쪽

4. 19세기 프랑스 풍경화에 미친 영국 풍경화의 영향과 그 후의 전개
프랑스에서는 신고전주의가 지배적.
영국에서는 수채화가 일반에 인기를 끌면서, 컨스터블이나 윌리엄 터너 같은 풍경전문화가 등장.
19세기 초 영국 화가들은 프랑스로 스케치 여행을 했다. 중요한 교량 역할을 한 이는 보닝턴, 컨스터블. 컨스터블은 과학적 관찰에 의한 자연의 신선함을 포착하려고 했기에, 인상주의의 선구자라는 평을 듣기도 한다.
하지만 여전히 야외 스케치는 참고용 습작으로만 여겨질 뿐, 전시될 수 있는 작품으로 생각되지 않았다.
프랑스에서 외광 풍경화의 전통은 1830년대 바르비종 그룹에 의해 정착되었다. 퐁텐블로 숲의 북쪽 끝에 위치한 바르비종 마을. 여기서 그림을 그린 그룹으로는, 코로, 루소, 트루아용, 밀레, 도비니 등이 있다. 이들의 그림에서부터 완성된 작품과 스케치와의 경계선이 모호해지기 시작. 리더는 루소. 자연의 웅대함에 대한 반응을 보여준다.
반면, 노르망디 해안 일대의 또 다른 그룹의 화가들도 있었다. 폴 위에, 이자 베이, 요한 바르톨트 용킨트, 으젠느 부댕. -127-133쪽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풍경화는 점점 더 인기를 끌게 되었다. 용킨트, 부댕, 모네는 인상주의의 선구자. 생 메시옹 화파. 에콜 바르비종 뒤 노르. 쿠르베, 보들레르, 코로, 바질 등.
외광 풍경화가 본격적으로 전개된 것은 19세기 전반의 영국 풍경화와, 프랑스의 바르비종 화가들에 의해서였다. 자연에서 직접 관찰하고 그 변화 무쌍함을 화면에 재현하려고 하였다.
용킨트, 부댕, 코로, 루소 등이 닦아 놓은 외광풍경화는 곧 모네, 르누아르, 피사로 등 인상파 화가들에 의해 절정에 이른다. 처음으로 야외에 이젤을 놓고 작품을 완성했다.
그러나 인상주의가 끝남과 동시에 그 이후 화가들은 주관적 감정 표현에 주력, 추상화, 표현주의적 방향으로 전환된다. -133-136쪽

제1차 세계대전은 유럽 화단에 많은 변화 불러일으켰다. 허무, 분노, 무기력은 다다를 탄생시켰고, 러시아에서는 구성주의 운동이 시작되었다.
입체주의에서 잔존하던 대상을 완전히 떠나 순수 기하학적 형태만으로 구성된 비대상 미술은 젊은 지성적인 미술가들에 의해 시도되었다. 일종의 협동미술 운동이었다. 자신들의 양식이야말로 그 시대의 미술과 문화에 가장 적절하다는 의미에서 공동 간행물에 <드 스틸the style>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여러 분야의 예술가들이 모여 새로운 시대의 특징을 화음으로 보고 그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시각적 화면과 주위 환경을 창조하고자 했다. 19세기 후반의 미술 공예 운동과 같은 맥락에 있다. 실생활과 연관되기를 바랐던 열망.
몬드리안, 반 되스부르그가 가장 중심 인물.
건축은 드 스틸 운동에서 대단히 중요한 분야. 드 스틸 그룹의 추구와 가치가 건축 환경에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 -222쪽

2. 드 스틸 그룹의 형성과 신조형주의
1917년 네덜란드에서 시작. 중립을 지키고 있던 네덜란드로 돌아온 미술가들, 그중 반 되스부르그는 ㅅ미술과 사회개혁을 복합시킬 수 있는 그룹 양식을 창조하고자 했다. 월간 간행물을 통해 작품과 이념을 알리고 소개하는 데 주력했다. 그들은 새로운 시대로의 전환전에 있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223쪽

새로운 미술을 정의내리고자 했다. 유토피아적 사회의 본질인 균형과 화음, 팽팽한 평형 상태를 표현할 수 있는 미술이어야 했다. 가장 순수하고 일반적인 조형 요소로만 창조될 수 있는 것.
끊임없이 변하는 자연에서 근원적인 구조를 찾아 추상화시키려고 했다. 세잔느와 입체주의의 사고 계승. 드 스틸 그룹은 입체주의에서 더 나아가 완전한 비대상으로 몰고 갔다. 선, 면, 형태, 삼원색, 삼비색만 사용하기 시작했다.
선, 면, 삼원색, 삼비색의 기본 조형 요소만 사용해 새로운 시대정신인 화음과 평형 샅애를 표현하려는 이 양식은 몬드리안에 의해 '신조형주의'라고 이름지어졌다. 신조형주의의 이상은 완벽한 우주, 유토피아이며 드 스틸 그룹은 미술이야말로 인류를 유토피아로 인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다. -224쪽

드 스틸 운동은 1920-25년 사이에 가장 활발했으나 점차 해체될 징조를 보이기 시작. 1932년 <드 스틸> 마지막 호를 끝으로 20세기의 가장 지성적이고 복합적인 미술 운동은 끝났다.
독일의 바우하우스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 미쳤다. 실내 디자인, 가구, 인쇄물에서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또한 르코르뷔지에의 작품에도 드 스틸 운동의 영향이 드러난다.
드 스틸 건축의 미술사적 중요성은 드 스틸 회화보다 훨씬 더 의미심장하다. 몬드리안을 예외로 할 때. -2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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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노프스키와 뒤러 - 르네상스 미술과 유럽중심주의
신준형 지음 / 시공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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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시법은 실제로 객관적인 세계가 존재하는 방식을 반영한 게 아니다. 우리의 안구가 평면이 아니라 곡면이기 때문에 실제 우리의 눈에도 세계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결국 투시법은 세계와 거리를 두고 그것을 수학적으로 분석하고 범주화해서 재현한다는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행위다. 세계를 재현한다는 건 세계를 우리가 이해하는 방식으로 재구성한다는 뜻이며, 결국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배욕을 드러낸다. 따라서 투시원근법은 인간이 세계를 보는 자세가 두려움과 경외에서 자신감과 지배욕으로 바뀌었음을 뜻한다. .. 인체비례에 대한 새로운 법칙은 마찬가지의 현상이 인간이 세계를 보는 관점뿐만 아니라 타자를 바라보는 데도 적용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세계와 타인을 바라보는 화가의 눈이 권력을 가지게 되었으며, 화가를 통해서 대상을 보는 관람자 역시 권력을 가지게 된 것이다. -188쪽

파노프스키는 중세의 이 시기에 와서야 학술적인 글이 분할과 세부 분할의 체계를 가지게 되었음을 지적한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저 유명한 <신학대전>의 예를 들면, 전체는 파르테스로 나뉘고, 이것은 다시 멤브라, 콰이스티오네스, 그리고 마지막으로 더 작은 단위인 아르티쿨리로 나눠진다. 이는 분명 전체를 층위와 단계의 반복되는 구조로 나눠서 사물에 체계와 질서를 부여하려는 심리적 패턴의 발현이다.
이런 현상은 당시의 건축에서도 보인다. 건축 역시 공간을 체계적으로 나누고 부분들을 서로 균형 있게 대치시키는 데 몰두했다. 이 시기 교회의 양식을 보면 마치 스콜라 신학의 저서와 같이 일정한 분할과 세부 분할이 전체 건물에 규칙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192쪽

전통적인 책에서는 오른쪽 페이지인 렉토recto가 특권을 가지는 곳이다. 우리가 책을 펴면, 오른쪽 페이지로부터 새로운 장이나 중요한 부분이 시작하고 이것을 넘겨 그 뒷면인 버소verso를 보게 된다. 뒤러는 렉토에 자신의 그림을, 그것도 페이지를 가득 메우는 큰 그림을 넣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변화다. 전통적으로 책이란 말씀에 대한 것이지, 도화에 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상황이 뒤집혔다. 화가가 주도하는 책이 나온다는 것, 책의 주도권이 텍스트에서 그림으로 넘어간다는 것은 문화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는 심각한 징후가 아닐까?
글과 그림의 문제는 사실 인류의 문화사를 놓고 볼 때 매우 흥미로운 주제다. 인류의 문명은 우선은 그림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다가 문자가 발명되고 더 많은 사람들이 글을 익히게 되면서 점차 글이 지배하는 세계로 바뀌었다. -205쪽

결국 북유럽에서 가장 르네상스적이라는 뒤러가 가장 르네상스풍으로 그렸다는 <장미화관의 축제>가 내용과 형식 모두 북유럽 전통에 기반한다는 사실, 이것은 결국 북유럽 르네상스가 이탈리아 르네상스와는 다른 패러다임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내는 증거가 아닐까?-219쪽

파노프스키가 흔히 르네상스를 고대, 중세와 비교해 더욱 발전되고 완성에 가까워진 시기로 보고 있는 것은 헤겔의 역사주의와 매우 비슷하다. ... 결국 헤겔이나 파노프스키나 미술이라는 징후를 통해 역사의 진보를 증명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226쪽

파노프스키의 투시원근법 연구는 헤겔이 견지한 역사 발전의 변증법적 합법칙성과 매우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우선 고대 그림에 나타나는 초보적인 원근 표현이 헤겔이 말한 테제라고 볼 수 있고, 이것이 중세 기독교 사회가 시작되면서 사라지고 매우 비공간적인 미술이 득세하게 된 것은 일종의 안티테제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르네상스 시기에 와서 고대의 테제가 부활된, 그러나 단순한 재생이 아니라 훨씬 이론적으로 발전된 법칙으로 나타난 것은 신테제인 셈이다. -227쪽

저서 말과 사물에서 푸코는 우리가 지식의 대상을 종류에 따라 분류하고 그것들을 유사점과 차이점에 따라서 유와 종으로 묶는, 그래서 나름대로 연구 대상에 질서를 부여하는 방식을 타불라라고 부른다. 문제는 우리가 타불라를 통해 어던 대상을 제시할 때 비로소 대상이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이해라고 인정되며 따라서 학문적인 권위를 부여받는다는 점이다. 이처럼 한 문명이 자신의 논의 대상을 분류하고 분석하고 재현하는 데서 발견되는 인식론적 구조를 푸코는 에피스테메라고 부르고, 에피스테메를 밝혀내는 작업을 수사학적으로 고고학이라고 표현했다. -2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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