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형과 시대정신
김영나 / 열화당 / 1998년 6월
절판


미국 미술사학의 역사적 발전 과정, 미국의 대학과 대학원에서 시행되고 있는 미술사 교육제도 및 전공 분야의 교수 분포, 1980년대 이후의 미국 미술사학계의 특징과 현황을 다루고자 한다. -320쪽

모든 문화와 지역의 기대에 부합할 만한 미술사적 방법론이 있는가.
하버드 대학의 이슬람미술 전문가 그라바에 의해 요약되고 있다.
history of art, 즉 미술작품에 초점을 두면서 양식과 도상적 분석을 하는 이제까지의 경향을 art history, 즉 작품을 토대로 사회적 문화적 역사를 조명하려는 새로운 방법으로 대치하려 시도하고 있다.
신미술사학은 작품이 제작되었던 당시의 물질적 조건, 그 시대의 심리적 정신적 틀을 연결해, 미술작품은 미적 산물이기 이전에 사회의 여러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고 그 기능이 작품의 성격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미술은 문학과 달리 국경을 초월한 언어이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종적, 횡적 교류를 이해할 수 있는 지적 용어와 방법론을 개발해야 한다고 조심스럽게 결론짓고 있다. -1쪽

미술사학자 클라인바우어는 <미술사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미술 이론을 미술사, 미학, 미술평론과 같이 놓으면서 '미술 작품을 형성하거나 영향을 미친 이론에 관한 것'이라고 정의한다.
미술이론의 다의성은 미술이론이 하나의 독립된 학문 분야라기보다는 혼성적이며 열린 개념을 갖기 때문에 생겨난다. -2쪽

본격적인 미술이론이 자리잡기 시작하는 것은 르네상스 시기부터. 르네상스 미술 이론가들은 주로 인문주의자이거나 미술가 자신들. 미술가들을 위한 이론적 서술이 대부분.
알베르티, 레오나르도 다 빈치. 원근법, 색채, 동작과 표정의 적절성에 대한 문제 등을 다루었다. 이와는 달리 바자리는 르네상스 미술을 생성, 발전, 완숙, 쇠퇴의 시기로 보면서 각 미술가들의 전기를 생생하게 기록해 미술사학자로서의 의식을 보여 주었다. -3쪽

르네상스 미술이론가들의 강조는, 미술이 장인적 기술이 아니라 지성적인 작업이므로 그림을 그릴 때는 탄탄한 이론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
1563년 아카데미아 델 디세뇨 설립.
수학, 해부학, 골상학에 후에 역사, 문학이 포함.
18세기 이전에는 미술사, 교육이론, 미학, 평론 등 경계가 불분명했으나, 그 이후 계몽주의는 지식을 체계적으로 구성하려고 함.
빈켈만은 고대 미술품을 유파와 시대에 따라 정리하고 그 양식적 특성의 역사적 변천 과정을 고찰하는 미술사를 쓰면서 미술사학의 시조가 됨.
빈켈만 이후 미술사학이 조형 예술의 역사적인 변화 추적하고 미술품들의 제작 과정 연구/ 비역사적 불변 요소를 탐구하고 미술의 본질을 묻는 태도는 미학을 성립시킴.
18세기에 미술 전시와 미술품 해석에 관한 출판물이 등장하면서부터 미술비평 시작. 18세기에 학문적 틀 형성, 19세기와 20세기 전반에 방법론에 대한 논의. 정신사적 접근과 실증적 접근. 정신사적 접근은 헤겔의 관념론적 역사관 반영한 것으로 미술의 형태는 시대정신의 표현이라는 것. 리글과 드보르작. 반면, 실증적 접근을 한 학자는 부르크하르트. 사실과 기록 중요시.
-4쪽

20세기 전반 뵐플린과 파놉스키
뵐플린: 시대 양식이란 사회나 문화적 외적 요인과 상관없이 자체적으로 변하는 것.
파놉스키: 하나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계층, 종교, 철학 등의 기본 태도를 이해하고 맥락 속에서 작품 내용이 파악되어야 한다.
하지만 모더니즘 발전하면서 미술이 역사, 종교, 문학적 텍스트를 벗어나 시각 양식의 심미적 힘이 강조되면서 미술은 그 자체의 언어를 가지고 있다는 뵐플린 주장이 부상. -5쪽

뵐플린의 방법론은 로저 프라이, 클라이브 벨, 그린버그에 의해 형식주의 평론으로 연결. 역사적, 정치적, 서술적인 내용을 배제한 모더니즘의 추상미술에서 창조적인 개인의 독창성에 대한 평론과 연구에 집중. 20세기 전반에는 개개 미술가에 대한 많은 단행본 출간.
미술가의 독창성과 엘리트 의식이 모더니즘 미술과 형식주의 미술사의 특징. 바우하우스에서 반영. 역사화나 문학적 내용을 담은 작품 중심의 교육에서 탈피. -6쪽

미술사학에서의 미술이론은 이제까지 미학에서 다루던 개념의 미술이론을 포함시킬 뿐 아니라, 철학, 역사, 언어학, 문학비평 등 인문학과 인류학, 심리분석학 등의 사회과학적 이론에 근거한 연구와 연결시키는 문화 이론의 경향을 띠게 됨.
그동안은 미술가의 생애연구, 양식 발전, 양식의 연원, 도상학적 연구, 연대 판정, 작품의 진위 여부 판단이었다. 사실과 기록을 확보하고 당대의 평이나 후원자와의 관계, 전통과의 관계 규명에 열중했다.
하지만 1960년대 들어오며 이제까지의 문화가 엘리트 위주의 문화연구였음을 지적하고 문화의 선택적 전통의 독점에 반발했다. 계급간, 지역간의 문화 차이, 대중문화의 새로운 형태, 청년 문화, 반문화, 언론매체, 문화외 교육의 상관관계에 관심을 보임. 문화를 갈등과 투쟁으로 보면서, 문화 연구에 정치적 사회적 움직임을 연관시키는 등 문화 분석에 여러 학문의 경계를 연결시키고자 함. -71쪽

성, 계급, 인종이 주요 주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관심으로 연결.
페미니즘에서의 가부장적인 제도와 성 차별 비판.
장 보드리야르의 복제와 독창성의 문제. 시뮬레이션 이론.
다문화주의, 후기 식민주의, 비교 문화연구, 문화의 이동과 혼합, 무노하 지배와 종속 관계, 문화 정책, 과학과 종교 문화의 연구 등. -8쪽

영국에서 일어난 신미술사학: 미술작품의 사회적 측면과 미술사에서의 문화 이론의 적용. 미적 판단이 작용하는 양식 분석보다는 주제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이미지의 재현 이유를 탐구했다.
초창기에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적용한 사회사적 도상에 대한 관심. 클라크. 19세기 중후반 작품들에 드러난 농부나 부르주아, 도시, 댄스 홀 등의 도시적 모더니티의 재현 문제.
경제적, 정치적 상관관계 등에 대한 연구로 발전. -9쪽

1980년대 이후 프랑스 후기 구조주의와 문학비평의 영향을 따라 페미니즘, 심리분석학, 해체, 기호학 등의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을 근거로 연구 진행. 형식주의로는 시각문화의 다양성을 이해할 수 없다고 봄. 지금까지의 형식주의와 실증주의는 감정가적인 역할만을 강조, 미술 시장의 하수인이자 고급 취향의 공급자가 되었다고 공격. 창조자로서의 미술가보다 사회작 산물인 미술품에서 사회, 정치, 경제적 제도와 질서가 어떻게 재현되는가.
가장 문제시한 것은, 심미적 기준, 작품의 질에 대한 기준. 지금까지의 기준은 뿌리깊은 지배계급의 편견. 고급미술뿐 아니라 대중문화, 디자인, 공예, 만화, 삽화, 영화 등 일반이 공유하는 문화를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 시각 이미지가 언어보다 문화의 중심이 되고 있다는 자각 때문. -10쪽

전통적 미술사와 새로운 미술사의 첨예한 의견 대립은 미술작품에 대한 정의. 전통적 미술사학자들은 문화연구 미술사가 미술품의 감각적 질을 무시했다고 주장한다. 미적 가치를 고려하지 않고 미술사 연구가 가능한지, 미술사학 자체가 존립 가능한지 문제 제기. -11쪽

자연에 대한 인간의 관심을 화폭에 담기 시작한 데서 풍경화 시작. 즉, 자연관이 반영되기 마련. 가령, 동양에서는 자연을 경이적인 대상, 신비로운 대상으로 그림. 동양미술에서는 풍경화 비중이 서양에 비해 높음.
서양에서는 자연보다 인간의 활동에 관심 더 많았기에 풍경화나 정물화는 높게 평가되지 못함.
하지만 동서양의 공통점도 있다. 실경화는 드물었다는 점.
19세기 후반, 풍경화의 전성기를 이룬 인상주의에 이르기까지, 외광풍경화의 발전 과정을 추정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 서양 풍경화사에서 외광풍경화의 전통, 19세기 풍경화의 전재. -113쪽

*서양 풍경화사에서 외광 풍경화의 전통
1. 고대에서 16세기
고대. 풍경화는 인물의 배경으로 사용. 인간상 창조에 주력.
중세. 자연이란 미지의 세계, 두려운 대상. 정신 세계가 중시된 탓에 풍경화는 미미하게 그려짐. 황금빛으로 채색.
고딕 후기. 자연에 대한 관심 시작. 장식적이고 도식화된 모습. 클라크 "중세 풍경화의 특징은 꽃, 정원, 나무들이 종교적 상징성을 갖는다"
랭부르 형제 <베리 공의 호화로운 기도서>는 풍경화의 한 획. 실질적인 계절의 풍경을 담음. 얀 반 아이크의 <예수의 세례>에서 사실적 풍경화 시도.
르네상스. 과학의 발달로 자연에 대한 호기심 증가. 원근법. 현실의 세계란 항상 변하므로 이상적인 인물에 걸맞은 이상적인 자연의 모습 고안. 베네치아에서 풍경화 발달. 벨리니, 지오르지오네, 티치아노를 중심으로, 목가적이며 시적인 분위기의 풍경화.
실제 풍경에 대한 관심은 플랑드르, 독일을 위시한 북유럽 르네상스 회화에서 많이 보임. 사실주의 경향 덕에 자연과 더 밀접한 관계 유지 가능했음. 콘라드 비츠 <기적적인 물고기의 낚음>. 독일인 뒤러의 여행 기록.
16세기 말. 종교화 숫자가 줄어들고 회화 주제가 세속화. -115-118쪽

2. 17세기: 야외 사생 시대
풍경화사에 일대 전기 마련.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는 고전주의 정착되며 이상화된 풍경화 계승. 플랑드르와 네덜란드에서는 사실적 묘사에 충실.
17세기 시대 분위기는 공간과 활동을 확장하고자 함. 미술에서도 제한된 종교 주제에서 벗어나 풍경화, 장르화, 정물화 등이 본격적으로 등장.
이탈리아의 카라치. 고전적 풍경.
프랑스의 푸생. 이상적인 자연 그림.
로랭. 캄파냐 관찰하여 그림.
플랑드르의 루벤스. 전형적인 바로크 양식.
풍경화를 독자적으로 발전시킨 곳은 네덜란드. 가톨릭이 아닌 신교 국가이며,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중산 계급층이 많았기에, 그들이 원하는 실내에 걸어 놓을 수 있는 조그마한 정물화, 초상화, 풍경화 수요가 높았다. 특징은, 사실에 충실하고 미화하지 않는다는 것. 수평선을 낮춰서 강조함으로써 전경과 원경을 자연스럽게 이어줌. -119-124쪽

3. 18세기: 풍경 전문화가의 등장
이탈리아에서는 베두테라는 새로운 종류의 풍경화 등장. 유적을 세밀하게 그린 그림. 여행 기념품 역할. -124-쪽

4. 19세기 프랑스 풍경화에 미친 영국 풍경화의 영향과 그 후의 전개
프랑스에서는 신고전주의가 지배적.
영국에서는 수채화가 일반에 인기를 끌면서, 컨스터블이나 윌리엄 터너 같은 풍경전문화가 등장.
19세기 초 영국 화가들은 프랑스로 스케치 여행을 했다. 중요한 교량 역할을 한 이는 보닝턴, 컨스터블. 컨스터블은 과학적 관찰에 의한 자연의 신선함을 포착하려고 했기에, 인상주의의 선구자라는 평을 듣기도 한다.
하지만 여전히 야외 스케치는 참고용 습작으로만 여겨질 뿐, 전시될 수 있는 작품으로 생각되지 않았다.
프랑스에서 외광 풍경화의 전통은 1830년대 바르비종 그룹에 의해 정착되었다. 퐁텐블로 숲의 북쪽 끝에 위치한 바르비종 마을. 여기서 그림을 그린 그룹으로는, 코로, 루소, 트루아용, 밀레, 도비니 등이 있다. 이들의 그림에서부터 완성된 작품과 스케치와의 경계선이 모호해지기 시작. 리더는 루소. 자연의 웅대함에 대한 반응을 보여준다.
반면, 노르망디 해안 일대의 또 다른 그룹의 화가들도 있었다. 폴 위에, 이자 베이, 요한 바르톨트 용킨트, 으젠느 부댕. -127-133쪽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풍경화는 점점 더 인기를 끌게 되었다. 용킨트, 부댕, 모네는 인상주의의 선구자. 생 메시옹 화파. 에콜 바르비종 뒤 노르. 쿠르베, 보들레르, 코로, 바질 등.
외광 풍경화가 본격적으로 전개된 것은 19세기 전반의 영국 풍경화와, 프랑스의 바르비종 화가들에 의해서였다. 자연에서 직접 관찰하고 그 변화 무쌍함을 화면에 재현하려고 하였다.
용킨트, 부댕, 코로, 루소 등이 닦아 놓은 외광풍경화는 곧 모네, 르누아르, 피사로 등 인상파 화가들에 의해 절정에 이른다. 처음으로 야외에 이젤을 놓고 작품을 완성했다.
그러나 인상주의가 끝남과 동시에 그 이후 화가들은 주관적 감정 표현에 주력, 추상화, 표현주의적 방향으로 전환된다. -133-136쪽

제1차 세계대전은 유럽 화단에 많은 변화 불러일으켰다. 허무, 분노, 무기력은 다다를 탄생시켰고, 러시아에서는 구성주의 운동이 시작되었다.
입체주의에서 잔존하던 대상을 완전히 떠나 순수 기하학적 형태만으로 구성된 비대상 미술은 젊은 지성적인 미술가들에 의해 시도되었다. 일종의 협동미술 운동이었다. 자신들의 양식이야말로 그 시대의 미술과 문화에 가장 적절하다는 의미에서 공동 간행물에 <드 스틸the style>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여러 분야의 예술가들이 모여 새로운 시대의 특징을 화음으로 보고 그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시각적 화면과 주위 환경을 창조하고자 했다. 19세기 후반의 미술 공예 운동과 같은 맥락에 있다. 실생활과 연관되기를 바랐던 열망.
몬드리안, 반 되스부르그가 가장 중심 인물.
건축은 드 스틸 운동에서 대단히 중요한 분야. 드 스틸 그룹의 추구와 가치가 건축 환경에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 -222쪽

2. 드 스틸 그룹의 형성과 신조형주의
1917년 네덜란드에서 시작. 중립을 지키고 있던 네덜란드로 돌아온 미술가들, 그중 반 되스부르그는 ㅅ미술과 사회개혁을 복합시킬 수 있는 그룹 양식을 창조하고자 했다. 월간 간행물을 통해 작품과 이념을 알리고 소개하는 데 주력했다. 그들은 새로운 시대로의 전환전에 있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223쪽

새로운 미술을 정의내리고자 했다. 유토피아적 사회의 본질인 균형과 화음, 팽팽한 평형 상태를 표현할 수 있는 미술이어야 했다. 가장 순수하고 일반적인 조형 요소로만 창조될 수 있는 것.
끊임없이 변하는 자연에서 근원적인 구조를 찾아 추상화시키려고 했다. 세잔느와 입체주의의 사고 계승. 드 스틸 그룹은 입체주의에서 더 나아가 완전한 비대상으로 몰고 갔다. 선, 면, 형태, 삼원색, 삼비색만 사용하기 시작했다.
선, 면, 삼원색, 삼비색의 기본 조형 요소만 사용해 새로운 시대정신인 화음과 평형 샅애를 표현하려는 이 양식은 몬드리안에 의해 '신조형주의'라고 이름지어졌다. 신조형주의의 이상은 완벽한 우주, 유토피아이며 드 스틸 그룹은 미술이야말로 인류를 유토피아로 인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다. -224쪽

드 스틸 운동은 1920-25년 사이에 가장 활발했으나 점차 해체될 징조를 보이기 시작. 1932년 <드 스틸> 마지막 호를 끝으로 20세기의 가장 지성적이고 복합적인 미술 운동은 끝났다.
독일의 바우하우스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 미쳤다. 실내 디자인, 가구, 인쇄물에서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또한 르코르뷔지에의 작품에도 드 스틸 운동의 영향이 드러난다.
드 스틸 건축의 미술사적 중요성은 드 스틸 회화보다 훨씬 더 의미심장하다. 몬드리안을 예외로 할 때. -2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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