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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명해지는 것을 주저하지 말라! 너 자신의 오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 이것이 바로 계몽의 표어이다. - 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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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오한 척 하는 사람들만이 모호함을 위해 쓴다. 실제로 심오한 사람들은 명료함을 위해 애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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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이 꽤 좋다. 수유 너머에서 활동하고 있는 분인데, 나이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은데 단어 선택을 고심한 흔적이 엿보였다.  

덕분에 니체 읽기가 더 즐거웠다. 니체의 사유가 나를 위로하는 측면도 있었다. 좀 더 읽어 보고 싶다는 충동이 생겼다. <짜라투스트라>부터 읽어 보아야겠다. <이 사람을 보라>도... 

1889년, 마부가 말을 마구 채찍질하는 것을 보고선 니체는 뛰어들어 말의 목을 감쌌다고 한다. 그 해, 정신병이 도졌다고도 한다. 이 대목은 도스또예프스끼의 <까라마조프>를 연상시켰다.  

 

 

 

니체는 자신 안에서 예술과 철학, 학문이 동시에 성장하고 있음을 느꼈으며 이들이 일종의 켄타우로스 같은 존재로 세상에 태어나게 될 것임을 감지하고 있었다.  

사실 첫 저작부터 마지막 저작에 이르기까지 전 저작을 통틀어 니체는 명랑성이라는 개념과 씨름하고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즐거운 학문>에 나오는 단어 "Heiterkeit"는 다소 아이러니한 의미에서 '그것 참 재미있겠는데'라는 태도를 표현한다.  명랑한 정신은 두려움 없는 모험 정신으로 앎을 추구한다.   61p. 

생각은 고통과 삶의 시행착오들에서 태어나야만 하며 "피, 가슴, 불, 쾌락, 정열, 고뇌, 양심, 운명, 돌연한 재난들"을 자신 안에 포함하고 있어야만 한다.  

삶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사라졌다. 그것은 아주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삶은 이제 오직 문제로서 우리 앞에 제시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를 곧바로 우울한 현실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고 니체는 우리를 위안한다. 삶에 대한 사랑은 여전히 가능하다. 다만 사랑의 방식이 바뀔 뿐이다. "언제나 우리 마음에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여인에 대한 사랑" 63p. 

영웅적 기질들이 춤추고 유희할 수 있는, 위험과 승리의 세계.  

견디기 어려운 진실들 속에서도 명랑함을 잃지 않는 것.  

니체는 신과 관련해 두 가지 허무주의가 배회하고 있다고 보았다. 신의 존재를 주장하는 입장이 현세로부터 의미를 박탈한다는 점에서 허무주의라면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입장은 모든 것으로부터 의미와 가치를 박탈한다는 점에서 허무주의인 것이다.  65 

우리 인간은 진리와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의 유기체는 진리에 반대되도록 만들어져 있는 듯하다.  

진리는 자신이 오류 위에 세워진 것임을 알게 될 때 우리를 살해하며 동시에 스스로를 살해한다. 아름답고 선한 모든 것은 환상일 뿐이다.

소화 흡수는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포함해 자기 인식이라는 니체의 또 다른 과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중요한 개념이다. 자유로운 정신은 지식을 소화하고 그것으로부터 영양을 취하는 법을 아는 정신이다. 그는 무거운 영혼, 중력의 영을 거부한다. 모든 것을 씹어 삼켜 소화하려는 그 정신의 요구는 돼지처럼 탐욕스럽다. 중력의 정신은 지식을 섭취할 줄 모른다. 다시 말해 지식을 소화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법을 알지 못한다. 여기에서는 유한한 존재인 자신에 대한 사랑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기억 능력은 인간을 시간의 동물로 만든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 즉 이를 위해 우리는 우연히 일어난 일과 계획에 의해 발생한 일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하고 인과적으로 사고할 줄 알아야 하며 미래를 현재처럼 사고하고 예견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기억을 두려워하며 따라서 내면을 성찰하기를 두려워한다. 거기에는 언제나 우리 삶에 대해 뭔가를 말하고 싶어하는 유령들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최고의 의미를 띤 드문 순간과 기껏해야 그 그림자가 우리 주위를 떠도는 것에 불과한 무수하게 많은 순간 사이의 구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최고의 순간, 혹은 삶의 정점은 시간과 일상적 사물의 흐름 바깥에 존재한다.  최고의 시간 사이의 무수하게 많은 순간들이 바로 우리 삶을 채우는 일반적인 시간들인데 그것들은 표시 가능하고 또 계산 가능한 시간 단위로서 삶의 단조로운 반복에 관련되어 있다.  

최고의 순간을 목도한 사람은 이제 삶의 대부분을 그 경험의 그림자로만 느낄 수도 있다.  

영원회귀는 자유 정신 시기라고 불리는 1878년에서 1882년 사이에 니체가 천착했던 일련의 문제들, 무엇보다도 신의 죽음이라는 문제에 대한 일종의 응답으로서 제시되었다. 그는 그동안 인간들을 지탱해온 중력, 즉 최고의 무게를 잃어버리고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알지 못하는 우리의 불확실한 존재 상황에 대해 먼저 이야기한다. 

영원회귀는 더 나은 삶, 혹은 사후의 삶이 아니라 현재와 똑같은 삶의 반복을 의미하는 개념이다. 다시 말해 '똑같은'이란 수식어가 설명하는 것이 바로 지금의 삶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개념에서 현세의 삶으로부터 도망치거나 그밖에서 구원을 찾을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위대한 종교는 전염병이 되어 버린 삶의 권태와 무기력함에 대한 투쟁에 다름 아니다.  

니체는 인간의 역사가 목적을 갖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오직 인간이 역사에 목적을 설정할 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척추로 작용할 의지를 필요로 하며, 그런 이유에서 모종의 목적을 요청한다.  문제는 우리가 삶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이 고통에 설명과 정당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그는 인간이란 동물은 의미와 방향이 주어진다면 고통조차도 원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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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음악의 비밀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으로서, 음악의 세례를 받고 공통의 드문 예술 경험에 의해서 처음부터 맺어져 있는 사람들을 위한 '음악'이며, 또한 예술에서 피를 함께 나눈 사람들을 식별하기 위한 인식표이다. 

음악으로 표현할 수 없는 모든 것에 대해서... 나는 구역질과 혐오를 느끼네. 만하임 공연을 다녀온 후, 나는 밤새도록 이상스러울 정도로 일상적 현실에 대한 고양된 전율을 느끼네. 왜냐하면 현실적인 모든 것이 더 이상 사실로 느껴지지 않고 허깨비처럼 보이기 때문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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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타르키비츠가 쓴 미학 책.  쉽게 쓰인 것 같다.  

6챕터 객관주의와 주관주의 간의 논쟁 부터 읽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요새 예술 철학 주된 쟁점이 그 부분이고, 나도 궁금한 점이 많으니까.  

6장 첫 문장부터 속시원하다. 요 몇 주간 내가 의문을 가졌던 점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미학은 본래 미에 대한 객관주의적 이론이었으나 현대에 와서 주관주의로 되었다고들 믿고 있다. 그런 생각은 착오다. 미에 대한 주관주의 이론 역시 고대 초기와 중세에도 존재했으며, 한편 근대도 오랫동안 객관주의 이론을 고수하기도 했다. 고대와 중세의 미학에서는 객관주의 이론이 우세했고, 근대에는 주관주의 이론이 우세하다고 말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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