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나무

 

                                             엄 영 훈

 

학교 가는 외길 오른쪽에 그 집이 있었다 토해 낸 양잿물 냄새는 비 맞은 개 비린내처럼 역했다 까만 바지 계집애가 무늬 삭은 포대기로 아기를 업고 툇마루에 앉아 있었다 방문을 지켜보는데 겨울 밭에 얼어있는 대파 외줄기 같았다 높은 신음은 짐승 소리였고 낮은 신음은 풀숲을 기어오던 구렁이였다 신음에 끊기는 애원은 문장이 되지 않았지만 단박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갈라진 여자 목소리는 계집애를 부르고 있었다 제발 죽여달라고 빨리 죽여달라고 애걸하고 있었다 신음에 뒤통수를 맞으며 잰 걸음으로 학교로 달아났다 신음은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다고 속삭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낮은 신음만 흙벽 구멍 난 수숫대 사이로 간간이 기어 나왔다 계집애는 아침처럼 방문 앞 툇마루에 앉아 있었다 빈 포대기를 허리에 두른 채 이남박에 든 것을 먹고 있었다 돌아보지도 않고 먹고 있었다 누가 건네준 늦은 아침인지 이른 저녁인지를 허겁지겁 퍼 넣고 있었다

 

바람은 신음을 더 전하지 않았다 등굣길에 계집애도 보이지 않았다 빈집을 지날 때마다 가슴에 서늘하게 차올랐다 세상에는 죽음보다 무서운 것이 있고 그것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있다고

 

삼동에 시든 햇살은 눈구름을 통과하며 바늘로 변해 대기에 부서져 흩날렸다 겨울나무는 진창에 발목이 잡힌 채 시커멓게 언 살을 패이며 맞바람에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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