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늦지 않았을까

처서가 지나서야 홍로(紅露)의 봉투를 벗겨준다

두 겹 어두운 장막 속에서 자란 사과는

세속의 비바람이 주는 티 하나 없이

순지(純紙)은 아기 엉덩이로 비로소 빛을 본다

 

육십 년대 중반

까만 탄광촌 열여섯 살 까까머리는

높은 조회대 연사가 시키는 대로

신발 한 짝은 엉덩이에 깔고

다른 한 짝은 두 발을 모아 올렸다

맨땅 운동장에 줄 맞춰 앉아서

사람의 말이란 공명을 주는 파장이란 걸 처음 알았다

그날 초여름 오후 특강 두 시간 내내

땡볕의 파장이 머리 위에서 지글거렸다

 

봉투를 벗긴 사과는

눈부신 빛의 폭포를 맞으며

뜨거운 알갱이만 속으로 모아모아

선홍색으로 어느덧 발광(發光)하는 것은

긴 파장의 난반사 때문이 아니라

풋내만 가득하던 푸석푸석 빈속을

아삭아삭 맛과 향으로 가득 채우고 이윽고

탱탱하게 넘칠 무렵부터이다

 

음악실을 겸한 가난한 도서관

몇 해 묵은 사상계에서 다시 만난

흰 고무신에 흰 두루마기을 입은 강사

처음 조립한 광석라디오처럼

격한 진동을 심장에서 심장으로 전달하는 힘이 있었다

학교 울타리 너머 사과가 빨갛게 익어가던 시간

검지와 검지의 손 끝 떨리는 만남이었다

잔서(殘書)의 향이 사과향처럼 배어들었다

 

모든 풋사과는 태양을 사모하는 족속이다

사과나무 가지에서 저마다

진공의 어둠을 뚫고

팔분 십칠 초 만에 날라 오는

태양을 모사(模寫)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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