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후 자리 잡은 전원주택
폭설 쏟아져
전화마저 불통인 외딴 섬 같다
어두운 밤새 눈이 내린 것이 아니라
짙은 눈보라가 어둠을 몰고 왔다
별빛이 눈 위에 뿌려졌으나
두꺼운 냉기에 사위어들고 있다
눈은 세상의 모든 소리를 방음벽처럼 소거했다
카지노로 가는 38번 국도엔 바람이 흔적도 없다
퇴역병 외등 두엇이 눈을 뒤집어쓰고
정지된 휴게소에 불침번을 서고 있다


넉가래로 눈을 치우며 길은 튼다
눈 쏟아진 3만 년 전 새벽의 혈거인도
잠에서 깨어나면 제 불씨 살리기 전
이웃 동굴까지 먼저 길을 냈을 것이다
넉가래는 꼭 사람 하나 만큼의 너비다
첫새벽엔 왕복 길을 낼 겨를이 없어서이다
사람보다 먼저 마실 다닌 발자국
산토끼도 이웃이 궁금했나보다


눈을 치워 길을 낼 때 네 동작이 필요하다
초등학생 보건체조 하듯
온몸에 힘을 뺀 체 넉가래를 뒤로 젖혀
헛동작은 없게 깊이 밀어 넣고
허투루 없이 눈을 푹 떠서
마음 비우듯 옆으로 던진다
이음새 없는 네 박자가 매듭 없는 길을 연다

 
벙거지에 김이 오른다
갓 구워낸 고구마다
그래 이 길로는 군고구마 따끈함이 가고
지짐이 기름 냄새도 묻어올 게다
눈을 치우며 마중 오는
이웃집 발자국도 네 박자다
조바심으로 꼬리치던 강아지가
친구 부르며 내달린 반가움을
눈 위에 먼저 남긴다


햇귀에 드러난 흙이
홍조 띄며 습기를 머금고
겨울을 견디고 있던 냉이의 초록이 햇살을 반긴다
네 박자로 눈 치워
길을 트는 동짓날 아침은
코끝이 쨍한 채색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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