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주는 할머니가 늘 창피해 미웠다

 

가슴 설레던 소풍에 몸빼 입은 채 학교에 와

삶은 달걀 든 도시락 건네던 할머니가 창피했다

머리에 쓴 수건은 더 창피했다

만원버스에서 누가 자리 양보라도 하면

손주 이름 큰 소리로 불러 앉히고 당신은 서서 가셨다

손주는 얼굴이 벌게서 할머니가 미웠다

 

구더기 기는 떨이 꽁치 호박잎으로 벅벅 씻어

염천에 땀으로 구워내

맛있다고 입에 넣어주던 할머니

짜디짠 거짓말에 도리질 쳤다

쉬어터진 보리밥 덩이 찬물에 흔들어

풋고추 된장 찍어 먹는 입맛은 더 싫었다

삭정이 같은 손마디로 건네주던 학사금

다시는 독촉하지 못해

몇 개월 미납자 명단에 첫 째로 오를 때마다

손주는 할머니가 미웠다

 

천근만근인 눈꺼풀에

소금 얼룩 밴 적삼 이불 두른 채

손주 밥 먹는 소리가 미소되는

흙발인 할머니 목침 위 낮잠

발뒤꿈치 굳은 살 갈라터진 틈에 비친 피가

제 목구멍에 혹으로 맺혀

손주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쓰디쓴 익모초로도 다스리지 못하던

할머니 서증(暑症)

누가 벼이삭에 맺힌 새벽이슬이 특효라고 해

손주는 사기그릇으로 갓밝이에 벼를 훑었다

이슬은 대접에 채 고이기 전 검정 고무신에 먼저 찼다

무논에 미끄러져도 그릇을 둘러엎을 순 없었다

해 뜨기 전 마셔야 약이 된다기에

조바심이 턱까지 차오르던

어린 손주의 반 십리 길

 

벼꽃 후후 불어 마시면서

그까짓 그까짓 이슬 반 대접이 뭐라고

할머니 눈가에 번지던 습기가

구부려 밥 먹는 제 볼에서 방울 맺혀

손주는 할머니가 정말 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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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자 2016-04-15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손주는 할머니가 창피하고 미웠지만,,, 어른이 되어서 이제는 그 할머니의 사랑을 알고 있네요... `아버지`라는 시가 함께 생각납니다....

진희 2016-04-15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가슴이 아리네요. 할머니의 무조건적 희생적 사랑과 손자가 할머니의 사랑을 알아가고.... 마지막 연에 할머니는 손주으 효성에 감동하고 손주는 할머니에게 드린 것이 그까짓 별것 아니 것 같은(할머니 사랑에 비해).... 정말 사랑했지만 정말 미웠다는 역설적 표현!!!!!!!!!!

김영순 2016-04-19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리들에 삶의 모습이 고스란히 묻어나오는 이 한편의 시속에서 제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내 엄마의 모습과 내 할머니의 모습을 봅니다
나 역시 이 시속의 손주처럼 촌스러운 내 엄마의 모습을
또 내 할머니의 모습을 창피하다고 생각했던 어린시절이 있었습니다
한편의 시를 통해 내 마음을 들여다 보고 또 나와 관계맺고 있는
사람들을 들여다 보는 시간을 갖습니다
그리고 이 시를 읽으면서 할머니를 창피해 하는 손주들 같았던
어린 우리들에게 손주를 사랑하는 할머니 같은 마음으로
시를 가르치시던 푸르른 소나무 같았던 젊은 선생님의
마음도 함께 보았습니다

2016-04-20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몇해전 돌아가신 할머니가 떠오릅니다. 조막손으로 나는 무얼 해드렸나 기억해봅니다. 다 큰 성인이 되어서도 그 미운 마음을 갚지 못했네요. 그러며 살았구나, 싶습니다. 할머니의 사랑과 손주의 사랑이 같은 크기일 수는 없을 것 같네요.

lingeronyou 2016-04-20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손주를 향한 할머니의 사랑과 그 할머니에 대한 손주의 마음이 절절하게 잘 드러난 것 같습니다. 다만 할머니를 미워하게 된 계기들에 대한 설명이 여러 작가들이 옛날을 추억하며 자주 등장하는 다소 상투적인 상황들인 것 같아 아쉬움이 듭니다.

스당 2016-04-20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겪은 듯 생생한 글이네요.

가족은 고마움과 미안함과 창피함 같은 것을 한꺼번에 갖게 되는 존재이지요. 미웠다로 시작해 미웠다로 끝나지만, 할머니의 마음을 알게 되면서 느낀 글쓴이의 심정이 느껴집니다.

할머니는 그렇고... 그 시절에 대한 미움은 진짜인 것 같으네요 ㅎㅎ 하긴 지난 시절이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죠. 솔직한 글 잘 읽었습니다.

지영 2016-04-21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눈물이 멈추질 않네요
어렸을적 환경미화원이었던 아버지가 창피했던적이있었지요
자전거로 학교등교해주셨는데 정문앞에서 내려달라고해도
학교안까지 태워주시던 아버지
지금은 그 따뜻한 등이 너무나 그립습니다.
가슴시리지만 사랑과 그리움이 담긴 글 잘 읽고 갑니다.

토토로 2016-05-02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슬프지만 아름다웠던 추억에 대해 생각해 보게끔 하네요~
옛날을 떠올리게 하는 질박한 시어들과 유려한 문체가 잘 어울립니다.

꽉 찬 시라는 느낌... 하여 내용이나 형식에서 여백의 미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강성일 2016-10-10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버지, 어머니께서 결혼하신 후 6년 3개월만에 태어났습니다. 오랜 기다림 끝에 태어난 손자라 할아버지, 할머니께서는 사촌 형과 누나들보다 유독 저를 이뻐 하셨지요. 문득 돌아가신 그 분들의 품이 그리워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