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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으로 읽고 각으로 쓴다 - 활자중독자 김미옥의 읽기, 쓰기의 감각
김미옥 지음 / 파람북 / 2024년 5월
평점 :
살아남은 자의 슬픔
[바람이 되어 살아낼게]
“세월호에 325명의 단원고 학생이 타고 있었다. 그중 생존 학생은 75명이었다. 살아남은 학생들의 모임이 ‘운디드 힐러’(wounded healer)인데 뜻은 ‘상처 입은 치유자’이다. 이들은 재난 재해를 입은 사람들을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 그중의 한 생존자가 [바람이 되어 살아낼게]라는 책을 썼다. (p. 58 살아남은 자의 슬픔 [바람이 되어 살아낼게] 중에서)” |
어떤 책은 구매가 망설여진다. 마음이 여린 내가 감당하기에 너무 큰 아픔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바람이 되어 살아낼게]도 마찬가지였다. 의식있는 많은 분들이 이 책을 읽고 동감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나는 끝내 이 책을 손에 잡지 못했다.
2014, 그날 벌써 10년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드디어 서평가 김미옥 선생님의 ‘감으로 읽고 각으로 쓴다’를 통해 만나고 싶었지만 만나기가 힘들었던 그 책을 만났다.
내 아이와 그리 나이차가 나지 않는 아이들의 힘겨운 생존기, 그나마 선생님의 3쪽짜리 서평을 읽고 나는 한참을 울었다. 남은 생이라 하기엔 너무나 젊은 그들의 생존기가 너무나 가슴 아팠고, 사회가 보호해주지 않는 그들의 치유가 애달파서, 지켜볼 수 밖에 없는 내가 한없이 초라하고 미안해서 한참을 울었다. 그러면서 그들을 위해 썼던 내 글을 다시 찾아 보았다.
2024. 4. 16 세월호 10년…
오늘은 글을 쓰지 않으려고 했다… 이런 기분으로 글을 쓰게 되면 십중팔구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마냥 우울하고 슬픈 기분을 전염시킬 게 뻔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날은 그저 조용히 쌓여있는 자료나 정리하자며 일부러 유쾌한 노래들을 틀어놓은 채 3시간이 넘게 앉아 자료를 보고 있다.
10년 전 그날, 전국민을 경악시킨 최악의 해상 참사가 벌어졌다. 그날 세월호에는 수학여행을 가던 안산 단원고 학생 325명과 교사 14명이 탑승하였으며 단원고 학생 325명 중 250명이 사망하고 교사 11명이 사망하였다. 일반인 사망자는 43명으로 집계되었으며 총 사망자는 304명이다. 구조자는 단원고 학생 75명, 교사 3명, 일반인 94명으로 총 172명이다. 어린 학생들의 피해가 컸기에 국민들의 충격이 다른 사건들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엄청나게 컸었다. 이 사고로 단원고가 있는 경기도 안산시와 사고 해역이 있는 전남 진도군이 특별재난 지역으로 선포되었으며 안산 올림픽기념관과 안산 화랑유원지를 시작으로 전국에서 분향소가 설치되었다. 이 사고로 대한민국에는 엄청난 후폭풍이 닥치게 되었고, 대한민국 현대사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국민들은 참사가 일어난 것에 애통하며 함께 울었다. 일어나서는 안되는, 막을 수도 있었던 이 사고가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는지 사고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알고 싶었고 책임자는 강력히 처벌받기를 원했다. 하지만 정부는 은폐했고 회피했다. 이해할 수 없는 정부의 태도에 국민들은 분노하며 시국 선언문이 쏟아냈지만, 정부는 유가족간의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며 국민들의 시선을 돌리려고만 했다. 이후 국민들의 분노는 촛불 집회로 이어졌다. 자녀 교육에 모든 것을 헌신하는 한국 학부모들의 마인드를 크게 뒤바꾸어 놓은 전환점이 된 대사건이다.
결국 이 사건은 안전불감증에 빠져 있던 한국 안전 관리 실태와 혼란스러운 사회의 극치를 보여준 비극적인 사건으로 평가된다. 이 참사로 인해 당시 출범 2년차였던 ㅂㄱㅎ정부는 물론 대한민국 사회계, 정치계는 모두 엄청난 후폭풍과 침체 그리고 공황에 시달렸다. 이후 언론, 정계, 경제계, 교육계 그리고 문화계까지 수많은 갈등이 야기 되었는데, 이는 참사를 수습하기는 커녕 오히려 갈등을 조장하여 그 상황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했던 정부의 잘못이 크다. 21세기의 대한민국 사회에서 매우 큰 사회적 파장과 영향력을 준 사건 중 하나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해상 사고로 다섯 번째로 많은 사상자를 냈고 502명이 사망한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와 330명이 사망한 창경호 침몰 사고, 326명이 사망한 남영호 침몰 사고, 292명이 사망한 서해 훼리호 사고 후 4번째로 많은 인명 피해를 낸 재난 사고이다. 20세기에 일어난 위의 사건들과 달리 21세기에 일어난 대형 참사이기에 국민들의 충격이 그만큼 컸다. 이 사고는 전 국민들에게 안전의 중요성을 결정적으로 깨닫게 했다. (구글 나무위키 자료 참조)
2014년 그 날, 일을 하던 사업장에 사장이 틀어놓은 TV덕분에 세월호 사고 상황을 하루종일 지켜보고 있었다. 함께 일하는 사람 중 3명이 아줌마였고, 한 명도 그나마 아가씨여서 성별이 같은 여자 넷이서 방송을 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방송을 보던 중간에 전원 구조 되었다는 뉴스에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 뉴스는 가짜 뉴스였다. 구조는 더디기만 했다. 그 이튿날도 구조 소식은 잠잠하기만 했고, 나처럼 오지랖이 넓은 사람도, 넓지 않은 사람들도 느리기만한 구조 상황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차가운 바닷물 속 배 안에 갇혀있을 아이들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 사건은 해상 사건을 한 번도 겪지 않은 내게 커다란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그렇게 아이들이 잠든 바다의 팽목항엔 하늘의 별을 닮은 노란 띠가 하나씩 묶이기 시작했다. 바다를 떠나 하늘로 올라 간 가여운 영혼들은 그렇게 개나리빛 별이 되었다.
살아남은 학생들은 이상 증세를 보였다. 어떤 학생은 교실에서 지나치게 잠을 잤고 어떤 학생은 지나치게 책을 보았고, 저자는 지나치게 산만해져 어떤 일에도 집중하지 못했다. 이들에게 기자들이 수시로 접근해서 트라우마를 일깨웠다. 무책임한 어른들은 단원고 학생이라면 호기심을 갖고 그날의 일을 물었다. 그가 만난 가장 좋은 어른은 택시기사였다. ‘단원고’라고 하면 또 물어볼까 싶어 옆 건물 이름을 댔는데 그는 차비를 받지 않았다. “그냥 가.”나는 이 대목에서 눈물이 글썽해졌다. 어른 인 것이 부끄럽고 미안하다. 나는 TV 실시간 중계방송으로 침몰하는 배를 구경한 시청자였다. 자식을 잃고 통곡하는 부모들 옆에서 게걸스럽게 파자를 먹던 인간들도 있었다. 놀러 가다 죽은 건데 왜 난리냐는 말은 ‘이태원 참사’ 때도 반복되었다. 작년 9월 세월호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외력 가능성을 조사했으나 외력이 침몰 원인인지 확인되지 않았다. 내인설인지 외력설인지 오리무중으로 들어갔다는 얘기다. 박근혜 정권은 진상규명을 방해했고, 문재인 정권은 방관했고, 윤석렬 정권은 종결했다. 생존 저자는 지금 26세의 청년이 되었다. 몸은 땅에 있지만, 정신은 팽목항 세월호에 남아 트라우마에 시달리던 생존자들이다. 그들이 스스로를 구조한 이야기가 [바람이 되어 살아날게]다. 살아줘서 고맙다. _감으로 읽고 각으로 쓴다 중 [바람이 되어 살아낼게] 유가영 지음, 다른,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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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막둥이의 학교에서 코로나 이후 처음으로 체험학습을 한다며 체험학습비에 대한 가정통신문을 전해왔다. 한참 자라는 아이들이 코로나 이후 함께 모여 학교와 학원을 잊은 채 잠시 쉴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장소와 이동 수단이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세월호 이후 학교나 단체마다 이런 활동들이 축소되고 취소되는 일이 많았다고 했다. 10년이나 지났지만 학교에서 단체로 움직이는 활동에 곤두서는 신경은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다.
세월호 관련 글을 쓰려다 보니 갑자기 얼마 전 남편과 함께 본 애니메이션이 생각났다. 샌드 아트를 보는 듯한 아름다운 애니메이션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아름다운 영상이 너무나 아프고 무겁기만 했다.
제 93회 아카데미 단편애니메이션상을 수상한 작품 “If anything happens i love you(혹시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라는 작품이었다. 이 영화는 총기 사고로 딸 잃은 부모의 아픔 그려낸 작품이다. 옛날 사람들이 단장지애 (斷腸之哀)라는 표현으로 대신하는 자식을 잃은 슬픔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인간사의 최악의 비애(悲哀)가 아닌가 싶다.
영화의 시작, 무거운 분위기의 부부는 시든 꽃을 사이에 두고 멀찍이 떨어져 식사를 하고 있다. 고개를 떨군 채 먹고 있는 밥은 소화가 될까 싶을 정도다. 두 사람 마음의 거리는 양끝으로 길게 늘어져있는 식탁의 거리이나 멀게만 느껴진다. 부부는 서로를 원망하고 비난하고 있었다. 아빠는 먹던 밥을 치우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당에 나서자 집 외벽에 남은 딸아이의 흔적을 마주한 아빠, 아빠의 영혼은 딸아이의 흔적을 껴안다가 이내 미끄러졌다. 엄마는 빨래를 정리하다가 딸의 열린 방문 앞으로 다가가, 고개를 떨어뜨리고 문을 닫는다. 세탁기에서 딸이 입던 자그마한 티셔츠를 발견했던 것이다. 엄마는 그 옷을 가슴에 품은 채 그 자리에 주저앉아 참았던 눈물을 터트린다.
교복 입은 딸에게 책가방을 메어 주던 날. 그날 아침 그 시간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부모의 영혼은 학교로 향하는 딸을 어떻게든 막으려고 손을 뻗어보고 감싸 안아 보고 온몸으로 가려도 보지만, 결국 아이는 학교로 가고 말았다. “탕, 탕탕!”. 난데없이 공중에 퍼지는 총소리와 사이렌 소리, 아이들의 비명만이 가득 하다. 난리통에 딸은 부모에게 마지막 문자를 보낸다. ‘If anything happens I love you(혹시 내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사랑해요)’.
쉴 새 없이 눈물을 닦으며 멀리 떨어져 앉아 밥을 먹던 부부를 생각했다. 얼마나 오랜 시간 이런 지옥을 참아왔을까? 참척지변(慘慽之變)의 슬픔,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는 깊이의 고통과 아픔일 것이다. 예전에 세월호 학부모를 촬영한 다큐에서도 본 장면이 있었다.
세월호에 아이를 실어보낸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그날, 일어나지 못하는 아이를 억지로 깨워보냈어요. 다시 그날이 온다면 아이를 품에 안은 채 어디도 내보내지 않을거예요.”
애니메이션을 본 그날도, 다큐멘터리를 보던 그날도 나는 울었다. 그리고 감히 내 아이를 품고서 울고 있는 것이 너무나 미안했다.
아이를 떠나보낸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보며 그런 그들을 ‘지겹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유족들에게 ‘돈을 더 뜯어내려고 아직도 저런다’며 손가락질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가죽을 벗겨보고 싶다. 정말 그 안에 사람이 들었는지 확인해보고 싶다.
아직 자식을 낳아보지 않은 젊은 사람이어서 ‘자식’이란 존재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그래, 뭘 몰라서 그러지’하고 잠깐 이해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새끼 낳아 함께 기르는 사람들이 그러는 것은 내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다.
예로부터 내리 사랑이라 하였다. 그래서 부모보다 조상보다 자식이 좋고 손주는 더 좋은 법이다. 그런 내리 사랑을 주고 품어 17년을, 18년을 키웠던 자식이, 멀쩡히 돌아올 줄만 알고 짐을 싸서 보낸 아이가 벌써 10년째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것도 차디찬 바다에서 온 국민이 다 지켜보는 가운데에서도 구조 받지 못한 채 그런 사고를 당했다면 당신은 어떠했을까.
갑자기 차가워진 날씨에, 잠깐 외출했던 아이가 귓볼만 얼어서 와도 가슴이 시린 게 부모다. 그게 정상이다. 그런데 도대체 당신들은 자식을 키우면서 무얼 겪고 무얼 느끼고 살아왔기에 그렇게도 무서운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지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부모가 죽어 15년이란 시간이 지났어도 아직도 애가 닳아 아프고 슬픔을 가눌 길이 없는 나같은 사람에게도, 내리 사랑만 주고 키워온 자식을 잃은 사람들의 고통은 감히 헤아릴 수가 없다. 암,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이런 글을 쓰는 것조차도 그들의 마음을 그저 가벼이 넘겨 짐작하는 것만 같아 한없이 무겁고 죄스러워 글을 쓰지 않았었지만, 오늘 누군가 올린 글을 보고는 참을 수가 없어 이렇게 글로 남긴다.
제발, 제발 그러지 말자. 제발 그러지 맙시다.
사람이라면, 그것도 자식을 키워보신 분이라면 제발 참아주세요.
마음 속으로만 갖고 있되 사사로이 꺼내지 말아야 하는 말과 심정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입니다.
10년, 갓난 아이가 자라 초등학생이 되고, 초등학생이던 꼬맹이가 자라 성년이 되는 시간.
세월호에서 멀어져간 아이들도 나는 어딘가에서 그렇게 성인이 되어 살고 있다고 믿고 싶다. 생전 몰랐던 나라에 도착해서 기억을 잃은 채 살고 있다고 생각하련다.
언론이 바뀌고, 사회가 개혁되어 그들의 슬픔이 온전히 드러나는 그 날에, 나는 비로소 그들이 밝은 별이, 노란 옷을 입은 아름다운 별이 되리라 나혼자라도 그렇게 생각하련다.
빛을 잃은 아이들을 위해, 오늘 하루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련다.
If anything happens i love you
감(感)으로 읽고 각(覺)으로 쓴다. 각(覺)은 불교 용어로 우주에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의 실상을 깨닫고 마음의 근본을 깨달아 알게 됨을 뜻한다. 감성과 깨달음의 조화가 균형을 이룬 김미옥 선생의 서평에 딱 맞춤한 제목이라고 생각된다. 기도하고 울음하는 것만이 그들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10년이 지났지만 그들에 대해 알려고 노력하는 것, 그들의 남은 삶을 끝까지 응원하고 지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그리고 이런 깨달음을 공유하는 것이 진정 그들을 위하는 것이었다. 산 자와 죽은 자 모두에게.
우리 사회에는 아직 해결하지 못한, 규명하지 못한 많은 사건과 슬픔이 있다. 그들과 아픔을 공유하는 것에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다. 그들과 용기있게 나가 싸우며 행동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들을 지원하고 아끼며 그들을 알아나가는 것도 그들을 위하는 방법 중의 하나이다.
감으로 읽고 각으로 쓴 김미옥 선생 한 사람의 한 구절 덕분에 ‘함께 감(感)하고 함께 각(覺)하는 시간을 누렸다. 순간 순간, 이보다 신성(神聖)할 순 없다.
책이 결코 어려운 물건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는 양서(良書), ‘감(感)으로 읽고 각(覺)으로 쓴다’는 분명 서평계의 고전으로 오랫동안 책을 사랑하는 많은 이들의 가슴에 남을 것이다.
그녀의 따뜻한 감((感), 각(覺)을 오랜 시간 간직할 것만 같다.
서슴없이 감각의 지평을 열어주신 선생님께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https://youtu.be/kR3qqA4z438?si=PqLhoDNtBE0ieEhi
#세월호_10주기
#유가족들을응원합니다
#Remember0416
#감으로읽고각으로쓴다_김미옥
#파람북
#활자중독자김미옥서평집
#책으로지은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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