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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한 결정
오가와 요코 지음, 김은모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0월
평점 :

'박사가 사랑한 수식', '임신 캘린더' 등의 베스트셀러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오가와 요코는 일본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무라카미 하루키, 오에 겐자부로 등과 함께 전 세계적으로 가장 활발하게 번역 출간이 이루어지는 작가로 꼽힌다. 1994년작인 '은밀한 결정'은 비교적 초기작에 속하는 장편소설로, 2019년 ‘The Memory Police’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영문판을 시작으로 프랑스, 독일, 브라질, 러시아 등 28개국에 번역되며 이십오 년 만에 다시금 재조명을 받고 있다.
'은밀한 결정'은 SF적인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시공간이 명확하지 않은 배경과 의식주 묘사, 인물 간의 관계 등은 테크놀로지가 발달한 근미래 디스토피아가 아니라 땅과 바다에서 식량을 자급하고 마을이 하나의 공동체로 기능하던 지난세기의 목가적인 시골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그 저변에는 오가와 요코를 작가의 길로 이끌어준 십대 시절의 애독서 '안네의 일기'가 있었다. 자신의 내면을 말로 표현하는 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귀중한 자유임을 깨닫게 해준 '안네의 일기'처럼, 소중한 존재를 부당하게 빼앗기는 주인공의 시점으로 사회의 모순을 드러내보자는 생각과, ‘기억이 소멸하는 모습을 그려보고 싶다’는 발상을 하나의 주제로 이어본 것이 '은밀한 결정'의 탄생 계기가 된 것이다. 특히 나치 독일을 연상시키는 강압적인 비밀경찰의 감시하에 책을 쌓아놓고 불태우는 분서 장면, R씨가 은신처로 이동하는 날 큰비가 내려 감시의 눈을 피할 수 있었던 장면 등은 '안네의 일기'에 대한 직접적인 오마주다.
'은밀한 결정'은 소중한 것들이 하나하나 사라져가는 소멸해가는 어느 섬의 이야기이다. 소멸해가는 것들을, 사라져가는 것들을 기억 속에서라도 잡아두려하지만 '비밀경찰'이 나타나 흔적들을 하나하나 지운다. 마치 세상에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주인공의 부모님도, 부모님의 흔적도 어느날 소멸한다. 주인공의 아버지는 '새연구가'이다. 어느날 '새'가 소멸하고 '비밀경찰'이 찾아와 '새'의 흔적을 지운다. 그냥 '새'의 흔적만 지운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평생 업적이렀을 '새연구'도 다 없앤다. 나쁜 비밀경찰들.
진짜 상실감. 그 상실감을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주인공은 '새'를 매개로해서 아버지와 많은 시간을 보내고 많은 추억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 아버디를 잃은 것만으로도 상실감이 클텐데 아버지의 흔적인 '새연구'도 사라지니 인생을 부정당하는 느낌은 아니였을까.
'은밀한 결정'에서는 상실에서 오는 많은 반응들과 대처 방법들을 말하고 있다. 무언가가 소멸될까 걱정을 한다던가, 소멸을 피하기위해 숨는다던가, 자연스럽게 받아드린다던가.
생각해봐. 평소에 당연하게 여기던 것들이 사라져간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