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인류학 강의 - 사피엔스의 숲을 거닐다
박한선 지음 / 해냄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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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원숭이가 진화한 걸까 아니면 성경에서 나온 것처럼 아담과 이브에서 유래한 걸까? 진화론은 생물은 환경에 적합하게 진화한다는 것이다. 


생물이 환경에 적합하게 진화한다는 이론은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으나 원숭이에서 인간이 진화했다는 이론은 아무래도 꺼림직하다.


뒷커버에 나온 “진화는 인간의 몸과 마음을 어떻게 바꾸었는가”라는 질문처럼 이 책은 인류학이나 진화론이 다소 난해하지만 궁굼증을 자아낸다.




이 책의 저자는 인류학과 교수이자 신경정신과 전문의다.


무엇보다 진화인류학 중에서도 호모 사피엔스에 대해 진화생태학적 관점에서 연구를 하고 있어서 그런지 이 책의 전문성을 더하고 있다.


이 책 외에도 <인간의 자리>, <마음으로부터 일곱 발자국> 등을 썼고, <재난과 정신건강>, <자살 예방의 모든 것>, <포스트 코로나 사회> 등을 책을 공저로 냈다.




이 책은 크게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진화인류학의 숲에 들어서기 전에’ 진화인류학이 무엇인지, 지구 환경이 변화함에 따라 어떻게 인류가 진화해왔는지, 그리고 자연선택과 성선택이라는 주제를 다룬다.


2부 ‘사피엔스가 걸어온 수백만 년의 시간’에서는 교과서에서 배워서 잘 알고 있는 인류의 조상이라고 말하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를 시작으로, 호모 에렉투스, 호모 사피엔스까지 인류가 지난 수백만 년 동안 진화해온 이야기를 한다.


3부 ‘걷고 말하고 생각하는 존재’에서는 인간의 직립 보행이나 도구를 사용하는 것, 그리고 음식을 익혀 먹거나 언어라는 것을 사용하고 뇌가 커진 것 등 동물과 차별되는 부분들을 설명한다.


4부 ‘믿고 속이고 사랑하는 사회’에서는 현대 사회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이슈, 특히 사랑이나 가족, 결혼 뿐만 아니라 도덕과 종교에 대한 주제에 대해서 과학적 혹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저의 생각을 전한다.


기독교적 세계관은 과거 중세시대 때, 그것도 유럽이라는 대륙에서 지배적인 사고였다. 이러한 기독교 중심의 사고에 도전장(?)을 내민 사람은 다윈과 월리스였는데, 다윈은 교과서에 자주 등장하여 우리에게 친숙하지만 월리스에 대해서는 생물학 관련 분야의 전공자나 진화론에 대한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잘 모른다.


나 또한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다윈의 진화론만 알았지 월리스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저자는 “과학에 입각한 진화인류학은 우리의 눈을 열어주고 인간과 세계에 관한 참신한 시각을 가지게끔 도와준다.”라고 주장하는 데, 어쩌면 우리는 진리 탐구를 하는 이유가 단순히 많이 배워서 남에게 자랑하거나 고액의 연봉을 받기 위해서 아니라 올바른 시각을 갖기 위해서 아닐까?


현대에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 지도를 보면서 유럽 대륙과 아프리카 대륙을 비교하면 그 크기가 비슷해 보이는데, 실제로 아프리카 대륙은 훨씬 그 면적이 크다고 한다.


책에서 동아프리카 대지구대이 지형을 살며보면, 협곡이 생물종의 분화를 촉진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도 태백산맥이 있는데, 아프리카의 협곡의 규모는 우리의 산맥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크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전에도 현재의 인류와 유사한 종이 있었다고 하는데, 침팬지나 원숭이와 비슷한 400cc에 불과한 뇌 용량을 보면 과연 인류의 조상이 맞을까 싶다.


<혹성 탈출>이라는 영화를 잘 알 것이다. 원숭이가 진화하여 지구를 지배한다는 내용의 영화인데, 진화 기간이 너무 짧아서 그런지 (영화 내용을 비추어보면 수 백년에 불과한 것 같다) 생김새는 여전히 지금의 원숭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다. 


개인적으로는 참 재미있게 본 영화인데, 이 책에서 말하는 진화론에 따른다면 원숭이의 생김새도 바뀌는게 맞을 것이다. 무엇보다 인간처럼 말하고 사고를 하니 뇌가 커져서 지금의 원숭이와는 달라질 수 밖에 없다.


물론 학생 때 배운 진화론에 대해 개인적으로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의 편견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요즘에 태어나는 아기들이나 미취학 아동들을 보면, 나의 어릴적 모습과는 조금은 다른 점을 찾을 수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은 속눈썹의 길이인데, 과거에 비해 먼지가 많고 공기가 나빠지는 등 환경이 

오염되어서 그런지 몰라도 요새 아이들은 속눈썹의 길이가 무척이나 길다. 그리고 외모도 살짝은 다른데, 무엇보다 두 눈의 간격이 예전 어른들보다 좀 더 넓어진 것 같다. 


물론 개인적인 생각에 불과하고 추측에 불과하다. 진화라는 것이 그렇게 짧은 시간에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옛날 1900년 초반대 사진에 보이는 과거 우리의 조상들의 모습을 보면 지금의 현대인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 수 있을 정도다.


개인적으로는 인간을 동물과 구별짓는 가장 큰 점은 언어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글을 쓰고 있지만, 동물은 감정의 표현을 몇 가지 소리로 낼 수 있을 뿐이다. 




네안데르탈인의 경우 후두의 위치가 지금의 현대 인류와는 다르기 때문에 다양한 소리를 낼 수 없었을 것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네안데르탈인은 현대 인류의 조상이 아니다는 의미는 아닐까?


다양한 학설은 검증되지 않았으면 단순한 주장, 즉 학설로 끝나야 하는데, 마치 절대적 진리인양 말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백미는 개인적으로 4부였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그 앞에서 다룬 내용은 학설이나 가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4부는 사회적 현상을 다루기 때문이다.


과거 유럽의 조각상이나 그림을 보면, 여성들이 뚱뚱하다 못해 비만으로 보이는 경우가 많다. 아마 그 당시에 유럽에서는 뚱녀가 미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과거 중국에서는 발이 작은 여성을 미인이라고 생각했다는데, 그래서 발이 크지 않도록 발을 싸매고 작은 신발을 억지로 신었다고 한다. 


이 외에도 흥미로운 주제를 많이 다루는데, 결혼이라는 제도, 특히 일부일처제에 대해, 그리고 결혼의 의미에 대해서 다루는데, 재미있게 읽었던 부분은 왜 일부다처제가 생겼는가에 관한 내용이었다.


동남아나 남인도의 경우 이모작이나 삼모작이 가능하여 남성이 집안 살림살이에 기여하는 수준이 상대적으로 낮다. 그렇기 때문에 그 지역에서는 신부대를 지불하고 신부를 데려갔다고 하는데, 신부대를 많이 지불할 능력이 되면 신부를 여럿 둘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나 과거 유럽의 경우에는 좁은 땅에서 어렵게 농사를 지어 겨우 입에 풀칠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신부를 여럿 둘 형편이 아예 안되었다. 일부 돈 많은 양반집이나 임금의 경우 후처(작은 어머니)나 후궁을 두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못한게 당연하다.


또 하나 재미있게 읽은 내용은 인간만 외도를 하는게 아니라 동물도 한다는 점이었다. 물론 사고력이 부족하고 본능에 충실한 동물과 이성적인 사고력을 갖춘 인간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겠지만, 나름 신기했다.


제비라는 새도 짝을 이루고 산다고 하는데, 숫컷 중 ¼ 정도가 바람을 핀다고 한다. 그래서 바람둥이 남자를 ‘제비’라고 부르나? 


놀랍게도 수컷 제비는 자신의 짝인 암컷이 다른 수컷의 접근을 막기 위해서 옆에 꼭 붙어 있다가도 알을 낳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른 암컷을 찾아 나선다고 한다.


끝으로 사람의 이타적인 행동에 대해서 설명한 ‘해밀턴의 법칙’도 재미있게 읽었다. 결국 동물이나 인간이나 서로 협력하고 돕는 이유는 ‘재회의 가능성’ 때문이라는데, 실제로 남에게 베푸는 사람 중에 다시 돌려받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이 책은 저자가 서울대학교에서 10년이 넘게 강의한 내용을 바탕으로 저술한 책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걸까?


책을 읽다보면 마치 저자가 나에게 강의를 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그리고 책 중간 중간에 ‘토론해 봅시다’라는 코너가 있어서 이 책은 마치 대학교 교양수업의 교재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실제로 책의 뒷부분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이 책을 마무리하며’에 보면 저자는 영문 교과서를 교양수업 교재로 사용하다가, <진화와 인간 행동>이라는 번역서를 사용하였으나 900페이지가 넘을 정도로 너무 분량이 많아서 결국 새 교과서에 해당하는 이 책을 출간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저자는 말한다.


“무지는 편견을, 편견은 혐오를, 혐오는 증오를 낳는다.”


이 말에 동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끊임없이 무언가를 배우는 이유는 타인을 혐오하거나 증오하지 않고 이해하기 위해서다.


진화론이나 인류학에 대해서 궁금한 사람이라면 이 책은 진화인류학의 입문서로써 쉽고 재미있게 궁금증을 해소해 줄 것이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읽고 솔직하게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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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삶과 운명 1~3 세트 - 전3권 창비세계문학
바실리 그로스만 지음, 최선 옮김 / 창비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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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을 즐겨 읽는 독자라면 꼭 읽어봐야 할 러시아 문학작품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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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삶과 운명 1~3 세트 - 전3권 창비세계문학
바실리 그로스만 지음, 최선 옮김 / 창비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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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무엇일까?


예로부터 삶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적지 않은 철학자들과 과학자들, 그리고 지도자들이 부단히 고민해온 주제가 아닐 수 없다. 인간에게 있어서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 만큼 중요한 주제도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은 2차 세계대전판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대단한 장편소설이자 역작이기도 하다. 


20세기에서 가장 끔찍한 전쟁 중 하나였던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현대 러시아 문학의 최고 걸작이자 세계적으로 가장 위대한 전쟁 소설 중 하나라는 말에 이 책에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다.




놀랍게도 이 책의 저자는 우크라이나 태생이 유태인으로, 모스크바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2차 세계대전 중 어머니는 유태인 학살로 잃었고, 폭탄 폭발로 큰 아들은 다리를 잃었다.


저자는 종군기자로 활동하며 <트레블린카의 지옥이라는 홀로코스트 보고서를 집필하였고, 이 책 외에도 <스째빤 꼴추긴>, <인민은 죽지 않는다>, <정의로운 일을 위하여>, <모든 것은 흐른다> 등 다양한 소설 책을 집필하였다.


이 책은 1959년에 완성되었으나 스탈린주의에 반한다는 이유로 다른 당대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소련 공산당의 검열 등으로 인해 출간 불허 판정을 받았고 압수까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밀반출에 성공하여 1980년에 스위스에서 출간된 이후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등 번역본이 출간되고 러시아에서도 1989년에 출간되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이 책은 영국과 러시아에서 라디오와 TV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 책은 장편소설인 만큼 분권되어 총 3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과 혼란 속에서 한 가족의 운명을 그려낸 소설로, 2차 세계대전 중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아마 전쟁만큼이나 슬픔을 주고 비극적인 사건이 아닌 것도 없을 것이다. 전쟁은 ‘좌’냐 ‘우’냐, ‘전체주의’냐 ‘공산주의’냐 등 이념이나 이데올로기라는 명분을 앞세워 시작하지만, 결국 인간에게 슬픔과 불행, 이별과 죽음 등 수많은 번뇌와 고통만을 안겨준다.


책 속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스트룸과 그 가족들은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발생하자 모스크바에서 카잔으로 피난을 간다. 





이 책이 좋았던 점은 전투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긴장감을 더해주고, 예리한 시선과 사실적인 묘사는 독자들에게 또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놀랍게도 러시아를 침공하는 나치즘이라는 전체주의에 빠진 독일이나 인민을 위한다는 공산주의나 결국 이데올로기만 달라 보일 뿐 사회 내부의 모순이나 비리는 결국 근본적으로는 동질하지 않을 수 없다.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주인공과 그 가족들은 여러 비극을 겪게 된다. 


이 책에서 인상 깊게 읽었던 내용은 2권에서 나온 ‘우정’에 관한 저자의 생각이다.


‘우정’이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흔히 친구 간의 우정을 떠오른다. 하지만 저자는 우정에도 다양한 우정이 있다고 지적한다.


노동 속의 우정, 혁명과업 속의 우정, 긴 여정 속의 우정, 병사의 우정, 감옥 속의 우정, 기쁜 속의 우정, 슬픔 속의 우정, 평등 속의 우정, 불평등 속의 우정….


우정은 도대체 무엇일까?


저자는 “같은 운명, 같은 직업, 같은 생각을 지닌 사람들 사이에서 친구를 사귀게 되는 경우가 가장 잦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공통성 만이 우정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부인한다.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사람들끼리도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데, 이에 대한 저자의 생각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면 성격이 다르면 언젠가는 서로 다투게 되고, 다툼이 계속되다 보면 서로 감정이 상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에는 우정이 깨질 수 밖에 없다. 


“우정의 추구는 인간 본성에 내재되어 있다”고 저자는 말하는데, 인간과 친구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인간은 개, 말, 고양이, 쥐, 거미와 친구가 된다고 한다. 물론 반려동물을 가족처럼 여기거나 친구처럼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과 인간의 관계, 우정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책 속에서는 전쟁의 비극을 묘사하는 문장도 종종 등장하는데, 그 중 인상적이었던 표현을 소개한다.


“그녀를 위하여, 그녀의 아들을 위하여, 얼음물에 손이 부르튼 여인들을 위하여, 노인들 위하여, 제 어미의 해진 머릿수건에 친친 감겨있는 아이들을 위형, 그곳에서 젊은이들이 죽음을 향해 행군하고 있었다.” 


이 책에서는 유태인 학살이나 수용에 관한 얘기가 주를 이룬다. 아무래도 저자가 2차 세계대전 중에 일어난 전쟁의 비극을 상세히 담으려고 한 의도가 있는 만큼 그럴 것이다. 


많은 러시아(?) 소설들이 그렇지만, 내용이 워낙 방대하고 분량이 많다 보니 책을 요즘 나오는 자기계발서와는 다르는 게 단숨에 읽기에는 다소 벅차다.




이 책은 문학작품 - 장편 소설 임에도 불구하고 내용을 읽다가보면 재미보다는 진정한 인간의 의미를 되새기게 할 정도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그런걸까? 생각보다 책을 읽어나가는 속도가 더뎠다. 소설 중간 중간에는 작가의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있었기에 그의 세계관을, 그의 사상을,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었다.


그 중 인상 깊었던 구절은 ‘죽음’에 관한 작가의 생각이었다.


“주저 없이 죽음으로 보낼 권리보다 더 큰 권리가 있다. 그건 죽음으로 보내며 한번 더 생각할 권리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 없다. 그런데 죽을 때 한번 더 생각할 권리라고? 납득하기 어렵지만,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가능할 수도 있겠다 싶다. 


총이나 칼과 같은 무기로 남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으니까. 그리고 앗아갈지 여부를 무기를 든 사람이 결정할 수 있으니까.


삶과 운명은 타고나는 것일까? 


누구나 삶을 살아가는데 굴곡이 있겠지만, 만약에 삶이라는게 이미 정해져 있다고 한다면 어쩌면 삶을 살아가는 이유가 없어질 것 같다.


‘우리의 생각이 삶과 운명을 결정짓는다’라는 말도 있듯이, 어쩌면 삶이나 운명은 미리 정해져 있는 길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마음 먹기에 따라 달라지는 거다.


미국의 유명한 오프라 윈프리도 말하지 않았는가?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느냐가 어떤 사람이 되는지를 결정한다”


“살아있는 것은 모두 고유하다”


인간을 죽고나면 한 줌의 재가 되어 자연으로 돌아가지만, 살아있는 동안 만큼은 서로 생김새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고 무엇 하나 똑같은게 없을 만큼 서로 구별되며, 유사한 것 하나 없으며 있을 수도 없다.




이 책은 20세기의 세계적인 비극적 사건 중 하나인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어느 가족의 운명을 그린 이야기다.


전쟁이라는 참혹함 속에 다양한 인간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무엇보다 작가의 특유한 세계관을 엿볼 수 있었다.


아무래도 장편소설이기 때문에 내용이 난해하기보다는 분량이 많아서 (자기만치 권당 500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책으로 3권이나 된다!) 그런지 읽다가 3권으로 넘어가니 1권 내용에 대한 기억이 가물가물해진다.


하지만 이 책이 문학작품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중간중간에 작가만의 고유한 관점이나 생각을 스스럼없이 표현하고 있어서 그 점에서는 책을 읽다가도 작가가 던진 문장에 대해 깊은 생각에 빠지곤 했다.


<전쟁과 평화> 등 톨스토이 작품을 애독하는 팬이거나 장편소설을 즐겨 읽는 독자라면 꼭 읽어봐야 할 러시아 문학작품이 아닌가 싶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읽고 솔직하게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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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나의 운명을 원망하지 않으리라 - 쇼펜하우어의 인생에 대한 조언(1851) 라이즈 포 라이프 2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지음, 김요한 옮김 / RISE(떠오름)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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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 대해 다시 한번 돌이켜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던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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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나의 운명을 원망하지 않으리라 - 쇼펜하우어의 인생에 대한 조언(1851) 라이즈 포 라이프 2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지음, 김요한 옮김 / RISE(떠오름)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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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라는 위대한 독일의 철학자가 쓴 책이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이 책은 독자의 시선을 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책이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고 독자들의 궁금증을 자아내는 이유는 다름 아닌 책 제목 ‘나의 운명을 원망하지 않으리라’가 아닐까 싶다.  




저자인 쇼펜하우어는 19세기 서양 철학자의 대가 중 한 사람이다. 그가 염세주의자이고 비관주의자라고 학창시절 때 배웠지만, 실제로 이 책을 읽으면서 쇼펜하우어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게 되었다.



이 책은 저자가 프롤로그에서도 밝히고 있지만, ‘처세’에 관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처세를 ‘일반적인 처세’, ‘자신과의 관계’, 타인과의 관계’, 그리고 ‘세상과 운명에 대한 처세’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처세’란 무엇인가? 처세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적절한 태도와 행동을 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인간이 사회적 동물로 사회 생활을 하는데 처세만큼 중요한 것도 없다고 본다.


‘일반적인 처세’에서 인상 깊게 읽은 구절은 “현명한 사람은 고통이 없기를 바라고 쾌락을 추구하지 않는다”였다.


이 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언급한 내용이라고 하는데, 정말 마음 깊숙이 와닿는 문구였다.


나는 현명한 사람인가? 순간적인 즐거움, 즉 쾌락만을 추구하지는 않는가? 그렇다면 왜 순간적인 쾌락을 추구하는가? 순간의 정신적인 고통을 잊기 위해서 그러는 것은 아닌가? 고통이 없다는 것이 쾌락으로 커버될 수 있는가?


저자도 말하고 있지만, 우리는 삶의 목표가 쾌락을 추구하고 향락을 누리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물질만능주의가 만연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 말은 다소 어패가 있어 보인다. 아니, 어쩌면 물질만능주의에 대한 경고가 아닐까?


그렇다면 진정한 행복의 본질은 무엇일까? 저자를 행복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소명과 역할이 무엇인지를 세상에서 찾아내야 한다’고 조언한다.


나의 소명과 역할은 무엇일까? 벌써 인생을 꽤나 살아왔는데, 돌이켜보니 나의 소명이 무엇인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조차 잊고 하루하루를 이겨내는데 정신없이 살아온 것 같다.


이에 대해 저자는 세네카의 말을 인용한다. 


“하루를 하나의 인생처럼 살아라”


여기서 우리가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은 저자도 지적하고 있지만, ‘오늘’은 단 한 번만 온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지금 이 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고 소중하게 여기며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하지 않을까?




나는 혼자는 뭐든 잘 못하는 타입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과는 달리 ‘고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저는 ‘고독’으로부터 삶의 지혜를 얻어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인간을 사교적으로 만드는 것은 그들이 고독, 즉 자기 자신과의 시간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말하는데, 고독을 싫어하는 1인으로 무척이나 공감가는 말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 저자가 지적하는 것처럼 나 역시도 스스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혼자 여행은 커녕 밥도 못 먹으며, 술을 마시며 공허함을 채우려고 한다. 실제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술을 마시는 이유는 즐겁거나 괴로워서라기보다는 공허함을 채우려고 하는게 아닐까?


저자는 “이 세상에서 천국과 같은 삶을 맛보려는 사람들 대부분이 ‘보라, 나는 오랫동안 고독 속에 살고 있다’라고 말했다”라는 지오다노 브루노의 말을 인용하면서, 독자들에게 “사회 속에서도 어느 정도 고독을 유지하는 습관을 들이기”를 권하고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타인과의 관계를 멀리하고 고독을 즐겨서는 안되겠지만, 어느 정도는 고독을 유지하는 것이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하다는 것이다.



얼마 전 건강검진을 받았다. 작년에 받고 1년 만에 받는 건데, 여전히 혈압이 다소 높다고 나온다. 그리고 적지 않은 직장인들이 갖고 있는 만성병인 ‘위염’도 있다고 한다. 나름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많이 걸으려고 하는데도 이제 나이가 들어서인지 몰라도 몸이 예전 같지 않다.


요즘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를 많이 느끼는데, 저자는 그 원인이 뇌에 있다고 말한다. 수면은 인간에게 시계의 태엽 감기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비유하는데 정말 적절한 비유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뇌의 활동이 많을수록 수면을 충분히 취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 사람에게 존경과 사랑을 동시에 느끼는 것은 어렵다”라고 라 로슈푸코는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존경을 받을지 아니면 사랑을 받을지를 택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사랑은 주관적이고 존경은 객관적이기 때문에 존경을 받는게 더 쉬울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는 사랑을 받는게 더 유익하다고 말한다. 개인적으로 그 이유는 인간은 감정적이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타인을 알아가는데 있어서 어느 정도 함께 보내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 사람과 희노애락이라는 감정을 함께 느껴보고, 특히 즐거운 일도 그렇지만 힘들고 괴로운 일도 겪어봐야 한다.


“사람들은 작고 사소한 일 속에서 자신의 진짜 성격을 드러낸다”라는 세네카의 말을 인용하면서, 저자는 타인의 사소한 행동이나 태도에서 그 사람의 이기심을 파악할 수 있다고 말한다.


솔직히 큰 일에는 누구나 조심하고 정성을 다하기 때문에 본심, 즉 진짜 성격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주변에 좋은 친구들이 많은가? 개인적으로는 친구가 많은지는 모르겠지만,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한다.


그렇다면 진정한 우정이란 어떤 것을 말하는 걸까?


저자는 “진정성 있고 순수한 우정은 상대의 기쁨과 슬픔에 대해 강한 공감을 전제로 한다”고 말한다.


친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진정한 우정은 바로 상대방의 감정에 공감해주는 것이다.


고난을 겪을 때 친구가 없다는 말이 있다. 실제로 어려운 상황에 빠졌을 때 남아있는 친구가 몇 명이나 될까? 내가 잘 나갈 때는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 그리고 엄청 친한 척 한다. 하지만 내가 나락에 빠졌을 때 과연 그 친구들이 남아있을까?


때마침 최근에 인생의 고난을 다방면으로 겪고 있다. 친구들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적은 것도 아닌데, 진정한 우정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해준다.



인생의 본질은 무엇일까?


불혹의 나이를 넘어 반백살의 나이를 향하고 있는데, 아직도 인생의 본질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다양한 여러 가지 사건들을 겪게 된다. 그 과정에서 희노애락이라는 감정을 느끼고, 나이를 들고 성장해간다.


저자는 “인생은 마치 사탕가게와 같다”고 말하는데, 그 의미는 무엇일까?


각양각색의 모양과 색을 가지고 있지만, 결국 사탕은 모두 같은 재료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그리고 입에서 달지만 몸에는 해롭다는 점도 공통점이기도 하다.


인생은 결국 즐거움이나 쾌락 혹은 향락을 추구하는게 아니라고 앞서 말했다. 인생은 고통을 피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불행의 가능성을 막을 수 있다면, 시간, 노력, 돈을 아끼지 말고 편안함을 포기하거나 목표를 제한하며 자신을 절제하는 것을 주저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우리의 운명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이미 운명이 정해져있다는 운명결정론은 믿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불행이나 고난이 덮치더라도 일희일비 할 필요 없을지 모른다.


저자는 말한다.


“우리의 목표는 주위를 잘 살펴 불행을 미리 대비하는 것이다”




지금도 우리에게 끊임없이 일어나는 삶의 작은 불행들은 어쩌면 앞으로 닥치게 될 큰 불행을 견딜 수 있도록 우리를 훈련시키는 것이 아닐까?


이 책의 원 제목은 ‘Counsels and Maxims’이다. 우리말로 직역하면, ‘조언과 격언’ 정도일 것 같다. 만약에 출판사가 원제를 직역했다면 아마 독자들에게 큰 시선을 끌지 못했으리라.


하지만, 저자는 인생에 대해, 일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독자들에게 조언하고 싶고 격언을 말하고 싶었던 거 같다.


뒤늦게 이 책을 읽게 된 점이 몹시 아쉬웠다. 미성년 대학생일때, 사회 초년생일 때 이 책을 읽었더라면 조금 더 인생을 허비하지 않고 후회없이 살았을 것 같다. 하지만 지금도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앞으로 남은 제2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쩌면 큰 벽에 또 한차례 부딪혀 주저앉아 버릴 수도 있다. 그럴 때 절망하지 않고 거울을 보면서 나는 다짐할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나의 운명에 당당히 맞설 것이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읽고 솔직하게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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