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과 연대의 경제학 - 가부장제 체제의 부상과 쇠락, 이후의 새로운 질서
낸시 폴브레 지음, 윤자영 옮김 / 에디토리얼 / 202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추상적 언어로 꾹꾹 눌러담은 인류의 미래. 돌봄의 가치를 재구성하고 자본주의 경제에 저항하는 연대의 구축이 시급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돌봄과 연대의 경제학

낸시 폴브레


여성도 남성만큼 자신의 이기심을 추구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하지만, 이기심을 추구하기 위한 전체 공간이 타인에 대한 돌봄을 희생시키며 확장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여성이 권리를 더 얻으려면 남성이 의무를 더 져야 한다. (중략) 이타적 헌신(commitment)의 비용과 편익, 위험은 공정하게 나누어야 한다. 
-p.17

페미니즘은 여성이 이해관계를 공유한다고 주장하지만 여성들의 동맹은 차이점을 극복하는 데 달려 있다. 
-p.38

우리는 미래가 두려워서 과거에 집착한다. 동맹의 결과를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론적 서사와 문학적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결정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p.27

노후 소득 보장과 돌봄을 두고 걱정하는 성인들은 자녀 양육의 순편익과 필요한 돌봄을 구매할 수 있는 저축의 순편익을 저울질하게 될 것이다. 이 역시 양육 의욕을 꺾는다. 
-p.285

민주주의 국가에서 노인은 투표권이 있는 반면 18세가 안 된 국민은 투표권이 없다는 단순한 사실로 보건대, 노인의 정치적 영향력은 그들의 집단권력을 강화한다. 
-p.283

오늘날 많은 국가의 아동은 노동자로 성장하여 세금을 내고, 젊은 세대를 키우는 데 시간이나 노력을 거의 들이지 않는 노인을 돌보게 된다. 
(중략)
이런 패턴을 분명히 인정한 독일 헌법재판소는 2001년에 자녀를 둔 부모는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공적 장기요양보험료를 더 적게 내는 정책 설계를 권고했다. 
-p.282

누구의 아이들인가?
초기 복지국가는 사적 비용을 부모에게 보상하기보다 젊은 세대 양육으로 발생한 편익을 모든 시민에게 나누어주었다. 이런 정책은 처음에는 경제성장에 대한 잠재적인 부양책으로 여겨졌지만, 예상보다 훨씬 더 빠르게 출산율 감소를 가속화했다. 일부 국가에서는 꾸준한 인구 감소를 야기할 수 있는 대체율 미만의 출산율 수준에 도달했다. 
-p.281

모성 불이익
많은 회사는 장시간 일하고 저녁과 주말에도 근무하고 갑작스러운 통보에도 출장을 갈 수 있는 최고 전문직에나 걸맞을 노동자를 고용하고 싶어한다. 고용주는 이에 적합한 구직자를 식별할 수 없기 때문에 통계적으로 ‘이상적인 노동자‘가 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즉 여성을 차별하는 경향이 있다. 
(중략)
지금은 유명해진 한 실험에서 사회학자는 한 가지를 제외하고 모든 면에서 거의 일치하는 가상의 구직 지원서를 미국 고용주에게 보냈다. 일부 지원서에는 부모-교사 조직에 참여한 활동 경력을 적어내 지원자가 어린 자녀를 둔 어머니라는 신호가 포함되어 있다. 이런 신호는 구직자가 서류 전형 단계를 통과할 가능성을 줄였다. 
-p.301

정말 장기적으로는 출산율은 대체 수준까지는 회복해야 한다. 그래야 인류의 멸종을 막을 수 있다. 
-p.341

가족을 직접 돌보는 남성 비중보다 가족을 경제적으로 부양하는 여성 비중이 더 빠르게 증가했다. 이런 차이가 나타나는 이유는 아마도 남성이 돌봄 노동을 할 경우 불이익을 받는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타인을 이롭게 하는 돌봄을 전담하는 것은 즉각적이고 확실한 경제적 보상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p.59

재생산 위기
단기적 편익과 장기적 편익의 괴리가 인구학적 추세를 특징짓는다.
-p.340

남성은 가장으로서 협상력을 잃지 않고자 잠재적 가구 소득을 일부 희생하더라도 여성의 임금노동 참여를 반대할 수 있다. 
-p.234

일부 경제학자는 남성의 경제적 동기가 변해서 자발적으로 제도적 권력을 포기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어떤 남성은 확실히 그랬다. 그러나 극소수 남성만이 페미니스트가 요구하는 개혁을 거리낌 없이 옹호했다. 경제적 기회도 중요하다. 그러나 결국 변화의 이점을 강조해 남성을 설득한 요인은 여성의 개인적, 정치적 협상이었다. 
여성의 세력화에는 집단행동이 필요하다. 
-p.234

어떤 경우에 필요는 동맹의 어머니이다. (중략) 광범위한 연대는 단순히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땅에서 솟아나지 않는다. 개인의 노력과 소규모 실험, 집단적 조직화 노력, 일관된 공공정책으로 만들어지고 키워지고 발전된다. 
-p.352


대중에게 친절한 책은 아니다. ‘교차성‘이라는 용어가 별다른 설명 없이 툭툭 튀어나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책의 저자는 독자들이 이미 어느 정도 정치경제적 지식이 선행되어 있다는 가정하에 자신의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 책은 용감한 책이다. 사실 이 시대에는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게 별로 용감한 일은 아니다. 무임금 돌봄의 착취 고리에서 탈주하겠다는 선언, 그것은 지난 세대에 용감한 선언이었다. 지금 용감한 선언은 사회적 약자들의 입장에 서서 ‘무임승차‘의 뻔뻔함을 지적하는 일이다. 무임승차조차 선택할 수 없는 이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일이다. 그들이 옹호하는 사람들이 지식 계급으로나 경제적 계급면에서 아무런 우위도 확보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 일은 용감한 일이 된다. 

이 책은 용감할 뿐만 아니라 영리한 책이다. 저자는 정치적 선언이 경제 이데올로기의 어떤 허점을 파고들어야 하는지 알고 있다. 어떤 면에서는 낸시 폴브레에 비교해 낸시 프레이저는 마르크스주의의 견고한 틀에 갇혀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오래 전에 어느 비혼주의자 여성이 다른 동창생의 아이를 안고 어르며 “훌륭하게 커서 세금 많이 내야 한다.”고 괴이한 덕담을 하는 광경을 목격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불임으로 고생하고 있었고, 아직 아이를 낳지 않은 상태였으며 언제 낳을지, 과연 낳을 수나 있을지 의심스러운 상태였지만, 그 말은 상당히 불쾌한 느낌을 주었다. 느낌은 있었지만 언어가 없어서 나는 그 느낌을 표현할 수 없었다. 지금은 그때 느낀 불쾌함의 실체를 논리적 언어로 재구성할 수 있다. 

저 덕담을 가장한 압박에는 ‘무임승차자‘의 뻔뻔함이 들어 있다. 자신이 무임승차자라는 인식조차 없이, 타인의 돌봄 노동에 승차하겠다는 지독한 뻔뻔함이 들어 있는 것이다. 전문직종에 종사하며 연금과 보험을 잔뜩 들어둔 비혼주의 여성은 타인의 돌봄 노동에 무임승차하여야만 미래를 보장받는다는 사실을 (알지만) 짐짓 모른다. 그가 나중에 자신을 돌봐주는 간병인이나 간호사, 요양보호사 등등의 인력에게서 ‘염가‘로 사들이는 노동은 ‘사람을 길러내는 일‘에 아무런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헌신한 타인의 선의에 기대 마련되는 것이다. 이 세계에 젊은이가 더 이상 생겨나지 않는다면 노인은 대체 누구에게 돌봄을 기대하겠는가? 
그것을 단순히 미래 인구에게 ‘세금‘을 많이 내서 내 ‘연금’을 보장해달라는 식으로만 해석하는 일은-그러니까 돈으로 모든 것을 환산하는 태도는(물론 그 자체도 매우 뻔뻔하지만) 무임승차자의 이기적 사고의 한계를 보여준다. 

나는 여성에게 모든 짐을 당연한 듯이 떠넘기는 지난 세대의 어르신들을 만나면 숨이 막힌다. 그런 윤리관을 문학의 미학으로 여기는 문장들을 만날 때도 숨이 막힌다. 그렇지만 작금의 현실 중에서 여성들이 인류의 미래를 보이콧함으로써 무언가를 쟁취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볼 때도 슬퍼진다. 그것은 대안이 아니다. 그것은 멸망이다. 협상 불가능성에 대한 절망 때문에 모두 자멸하자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을 낳고 나서 누군가 내게 ‘행복하냐˝고 물었을 때 나는 이렇게 답했다. 

“내가 아이를 낳아서 ‘우리의 행복‘은 증가한 것 같아. 그렇지만 ‘나의 행복‘은 줄었어. 많이 행복한 순간도 있지만, 일상이 대체로 ‘내 행복‘을 희생하는 방향으로 진행되니까. 그 희생을 주변의 행복이 메우는 느낌이야. 부모님, 남편, 친정 어머니, 기타 등등의 주변인들이 즐거워하는 걸 보면 ‘그래, 당신들이 행복하다니, 난 괜찮아.’ 하는 기분이 되는 거지.”

어떤 산술 공식으로도 정답을 구할 수 없는 현실의 저와 같은 현상은 단순히 ‘기분‘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 실체 있는 재화와 권력으로도, 치환될 수 있다. 

이제껏 두 아이를 키우며 경제적으로 환원할 수 없는 가치들을 위해 내가 희생한 경제적 이득들이 숱하게 떠올랐다.

내 아이들은 이해타산에 능하지 못한 어미 덕분에 미래 세대가 지는 부담은 모두 짊어지고 계급적 상승은 경험할 수 없을 것이다. 내게는(우리 부부에게는) 자녀들의 계급을 상승시킬 투자 여력이 없다. 

추상적이고 전문적인 언어들로 기록된 지독하게 현실적인 이야기들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2019 제4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김초엽 지음 / 허블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초엽은 SF장르만의 고유한 특성을 살리면서도 감성적인 문장을 구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한국 대표 SF 작가이다. 이 책은 중국 은하상 최우수외국 작가상, 최우수번역상, 2관왕을 하게 될 기념비적인 출발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당신 인생의 이야기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엘리 / 202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하드sf 단편소설의 현존 대표 작가 테드 창을 유명하게 만든 초기작들. 과작을 하는 작가답게 한 편 한 편 밀도가 높다. 과학적 상상을 바탕으로 독특하고 정교한 세계를 구성해내는 솜씨가 탁월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밖의 사람 - 어느 소설가의 택배일지
정혁용 지음 / 마이디어북스 / 202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선 질문 먼저, 당신은 일주일에 택배를 얼마나 받으십니까?

코로나를 겪으며 택배에 대한 관심이 크게 증가했었다. 그래서 몇몇 책과 기사문들을 찾아 읽은 적은 있다. 그러나 내 뇌리에 택배 노동자에 대한 각인을 조각도로 석고판을 후비듯이 새긴 책이라면 단연 이 책을 꼽아야 한다.

내 소갈머리의 용량은 정혁용의 <문 밖의 사람>을 읽기 전과 읽은 후로 나눌 수 있다.

그 전에도 택배 노동자에 대한 글을 읽긴 했지만, 지나치게 관념적이거나 일반화된 개념으로 접해서 사람이 아니라 도표가 기억나곤 했다. 혹은 ˝아, 심각하구나.˝ 하고 곧 잊었다.

그러나 이제는 정혁용이라는 하나의 개별 인간으로 기억하게 되었다. 대학원까지 나왔지만 택배를 하고, 잠을 줄여 소설을 썼던 한 사람.
르포 기자들이 한 사람과 밀착 동행해 취재를 해 기사를 쓰는 이유는 ‘생생한 하나의 사람‘을 전달하기 위해서일 텐데, 중간에 기자가 끼지 않고 본인이 직접 글을 쓸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그래서 언어가 권력이라 했던가.

이 책의 장점은 ‘호소‘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책 안에 삽입된 <에픽>5호에 게재되었던 논픽션조차 ‘호소‘의 논조가 거의 없다. 마치 소설처럼 이야기를 들려준다. 비극 반 희극 반의 블랙 유머 논조가 책 전체에 물결처럼 흐르고 있다.

정혁용 작가의 생애에 휘몰아쳤던 사건들은 흔히들 ˝내 인생을 책으로 쓰면 소설책 10권은 나올 거다.˝고 말하는 경지인데, 역시 그런 분들은 소설을 못 쓰고 정혁용 작가는 에세이를 써도 소설이 된다. 왜냐하면....

어떻게 이런 이야기들을 책 한 권에 우겨 넣으실 수 있었단 말인가? 그것도 장면화하여 영화처럼 눈 앞에 선연히 그려지는 방식으로 전달하신단 말인가?

긴 말 필요없고, 사서 읽으시길 바란다. 호주머니가 비어 계시다면 가까운 도서관에 희망도서라도 신청해서 1빠로 대출하시기 바란다. 그 뒤로는 대출중으로 떠서 빌릴 수도 없을 테니, 서둘러야 할 것이다. (희망사항인데, 정말 그렇게 되면 좋겠다.)

정혁용 작가의 소설 <침입자들>과 <파괴자들>을 재미있게 읽으신 분들이라면 꼭 읽으셔야 하고,
작가를 몰랐던 분들이라면 에세이부터 보시길. 아마 알게 된 것에 기뻐서 ‘깨춤을 추실‘ 것이고, 소설까지 달려 나가실 것이다.

내가 밑줄 그은 부분은 작가의 아포리즘과 사람 됨됨이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이것은 내가 재미있게 읽은 대목들의 실오라기쯤 된다.

정말 재미있게 읽은 부분은 스포 될까 숨긴다. (사실 줄 그으면 책 한 권 다 그어야 해서 포기했다.)

읽으신 분들과 독서 클럽이라도 만들고 싶다. ‘통역사‘, ‘남의돈예술‘, ‘휘발유 같은 경유‘, ‘천사‘, ‘놀~자‘에 대해 이야기하며 소주를 마시고 싶다. 진심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