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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나라는 통증 - 비로소 나아가는 읽기, 쓰기
하재영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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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영 작가님의 글들을 정말 좋아한다.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로 처음 만나 <나는 결코 어머니가 없었다>에서 팬이 되었다. ‘공간으로서의 집’과 ‘나의 시작으로서의 어머니’. 그리고 이번에는 ‘나라는 통증’이다. 이보다 더 여성적 글쓰기가 있을까.

<지극히 나라는 통증>은 작가님 전작들을 사랑하는 나에게는 선물 같은 책이다. 모든 작품에 대한 ‘후기’를 들려주는 느낌이었달까. 스스로의 삶에 대한 긴 안부 편지 같았다. 그동안 어떤 터널을 지나왔느냐면, 하고 솔직하게 털어놓는 고백은 오히려 강하고 단호한 선언이기도 했다.

‘세상이 바라는 대로 숨거나 사라지거나 침묵하지 않겠다고(44p)’
‘채워지지 않는 허기와 분투하던 날에 불완전한 화해를 보내겠다고(78p)’
‘또다시 내면에 유혈사태를 겪더라도 나는 잃어버린 것을 계속 회고함으로써 계속 말하고 싶다고(248p)’

‘따라서 회고록이 독자에게도 의미를 가진다면, 그것은 나열된 사건 때문이 아니다. 글쓴이가 자신과 맺고 있는 관계를 탐구함으로써, 경험 안에서 진실을 찾으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서사적 완결은 자아의 복잡성을 이해하고 스스로의 이중성을 대면할 때 가능해진다(244p).’

버지니아 울프, 비비언 고닉, 캐럴라인 냅, 리베카 솔닛, 도나 해러웨이, 수전 손택과 김혜순. 그에게 믿을 구석이 되어 주었던 여성 작가들처럼 그 역시 다른 여성들에게 믿을 구석이 되어주고 있다. 이 여성적 글쓰기가 지속되기를 바란다. 많은 여성들이 그의 문장들을 짚고 일어설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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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노라마
릴리아 아센 지음, 곽미성 옮김 / 어떤책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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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가까운 미래의 어느 날, 프랑스에서는 사법부의 신뢰를 떨어뜨리는 일련의 사건으로 인한 시민 혁명이 일어난다. 관료적인 행정부를 축소하고 사법부를 해체하자는 운동인 ‘투명화시민운동’이 시작되자 주인공인 엘렌 뒤베른 역시 경찰에서 일개 안전관리인으로 전락하고 만다.

‘투명화시민운동’은 관료제의 해체뿐만 아니라 건축에도 영향을 미쳤다. 안전과 윤리적 무결을 위해 모든 건축물은 투명하게 지어졌고 이에 동조하는 이들은 CCTV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고급 투명주택 단지에 거주하게 된다. 사람들은 투명한 건축물에 익숙해져서 나를 드러내는 일에도, 남을 관찰하는 일에도 아무런 죄의식을 갖지 않게 된다. 투명한 사회로 거듭난 프랑스는 얼핏 정의롭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듯하다.

어느 날, 고급 주택단지에서 실종사건이 벌어지며 투명한 세계에도 균열이 일어난다. 사건의 실체를 밝히려는 엘렌은 투명한 세계 속에 가려진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감상:

나의 모든 정보와 취향이 대형 포털 사이트나 SNS에 빅데이터로서 공급되는 요즘, ‘감시 자본주의’는 먼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프랑스의 젊은 작가 릴리아 아센은 추리소설의 형식을 빌어 ‘감시’가 일상이 되는 사회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그 안에서도 감춰지지 않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책장을 덮었을 때 왠지 먼 미래의 일이 아닌 듯해 순간 두려움이 엄습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정의는 과연 모두에게 ‘정의’인가. 부정적인 것을 배제하고 보기 좋은 것들만 늘어 놓았을 때, 그것은 과연 진짜 ‘나’인가. 모든 것들이 내 바람대로 이루어진다면 과연 그것은 유토피아인가.

여러 등장인물들을 통해 사건을 각자의 관점으로 이해하며 뻗어나간 가지에서 줄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과정이 흥미롭고 스토리의 전개가 빨라 속도감 있게 읽힌다. 자칫 무거울 수도 있는 주제이지만 재미를 놓치지 않은 작가의 현명함이 돋보인다.

프랑스의 현대소설 작가라면 아니 에르노와 기욤 뮈소, 베르나르 베르베르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파노라마>를 통해 목록에 ‘릴리아 아센’을 추가하게 되어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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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생물학 - 내 몸을 누군가와 나눈다는 것
이은희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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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생물학 - 내 몸을 누군가와 나눈다는 것

나는 딸로 태어나 여자로 자라나고 엄마가 되었지만 아직도 내 몸에 대해 잘 모른다. 알아야 한다는 생각도,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다. 자세하게 알려주고 미리 준비하는 교육을 받았더라면 처음 겪었던 월경이, 임신과 출산과 육아가, 곧 다가 올 완경이 조금은 더 쉬웠을까? 그렇지만 이미 늦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엄마 생물학> 같은 책이 있으니 이제라도 알아가면 된다.

이 책은 꽤 폭 넓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월경과 난자, 체외수정과 난임, 임신과정과 출산부터 성평등과 모성, 육아와 관련된 가설과 오해들, 완경과 죽음까지 꼼꼼하고 친절하게 알려준다. 살아가며 마주하는 급격한 변화에서 답을 찾기 힘들었던 문제들을 이 책을 읽으며 다소 해소했다.

특히 나 역시 저자와 동일한 과배란 과정과 수정란 이식, 수정란 냉동을 경험해서인지 1부 ‘깃들다’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2023년 기준 7만5천여 명의 여성이 난임시술을 받을 정도로 체외수정이 보편화 된 지금이지만 당시에는 ‘그렇게까지 해야 해?’라는 사회적 인식이 컸다. 눈이 나빠 시력 교정술을 하는 이에게는 ‘그렇게까지 해야 하느냐’라는 조건을 달지 않는데, 보조 생식술을 받는 것에는 윤리 문제를 거론했다. 또 ‘시험관 아기’라고 하면 비이커나 배양접시에서 태아를 만들어 내는 것으로 막연히 생각하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부정적인 사회인식과 가족들의 기대, 실패에 대한 두려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뭔가 문제가 있어 아이를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우울증과 자존감 저하에 시달’(p53)리던 날들. 힘든 시간들을 겪은 저자가 솔직히 풀어놓은 이야기들 덕분에 당시의 나를 위로할 수 있었다.

이제는 완경기 평균 나이에 근접하고 있지만 여전히 내 몸에 대해서는 새롭게 알게 되는 사실이 더 많다. 5분 남짓한 진료 시간 사이에 친절하고 자세한 의사를 만나 긴 이야기를 나누기는 쉽지 않다. 궁금했던 것들을 직접 묻지 못하고 내가 찾아봐야 알게 된다는 것은 아직도 아쉬운 점이지만, <엄마 생물학>같은 책들이 나와주는 것은 참 고마운 일이다. 임신과 출산, 육아를 하는 여성들은 물론이고 이를 하지 않았거나 하지 않을 여성들과 남성들에게(특히)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세상에 태어난 나와 나를 낳은 엄마를 이해하기에 이 책보다 더 좋은 시작은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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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아름다움은 이미 때 묻은 것 - 모성, 글쓰기, 그리고 다른 방식의 사랑 이야기
레슬리 제이미슨 지음, 송섬별 옮김 / 반비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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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아름다움은 이미 때 묻은 것>

기찻길 옆 소방서 근처의 서블렛 아파트에서 한 살 아이와 단 둘이 시작하는 삶.

이 책은 산도(産道)처럼 생긴 그 아파트에서 시작된 그간의 긴 이야기이다.

그녀의 이야기는 익숙하기도, 낯설기도 했다.

싱글맘의 고군분투 이야기나 아이로 인해 온전히 예술을 향유하지 못하는 이야기, 아이로 인해 엄마로서의 삶뿐 아니라 내 어머니의 삶까지 짚어보는 이야기는 이미 익숙했다.

그러나 그녀는 일상의 순간에서 떠오르는 생각과 감정을 집요하게 붙잡는다. 감정의 밑바닥에 자리한 불안과 두려움까지 끄집어내며 잊고 있던 그 시절의 나와 나의 상념들까지 강력하게 소환한다. 분명 희미한 기억들인데 렌즈를 들이대고 계속 줌인해서 확대하고 또 확대해보니 또렷해지는 그 순간의 감정들. 기억은 선명해지고 눈앞은 흐려진다.

육아를 하면 할수록 ‘본연의 나’는 ‘육아하는 나’와 공존할 수 없다는 불안만이 매일의 소회였다. 나는 엄마들 사이에서도, 엄마가 아닌 사람들 사이에서도 스스로를 소외하며 내가 될 수 있었던 ‘다른 버전’의 나를 상상하는 일에 집착했다. 모든 선택을 한 것은 나였음에도 이 상황을 만든 것은 늘 ‘아이’라고 생각하며 원망했다.

‘더 나은 엄마’와 ‘더 나은 나’는 정말 공존할 수 없었을까?

제발 지나가라 애원했던 시간들은 이미 과거에 남겨져 있다. 그때는 소중한지 몰랐던, 너무나 아까운 날들.

이제는 안다. 모든 게 엉망진창인 채로 또 새로운 날들이 시작된다는 것을. 힘들었던 오늘 역시, 미래에는 간절히 바랄 다시 돌아가고 싶은 날들이라는 것을.

레슬리 제이미슨은 내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균열 없는 삶은 불가능한 것이라고. 모든 아름다움은 때 묻은 것이라고.

지난한 일상 속, 복잡한 상황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아름다움은 분명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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