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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필 다이어리 - 철학자와 영화의 만남 ㅣ 시네필 다이어리 1
정여울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1월
평점 :
절판
『시네필 다이어리』, 정여울, 자음과 모음, 2010
- 영화와 철학이 삶을 만나는 순간
영화는 그 어떤 것과의 만남도 흥미롭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심리학과 만나도, 과학과 만나도, 미술과 만나도 매번 잘 어울릴 뿐 아니라 더욱 재미있어 진다. 독자적으로 놓고 보면 어렵게 느껴져, 선뜻 다가가기 힘든 학문일지라도 영화를 만나는 순간 특유의 친근함과 편안함으로 금방 우리를 매료시키는 것이다. 즐겁게 본 영화의 기억을 떠올려 심리학을, 과학을, 또는 미술을 그려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철학이라면 말이 좀 달라진다. 철학, 그 어떤 학문보다 지겹고 따분하고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단순한 고정관념일까? 아니라고 본다. 철학을 담고 있는 이 책은 역시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한 번 읽어버린다고 해서 그 의미가 쉽게 마음을 파고들지 못하였다. 하지만 조금은 느슨해진 마음으로 영화의 순간을 떠올리며 다시 차근히 읽어본 이 책은, 우리가 순간의 즐거움으로 놓쳐 버렸던 아주 커다란 진실들에 대해 차분하게 이야기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진실들을 알아가는 것은 과연, 재미있는 일이었다.
총 8편의 영화를, 깊이 있게 다루고 있는 책의 내용 중 가장 주목하고 흥미롭게 읽은 부분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관한 글이었다. 지금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처음 보던 날을 잊을 수가 없다. 확실한 충격이었다. 미적 감각으로서의 충격, 상상력으로서의 충격, 나의 17년 문화생활로서도 최대의 충격이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명성은 알고 있었지만, 17살에 만난 하야오가 만든 세상은 환상 그 자체였다. 영화를 보는 내내, 다 본 후에도 그 여운이 참 오래 갔던 기억이 난다. 사람들은 제각기 자신만의 스타일로 자신이 본 영화를 기억해내기 마련이다. 영상 그자체로 기억할 수도, 음악으로 혹은 배우의 헤어스타일로 기억할 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영화를 본 시기에 나에게 벌어진 일이나 사건들과 맞물려 기억하곤 한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보았을 시기에 나는 커다란 불행을 겪었었다. 아직 사춘기도 떨쳐내지 못한 때였으며, 무기력과 우울이 함께 찾아와 무척이나 힘들었다. 그래서 그 시절, 나는 온종일 영화를 보는 일에 빠져들었다. 유일한 도피처였던 것 같다. 그래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보는 내내 센의 모험에 더욱 깊이 빠져들었는지도 모른다. 센이 아닌 치히로로, 모험을 완성하고 부모님을 구하려는 모습에서 나는 큰 카타르시스를 얻었던 것 같다. 그래서 펑펑 울 수도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5년이 지난 지금 『씨네필 다이어리』 속에 있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다시 들여다보는 일은 그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을 주었다. 그 시절, 내가 영화를 통해 받았던 마음의 울림과 여운을 철학과 맞물려 고개를 끄덕이도록 설명해놓았다. 그리고 그것이 다가 아닌, 그때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들 또한 발견할 수 있게도 해주었다. 어쩌면, 내가 그 때보다 나만의 철학이 더욱 많이 생겼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마음속에 다시 한 번 영화를 떠올리며, 나만의 철학에 대해 골몰하며 책을 읽으며 시종 진지해졌던 것 같다.
이 외에도 깊고, 명쾌하게 정리해 놓은 8편의 영화 모두 인상 깊었다. 영화가 재미있는 것은 아무래도 영화가 우리의 삶과 너무도 닮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는 수많은 철학이 담겨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의 인생에도 철학은 항상 존재하니까. 어떤 존재와 어떤 순간, 또 어떤 사건들에 대해 의미 없고 이유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에는 그만의 철학을 안고 있다. 영화를 이용하고 있긴 하지만, 우리의 삶 자체에 존재하는 철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묵직한 흥미로움을 던져준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