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 한강 소설
한강 지음, 차미혜 사진 / 난다 / 2016년 5월
평점 :
품절


어둠 속
성글게 흩날리는 눈송이

하늘에서 잠깐 내려와
금방 사라지고 마는 그 하얀 눈송이

그러나 영원히 기억하게 될
어둠 속, 밝게 빛나는 흰 아름다움

_
삶과 죽음 언저리에 맞닿아 있는 흰

하얀 서리가 내리던 어느 초겨울에 태어난
까만 눈동자가 유난히 빛나던 그녀

흰 배냇저고리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던
달떡처럼 동그랗고 하얗던 그녀

대학 동기 둘이 비슷한 시기에 죽었다.

문학수업을 듣던 강의실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어린 백목련 두 그루를 심었다.

(중략)
흰 꽃은 생명과 연결되어 있는 걸까, 아니면 죽음과?

인도유럽어에서 텅 빔과 흰빛, 검음과 불꽃이 모두 같은 
어원을 갖는다고 그녀는 읽었다.


한 강 _흰 p.8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놀이의 반란 - EBS 다큐프라임 화제작!
EBS <놀이의 반란> 제작팀 지음 / 지식너머 / 201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늘부터 얼마나 잘 노는지를 평가할거에요.˝

아마 한번 쯤은 ˝컴퓨터 게임으로 시험보면 진짜 1등할 자신있는데˝와 같은 생각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공부가 아닌 컴퓨터 게임으로 시험을 보고 성적을 매긴다면, 진심으로 컴퓨터 게임을 좋아하고 즐기는 사람들은 줄어들 것이다. 그들에게 그것은 더 이상 즐거운 놀이가 아니다. 지긋지긋하게 하기싫은 공부일 뿐이다.

많은 어른들이 취미생활이란 이름으로 그들 만의 놀이를 즐긴다. 그들에게 취미생활, 곧 놀이는 즐거움을 주고 스트레스를 해소시켜주는 행위이다.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집에 오면, 주말마다 놀이에 빠져든다. 옆에서 누가 ˝아니, 그건 그렇게 하면 안되지! 봐봐, 이렇게 하는거라니까? 나 따라해봐˝라고 훈계아닌 훈계를 한다면 짜증이 나면서, 갑자기 의욕이 떨어질 것이다. 어른들 중에는 공부하는 것처럼, 일하는 것처럼 노는 사람은 거의 없다. 어른들은 ‘진정한‘ 놀이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있다. 그런데도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공부같은 놀이‘를 강요한다. 놀이같은 공부는 있을 수 있지만, 공부같은 놀이는 있을 수없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공부하고 분석하기 위해 취미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다. 취미생활을 계속 하다보니 더 배우고싶고, 잘하고싶은 욕심이 생겨서 공부하고 분석하는 것이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공부를 목적으로 놀이를 하는 것이 아니라, 놀이를 하다보니 궁금한 것이 생겨서, 더 잘하고싶어서 공부를 하는 것이다. 절대 그 반대는 있을 수 없다.

분명, 아이들은 놀이 속에서 무엇인가를 배운다. 하지만 배움은 즐겁고, 자연스러운 놀이 속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이다. 어른들이 계획하고 ‘주도하는‘ 대부분의 놀이는 자연스럽지도, 즐겁지도 않다. 그건 놀이라고 부를 수 없다. 부모와 교사는 아이들과의 놀이에 주도자가 아닌 참여자, 보조자로 참여해야한다. 이것저것 참견하고 가르치려고 하기보다는, 놀이의 주도는 전적으로 아이들에게 맡기고 어른들은 아이들이 만든 놀이에 몸만 들어가면된다. 아이들은 상상력은 정말이지 상상이상으로 무궁무진하다. 그들의 세계에선 무엇이든 만들어낼 수있다. 그렇기에 성인의 불필요한 개입은 놀이를 방해하는 장애물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이들 혼자서 놀게 내버려 두라고 배우지않는다. 시간을 내서 아이들과 함께 놀아야 한다고 배운다. 어른들이 유아의 놀이에 참여해야하는 사회문화적, 뇌과학적 이유는 정말 많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성인이 유아의 놀이 참여해야하는 이유와 방식, 역할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성인은 유아보다 더 오래시간 세상을 살았고, 거의 모든 어른이 유아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있다. 즉, 성인은 유아들의 놀이를 확장시켜줄 수 있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놀이에 참여하면서 아이들이 알지 못하는 부분을 ‘슬쩍‘ 흘린다. 예를들어 유아가 동물인형을 가지고 놀고 있다면, 부모(혹은  교사)는 사육사가 되어 놀이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럼 유아는 묻는다. ˝사육사가 뭐하는 건데?˝ 아이가 사육사가 무엇인지 궁금해하고, 질문을 할 때‘만‘ 놀이의 흐름이 끊기지 않는 선에서 ‘아주 간략하게‘ 답하면 된다. 아마 그 유아의 사전에는 사육사라는 단어가 추가되어 다음 놀이부터는 사육사 역할이 반복해서 나타날 것이다. 이게 놀이 속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공부다. 중요한 점은 절대 길게, 자세하게 설명해선 안된다는 점이다. 우리도 잘 알고있듯이, 설명이 길어지면 지루해진다. 유아들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유아들은 성인보다 인내심이 훨씬 짧다. 설명이 길어지면 지루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놀이를 방해받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더 많은 것을 알고있다는 자만에 빠진 어른들은 이런 실수를 반복적으로 저지른다. 성인은 유아가 호기심을 가질 수있도록 무심하게 툭 던지기만 하면된다. 그것을 줍든, 안 줍든 그건 온전히 유아의 마음이다. 유아가 던져진 무엇인가를 주워와서, 이것이 무엇인지 물어볼 때 짧게 설명해주는 것으로 어른들의 역할은 끝난다.

그런 의미에서 유아들에게 놀이시간 만큼 중요한 것은 다양하고 풍부한 놀이환경이다. 아이들은 다양한 환경 속에서, 다양한 놀잇감을 가지고, 다양한 방식의 놀이를 많이 접해볼 수록 좋다. 이런 다양한 놀이는 유아의 다양한 영역의 발달을 돕는다. 아빠의 놀이가 중요한 것 역시 이러한 이유에서다. 엄마의 놀이는 대부분 정적이다. 앉아서 블럭놀이나 인형놀이를 하거나, 같이 놀이터에 나가더라도 그네를 밀어주거나 미끄럼틀 밑에서 내려오는 아이를 받아주는 것이 아마 대부분의 엄마들의 놀이일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아빠들은 좀 더 활발한 놀이를 선호한다. 칼을 휘두르고 총을 쏘아대는 전쟁놀이, 온 몸으로 공격하고 방어하는 레슬링 등 신체를 역동적으로 사용하는 놀이를 많이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엄마 놀이냐, 아빠 놀이냐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다양한 방식의 놀이를 경험해보았냐는 것이다. 정적인 놀이와 동적인 놀이가 서로 뇌의 다른부분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여러 논문에서 밝혀져있다. 그만큼 다양한 방식의 놀이는 유아에게 중요하다.

그 외에도 다양한 놀잇감을 제공하는 것도 필요하다. 특히, ‘정형화되지 않은‘ 놀잇감을 제공해야한다고 많은 학자들이 말한다. 최근 숲교육이 떠오르고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자연물은 정형화되지 않은 놀잇감이기 때문이다. 정형화되지 않은 놀잇감은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시키고, 쉽게 놀이가 확장될 수 있도록 돕는다. 물론 이렇듯 몇 개의 정형화되지 않은 놀잇감도 중요하지만, 유아들이 풍부한 놀잇감을 접할 수 있는 환경 역시 그 장점이 존재한다. 아이들은 다양한 종류의 놀잇감을 가지고 놀면서 다양한 영역을 자연스럽게 접해본다. 유치원에서도 아이들에게 많은 놀이의 기회를 제공해주기위해 짧게는 매 주, 길게는 매 달 놀잇감을 새롭게 바꿔준다. 유치원은 유아들이 최대한 많은 놀잇감을 경험해볼 수 있도록 노력하고있다. 즉, 부모와 교사는 놀이에 직접 참여하는 것과 더불어, 유아들이 많은 놀이를 경험해볼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장난감만 많이사주고 같이 놀지않는 엄마와 아빠, 혹은 환경구성 만을 해주고 하루종일 업무만 보는 교사는 바람직한 성인이 아니다. 무엇보다 놀이의 목적은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성인이 아이들의 놀이에 참여해야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아이들에게 더 큰 즐거움을 주기위해서다. 혼자서 노는 것보다 여럿이 노는 것이 더 즐겁고, 누군가와 함께라면 혼자선 할 수 없는 놀이를 마음껏 할 수있다. 그 놀이의 대상이 성인, 특히 부모와 교사가 되어야하는 이유는 그들은 아이들의 하루의 대부분을 함께하는, 유아들이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이들과 함께 즐거운 놀이를 하기위해서는 어른들이 먼저 놀이에 빠져들어 놀이를 즐기는 것이 중요하다. 놀이를 즐기지 못하는 성인은 유아들의 놀이를 즐겁게 만들어주기 어렵다. 우리는 유아들의 삶을 더욱 더 즐겁게 만들어주기 위해, 함께 노는 것이다.

놀이는 아이들의 일상, 곧 삶이다. 아이들의 놀이는 놀이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한다. 어른들이 자신의 놀이(취미활동)를 존중받고 싶어하는 만큼, 유아들도 자신의 놀이를 존중받고 싶어한다. 어른들은 유아들의 놀이에 억지로 간섭해서 교육적인 방향으로 이끌려고 하기보다는 재미있는 놀이로 남겨줄 수 있어야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여행이라는 참 이상한 일
한수희 지음 / 인디고(글담) / 2017년 8월
평점 :
판매중지


여행은 즐거운 일인줄 알았는데, ‘이상한 일‘이라니. 왜 이상한 일이지? 내가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단지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다. 여행이 ‘이상한 일‘이라니.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책 초반엔 여행을 바라보는 독특한 시선이 매력적이었다. 여행을 좋아하지만, 낯선 곳을 싫어하는 작가의 생각이 문장 하나하나에 잘 드러났다.

나 역시도 낯선 곳을 싫어하고, 낯선 곳을 두려워한다. 그런데도 여행을 가고싶어하는 아이러니한 이유를 작가가 잘 말해주었다.

낯선 곳에서의 두려움조차, 낯선 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설렘의 일부였다.

_
역시 모든지 적당해야 좋다.

작가는 시간이 갈수록, 두려움을 빙자한 불만을 내비친다. 이런 불만이 책을 읽는 내내 사람을 피곤하게 만든다.

한 챕터, 챕터가 지날 수록, 각기 다른 여행엔 각자다른 불평이 가득하다. 작가의 여행에 빠져들어 두려움과 진정한 설렘을 경험할라치면, 작가는 불평불만을 한다.

맛 없는 뷔페를 ‘꾸역꾸역‘ 먹는다.

여행부터 그녀의 삶 자체까지, 어느하나 그녀에게 만족스러운 것은 없어보인다. 작가의 여행기 속 여행은 그닥 행복해보이지 않는다.

_
˝우리 앞에는 이제 내리막길만이 이어지리라는 것을.˝
책 <여행이라는 참 이상한 일> 중

_
그 예를 하나 들면, 작가는 신혼여행을 규슈로 갔다왔다. 지긋지긋한 비행기가 아닌 배를 타고. 이건 오로지 그녀의 선택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원하는 장소로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그럼에도 그녀는 후회한다.

왜? 유럽으로 가지 않아서.

그녀가 신혼여행을 유럽으로 다녀와야 했던 이유는 다양하다. 딸린 자식들과 함께는 호화스러운 여행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이가 들수록 무릎이 약해지기 때문에, 남편을 낭만적인 눈으로 바라보기엔 세월이 많이 흘렀기 때문에. 그들의 앞 날엔 이제 내리막길 밖에 없기 때문에.
그녀는 유럽에 다녀왔어도 아마, 이렇게 후회했을 것이다.

‘난 배를타고 규슈로 신혼여행을 갔다오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 지금의 나이와 무릎으로는 절대로 해볼 수 없는 경험이다. 그때는 파릇파릇한 생기가 가득하고 힘이 넘치는 신혼이었지만, 지금은 애 둘 딸린(!) 나이먹은 흔한 아줌마일 뿐이다. 이젠 그런 여행을, 멀미가 가득한 배를 타고 무작정 규슈로 떠나는 그런 여행을, 가고싶어도 가지 못한다.‘

_
책을 덮고 글을 쓰다보니, ‘사실은 내가 불평불만이 가득한 사람이여서, 작가의 진솔한 말과 행동이 불평불만으로 들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이제서야 든다.

난 사소한 불만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기 위해 책을 읽는다. 그래서 지나치게 진솔했던 이 책이 피곤하게 느껴졌을 수도 있다.

고국에서라면 겪지 않아도 될 난처한 상황에 놓이고 낯선 곳에 도착하고 당황하고 절망하는 일을 반복해야 한다. (중략) 나는 다시 어린시절의 나로 돌아간다. 이런 게 여행이라면 나는 여행이 싫다.

참 이상한 일이다. 고향이 아닌 곳에서 고향의 느낌을 받으러 그 먼 길을 가다니, 참 이상한 일이다. (중략) 그렇게 빈둥대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마치 고향같은 곳에서. 나는 이 도시가 좋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수 클리볼드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1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수 클리볼드는 수십명의 부·사상자를 만들어낸 총기 사건 가해자의 엄마이자, 사랑하는 아들을 자살로 잃은 유가족이다.

그녀는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을 진심으로 애도하지만, 여전히 딜런을 사랑한다.

이 책 속엔 이러한 그녀의 혼란스러움이 생생하게, 그리고 담담하게 모두 담겨있다.

_
수 클리볼드는 자신의 아들이 저지른 끔찍한 일을 우울증이란 단어로 덮어버리려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그의 아들, 딜런이 사람을 죽였다는 변하지 않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럼에도 그녀가 이 책을 쓴 단 하나의 이유는 이렇게 끔찍한 사건을 ‘막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_
대부분의 부모는 자식을 사랑으로, 누구보다 최선을 다해 키운다.

나의 부모님 역시 최선을 다해 지난 23년간 나를 키우셨다.
부모님과 나는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하지만 나는 부모님에게 나의 모든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우리는 절대로 타인의 속마음을 모두 알 수 없다.
그건 부모도 마찬가지다. 부모 역시 자녀의 모든 생각을 알 수는 없다.

어떻게 그 아이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_
이러한 참사가 내 자식에게 일어나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

청소년 범죄가 일어났을 때, 그 모든 책임을 가해자 부모에게 전가하는 경향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 자식에게는 이런 일이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야‘라는 착각에 빠져살기 때문이다.

정말 내 자식이 마음의 병을 앓고 있지 않다고 확신할 수 있나? 내 자식이 부산 여중생 폭행과 같은 사건의 가해자가 되지 않을 거란 확신이 있나?

어떻게 확신하는가?

집에선 언제나 밝은 아이지만, 학교에선 따돌림을 당하고 있을 수 있다. 집에선 조용한 아이지만, 학교에선 따돌림의 주동자일 수도 있다.

p.393
사람들은 고슴도치처럼 연약한 속을 보호하기 위해 몸을 움츠리고 가시를 바깥쪽으로 내밀었다.
... 모든 이들이 공격을 막아내면서 동시에 자기들도 공격의 칼날을 휘둘렀다.

p.397~398
친구는 이렇게 물었다. "넌 딜런이 한 일을 용서할 수 있니?" 나는 충격을 받아 할 말을 잃었다.
... 내가 딜런을 실망시킨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보노보노처럼 살다니 다행이야
김신회 지음 / 놀 / 2017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을 다 읽지 못하고, 덮어버렸다.

그 이유를, 책에서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p.311
긴 시간 책을 읽고 싶은 밤이었지만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중략) 잘난 척이 심한 책은 도무지 읽기가 힘든데,
특히 왜 잘난 척하는지 모르겠는 사람이 잘난 척할 때는 더 그렇다.

_
만화 보노보노를 읽은 후, 침대에 누워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린다.

‘보노보노처럼 아무 생각없이 살면 얼마나 좋을까?‘
‘아, 이 때 보노보노처럼 이렇게 행동했으면/말했으면 좋았을텐데.‘

다짐한다.
‘내일부턴 나도 보노보노처럼 살아야지.‘

아마도 작가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책의 내용이 그 생각에서 더 나아가지 않아 아쉽다.

_
작가의 글이 아닌, 만화 보노보노의 대사를 여러 번 곱씹어본다.

여러 번 생각하게 만드는 대사가 참 많이 나온다. 

만화 보노보노를 사서 읽어봐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