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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나라
허버트 조지 웰스 지음, 차영지 옮김 / 내로라 / 2025년 7월
평점 :
짧고 빠르게 읽히지만 생각할 거리를 무수히 던져 주는 내로라 출판사의 책. 이번 책도 대략 50페이지 정도의 짧은 글이었지만 임팩트는 어마어마했다.
이유 모를 전염병이 돌아 눈이 멀게 된 어느 마을, 눈먼 세대가 15번을 거듭하던 어느 날. 알프스 원정을 하던 '시력을 가진' 누네즈가 우연히 눈먼 자들의 나라에 떨어진다. 다른 세계와 동떨어져 완전히 고립된 채 자신들의 세계를 만들어 오던 눈먼 자들의 나라. 그들은 시력 대신 예리하게 길러진 청력과 촉각으로 일상을 영위한다. 누네즈는 눈먼 세계에서 자신만 시력을 가지고 있으니 자신이 이 나라를 통치하는 우두머리가 되리라 생각하지만(그것도 아주 간단히) 예상치 못한 난관이 펼쳐진다.
보이는 자는 보이지 않는 자들 사이에서 너무나 쉽게 왕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나 역시 뒷통수 제대로 맞은 기분이었다. 보이지 않는 게 기본값인 이들 세계에서 보이는 자의 시력은 '질병' 그 자체가 되었다. '정상'이라는 개념을 완벽하게 뒤집어 이야기를 만들어 낸 작가가 놀라웠다. '정상' 또는 '평균'이라는 개념은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무수히 변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서서히 스몄다기 보다 순식간에 후두려 맞은 깨달음... 정상과 비정상, 보편과 특수성은 누구의 기준으로 정해지는 걸까? 나 역시 평범한 일상 속 나만의 보편과 나만의 기준에 절절히 찌들어 있었음을 확인했다. 서로에 대한 온전한 이해 없이 더 나은 방향을 제시해 주려는 것 역시 얼마나 터무니 없는 폭력이 되는지도 실감했다.
챕터는 크게 두 부분 <단숨에 읽고>, <깊어지자>로 나뉜다. 원서와 함께 읽을 수 있다는 점도 매력 있고, <깊어지자> 부분의 편집자의 말, 저자 소개, 책에서 배울 수 있는 단어들에 대한 현상과 설명 등 독서 후 활동을 제공하며 깊이 있는 사색에 빠질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는 점도 매우 인상 깊었다. 과학 소설로 분류되어 있지만 현 시대상을 예리하게 반영하고 있어 꼭 많은 사람들이 읽어 봤으면 하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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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눈먼 자 중에서 특별히 머리가 비상한 이들이 태어났다. 그들은 눈이보이던 시절로부터 내려오는 전통과 믿음에 의구심을 가지고 질문을 던졌다. 그 결과, 구전되던 것들은 전부 쓸데없는 상상으로 치부해 버리며 새롭고 그들이 믿을만한 설명으로 대체했다. 시력에 의존했던 기존의 상상력은 그들의 안구와 함께 말라버렸고, 예민한 귀와 손끝 감각을 활용한 새로운 상상력을 가지게 되었다.
🔖151. 일상 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비정상'을 마주친다. 정서적으로 맞지 않아서, 가치관이 달라서, 때론 그냥 이상해서, 주관적 '비정상'으로 분류하고 멀어지려 한다. 우리 사회는 조금 더 객관적인 항목을 만들어. 정상성을 수치화했다. 보호와 자원이 필요한 사람을 분류한다는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졌지만 동시에 보이지 않는 경계를 만들어 그들을 배제하는 역할도 한다. '정상'은 통계적 평균이나 과학적 기준이라는 외피를 쓰고 있지만 사실은 무엇을 허용하고 무엇을 배제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사회적 경계선이 되어 버린 것이다.
🔖159. 정보 과잉의 시대에 살고 있다. 수 많은 정보가 실시간으로 생성되지만 우리가 실제로 마주하는 정보는 극히 제한적이다. 소셜미디어, 검색엔진, 유튜브 등 대부분의 플랫폼은 맞춤 알고리즘 기술로 사용자가 좋아할 것 같은 콘텐츠를 골라 보여준다. 편리하고 효율적이지만 동시에 우리를 좁은 세계에 가둔다. 사용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비슷한 취향과 의견을 반복적으로 접하며, 점차 다양한 관점을 잃어간다. 중요한 문제에 대해 반대 의견이나 다른 시선을 만날 기회가 줄어들고, 이로 인해 개인은 자신의 믿음을 강화하면서도, 다른 세계와 단절된다.
#허버트조지웰스 #눈먼자들의나라 #내로라출판사 @naeroraboo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