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라는 감옥 - 우리는 왜 타인에게 휘둘리는가
야마모토 케이 지음, 최주연 옮김 / 북모먼트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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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라는 감정에 대해 다각적인 관점에서 속속들이 파헤쳐 보는 책. 사실 인문학 책이 막막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는데 표지부터 재미있던 게 끝까지 재미있다.

●우리는 왜 타인에게 휘둘리는가
●고대 그리스부터 오늘날 SNS까지 당신의 삶을 뒤흔드는 질투에 관한 모든 것

궁금해, 안 궁금해?! 읽지 않고 못 베길 책이라 몇 챕터만 읽어볼까 했던게 앉은 자리에서 완독하게 된다.

이 책을 쓴 야마모토 케이의 전공 분야는 현대 정치이론, 민주주의론이라는데 심리학도 아닌 이런 전공을 가진 사람이 이야기하는 질투라니, 처음엔 의아했었다. 정치학을 전공하는 사람은 '질투'에 대한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갈까 궁금했다. 질투라는 사전적 정의부터 질투를 부추기고 불러일으키는 사회의 모습, 질투의 진정한 메시지까지 여러 책들의 인용과 적절한 예시를 곁들인 설명에 쉴 새 없이 흥미롭다.

질투라는 감정이 죄악시 되던 사회가 존재했고 질투의 적절한 표출을 위한 출구가 되었던 '도편추방제'에 대한 이야기도 놀랍고 신기했다.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고 시대에 따라 약간은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여진 질투가 요즘 시대에 전하는 메시지 역시 깊게 생각해볼 만하다. 요즘은 질투를 부추기기를 넘어 과시하는 경향이 있으며, 우리는 왜 이렇게까지 과시를 하고 타인의 인정에 목말라 하는지 들여다 본다. 여러 대목에서 공감하며 무릎을 친 건 두말 할 것 없고. 나부터도 질투하고 질투받는 상황에서 온전히 자유롭다 말할 수 없을 테니까.

초반 의아했던 작가의 전공 분야가 빛을 발하는 부분은 후반부다. 여러 이야기들을 버무리고 요리하여 질투와 민주사회를 엮어 이야기할 마무리 단계에 오면 작가의 의도를 약간은 간파한 것도 같다. 민주주의 사회를 이뤄온 감정의 일부인 질투는 영원히 없앨 수도 없는 감정이며 질투의 과잉이 민주주의를 파괴할 정념인 것도 아니라는 점. 여러 관점에서 이로울 거 하나 없는 해악으로만 여겨졌던 '질투' 역시 소비 경제 사회와 물질주의의 밑바탕이 된 감정인 것도 확실해 보인다.

여러 이야기를 했음에도 질투라는 감정은 찝찝하고, 타인에게 들켜서도 안 되는 마음이라 판단되어 숨기기 쉬워 스스로를 깊이 들여다보기를 꺼리는 마음이 들 수 있다. 여타 다른 책들처럼 질투에 매몰되어 자신을 낭비하지 말고 건전한 삶을 꾸리라, 질투를 없애자는 등의 허황된 말은 일절 없다. 깊이 고심하고 비교해보고 판단을 내리며 진지하게 마주해볼 것을 권하는 책. 나에게 슬쩍 제안한다. 질투를 없앨 수 없다면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면 좋을지를.

다원적 가치관을 허용하는 사회를 만들면 평가 축이 다양화될 테니 한쪽으로 치우친 서열 자체가 의미 없을 것이고 (말처럼 쉽진 않겠지만) 뻔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자신감과 개성을 가지는 것이 매우 중요하겠다. 그리고 제일 크게 와닿았으면서 독특하다 느꼈던 방법이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사람은 100이면 100 모두 다르고 누군가가 내가 부러워할 어떤 점을 지니고 있음이 확실하더라도 다른 어떤 부분에서는 분명 나보다 부족한 부분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는 거지. 질투를 해보겠다하면 속속들이 끝까지 비교를 해보라는 이야기에 피식 웃음이 나면서도 꽤 좋은 방법이고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할 수 없는 감정인 질투. 즐기는 것까지 못하겠다면 휘둘리지는 않도록, 건강하고 의미 있게 받아들일 수 있으면 인생이 한결 가벼워지지 않을까. 오늘도 누군가의 일상이 부러운 모두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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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 사람은 왜 무언가를 자랑하고 싶어할까? 이에 대해서는 인정 욕구나 자신감 결여의 표출 등 다양한 설명이 있을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부분은, 인정에 대한 끝없는 욕구가 과시와 자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마치 갈증을 해소하려고 바닷물을 들이켜는 것처럼 인간은 과시하면 할수록 타인의 인정을 갈망하게 된다.

🔖278. 질투에 무언가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이 감정이 '나는 누구인가'를 가르쳐 준다는데 있을 것이다. 대부분 나의 질투는 타인은 공감하지 못하는 나만의 것이다. 내가 누구의 무엇을 질투하는지, 왜 그 사람에게 질투를 느끼는지 들여다보면 내가 어떤 인간인지, 나는 누구와 자신을 비교하는지, 난 어떤 준거집단 안에서 나를 찾고 있는지가 보인다. 확실히 그것이 객관적인 자기상은 아닐지 몰라도 때로는 스스로 알아채지 못하는 또 하나의 자신을 보여주기도 한다.

#야마모토케이 #질투라는감옥 #북로망스 #북모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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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피라이터의 일 - 11년간의 모든 기록이 담긴 29CM 카피라이터 직업 에세이
오하림 지음 / 흐름출판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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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도 깊은 취향 셀렉트숍》29CM의 카피라이터 오하림의 일과 일상 밖 이야기.

다양한 어플이 많아져 폰을 뒤덮는 게 싫은 인간인 나도 진작에 깔아 놓은 쇼핑 어플 29CM. 패션과 잡화부터 디자인 리빙 제품까지 없는 게 없으며 신선하고 특별한 브랜드가 많아 구경하다 보면 정말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허우적대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 '힙'한 셀렉트숍 29CM의 카피라이터 오하림의 직업 에세이.

카피라이터라는 직업이 생소하진 않았지만 눈길이 머무는 카피만 쓰는 줄 알았던 직업의 숨어 있는 다양한 뒷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어 새로웠다. 문맹률 0프로에 육박하는 나라에서 글을 가지고 먹고사는 일은 아마 예상보다 더 숨막히지 않을까? 작가의 불안, 권태, 번아웃의 시절들의 이야기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가고 넘어서게 하는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마음이 나에게까지 느껴졌다.

하루에도 수백 가지의 배너를 쓰고 사람의 마음까지 사로잡을 문구를 만들어내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을 거라 생각되기에 오히려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 되는 것이다. 수많은 정보와 수많은 광고 속에 우리는 어쩌면 보는 듯이 보지 않고 아는 듯이 제대로 알지 못하며 지나치는 순간들이 많다. 지나칠 순간에서 고객이 '감각적으로 의식'할 그 찰나를 위해 미세한 완성도를 포기할 수 없는(p.59) 그녀의 열정이 책밖으로 고스란히 뿜어져 나온다. 같은 뜻을 포함하는 단어들이라도 고심하여 선별하고 사소해 보이는 문장 부호 하나에까지 공을 들이는 직업. 크. 카피로 먹고살아온 작가의 11년 내공과 노하우에 감탄 또 감탄.

글이 끝난 마지막 장, 동시대 동료 직업인들의 진심이 담긴 Q&A가 담겨 있는데 그 재미 역시 쏠쏠하다. 아니 이렇게 솔직하고 직설적으로 답변한다고? 키득키득. 다들 글을 쓰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한 문장 한 문장에 어째 깊이가 있는 것 같다. 글맛이 참 좋았다.

흐름출판의 직업 에세이 시리즈의 첫 작품이라는데 다양한 직업종이 계속 생겨나고 없어지는 시기에 자리 단단히 잡고 서게 할 작품이 아닐까 싶다. 다음 직업 에세이는 어떤 일을 다룰까 벌써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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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사랑이 아닌 단어로 사랑을 말해달라는 어느 가사처럼 뻔하지 않은 표현으로 브랜드만의 목소리를 찾아주고 매체에 맞춰 말과 글에게 적당한 옷을 입혀주는 일. 사진이나 영상보다는 존재감이 미미해 많은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지만, 또 그만큼 자연스레 스며드는 것이 또 하나의 즐거움이기도 한 어느 카피라이터의 일을 지금부터 소개합니다.

🔖28. 카피라이터는 이렇듯 사소한 '굳이'에 담긴 이야기를 발견하고 세상의 큰소리로 대신 외쳐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이처럼 '굳이'에는 애정이 담겨 있고, 이야기가 담겨 있고, 그것은 생각지도 못한 힘을 발휘합니다. 이 '굳이'에 담긴 이야기만으로 우리는 여러 가지 형태로 비친 사랑을 보는 거죠. 그리고 보는 사람을 미소 짓게 하고 또 행동하게 만들고요.

🔖31. 같은 것을 같지 않게 이야기를 붙이고 눈에 그려주는 기술. 다소 과장될지는 몰라도 들으면 즐겁고 재미있는 표현을 써내려가는 카피라이터를 다른 말로 이야기꾼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108. 자신의 단점만 보인다면 그것을 뒤집어 생각해 보세요. 단점은 밉게 보는 장점과도 같아서 사실은 하나의 재능인데 너무 그늘진 면만 보고 있는 걸지도 모릅니다. 스스로를 조금만 더 예쁘게 바라봐 주세요.

🔖129. 우리는 죽을 때까지 선택의 문을 열어갈 텐데, 이왕 그런 인생이라면 내가 결정한 것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옳게 만들어보는 게 어떨까요?

#오하림 #카피라이터의일 #흐름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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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는 대체로 누워 있고 우다다 달린다
전찬민 지음 / 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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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는 이방인, 한국에서는 해외동포로 여겨지는 사람. 어디를 가도 왠지 떠돌이의 느낌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작가의 이야기. 어딘가 소속되어 있다는 느낌이 주는 안정감이 알게 모르게 굉장히 크다. 작가는 일본어도 제대로 모른 채 일본으로 건너 가 계획 없이 일본에서 결혼을 하게 되고 딸 둘을 키우고 있는 평범한 주부로 보인다.

담담하지만 확실하게 줏대 있는 문체가 마음에 들어 작가 이름을 여기저기 검색해 봤는데 사진 하나 찾을 수 없어 아쉬웠다. 자식 둘을 키우고 있는 나와 왠지 연배가 비슷한 것도 같고 글을 읽으며 많은 부분이 공감되었기에 내적 친밀감이 잔뜩 쌓였다.

온전치 못한 가정에서 자란 외로움과 고독함이 마음에 쌓여 누구도 자신을 반기지 않을 거라는 닫혀 있는 마음부터 시작해서 일본 생활의 여러 모습들에 적응하며, 누리며, 가족과 이웃들과 나누는 소소한 정을 감사할 줄 아는 작가에게 조용하지만 단단한 응원을 보내게 된다. 아빠와의 에피소드에서는 예상치 못하게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하염없이 훌쩍거리다 나도 멀리 있는 아빠에게 전화 한 통이라도 먼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곁에 있어서 우선 순위를 미루고 표현해야 할 필요조차 크게 느끼지 않고 살았는데 이 작고 묵직한 에세이를 읽고 나니 인생에서 중요한 것들에 대한 정의를 다시금 하게 된다. 너무 지쳐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을 때에는 그냥 남들 시선 신경쓰지 말고 하루종일 누워 있자. 괜찮다. 기운이 나면 나서 보는 거다. 조금 느리더라도 나만의 속도로 나아가는 것. 일단 나의 속도가 어느 정도인지 찾는 것부터 시작해볼까. "담대하게!!"

덧. 곳곳의 온기 넘치는 풍경의 사진들까지 참 좋았다. 이 책 덕분에 목욕탕을 좋아하지 않는 내가 동네 목욕탕이 가고 싶어졌고 눈 덮인 후지산을 꼭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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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진짜 내 마음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용기내서 물어야 한다. 내 물음에 들춰지는 이 마음이 인정하기 싫고 원하지 않았던 본 모습이라 해도 그 형태를 봐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나를 더욱 단단하고 온전하게 만들어 준다. 멋지고 대담하지 않으면 어떤가, 크고 깊지 않으면 어떤가, 옹졸하고 비겁하면 어떤가, 나약하고 불안정하면 어떤가. 그게 그대로의 모습인걸.

🔖35. 담대하자는 문장을 실제로 내뱉으면 붕 떠서 갈 길을 잃었던 마음들이 그 소리에 모여든다. 모여든 마음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잃지 않았음을 알려주었고, 그럼 조급함에 시야가 어두워져 잘 보이지 않았던 소중한 것들이 선명히 드러난다. 그 순간 시련을 넘길 용기도, 기운도 난다.

🔖178. 세상에 증명할 척도가 없는 나는 어리석게 살고 있는 걸까, 한창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하는 시기에 아까운 시간을 흘려보낸 걸까 고민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아니다. 나는 나를 중요시할 것을 먼저 택했을 뿐이다. 아이들을 키워내듯 내 안에 작은 나를 키워냈고, 원인을 잘 찾은 덕에 불안을 다스릴 수 있게 됐고, 무엇보다 모순된 나로 살아가지 않아도 되니 내 자신에게 당당해졌다.

🔖182. 이유란 결국 그가 스스로의 행복을 위해 붙인 의미일 것이다. 누가 정의내린 의미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내린 의미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행복을 기다리기보다 지금 당장 스스로 찾아나서는 그는 역시 똑똑한 사람이다.

🔖266. 민 짱, 살아 있는 게 낭만인 거야. 젊을 땐 낭만이란 더 대단한 것이겠지 생각했지. 그런데 아니었어. 그저 살아 있으면 돼. 그러면 낭만을 매 순간 마주하게 되지. 어제 그곳도 너무 낭만적이었잖아!

#전찬민 #고양이는대체로누워있고우다다달린다 #달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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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번트가든의 여자들 - 18세기 은밀한 베스트셀러에 박제된 뒷골목 여자들의 삶
핼리 루벤홀드 지음, 정지영 옮김, 권김현영 해제 / 북트리거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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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7년 영국 런던에서 출판된 한 권의 책이 있다. 이후 꾸준히 개정판을 내며 25만부의 판매고를 올렸던 책. 당대 가장 성공한 베스트 셀러이면서 동시에 가장 수치스러운 책은 바로 「해리스의 코번트가든 여자 리스트」이다. 18세기 매춘부들의 특기와 전공, 신상 명세를 기술해 놓은 책은 그 당시 사람들도 공공연히 들고 다닐 수는 없었나 보다.

이 책에서 다루는 가장 큰 이야기인「해리스 리스트」는 여성을 상품으로 취급한 남자들의 시선에서 기술된 책(이라고 부르고 싶지도 않지만)이라 불쾌했던 게 사실이었다. 실제 「해리스 리스트」의 기술된 내용이 책 속에도 있어서 읽어볼 수 있게 되었지만 삼류 글쟁이가 쓴 매춘부들의 특징은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흥미로웠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부정하지 못하겠다.

책의 저자 핼리 루벤홀드는 18세기 런던 뒷골목의 상황과 남성지배적인 사회의 모습을 면면에 드러내며 「해리스 리스트」가 출간된 이유와 출간에 얽혀 있는 잉글랜드 포주 대장 잭 해리스, 시인을 꿈꿨던 글쟁이 새뮤얼 데릭, 최고의 마담 샬럿 헤이즈 3인방의 이야기를 쫓는다.

열악한 당시의 상황에서 매춘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여성들의 이야기는 철저히 지워지고 남성들의 평가와 조롱으로 그녀들의 삶이 좌지우지되는 현상이 가슴 아팠다. '그런 때도 있었다'는 관점으로 단지 역사의 한 부분에 대해서 담담히 써내려간 책은 누구를 비웃지도 않고 그렇다고 옹호하지도 않으며 그 당대의 현실을 나열한다. 불합리하고 억울했을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된다. 지금은 달라졌나?

"매춘을 둘러싼 환경과 매춘의 유혹에 넘어가기 쉬운 여성들의 취약성을 두고 논쟁이 불붙었지만, 남성의 행동이나 사회적 인식이 악의 한 원인이라고 주장하거나 대담하게 매춘을 근절할 계획을 제시하는 사람은 없었다.(p.243)"

매춘 근절을 외치던 시절이 왔을 때에도 악의 원인을 여성에게 찾던 시절. 지금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동정의 대상이면서 조롱의 대상이고, 도와야 할 사람인 이면에 피해야 될 사람, 사회의 희생양이면서 오염원이었던 그녀들은 '여성' 그 자체로 그저 존재할 수 없었던(p.400) 현실을 읽으며 괜히 숙연해지는 마음도 들었다.

빛나고 찬란한 역사만 바라볼 순 없다. 분노하고 괴로워지더라도 보통 사람들의 목소리 역시 가슴에 새겨야 더 나은 목적지로 나아갈 방향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각자의 살아온 모습과 각자의 이야기로 선택된 인생들이라 누구를 탓하고 싶진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이루어진 상황으로 비극을 맞았을 많은 사람들 생각에 가슴이 아프다. 어둡컴컴하고 씁쓸한 과거이지만 한편으로 지독하게 매력적인 책이었다.

덧. 수요가 있으니 공급이 있는 거지.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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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해리스의 코번트 가든 여자리스트]는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다. 18세기 영국 사회의 변두리에서 목숨을 간신히 부지하던 사람들. 계층 사다리에 언제까지나 불안정하게 매달려 있고, 점잖은 사람들의 '정상적인' 집단으로의 입장을 절대로 허락받지 못할 사람들.

🔖396. 우리가 기억해야만 하는 사실은, 『해리스 리스트』에 등장한 절대다수의 여자들에게 매춘은 스스로 선택했다기보다는 운명 지워진 길이었다는 점이다.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처녀성을 잃고 난 뒤에야 여자가 남자처럼 성욕을 알게 된다는 믿음이 남성의 자부심을 높여 주었다. 결혼하지 않은 여자가 처녀성을 잃게 되면, 실제 행동거지가 어떻든 간에 창녀로 취급되었다. 이런 판단에는 중간이 없다. 자발적으로 음탕한 행위에 동의했든, 강제로 당했든 중요하지 않았다. 어느 쪽이든 결과는 같았다. 그 여자는 더 이상 순수하지 않으며, 성적 욕망에 눈을 떴을 뿐이었다. 세상은 이런 상황에 처한 여성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필요악이었던 매춘 외에는 어떤 좋은 선택지도 주어지지 않았다.

#핼리루벤홀드 #코번트가든의여자들 #북트리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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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중 마음 농도
설재인 외 지음 / 든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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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기 시작하며 생각했었다. 나는 왜 술을 좋아할까? 아마 술 좋아하는 두 작가의 술 냄새 진하게 나는 편지글을 읽다 보면 나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기도 했다. 책을 다 읽고 며칠이 지난 지금도 난 이유를 찾지 못했다. 이래서 좋고 저래서 좋고 갖다 붙이는 대로 이유가 만들어지겠지만 여전히 난 술이 '그냥' 좋은 걸. 다른 이유를 붙이기 힘들다.

여기 서로 너무너무(강조!) 다른 두 여자 작가의 술 이야기. 공통점은 둘 다 술을 좋아한다는 것뿐, 주종도 술을 마시는 스타일도 정말 너무 다른 두 사람이 술을 마시며 취기가 도는 상태에서 서로에게 편지를 쓰며 술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이 얼마나 매력적인 책이냐. 며칠을 정말 행복한 마음으로 손과 마음이 저절로 움직여 책을 읽었다.

소주를 제일 좋아하고 혼자가 편한 89년생인(왠지 이 글들에선 그들의 나이도 중요한 차이점으로 다가온다) 설재인 작가와 위스키를 좋아하고 술의 맛과 멋을 제대로 느끼며 관계에 집중하는 01년생 이하진 작가.

술을 마시며 쓰는 글이라 그런지 왠지 마음 저 밑바닥에 묵혀둔 이야기까지 술술 흘러나오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들 사이에서 조용히, 그리고 맞장구치며 이야기를 듣는다. 술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라지만 술이라는 게 으레 그렇듯 진하고 깊은 기억의 조각들까지 떠올라 자기주장을 펼친다. 즐겁게 시작했다가 묵직한 이야기와 철학적인 인생관을 들은 기분이라 마음이 마냥 가볍진 않지만 그게 책이 주는 행복한 무게감인 것 같다. 두 작가의 환경이나 가치관을 주고 받는 글에 공감백배 밑줄을 얼마나 그어댔는지 모른다.

술에 대한 사랑을 시(詩)적으로 나눈 모습이 인상깊었다. 술의 입장이 되어 나를 돌아보는 상황이라니 이 재미있는 상상을 나는 왜 한 번도 못 했을까.

"오 씨는 어디 가지 않아요. 수단이 되어도 슬퍼하지 않고 언제나 꾸준한 분량의 기쁨만을 주려 노력하는 오 씨."(p.84)

오 씨는 알코올의 화학식 C2H5OH를 편히 읽으려 뒷글자 'OH'만 따서 '오 씨'라고 부르겠다는 설재인 작가의 글을 읽고 키득거렸다. 오 씨라고 부르고 보니 정말 언제나 내 곁에(?) 있어주는 든든한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바른말을 해주는 이가 충신이고,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이가 간신이라면 오 씨는 어쩌면 간신에 가깝겠지만 우리가 술을 멀리하지 못하는 이유는 분명 술이 우리를 사로잡을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완전히 행복하기만 한 일은 존재할 수 없고 모든 일은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 우리는 고통의 총량보단 행복의 총량에 더 집중해야 하는 거죠. 내가 가장 행복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하는 게 그나마 우리를 '살아낼' 수 있게 만드는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표현이 주는 낙관의 어감을 좋아합니다. 백해무익한 술의 각종 해로움을 알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음주를 택하는 저의 모습에 낙관을 붙이긴 뭐하다 생각은 하지만요. 그래도 즐겁잖아요? 그럼 된 거죠."(p.318)

숨만 편히 쉬는 것도 쉽지 않은 현대사회에서는 이하진 작가의 말처럼 우리는 고통에 집중하기보다 행복에 더 집중해야 한다. 우리를 살아낼 수 있게 만드는 소소한 것들에 집중하기. 나 역시 '즐거우면 됐다'라는 마음에 백 프로 찬성할 수도 없고 즐겁지 않은 일도 해야 하는 게 인생이라지만, 내 기쁜 감정을 조금 더 플러스 시켜주는 '오 씨'와 함께라면 살짝 밋밋한 순간도 화사해보이기도 하니까. 의존적이지 않은 건강한 관계에서라는 전제하에 즐겁게 즐겨도 좋지 않을까.

나는 정말 임팩트 있게, 짧고 굵은 리뷰를 쓰고 싶은데 좋아하는 마음이 크면 이렇게 주저리 주저리 말이 길어진다.설재인 작가와 이하진 작가 둘 다 다른 색감으로 서로 다른 향기로 각자의 매력을 철철 떨어뜨려 놓고 갔다. 혼술도 좋고 함께하는 술자리도 좋고 낮술 밤술 다 좋아하는 나는, 이제 나이를 앞세워 뒷날이 많이 힘들지 않을 만큼만 즐기려 노력한다. 건강하게 오래 술 마시기 위해서 꾸준히 운동도 한다. 많이 마시고 적게 마시고를 떠나 술을 좋아하는 모두에게 적극적으로 권하고 싶은 책이다.

덧. 나는 주종 안 가리고 술을 좋아하지만 그래도 최애는 소주..... 제일 친근하고 가깝고 부담없는 친구랄까. 그런데 이번 책을 읽으며 내 꼭 마셔보리라 다짐한 위스키 '글렌 모렌지 시그넷' !!!! 조만간(?) 마시고 댓글로 후기 달아야지 캬캬. 역시 책과 술은 항상 내 좁은 세계를 넓혀준다.

#설재인 #이하진 #취중마음농도 #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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