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으로 멀리 뛰기 - 이병률 대화집
이병률.윤동희 지음 / 북노마드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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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병률에 대한 독자의 기대치를 반영한 것이라 보면 될까. 이병률 대화집이라는 것이 나왔다. 제목은 <안으로 멀리 뛰기> 다. 이해가 될 듯 하면서도 한편으론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제목이 아닐 수 없다. 이병률과의 대화를 엿듣다 보면 자연스레 귀가 트이리라 생각하며 책을 펴들었다.

 

이 책은 북노마드 대표로 책을 만들고 있으며 틈틈이 미술에 대한 글을 쓰고 강의를 하는 윤동희라는 사람이, 시인이자 여행작가이며 역시 책을 만들고 있는 이병률이라는 사람을 만나 나눈 이야기들을 정리한 것이다. 철저히 이병률이라는 한 사람에 집중하고 있으며, 이 책에서만은 그가 세상의 중심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우연한 기회에 이병률이라는 작가를 알게 되었고, 그가 펴낸 세 편의 여행산문집을 읽어본 인연으로 그의 존재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기에 이 책을 읽어보게 됐다. 아직 그의 시는 읽어보지 못했지만, 여행작가로서도 충분히 매력적인 글과 사진을 보여주었기에, 글이 아닌 진솔한 대화 속에서 이병률의 새로운 면모를 보게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품으면서.

 

잘은 모르겠다. 그를 잘 알고 있기에 할 수 있는 질문들이 많다. 스치듯 우연히 만나 소주 한잔 마시면서 나눌 수 있는 대화는 분명 아니다. 이병률의 깊은 곳을 짐작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겠지만, 그래서 조금 소외감을 느끼게 만들기도 했다. 조금 아는 사이끼리 한걸음 더 나아가 좀더 깊어지는 관계. 윤동희와 이병률은 이번 대화집 발간을 위한 몇차례의 회합을 통해 이전보다 깊어졌으리라 생각해 본다.

 

다시 책을 고를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 책을 선택하진 않을 것이다. 대신 이병률의 시집을 사서 읽어보겠다. 이병률 대화집 <안으로 멀리 뛰기>라는 책이 '별로'라는 얘기는 아니다. 먼저 이병률의 시를 읽고, 그의 문학 세계를 살짝이라도 맛본 이후에야만 그 둘 사이의 대화를 좀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서다.

 

"인간적으로 살고 싶다"는 이병률의 말에서 묘한 동질감을 느낀다. 그는 인간적으로 살고 싶은 욕구가 있다는 건 인간이 되는 과정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단다. 좋은 사람으로 사는 건 관심 없는데 인간적으로 사는 거에 비중을 많이 두는 이병률이라는 사람. 이 세상에 나와 비슷한 생각을 품고 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충분히 기분 좋은 일이다.

 

"사랑하면 자야 하잖아요. 손 잡고 자는 거 말구요. 잠도 감정의 한 영역이니까. 하지만 그러면서 확 가까워지는 느낌, 뭐든 괜찮을 것 같은 느낌. 난 그게 싫더라구요. 서로에게 쉬어지는 느낌이죠. 동물적인 상황을 겪고 나면 원래 다 그럴까요." 남녀간의 사랑에 대한 이병률의 생각은 이렇다. 일반인들의 생각과는 조금 다른 듯 하면서도 또 누구나 다 그렇게 사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책을 읽으며 잠시 옛 추억에 빠져 들었다. 경북 봉화의 어느 깊은 산골이었다.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게 이런저런 이야기에 취하고, 카세트에서 흘러 나오는 노래에 취하고, 한잔 두잔 나누는 술에 취했던 것이 불과 몇 해 전인데 꽤나 오래 전 일처럼 느껴진다. 대화는 모름지기 그렇게 해야 제 맛인데,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기에도 어려운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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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온도 (100만부 돌파 기념 양장 특별판) - 말과 글에는 나름의 따뜻함과 차가움이 있다
이기주 지음 / 말글터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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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고 책을 만든다. 쓸모를 다해 버려졌거나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해 쓴다. 가끔은 어머니 화장대에 은밀하게 꽃을 올려 놓는다. 이것이 이기주 작가를 설명하는 말인 듯 하다. 짤막한 이 글귀에서 부러움이 느껴진다. 이런 삶을 살 수 있다는 것, 요즘같은 세상에서 분명 부러운 일이다.

 

이기주라는 사람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말과 글에 온도가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지각 있는 사람이요 깨어 있는 식자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이기주 작가가 쓴 <언어의 온도>라는 책을 읽어가며 처음 나의 짐작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언어의 온도> 속에는 담백한 에세이들이 잔뜩 실려 있다. 자극적이지 않은 글 속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어서 좋다. 일상 속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 접하게 되는 풍경 속에서 느낀 감정들을 담담히 써내려 가고 있다. 뭔가 있어 보이려고 하는 것이 없어서, 진솔한 됨됨이가 느껴져서 내 마음까지도 절로 따뜻해지는 느낌이다.

 

이기주 작가는 얘기한다. 언어에는 나름의 온도가 있으며 따뜻함과 차가움의 정도가 저마다 다르다고. 온기 있는 언어는 슬픔을 감싸 안아 주지만, 용광로처럼 뜨거운 언어에는 감정이 잔뜩 실리기 마련이라고. 얼음장같이 차가운 표현도 위태롭기는 마찬가지여서 상대의 마음을 돌려세우기는 커녕 꽁꽁 얼어붙게 한다고.

 

이 대목에서 그는 우리를 향해 질문을 던진다. 이 책을 집어 든 당신의 언어 온도는 몇도쯤 되느냐고? 잠시 생각해 본다. 평소 나의 말과 글의 온도는 몇도쯤 될까를. 너무 뜨거운 말로 상대에게 화상을 입히지는 않았을까. 가끔은 너무 차가운 글로 누군가의 마음을 얼어붙게 하지는 않았을까 반성해 보게 된다.

 

평소 이런 생각을 염두에 두고 산다면 말과 글로 업을 짓지는 않겠지만, 세상살이란 것이 마음먹은대로만 되는 것은 아니라서 항상 후회할 일을 만들고 만다. 실수를 하지 않으려면 입을 닫고, 글쓰기도 멈추면 그만이겠지만 그것 역시 사회의 관계망 속에서 존재하려면 불가능한 일이다. 차라리 속세를 떠나 출가한다면 모를까.

 

말과 글은 머리에만 남겨지는 게 아닙니다. 가슴에도 새겨집니다.

마음 깊숙이 꽃힌 언어는 지지 않는 꽃입니다.

우린 그 꽃을 바라보며 위안을 얻기도 합니다.

 

이기주 작가는 책의 서문을 통해 일상에서 발견한 의미 있는 말과 글, 단어의 어원과 유래, 그런 언어가 지닌 소중함과 절실함을 책에 담았노라고 밝히고 있다. 그래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문장과 문장에 호흡을 불어넣으며, 적당히 뜨거운 음식을 먹듯 찬찬히 곱씹어 읽어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면서 각자의 온도를 스스로 되짚어봤으면 하는 바람을 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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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은 어쩌면 가까이 - 슬픈 날에도 기쁜 날에도, 제주
허지숙 & 허지영 글.사진 / 허밍버드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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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이름만 들어도 언제든 떠나고 싶어 지는 곳이다. 여러번 다녀 왔지만 여전히 만나보지 못한 풍경과 사람들이 많다. 요즘은 제주도에 일주일 살아보기, 한달 살아보기 이런 것들이 유행인 모양이다. 그만큼 제주도란 섬이 가진 매력이 크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매력적인 곳에서 나고 자란 허지숙, 허지영 자매는 부러운 사람이다. 직장생활과 학업을 위해 6년간 제주로를 떠났던 이들이 다시 돌아와 제주도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남겼던 사진과 글들이 한 권의 책으로 나왔다. <천국은 어쩌면 가까이>란 제목의 이 책에는 제주도 사람이기에 보여줄 수 있는 숨겨진 비경들이 많이 있다.

 

책에 담겨진 사진을 바라보고 있자니 당장이라도 그 풍경 속으로 떠나고 싶은 욕망이 커진다. 그녀들의 사진은 사진학 개론이나 이론서에 나와 있는 잘 찍은 사진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고 할 지라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그녀들의 사진들은 감각적이고, 개성이 넘친다. 분명 센스있는 사람들이기에 이런 사진을 찍을 수 있을 것이다.

 

늘상 좋은 곳에 있다보면 그것이 좋은 것인지를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공기도 그렇고 좋은 친구나 연인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사라지고 나서야 가치를 깨닫게 되는 우리의 우둔함을 탓할 수 밖에. 나 역시도 매력적인 도시인 경주에서 꽤 오랜 시간을 살았지만, 정작 그곳을 떠나오고 나서야 경주의 진면목을 깨닫게 됐고, 그리워하게 됐다.

 

하지만, 허 자매는 가까이 있는 천국을 찾아냈다. 보이지도 않는 목적지를 좇아가다 길가에 핀 들꽃을 놓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말자는 그녀들의 다짐은 무척 현명한 것이다. 어찌보면 평범한 풍경 속에서 의미있는 무언가를 찾아내고, 아름다움을 발견해 내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능력이 아닐까 싶다.

 

그녀들은 제주도의 속도를 매우 느리다고 얘기했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제주도만큼 급격한 변화가 계속되는 곳이 또 얼마나 있을까. 1년만 지나도 새로운 볼거리들이 생겨나고 기존의 오래된 것들은 사라지고 만다. 이름난 관광지마다 중국인 관광객들이 넘쳐난다. 예전의 그 호젓함과 여유로움들이 사라지는 것 같아 아쉬울 때가 많다.

 

'오늘은 어디를 탐험해볼까' 하고 설레는 여행자의 마음으로 하루를 보낸다면 뻔한 일상도 충분히 달라 보일 수 있다고 허 자매는 말한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 또한 그 행복을 발견하고 내 것으로 만드는 것 역시 스스로의 몫이다. 사소한 일상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과 풍경 속에서 이전과는 다른, 반짝이는 순간을 찾아낼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순간 행복이 내 곁에 다가왔음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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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아홉 편의 겨울 여행과 한 편의 봄 여행 - 나를 떠나 나를 만나는 시간
이희인 지음 / 나는북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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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같은 아마츄어 사진가에게 겨울은 부담스럽다. 봄꽃들이 만개하거나, 온 산이 단풍으로 불타 오를 때면 어느 곳으로 떠나도 좋겠지만 겨울은 그렇지 않다. 온통 무채색의 풍경에서 괜찮은 작품 하나를 건져낼 수 있는 내공이 없는 아마츄어들에게 겨울은 잠시 카메라와 멀어져야 하는 시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대로 사진을 찍을 줄 아는 사람에겐 겨울이 제 격이다. <열아홉 편의 겨울 여행과 한 편의 봄 여행>의 지은이 이희인 작가 역시 겨울 느낌을 잘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인 것 같다. 사진 뿐만 아니라 글에서도 겨울이 오롯이 느껴지는 듯 하다. 카피라이터라는 직업이 그의 삶에도 큰 영향을 끼쳤으리란 짐작이 된다.

 

이희인 작가 역시 광고 카피라이터라는 직업과 오래 화해하진 못했지만, 그 직업 덕분에 생각과 마음을 늘 열린 상태로 유지할 수 있었고, 채고가 여행, 문화와 예술 언저리에 삶을 부려 놓을 수 있었으니 참 고마운 천직이었다고 얘기하고 있다. 의도하건 의도치 않건 직업이란 것이 한 사람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결코 무시할 수 없으리라.

 

하필이면 왜 겨울이고, 겨울 여행이었을까. 그 질문에 대한 이희인 작가의 답은 확실하다. 나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추운 문 밖으로 나서야 하는 겨울 여행을 감행하는 데 주저하지만, 길 위에 서면 더 많은 것이 우릴 반긴다고.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을 걸어 오른 설산이나 거센 칼바람이 달려드는 바다 앞에서 문득 우리는 존재론적 질문을 던지는 철학자가 되노라고.

 

나는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그 여정을 통해 우릴 짓누르는 화두를 잊고 몸과 마음을 말끔히 포맷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진정한 여행이 혼자 떠나는 여행이라 한다면, 겨울은 홀로 떠난 여행자에게 가장 훌륭한 사색의 공간을 제공해 준다며 작가는 우리에게 홀로 떠나는 겨울 여행을 권하고 있다.

 

전적으로 공감하는 말이다. 나 역시 사진을 처음 시작할 때는 한겨울의 매서운 바람을 두려워하지 않았었다. 오히려 사람들이 적어서 오롯이 그 공간을 나만의 것으로 전유할 수도 있었고, 쉽게 만날 수 없었던 풍경과도 마주할 수 있었다. 그 때의 열정이 사라진 요즘, 이 책은 내게 예전의 나를 떠올려주게 했다.

 

열아홉 편의 겨울 여행은 우리나라에서 시작해 일본과 중국, 몽골, 러시아를 거쳐 네팔, 남미, 북유럽을 돌아 온다. 겨울 풍경이지만 결코 차갑게 느껴지진 않는다. 온통 눈으로 뒤덮혀 있는 어느 북유럽 마을의 저녁 풍경은 겨울의 끝자락에 불어오는 훈풍처럼 따뜻하기까지 하다.

 

계절은 어느새 본격적인 겨울로 접어들고 있다. 짧기만 했던 가을의 야속함은 이제 잊어야겠다. 굳이 이 책에 소개되어 있는 여행지가 아닐지라도 가까운 강원도의 어느 산골 풍경도 좋고, 강원도 동해안의 한적한 바닷가도 좋겠다. 잃어버린 열정 또한 누가 되돌려 줄 수 있는게 아니지 않는가. 우선 떠나보자. 여행자에게 답은 결국 길 위에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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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얼굴의 조선사 - 군자의 얼굴을 한 야만의 오백 년 지배와 저항으로 보는 조선사 1
조윤민 지음 / 글항아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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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의 얼굴을 한 야만의 오백 년. <두 얼굴의 조선사>를 쓴 다큐멘터리 작가 조윤민의 조선왕조에 대한 평가는 무척 신랄하다. 책 머리에 명시되어 있는 것처럼 그는 조선 시대 양반 지배층을 도덕의 가면을 쓴 위선적 존재로 인식했다. 그런 지배층의 지배 하에 5백 년 이상을 유지한 조선 왕조 역시 좋은 평가를 받을 리 만무할 터.

 

삼백 여 페이지가 넘는 책을 일관되게 관통하는 이미지는 하나같이 부정적이다. 조선왕조의 지배층은 물론, 그 시대의 지배 철학, 제도, 사회, 외교 등 전반에 대해 지은이는 혐오에 가까울 정도의 비판을 가하고 있다. 책을 읽는 내내 한편은 그의 지적에 공감할 때도 있었지만, 지나치게 공격적이기만 한 그의 신념을 견고하게 만든 원인은 무엇일 지도 궁금해졌다.

 

궁금증에 대한 해답의 단서는 프롤로그에서 살짝 엿볼 수 있다. 폭정과 야만의 시대로 일컬어지던 17세기 유렵 네덜란드의 인문학자 이사크 포시위스는 유럽의 동쪽 끝에 있는 조선과 중국을 이상국가로 소개했다. 철인왕이 통치하는 플라톤의 유토피아를 떠올리게 하는 그런 나라쯤으로 말이다.

  

그의 책 <여러 가지 언설>에서는 중국과 조선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고 한다. "중국과 조선의 고위관료들은 철학자들이다. 나라를 통치하는 이들 철학자들이 충실하지 못하면 인민이 이들을 판정할 자유를 갖는다. 이 나라에는 유럽과 같은 세습귀족이 없고, 배운 자들만이 귀한 대접을 받는다. 왕이 잘못을 저지르면 철학자들은 주저없이 왕을 비판한다. 이는 구악의 위대한 예언자들조차 감히 하지 못했던 수준이다."

 

물론, 이사크 포시위스의 주장은 정확하지 못하다. 머나먼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이 앞섰던 탓인지, 중국과 조선에 대한 그의 기술은 지나치게 이상적이어서 낭만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조윤민 작가 역시 이사크 포시위스의 조선에 대한 환상에 대해 조목조목 사례를 들어 반박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대해 조금은 과대포장된 부분에 대한 반감이 <두 얼굴의 조선사>란 책이 출간된 이유라고 본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인간 세상에서 이상적인 국가나 사회조직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유구한 역사를 통해 명멸을 거듭한 수많은 국가들은 양면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동 시대의 다른 국가들에 비해, 혹은 이전 시대의 실패를 교훈삼아, 더 나은 국가체계와 사회 제도를 구축하려 했던 노력들이 성공의 열매를 맺기도 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허다하다.

 

그래서, 이 책은 <두 얼굴의 조선사>는 조금 불편하다. 마치 잘 정리된 논문처럼 사서와 여러 인용문헌들을 통해 그동안 미처 알지 못했던 조선시대의 참혹상을 다시금 되돌아 보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지만, 유독 조선이란 왕정 국가에 대해 폄하에 가까운 비난을 하는 것은 지나쳐 보인다.

 

그는 조선시대를 통해 우리 역사가 자율적으로 진보, 발전해 나갔던 동력을 부정하고 있다. 왕조 교체기에 조선 건국의 주체세력으로 활동했던 신진 사대부나, 훈구세력과의 대립 속에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했던 16세기 사림 역시 그에게는 알맹이는 그대로인데, 포장지만 바뀐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이는 자율적인 역사 발전의 능력이 없었다고 폄하하는 일본의 식민사관과도 궤를 같이 하는 것이라고도 보여진다.

 

편협함은 역사를 바라보는 데 있어서 상당한 위험성을 내포한다. 지은이 역시 이런 비판적인 시각을 의식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저자 스스로는 부정적 시각에서 조선시대를 폄하하는 뉴라이트 역사학을 옹호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으며, 민중사관을 치켜 세우려는 것도 아니라고 변호한다. 다른 것은 차지하더라도 다가올 날에는 일부 지배층의 과도한 욕망과 편중된 이익의 정치가 누그러지길 그의 바람에는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어지러운 시대는 계속되고 있다는 안타까움이 커지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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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언니 2017-11-07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얼굴의 조선사”에 대해 저와는 다른 독법을 가진 것 같아 나름의 의견 제시합니다. 님의 리뷰가 비판적 책읽기를 통한 의견을 밝힌 것이듯 저의 댓글도 그런 차원에서 읽어주었으면 합니다. 적대하거나 비난하기 위한 댓글이 아니니 오해 없었으면 합니다. 먼저 님의 의견을 제시한 문장을 보이고, 그에 대한 저의 의견을 덧붙입니다.

<푸른가람님의 의견>
그는 조선시대를 통해 우리 역사가 자율적으로 진보, 발전해 나갔던 동력을 부정하고 있다. 왕조 교체기에 조선 건국의 주체세력으로 활동했던 신진 사대부나, 훈구세력과의 대립 속에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했던 16세기 사림 역시 그에게는 알맹이는 그대로인데, 포장지만 바뀐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이는 자율적인 역사 발전의 능력이 없었다고 폄하하는 일본의 식민사관과도 궤를 같이 하는 것이라고도 보여진다.


<다른 의견>
이 책에서 다룬, 건국 주체인 신진사대부와 16세기 사림에 관한 내용은 이들의 사회경제적 기반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 주된 요지로 보입니다. 이를 두고, 조선이 “자율적인 역사 발전의 능력이 없었다고 폄하하는 일본의 식민사관과 궤를 같이한다”고 해석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자 범주 착오로 보입니다. 시기별 주된 정치세력의 사회경제적 기반 문제와 역사발전의 동력 문제는 범주와 성격이 다른 것으로 매개 맥락 없이 곧바로 연결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고 봅니다. 이는 달리 논의해야 할 사안입니다. 작가는 한 사회 내의 두 부류의 정치세력의 사회경제적 기반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했는데, 어찌 이러한 주장이 그 사회가 자율적인 역사 발전의 능력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곧바로 읽히는지 의문입니다. 책의 이 부분에서 핵심은 사림의 사회경제적 기반이 과연 이전의 훈구파와 다른가 하는 극히 사실적인 문제입니다. 작가는 어디에서도 조선사회가 진전의 역사가 아니고, 자율적인 역사 발전의 능력이 없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사회경제적 기반이 다른 정치주체”의 등장이라는 사실과는 다른 그동안의 주장이(혹은 사료로 엄밀하게 검증하지 않은 주장이) 오랫동안 제대로 비판받지 않고 유지돼 온 데 대한 비판적 의문을 제기하는 것으로 읽혀집니다. “조선의 역사를 부정적 지배세력을 밀어내고 긍정적 성격의 지배세력이 이끌어가는 진전의 역사로 풀이” 하려는 의도가 지나치게 앞서, 그 근거를 제시하기 위한 과정에서 나온 오류가 아닌가 하고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작가는 조선이 자율적인 역사 발전의 동력이 없었다거나 자율적인 역사 발전의 능력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를 잘못 제시하고 있다는 나름의 의견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지은이의 관심과 주장은 조선 역사 발전의 동력 문제에 있는 게 아니라 조선 지배층이 훈구에서 사림으로 바뀌어도 부정적 측면에서 본 그 지배적 속성은 지속됐다는 주장을 펼치는데 있어 보입니다. 그러니 지은이의 주장에 대해서 다른 논거나 사료 제시 없이 “자율적인 역사 발전의 능력이 없었다고 폄하하는 일본의 식민사관과도 궤를 같이 하는 것”으로 여기는 데는 비판의 여지가 있다고 봅니다.
이 책의 관련 부분을 면밀히 검토하면 이 책에는 조선시대의 자율적 진보와 발전의 동력을 부정하는 대목을 찾을 수 없습니다. 조선사회의 부정적인 면을 들춰내고 신랄한 비판을 가하면, 면밀하고 객관적인 검토 없이 마치 이를 일제가 저지른 식민사관과 같은 것으로 여기는 풍조가 있는데, 이런 풍조가 오히려 조선시대에 대한 정확하고 객관적인 이해를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할 경우가 있다고 봅니다. 이렇게 보면 이 책에서의 작가의 시선은 편협함이나 식민사관 운운으로 논의할 문제가 아니라 제대로 된 비판 없이 받아들여진 조선시대 정치주체의 사회경제적 기반에 대한 그간의 주장과 해석에 대한 반론이자 문제제기 차원에서 다뤄야 할 사안으로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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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가람님의 의견>
인간 세상에서 이상적인 국가나 사회조직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유구한 역사를 통해 명멸을 거듭한 수많은 국가들은 양면을 가질 수밖에 없다. 동 시대의 다른 국가들에 비해, 혹은 이전 시대의 실패를 교훈삼아, 더 나은 국가체계와 사회 제도를 구축하려 했던 노력들이 성공의 열매를 맺기도 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허다하다.
그래서, 이 책은 <두 얼굴의 조선사>는 조금 불편하다. 마치 잘 정리된 논문처럼 사서와 여러 인용문헌들을 통해 그동안 미처 알지 못했던 조선시대의 참혹상을 다시금 되돌아 보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지만, 유독 조선이란 왕정 국가에 대해 폄하에 가까운 비난을 하는 것은 지나쳐 보인다.


<다른 의견>
이 책의 전체 기조는 ‘폄하에 가까운 비난’이라기보다 ‘주류 시각과 다른 관점에서 본 신랄한 비판’ 정도로 파악됩니다. 그동안 조선시대 지배세력인 양반 내지는 사림에 대한 찬사 일변도의 시각에서 벗어나 객관적 사료를 통해 그와는 다른 면을 한번 조명해보자는 데 지은이의 의도가 있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이 점은 지은이가 머리말(책머리에)에서도 분명히 밝힙니다. 선비도 경세가도 왕도를 드높이려는 사림관료도 아닌 이익과 욕망에 충실한 지배자로서의 얼굴을 그려내고, 유교 도덕정치가 아니라 욕망의 계급정치를 드러내려고 한다고 말입니다. 즉 그동안의 찬사 일변도의 양반-사림에 대한 균형을 맞추기 위해 부정적인 면을 의도적으로 들추겠다는 뜻으로 읽혀집니다. 이는 머리말의 다음 문장으로 알 수 있습니다. “조선이라는 세계 최장기 왕조에 대한 적나라하고 신랄한 초상 또한 갖게 될 것입니다.”
한 사회의 부정적인 면을 들어 비판을 가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다른 사회의 경우까지 보아야 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압니다. 논리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말이죠. “유독 조선이란 왕정 국가에 대해 폄하에 가까운 비난을 하는 것은 지나쳐 보인다.”는 주장에 설마 “나만 가지고 왜 그래” 라는 논리를 그 주장의 근거나 논거로 삼고 있는 건 아니겠지요...
지은이가 아예 책 서두에서 한 사회 지배세력의 부정적인 면을 말하겠다고 독자에게 알리고 양해를 구하고 있으니, 이 작가의 시선이나 관점을 두고 편협함이란 잣대로 비판을 가하기보단 작가가 책에서 드러낸 부정적 성격의 사실이나 비판이 근거가 있는지, 또한 합리적인지를 먼저 검토해야 한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