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얼굴의 조선사 - 군자의 얼굴을 한 야만의 오백 년 지배와 저항으로 보는 조선사 1
조윤민 지음 / 글항아리 / 2016년 2월
평점 :
품절


군자의 얼굴을 한 야만의 오백 년. <두 얼굴의 조선사>를 쓴 다큐멘터리 작가 조윤민의 조선왕조에 대한 평가는 무척 신랄하다. 책 머리에 명시되어 있는 것처럼 그는 조선 시대 양반 지배층을 도덕의 가면을 쓴 위선적 존재로 인식했다. 그런 지배층의 지배 하에 5백 년 이상을 유지한 조선 왕조 역시 좋은 평가를 받을 리 만무할 터.

 

삼백 여 페이지가 넘는 책을 일관되게 관통하는 이미지는 하나같이 부정적이다. 조선왕조의 지배층은 물론, 그 시대의 지배 철학, 제도, 사회, 외교 등 전반에 대해 지은이는 혐오에 가까울 정도의 비판을 가하고 있다. 책을 읽는 내내 한편은 그의 지적에 공감할 때도 있었지만, 지나치게 공격적이기만 한 그의 신념을 견고하게 만든 원인은 무엇일 지도 궁금해졌다.

 

궁금증에 대한 해답의 단서는 프롤로그에서 살짝 엿볼 수 있다. 폭정과 야만의 시대로 일컬어지던 17세기 유렵 네덜란드의 인문학자 이사크 포시위스는 유럽의 동쪽 끝에 있는 조선과 중국을 이상국가로 소개했다. 철인왕이 통치하는 플라톤의 유토피아를 떠올리게 하는 그런 나라쯤으로 말이다.

  

그의 책 <여러 가지 언설>에서는 중국과 조선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고 한다. "중국과 조선의 고위관료들은 철학자들이다. 나라를 통치하는 이들 철학자들이 충실하지 못하면 인민이 이들을 판정할 자유를 갖는다. 이 나라에는 유럽과 같은 세습귀족이 없고, 배운 자들만이 귀한 대접을 받는다. 왕이 잘못을 저지르면 철학자들은 주저없이 왕을 비판한다. 이는 구악의 위대한 예언자들조차 감히 하지 못했던 수준이다."

 

물론, 이사크 포시위스의 주장은 정확하지 못하다. 머나먼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이 앞섰던 탓인지, 중국과 조선에 대한 그의 기술은 지나치게 이상적이어서 낭만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조윤민 작가 역시 이사크 포시위스의 조선에 대한 환상에 대해 조목조목 사례를 들어 반박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대해 조금은 과대포장된 부분에 대한 반감이 <두 얼굴의 조선사>란 책이 출간된 이유라고 본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인간 세상에서 이상적인 국가나 사회조직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유구한 역사를 통해 명멸을 거듭한 수많은 국가들은 양면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동 시대의 다른 국가들에 비해, 혹은 이전 시대의 실패를 교훈삼아, 더 나은 국가체계와 사회 제도를 구축하려 했던 노력들이 성공의 열매를 맺기도 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허다하다.

 

그래서, 이 책은 <두 얼굴의 조선사>는 조금 불편하다. 마치 잘 정리된 논문처럼 사서와 여러 인용문헌들을 통해 그동안 미처 알지 못했던 조선시대의 참혹상을 다시금 되돌아 보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지만, 유독 조선이란 왕정 국가에 대해 폄하에 가까운 비난을 하는 것은 지나쳐 보인다.

 

그는 조선시대를 통해 우리 역사가 자율적으로 진보, 발전해 나갔던 동력을 부정하고 있다. 왕조 교체기에 조선 건국의 주체세력으로 활동했던 신진 사대부나, 훈구세력과의 대립 속에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했던 16세기 사림 역시 그에게는 알맹이는 그대로인데, 포장지만 바뀐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이는 자율적인 역사 발전의 능력이 없었다고 폄하하는 일본의 식민사관과도 궤를 같이 하는 것이라고도 보여진다.

 

편협함은 역사를 바라보는 데 있어서 상당한 위험성을 내포한다. 지은이 역시 이런 비판적인 시각을 의식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저자 스스로는 부정적 시각에서 조선시대를 폄하하는 뉴라이트 역사학을 옹호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으며, 민중사관을 치켜 세우려는 것도 아니라고 변호한다. 다른 것은 차지하더라도 다가올 날에는 일부 지배층의 과도한 욕망과 편중된 이익의 정치가 누그러지길 그의 바람에는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어지러운 시대는 계속되고 있다는 안타까움이 커지는 요즘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짱언니 2017-11-07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얼굴의 조선사”에 대해 저와는 다른 독법을 가진 것 같아 나름의 의견 제시합니다. 님의 리뷰가 비판적 책읽기를 통한 의견을 밝힌 것이듯 저의 댓글도 그런 차원에서 읽어주었으면 합니다. 적대하거나 비난하기 위한 댓글이 아니니 오해 없었으면 합니다. 먼저 님의 의견을 제시한 문장을 보이고, 그에 대한 저의 의견을 덧붙입니다.

<푸른가람님의 의견>
그는 조선시대를 통해 우리 역사가 자율적으로 진보, 발전해 나갔던 동력을 부정하고 있다. 왕조 교체기에 조선 건국의 주체세력으로 활동했던 신진 사대부나, 훈구세력과의 대립 속에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했던 16세기 사림 역시 그에게는 알맹이는 그대로인데, 포장지만 바뀐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이는 자율적인 역사 발전의 능력이 없었다고 폄하하는 일본의 식민사관과도 궤를 같이 하는 것이라고도 보여진다.


<다른 의견>
이 책에서 다룬, 건국 주체인 신진사대부와 16세기 사림에 관한 내용은 이들의 사회경제적 기반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 주된 요지로 보입니다. 이를 두고, 조선이 “자율적인 역사 발전의 능력이 없었다고 폄하하는 일본의 식민사관과 궤를 같이한다”고 해석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자 범주 착오로 보입니다. 시기별 주된 정치세력의 사회경제적 기반 문제와 역사발전의 동력 문제는 범주와 성격이 다른 것으로 매개 맥락 없이 곧바로 연결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고 봅니다. 이는 달리 논의해야 할 사안입니다. 작가는 한 사회 내의 두 부류의 정치세력의 사회경제적 기반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했는데, 어찌 이러한 주장이 그 사회가 자율적인 역사 발전의 능력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곧바로 읽히는지 의문입니다. 책의 이 부분에서 핵심은 사림의 사회경제적 기반이 과연 이전의 훈구파와 다른가 하는 극히 사실적인 문제입니다. 작가는 어디에서도 조선사회가 진전의 역사가 아니고, 자율적인 역사 발전의 능력이 없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사회경제적 기반이 다른 정치주체”의 등장이라는 사실과는 다른 그동안의 주장이(혹은 사료로 엄밀하게 검증하지 않은 주장이) 오랫동안 제대로 비판받지 않고 유지돼 온 데 대한 비판적 의문을 제기하는 것으로 읽혀집니다. “조선의 역사를 부정적 지배세력을 밀어내고 긍정적 성격의 지배세력이 이끌어가는 진전의 역사로 풀이” 하려는 의도가 지나치게 앞서, 그 근거를 제시하기 위한 과정에서 나온 오류가 아닌가 하고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작가는 조선이 자율적인 역사 발전의 동력이 없었다거나 자율적인 역사 발전의 능력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를 잘못 제시하고 있다는 나름의 의견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지은이의 관심과 주장은 조선 역사 발전의 동력 문제에 있는 게 아니라 조선 지배층이 훈구에서 사림으로 바뀌어도 부정적 측면에서 본 그 지배적 속성은 지속됐다는 주장을 펼치는데 있어 보입니다. 그러니 지은이의 주장에 대해서 다른 논거나 사료 제시 없이 “자율적인 역사 발전의 능력이 없었다고 폄하하는 일본의 식민사관과도 궤를 같이 하는 것”으로 여기는 데는 비판의 여지가 있다고 봅니다.
이 책의 관련 부분을 면밀히 검토하면 이 책에는 조선시대의 자율적 진보와 발전의 동력을 부정하는 대목을 찾을 수 없습니다. 조선사회의 부정적인 면을 들춰내고 신랄한 비판을 가하면, 면밀하고 객관적인 검토 없이 마치 이를 일제가 저지른 식민사관과 같은 것으로 여기는 풍조가 있는데, 이런 풍조가 오히려 조선시대에 대한 정확하고 객관적인 이해를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할 경우가 있다고 봅니다. 이렇게 보면 이 책에서의 작가의 시선은 편협함이나 식민사관 운운으로 논의할 문제가 아니라 제대로 된 비판 없이 받아들여진 조선시대 정치주체의 사회경제적 기반에 대한 그간의 주장과 해석에 대한 반론이자 문제제기 차원에서 다뤄야 할 사안으로 여겨집니다.


-----------------
<푸른가람님의 의견>
인간 세상에서 이상적인 국가나 사회조직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유구한 역사를 통해 명멸을 거듭한 수많은 국가들은 양면을 가질 수밖에 없다. 동 시대의 다른 국가들에 비해, 혹은 이전 시대의 실패를 교훈삼아, 더 나은 국가체계와 사회 제도를 구축하려 했던 노력들이 성공의 열매를 맺기도 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허다하다.
그래서, 이 책은 <두 얼굴의 조선사>는 조금 불편하다. 마치 잘 정리된 논문처럼 사서와 여러 인용문헌들을 통해 그동안 미처 알지 못했던 조선시대의 참혹상을 다시금 되돌아 보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지만, 유독 조선이란 왕정 국가에 대해 폄하에 가까운 비난을 하는 것은 지나쳐 보인다.


<다른 의견>
이 책의 전체 기조는 ‘폄하에 가까운 비난’이라기보다 ‘주류 시각과 다른 관점에서 본 신랄한 비판’ 정도로 파악됩니다. 그동안 조선시대 지배세력인 양반 내지는 사림에 대한 찬사 일변도의 시각에서 벗어나 객관적 사료를 통해 그와는 다른 면을 한번 조명해보자는 데 지은이의 의도가 있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이 점은 지은이가 머리말(책머리에)에서도 분명히 밝힙니다. 선비도 경세가도 왕도를 드높이려는 사림관료도 아닌 이익과 욕망에 충실한 지배자로서의 얼굴을 그려내고, 유교 도덕정치가 아니라 욕망의 계급정치를 드러내려고 한다고 말입니다. 즉 그동안의 찬사 일변도의 양반-사림에 대한 균형을 맞추기 위해 부정적인 면을 의도적으로 들추겠다는 뜻으로 읽혀집니다. 이는 머리말의 다음 문장으로 알 수 있습니다. “조선이라는 세계 최장기 왕조에 대한 적나라하고 신랄한 초상 또한 갖게 될 것입니다.”
한 사회의 부정적인 면을 들어 비판을 가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다른 사회의 경우까지 보아야 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압니다. 논리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말이죠. “유독 조선이란 왕정 국가에 대해 폄하에 가까운 비난을 하는 것은 지나쳐 보인다.”는 주장에 설마 “나만 가지고 왜 그래” 라는 논리를 그 주장의 근거나 논거로 삼고 있는 건 아니겠지요...
지은이가 아예 책 서두에서 한 사회 지배세력의 부정적인 면을 말하겠다고 독자에게 알리고 양해를 구하고 있으니, 이 작가의 시선이나 관점을 두고 편협함이란 잣대로 비판을 가하기보단 작가가 책에서 드러낸 부정적 성격의 사실이나 비판이 근거가 있는지, 또한 합리적인지를 먼저 검토해야 한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