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의 해부학 - 살인자의 심리를 완벽하게 꿰뚫어 보는 방법
마이클 스톤 지음, 허형은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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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어떻게 소개하는 편이 나을까 생각하니 어렵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왜 이렇게 두껍고 어려운데다 비싸기까지 한 책을 샀을까 의문이 들 정도다. 책 표지에는 '살인자의 심리를 완벽하게 꿰뚫어 보는 방법' 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긴 하다. 내가 왜 굳이 살인자의 심리를 꿰뚫어 볼 필요가 있었을까 싶기는 하지만 내용 자체는 흥미롭다.

이 책의 저자 마이클 스톤(Michael Stone) 교수는 컬럼비아 의과대학 임상정신의학 교수이자 미국 최고의 범죄 심리 전문의로 '범죄 심리학의 아인슈타인'으로 불린다고 한다. 하지만 프롤로그에서 그가 밝혔듯 악의 심리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접근이라는 의미에서 그를 범죄 심리학의 프로이트로 불리는 것이 더 어울리는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는 악을 이해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밝혔다. 악의 실체를 완전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겠지만 우리가 노력한다면 악이라는 대상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고 그는 믿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도처에서 범죄는 쉴 새 없이 발생한다. 갈수록 범죄는 흉포화되고 사이코패스라는 전문용어가 일상적인 단어로 인식될 정도로 '악'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기도 하다.

이 책에는 단순 살인자부터 정신질환자, 사이코패스, 악명높은 연쇄 살인범에 이르기까지 600명의 살인자의 심리를 통해 범죄를 악의 등급 22단계로 분류해 분석하고 있다. '범죄의 해부학'이라는 제목처럼 그는 생각하기조차 싫은 범죄의 현장으로 들어가 범죄자의 심연 속을 메스로 해부해 독자들에게 펼쳐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좀 더 간명한 정의를 내리기 위해, 무엇이 악의 '정수'인지 정리해 보자. 어떤 행위가 악행이 되기 위해서는,

1. 기가 막힐 정도로 끔찍해야 하고,
2. 사전의 악의(악한 의도)가 행위에 앞서야 하며,
3. 희생자에게 가한 고통의 정도가 극도의 과함이 있어야 하고,
4. 범행의 성질이 이해 불가능하고 당혹스러우며 평범한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라야 한다.


책의 내용은 당연히 불편하고 혹은 경악스러운 범죄 케이스들로 가득차 있다. 그래서 굳이 이 책을 재미삼아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도덕적으로 세상을 살아간다고 가정해도, 우리 모두는 충격적인 범죄의 피해자가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주변의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좀더 차가워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기도 한다.

진정한 절대악은 존재하는 것인지. 진정한 악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본성인지, 양육인지, 어릴 때 당한 성적 학대 때문인지, 마약 남용 탓인지, 아니면 타고난 '나쁜 씨앗' 때문인지를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이와 관련된 연구성과를 관련 분야는 물론 일반 대중에게까지 알리는 일은 단순한 학문적 관심을 너머 실용적인 부문에서도 무척 중요하다.

우리는 차마 사람으로서 못할 나쁜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흔히 '짐승같은 놈' 이라고 욕한다. 하지만 이것은 엄청난 아이러니다. 왜냐하면 악의 심리는 오직 인간에게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동물과 달리 죽음과 고통에 대해 충분히 인지하고 또 상상할 수 있으며, 남을 증오할 줄도 알며, 이러한 증오의 대상이 사라지면 얼마나 행복할까 상상할 줄도 아는 존재라는 얘기다. 인간의 천성은 선한 것인가 악한 것인가 하는 골치아픈 철학적 질문을 떠나 그저 나부터 내 주변 사람들까지 악의 기운이 좀더 사그라들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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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의사 박경철의 자기혁명 - 시대의 지성, 청춘의 멘토 박경철의 독설충고
박경철 지음 / 리더스북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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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급해 할 필요는 없다. 물은 99도가 될 때까지 끓지 않는다. 100도가 되기를 기다리는 인내와 여유가 필요하다. 내가 노력하고 있다면 기다림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여유가 있어야 한다. 세상의 모든 것은 발효 과정이 필요하다. 무언가를 시작해서 당장 성과를 얻는 것은 그야말로 운이다. 하필 행운의 여신이 나만 피해갈 리 없고, 하필 불행의 여신이 내 발목만 잡을 리도 없다. 인생은 정직한 것이다. 묵묵히 걸어가라. 결과를 두려워 할 필요도 없다. 이것이 바로 필자의 인생에서 아쉬웠던 점이자 이 시대의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다.  - 에필로그 중에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시골의사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한 외과의사 박경철의 '자기혁명'이란 책이 바로 그것이다. 저자는 에필로그를 통해 그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아쉬었던 점을 이 시대의 청춘들에게 깨우쳐 주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철학자의 심장으로 고뇌하고, 시인의 눈으로 비판하며, 혁명가의 열정으로 실천하라는 것이다.

저자의 책들을 몇권 사서 그 중에 읽은 것도 있고, 여전히 책꽃이에 가지런히 꽃혀 있는 책도 있다.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이 전자라면 '시골의사의 부자경제학'은 후자에 속한다. 외과의사임에도 불구하고 경제학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한 끝에 라디오와 케이블TV의 프로그램 진행을 맡을 정도로 전문가의 경지에 올랐다지만 내겐 그가 본업인 외과의사로서 환자들을 성심으로 대하며 느꼈던 것들이 마음에 더 와닿았던 것 같다.

그런 그가 청춘의 멘토로 소임을 다하기 위해 내놓은 이 책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것이다. 이 책은 저자가 지난 6년간 여러 강연, 청춘 콘서트 무대를 통해 중고등학생, 대학생, 학부모, 선생님들과 나눴던 대화의 기록이다. 그 수많은 대화들을 한층 더 완성된 문장으로 숙성, 발효시킨 노력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젊은이여 꿈을 가져라"고 쉽게 얘기는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가 않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등록금을 내기 위해 아르바이트 전선으로 내몰리는 이땅의 청춘들에게 세상의 변혁을 꿈꾸는 혁명가가 되라 얘기할 수 있을까. 감히 깊은 사색의 철학을 공부하고 시인의 아름답고도 냉철한 감성을 좇으라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저마다 취업이 당면한 인생의 최대 과제가 되어버린 청춘들에게는 그래서 스펙 쌓기가 눈 앞에 떨어진 불덩이다. 그것은 사실 그들의 책임과 잘못이 아니다. 그들을 신자유주의의 무한 경쟁 속을 내몰아버린 시스템의 문제요, 기성세대의 무책임이 낳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그런 까닭에 청년은 당연히 이러해야 한다는 식의 가르침이 어쩌면 위선으로 느껴질 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시골의사 박경철의 글에서는 진실이 느껴진다. 성공한 인생을 산 선배가 제잘난 맛에 지껄이는 공허한 말들이 아니라 그 역시도 치열하고 고뇌하고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찾아왔던 물음들에 대한 답들이기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호흡을 깊게 하고 이 책을 읽어볼 것을 권해 본다.

저자 스스로는 수준 낮은 에세이라며 겸손했던 '응시'에 관한 이야기에 여운이 남는다. 나 역시도 무척 좋아하는 안동 봉정사를 초가을 무렵에 찾아 인적이 없어 적요한 산사를 홀로 거닐며 느꼈던 감흥을 기록한 글이다. 차를 타고 올라가면 불과 수분이면 오르는 길을, 사방에 널린 자연을 의식하며 수십분 혹은 한시간 여 걸으며 사물을 바라볼 때 느껴지는 넓은 깊은 응시의 충만함에 가슴이 벅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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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꽃이다
도종환 지음 / 좋은생각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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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이 장미일 필요는 없다.
나는 나대로, 내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람대로
산국화이어도 좋고 나리꽃이어도 좋은 것이다.
아니, 달맞이꽃이면 또 어떤가!

느즈막히 도종환 시인의 글들에 매료된 것 또한 인연이라 생각해 본다. 조금, 아니 많이 늦어서 아쉽기도 하지만 한편 지금이라도 그의 아름다운 시와 따뜻한 산문을 읽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다. 결코 순탄치 않은 삶을 살면서도 사람과 세상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거두지 않은 그의 넉넉한 마음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사람은 누구나 꽃이다' 라는 따뜻한 제목을 지닌 이 책에 실린 글들은 하나같이 겸허하고 따뜻하다. 김용택 시인의 표현처럼 이 산문집의 모든 글들은 그 자체로 시다. 한번 읽고 그만인 글이 아니라 언제든 다시 펴서 또 읽으며 그 속에 담긴 시인의 깊은 성찰을 곱씹어 보고 싶어진다.

 


내가 이 책을 읽고 있으니 욕심내는 사람들이 있다. 강추한다는 얘기에 당장 읽어보겠노라는 사람도 있고, 누구는 제목에 반했다며 다 읽게 되면 빌려 달라는 이도 있다. 좋은 책을 함께 보는 것도 분명 좋은 일일 테지만 이 책은 빌려줄 수가 없을 것 같다. 그 이유를 묻는다면 이 책이 '너무 좋아서'라고 얘기 해야겠다.

늘 곁에 두고 마음에 먼지가 낄 때마다 읽어야 할 것 같고 제목 자체가 하나의 가르침과도 같은 예순 세편의 주옥같은 글들을 마음에 새겨두고 싶기 때문이다. 김용택 시인은 좋은 글 보다 좋은 사람을 좋아한다 했다. 좋은 사람의 글을 읽어 보면 글재주 글 냄새보다 사람 냄새가 솔솔 배어 나와 사람을 취하게 한다고 했는데 나에게도 도종환 시인의 글이 그러했다.

아마도 진실이 서려 있어서일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은은한 사람의 향기를 흘리는 좋은 사람이어서 일 것이다. 책을 읽는 내내 마음 속을 크게 울렸던 그 무언가를 짤막한 글로나마 표현해 보고 싶었는데 그럴 재주가 내겐 없다. 그저 누군가에게 "정말 좋다."는 짧은 말로 읽어 보기를 권하는 것으로 나의 마음을 드러내는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우리는 모두 특별한 사랑을 꿈꾼다.
그러나 특별한 사랑은 특별한 사람을 만나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보통의 사람을 만나 그를 특별히 사랑하면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 어머니의 동백꽃

나는 지금 사랑하는 사람의 무엇으로 있을까.
그에게 물이 되어 스미고 있는 걸까.  - 사랑의 불, 바람, 물, 흙

사랑한다고 말했는데 사랑한다고 말한 그 사람도 없고 사랑도 없다.
분명히 둘이 서로 뜨겁게 사랑했는데 그 뜨겁던 사랑은 간 데가 없다.  - 시드는 꽃을 어떻게 멈춰 세울 수 있는가

그대가 거기 있는 것처럼 소박한 모습으로 서서 자기들이 있는 곳을
아름다운 모습으로 바꾸어 놓고 있는 이들이 세상에는 참 많습니다.  - 그대 거기 있다고 슬퍼하지 마세요

내가 별을 바라보고 있는 이 각도의 반대편
꼭지점에 그대가 있을 것임을 나는 안다.
그대가 어디 있는 지 알고 있는 별은
우리를 그렇게 반짝이는 눈빛으로 연결해 주고 있을 것이다.  - 혼자 있어도 혼자 있는 게 아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 있음으로 해서 모든 물줄기가 그곳으로
모이고 거기 모여서 시냇물이 되어 먼바다에까지
흘러가는 이치를 배우고 싶다.
다시 맑고 차가운 마음으로 돌아가고 싶다.  - 가장 추운 곳에 서 있고 싶은 날

강줄기 위에다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꽃잎처럼 띄워놓고
천천히 따라 내려가고 싶다.
그 말을 해본 지가 언제인지 너무도 오래된
사랑한다는 말을 강물 소리 곁에서 다시 하고 싶다.  - 나는 다시 강으로 가고 싶다

고요히 있는 것이 최선이다.
가만히 있으면 흐린 것은 아래로 가고 물은 맑아진다.
맑아지면 마음의 본바탕과 만나게 된다.
맑아지면 선해지고 선해지면 욕심도 삿됨도 가라앉게 된다.  - 고요히 있으면 물은 맑아진다

물이 맑아서 산 그림자를 깊게 안고 있고,
산이 높아서 물을 늘 깊고 푸르게 만들어 주듯이
그렇게 함께 있으면 좋겠습니다.  - 강물에 띄우는 편지

내 목소리를 듣기만 하고도 내 가슴속에 비가 내리고 있는지
먹구름이 몰려 오고 있는지 금방 알아채는 사람은 누구인가.
내 노랫소리를 듣고는 내가 아파하고 있는지 흥겨워하고 있는지
금방 아는 사람은 누구인가.  - 소리를 알아듣는 사람이 친구다

그를 대하는 내 마음이 그늘져 있으면
나를 향한 그의 마음도 어둡다.
내 얼굴이 남의 얼굴에 물에 비치듯 비친다.  -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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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에서 온 편지
정홍규 지음 / 학이사(이상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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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만리 장천 푸른 하늘에 해 뜨고 달 가듯
텅빈 산중에 아무도 없는데 물은 흐르고 꽃은 핀다네.

반룡사 주지인 혜해 스님이 정홍규 신부의 칼럼집 - '오산에서 온 편지' 추천사에서 인용한 어느 고승의 싯구가 향기롭다. 사실 신부님을 알게 된 것은 오래되지 않았다. 업무와 관련해 스치듯 인사만 드렸을 뿐 속깊은 대화를 나눌 기회도 물론 없었다. 하지만 우연히 읽게 된 책 한권을 통해서 신부님의 깊은 사랑의 마음과 한발 더 앞서가는 지혜로움에 감동받게 됐다.

솔직히 이 책을 손에 쥐고 나서도 큰 기대는 없었다. 세상에 수많은 책들이 넘쳐나고 이름난 종교인들의 글들도 홍수를 이룬다. 모두가 판에 박힌 듯 좋은 이야기 일색이지만 정작 독자들의 가슴에 깊은 울림을 주기는 쉽지가 않다. 그저 시간날 때 한두페이지 읽어보려던 심산이었는데 어느새 책에 빠져들어 앉은 자리에서 다 읽고 나서야 손에서 놓을 수 있었다.

'오산에서 온 편지'라는 책은 정홍규 신부님이 2007년 3월부터 2011년 112월까지 지역의 한 신문사에 연재한 칼럼을 묶어낸 것이다. 종교적인 내용에서부터 철학, 교육, 환경 등 사회 문제에 이르기까지 그 관심사도 다양하다. 일반적으로 칼럼이라고 하면 딱딱하게 느껴지거나 강압적인 교훈이 담긴 것이 많아 불편하게 느껴지는 일이 많은데 이 책의 글들은 그렇지가 않다.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니 신부님 스스로 영천의 한 폐교를 빌려 산자연학교라는 훌륭한 대안학교로 가꾸고 있고 환경운동에도 솔선수범하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 아닌가 싶다. 특히 불교와 천주교 간의 화합을 위해 노력하고 계시는 모습은 참다운 종교인의 모습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편협한 신앙심으로 인해 지역에도 종교간 갈등의 불씨가 지펴지고 있음을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자신의 믿음과 종교만이 참된 것이고 그것으로 타 종교에 대한 판단의 기준을 삼아  불화와 분쟁을 조장하고 있는 일부 종교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정홍규 신부는 이를 두고 종교적 자폐증이라 칭하며 사회적 소통을 가로막는 가장 무서운 현상이라 지적하고 있다.

신부님은 그 해법을 '공감'에서 찾고 있다. 나 역시도 공감이라는 말을 참 좋아하기에 이 대목에서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나의 남의 차이를 인정하되 차별하지 않으며 그 차이를 이해하려는 배려가 필요한 시대다. 사회는 좀더 다양화 되어가고 있는데 사람들의 사고는 오히려 경직되어 가는 것 같아 우려스럽기도 하다. 신부님이 서문에 남긴 글이 그래서 마음에 오래 남는다.

타인과 그리고 동식물까지 포함하여 같이 느낄 줄 알며 자기가 원하지 않는 일을 남에게 하지 않는 실천적 공감이야 말로 주요 종교의 전통에서 최고 덕목이며 참된 종교의 시금석이라고 확신합니다. 종교는 말씀도, 교리도, 예수 천국, 믿음도 아닌 '단순한 실천'이 이 행성지구를 구할 수 있는 영적 깨달음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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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여행가방 - 박완서 기행산문집
박완서 지음 / 실천문학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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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란 것이 이래서 참 좋은 것 같다. 이제는 고인이 된 분의 체취를 이렇게나마 뒤늦게 책을 통해서 맡을 수 있으니 말이다. 故 박완서 선생님의 기행 산문집 '잃어버린 여행가방'은 지난 2005년에 초판이 발행되었다. 한참이나 늦게 이 책을 사게 된 것은 순전히 여행 에세이를 좋아하는 내 취향 탓이었다.

문필로 치자면 국내 어느 작가에게도 뒤질 것이 없느니만큼 과연 그 분은 여행을 통해 어떤 것을 느꼈을까가 무척 궁금했다. 일반인 혹은 여행작가가 아닌 순수 문학인의 손끝에서는 얼마나 주옥같은 작품이 탄생할까 기대도 사실 컸다. 이 책은 박완서 선생님이 평소 즐겨 찾던 국내 여행지와 몇차례의 해외 여행에서의 소회를 담담하게 기록하고 있다.

언제나 그랬듯 역시 아름다운 우리땅의 여행 기록에 눈길이 간다. 남도, 하회마을, 섬진강, 오대산 등은 나 역시도 몇차례 다녀온 곳들인지라 작가의 눈과 발길을 따라 내 마음도 함께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지금도 눈 감으면 남도의 포근한 산자락과 황톷빛 땅이, 섬진강 악양들의 누렇게 넘실거리는 가을 들녘이 선하게 그려진다.

사람의 감성은 누구나 비슷한 가 보다. 내가 느끼는 것을 그도 느끼고, 내가 감동해마지 않았던 풍경이 그의 마음에도 잔잔한 울림을 남겼다는 사실에 감사함을 느낀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공감할 수 있다는 것, 그것만큼 위로가 되는 것도 없을 것 같다. 인간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외로운 존재지만 공감의 순간만큼은 그 외로움을 잊을 수 있으니 말이다.

사실 '잃어버린 여행가방'이란 제목이 궁금했었다. 독일의 루프트한자라는 항공사에서는 매년 1월 여행객들이 분실하고 찾아가지 않는 여행가방을 공개적으로 경매하는 행사를 갖는다고 한다. 주인이 찾아가지 않는 가방에 비싸고 귀중한 것들이 들어있을 가능성은 적겠지만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훔쳐보고 싶은 인간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기엔 충분한 이벤트일 것 같다.

박완서 선생님 역시 여행가방을 분실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더러운 속옷과 양말이 가득 들어있는, 잃어버린 그 여행가방을 그 누가 열어봤을까 창피한 마음보다 더 두려운 것은 이 육신이란 여행가방 안에 깃들여 있던 영혼을 절대로 기만할 수 없는 엄정한 시선, 숨을 곳 없는 밝음 앞에 드러내는 순간이라는 작가의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죽비로 등짝을 내려치는 것처럼, 잦아있는 정신에 찬물을 끼얹는 듯한 말씀이다. 책에 담겨있는 많은 여행지들의 기록을 일일이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겠지만 인생의 여행가방을 내가 아닌 누군가가 열었을 때도 당당할 수 있게 그렇게 삶의 여정을 여행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가방 속을 더러운 속옷이나 불필요한 잡동사니들로 채우지 않도록 비워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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