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건축 중국건축 일본건축 - 동아시아 속 우리 건축 이야기
김동욱 지음 / 김영사 / 201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는 만큼 보이게 마련인 것인지라 여전히 고건축은 어렵다. 시간을 내서 책을 읽어 보기도 하고, 오래된 건축물을 찾아 유심히 살펴 보려 애써보지만 하루 아침에 눈이 떠질 리 만무하다. 그래도 지금껏 몰랐던 것들을 하나씩 알아가는 재미 또한 쏠쏠한 것도 사실이다. 이런 재미를 무럭무럭 키워 줄 좋은 책이 한 권 있어 소개해 보려 한다.

 

<한국건축 중국건축 일본건축> 이란 책은 한국건축역사학회 회장과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위원을 역임하고, 현재는 경기대학교 명예교수로 재직중인 김동욱 교수가 한, 중, 일 삼국의 건축을 세밀하게 비교하고 각각의 차이와 그 속에서 빚어지는 아름다움을 설명하고 있다. 동양 삼국의 고건축에 대한 관심과 일본 와세대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던 그의 경력이 고건축의 면면을 속속들이 통찰하는 데 있어 큰 도움이 되었음은 자명하다.

 

김동욱 교수는 건축물이 지어진 역사적 배경과 시대적 흐름에 관심을 가지고, 건물의 외형 보다는 당시 지식인들의 건축에 대한 생각, 건축물을 짓는 데 참여한 장인들의 기술, 물질적인 여건을 통해 시대의 건축을 입체적으로 파악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이를 통해 한중일 건축의 공통점과 차이에 대한 섬세한 비교를 통해 동아시의 문화의 상호 교류가 이루어낸 눈부신 성과를 재조명하고 서로 간 문화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서술은 객관적이다. 학창시절 한옥의 자연스러운 처마 곡선이 세계 제일의 아름다움이라 배웠던 나로서는 냉철하면서도 비판적이기까지 한 그의 시선이 다소 불편하기도 했다. 하지만 객관적 사실은 존중해야만 한다. 중국 대륙의 문화적 영향 속에서도 우리의 자연과 문화를 반영한 독특한 기법들을 발전시켜 왔던 고건축이 조선시대 들어 정체기를 거쳤다는 그의 설명은 엄연한 사실이었기에 우리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지식과 고정관념을 떨쳐낼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한국, 중국, 일본의 건축을 놓고 그 우열을 가릴 수는 없다. 김동욱 교수가 주장하고자 하는 핵심은 한중일 삼국이 상호 교류를 통해 아주 독특한 이 지역만의 건축학적 성취를 이루어 냈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초기에는 서로 간에 적극적인 교류를 통해 큰 성과를 거두었고, 시간이 지나며 자신의 개성을 찾기 위한 노력이 선택적인 외래문화 수용의 단계로 들어서게 된다. 이후 교류단절의 시기가 도래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를 통해 건축의 독자성이 성취되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문화에 있어 그 낫고 못함을 가려서는 안된다는 것이 아닐까. 각자에 놓여진 여건을 고려하여, 그 특성에 적합한 방향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당연한 역사의 과정일 것이니 서로의 차이 또한 이런 측면에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할 것이다. 한중일 세 나라의 건축양식 역시 그러하다. 비슷해 보이면서도 자세히 보면 그 차이가 완연하게 드러날 수 밖에 없는 것이 당연하다.

 

아쉽지만 중국이나 일본의 오래된 건축들을 직접 보며 이해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북경에 있는 자금성을 주마간산 식으로 구경한 것이 전부였지만 잠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와 중국의 건축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책에 소개되어 있는 많은 사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웅장하고 거칠 것이 없어 보이는 중국 건축이나, 규격을 중시해 치밀하면서도 화사한 면모를 지닌 일본 건축 또한 아름답다. 하지만 건물 자체가 주변 경관과 단절되지 않고 같은 풍경으로 어우러지는 우리의 건축이 나는 마음에 든다. 낙동강 너머 병풍처럼 드리워져 있는 바위절벽을 차경으로 삼아 고요히 강물을 바라보며 서 있는 병산서원 만대루의 아름다움은 언제나 황홀하다.

 

김동욱 교수가 자신있게 얘기한 것처럼 봉정사 만세루, 관룡사 원음각, 화암사 우화루 등이 가장 눈에 띄는 중심에 자리 잡으면서도 거칠고 투박한 개별 건물의 약점을 덮어 버리고 조선시대 사찰의 경관과 공간을 한층 극적인 수준으로 끌어 올리고 있는 수많은 누각들을 나 또한 한국 건축이 만들어 낸 최고의 걸작이라고 확신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궁에 빠진 세계사의 100대 음모론 - Special Edition
데이비드 사우스웰 지음, 이종인 옮김 / 이마고 / 2007년 12월
평점 :
품절


누구나 흥미를 느낄 만한 소재들이다. 공식적인 발표 이면에 무언가 숨겨진 진실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는 '음모론'의 유통기한은 너무나 길다. 음모론은 <미궁에 빠진 세계사의 100대 음모론>의 저자 데이비드 사우스웰이 이야기 한 것처럼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은 허위일지도 모른다"는 가정에 그 출발점이 있다.

 

이 책에는 존 F. 케네디, 존 레논, 이소룡, 다이애나 왕세자비와 같은 유명인의 죽음으로부터 외계인의 존재, 암살 혹은 실종, 역사적 인물과 사건, 의문의 장소, 비밀기관과 조직, 테크놀로지, 비극적 사건 등에 이르기까지 대중의 이목을 끌었던 굵직굵직한 100가지의 사례들을 담고 있다.

 

어쩌면 한번쯤 들어봤을 법한 얘기들이 많다. 오래 전부터 인구에 회자되어 왔기에 이제는 어느 정도 결론이 날 법도 하건만, 여전히 사람들은 진실에 목말라 있다. 아니, 어쩌면 진실은 이미 드러났지만, 어떤 신념에 사로잡혀 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지도 모른다. 음모론의 세계는 그만큼 뿌리가 깊어서 그 끝을 쉽게 가늠하기 어렵다.

 

사람들이 음모론에 쉽게 빠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은 미심쩍기 때문이다. 우상으로 떠받들었던 스타가 하루 아침에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면 그 죽음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물론,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누군가의 조사가 뒤따를 것이고, 그에 따른 공식적인 발표가 나오겠지만, 대중의 궁금증과 의구심을 100% 해소시킬 수 있는 속시원한 대답은 그 누구도 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로부터 음모론은 싹을 틔우게 된다. 팩트에 기반을 둔 조사라 하더라도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기란 어려운 법이다. 제각각의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제기하는 조그마한 의문에까지 응답할 여력은 없다. 애시당초 의구심으로 가득찼던 사람들은 새로운 가능성에 주목하게 될 것이고, 상상력이 더해지면서 음모론의 확대 재생산은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를 지도 모른다.

 

우리는 인정해야만 한다. 인간의 이성이란 것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또한 고도로 발달된 기술로도 밝힐 수 없는 신비로운 현상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을 말이다. 합리적 의심을 품는 것은 실체적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기본이지만, 그 의심이 지나치면 그 어떤 진실에도 눈감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될 수도 있다는 위험성도 내포되어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다.

 

<미궁에 빠진 세계사의 100대 음모론>에 실린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의심스럽다. 음모론자들의 생각처럼 히틀러는 실제 자살한 것이 아니라 어딘가로 도피했을 수도 있고, 로스웰의 외계인 역시 사실일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의 에필로그에 집중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지은이는 "모든 음모론의 95%는 쓰레기"라고 감히 단언하고 있다. 이것이 대부분의 음모론자들이 공공연히 인정하기 꺼려 하는 불편한 진실이란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음모론을 필요로 하는 것인가. 데이비드 사우스웰은 쓰레기가 아닌 5퍼센트에 집중하라 조언한다. 그 5퍼센트가 우리를 대상으로 음모를 꾸미는 세력들에 대항하여 무언가를 할 수 있도록 대비하게 해 줄 것이라고. 그것이 바로 음모론의 존재 이유라고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정의를 부탁해 - 권석천의 시각
권석천 지음 / 동아시아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흥미로운 대목이다. 종편인 JTBC에서 '송곳'이란 드라마를 편성하여 방영한다거나, 대표적인 보수언론이라고 일컬어지는 중앙일보 논설위원이 보수정권에 비판적인 칼럼을 쓴다거나 하는 것 말이다. 이 드라마나 칼럼의 화두는 다름 아닌 '정의'. 다소 거창하게 들릴 지도 모르지만 지금 이 사회에 절실히 필요한 것 또한 바로 이 정의가 아닐까.

 

<정의를 부탁해>라는 책은 중앙일보 권석천 논설위원의 칼럼집이다. JTBC 뉴스룸 손석희 앵커는 추천사를 통해 "나는 이 책을 지금 처음 손에 쥔 사람들에게 그냥 서문만 읽어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서문에서 어떤 뭉클함을 느낀 독자라면 그 다음 본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내가 권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세상이 빛의 속도로 변해도 글은 그 본질을 추구하며 권석천은 어떤 허장성세도 없이 그 본질로 들어간 글쟁이다."며 일독할 것을 권하고 있다.

 

물론 내가 손석희 앵커의 추천사 때문에 이 책을 읽었던 것은 아니나, 그의 얘기처럼 이 책의 서문을 통해 지은이 권석천의 사람됨과 글쓰기의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논설위원의 역할이 당연히 그렇겠지만 그의 글에는 우리 사회의 어두운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이 책만 보면 우리 사회가 온통 비리와 부조리로 가득찬 것 같아 암울하다. 정의가 필요한 세상이지만, '정의가 이기는 게 아니라 이기는 것이 정의'라는 지랄같은 상식이 지배하는 사회 속에서 정의를 논하는 것 자체에 의문을 품어야 할 정도로 우리는 찌질하다. 하루하루를 버텨야 하는 삶의 고단함을 핑계삼아 우리들은 그 찌질함을 포장하려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기는 것이 정의가 아니라 정의가 이겨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찌질함으로 인해 정의로운 삶을 살지 못하는 것에 면죄부가 주어질 수도 없다. 정의로운 세상은 물론 위대한 리더와 같은 슈퍼 히어로의 등장으로 가속도를 붙일 수 있을 수 있을 지는 몰라도, 결국은 사회 구성원 전반의 의식이 제자리를 찾아야만 가능한 일이라고 본다. 정의롭지 못한 세상을 언제나 남탓으로 돌려서는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정의를 구현할 방법이 없다.

 

책을 읽으며 내내 마음이 불편하고 답답했다. 한편, 이렇게 엉망인 세상인데도 하루하루를 버틸 수 있다는 것이 놀랍게 느껴질 정도다. 젊은이들이 얘기하는 '헬조선'이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불과 수십년전에 비해 국민소득은 비약적으로 높아졌다지만 국민들의 행복지수는 오히려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는 상황에 속시원한 해결책을 주는 이도 없다. 총체적인 절망 상태에 빠져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찌할 것인가. 물론 여건이 허락한다면 지옥같은 한국을 떠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는 있겠다. 하지만, 그마저도 엄두를 낼 수 없는 대다수 사람들이라면 내가 발붙이고 살아야 하는 이 세상을 보다 정의롭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밖에 없다.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다. 보다 거창한 것은 거창한 일을 하는 정치인들과 고위 관료들의 몫으로 남겨두자. 보다 근본적이고 현실적인 방법은 내 안에서 정의를 정립하는 것이고, 그것을 주변과 함께 실천해 나가는 것이 아닐까.

 

현재의 삶이 팍팍하지 않은 이는 드물다. 각자 모두의 사정이 있다. 나의 사정에만 매몰되면 옆사람의 힘듦에 눈돌릴 수가 없다. 권석천은 정의를 부탁한다고 했지만, 나는 그보다 앞서 배려를 부탁하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한다. 정의가 필요한 것은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정의로움은 빈 자리를 양보하고, 마주친 골목에서 옆으로 비켜주는 작은 배려 속에서 비로소 그 싹을 튀우고, 넓은 품을 가진 나무로 자라날 수 있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김종성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과거사를 둘러싼 한중일 동북아 삼국의 해묵은 다툼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과정에서 발생한 한국과 중국의 피해에 대해 일본은 아직도 진정성 있는 반성과 사과를 하지 않고 있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가이면서 전후 여러차례 사죄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독일의 사례와 여러모로 비교되는 대목이다.

 

비교적 가까운 근세사에 대한 정리도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삼국의 역사 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고 있다. 일본의 역사 왜곡이야 하루이틀 문제가 아니었지만, 세계 초강대국으로의 비상을 꿈꾸고 있는 중국이 자국의 역사를 미화하는 과정에서 주변국과의 마찰을 일으키고 있는 것 또한 큰 우려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특히, 우리의 고대사와 관련된 이른바 동북공정은 국가의 전폭적 지원 아래 상당히 체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며 역사에 대한 관심을 호소하고 있지만, 하루하루 먹고 살기 바쁜 일반인들이 그들의 밥벌이와 큰 상관없어 보이는 역사에 관심의 눈길을 줄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아 보인다.

 

이런 형국에 우리 내부는 국사 교과서 국정화 문제로 시끄럽다. 국정화 반대와 찬성으로 나뉘어 극렬한 싸움을 벌이고 있지만, 결국은 정부 방침대로 교과서 국정화 수순은 차근차근 진행될 것이다. 교과서 국정화 자체에 대한 각자의 판단을 떠나 본질적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과연 새롭게 만들어질 우리의 국사 교과서에 어떤 내용들이 담길 것인가 하는 것 말이다. 김종성이 지은 <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에 소개되어 있는 단편적인 내용들은 빙산의 일각일 수도 있다. 국내에서도 많은 논란을 빚고 있는 과거의 역사에 대한 어떤 관점으로 접근할 것인가, 제대로 된 우리의 역사를 가르칠 수 있는 교과서가 만들어 질 수 있을 지 여전히 의문스러운 상황이다.

 

<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에서는 동북아 삼국의 역사 교과서에 담겨져 있지 않은 역사의 진실에 주목한다. 자국의 역사에 대한 자긍심을 후세에 심어주기 위해 왜곡과 과장, 또는 미화를 일삼고 있는 중국과 일본에 비해 우리 사학계는 자랑스런 역사마저도 감추려 한다는 것이 김종성의 주장이다.

 

중국에 사대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자주성을 잃은 것은 아니었으며 주변국으로부터 사대를 받은 경우가 더 많았다는 사실이 역사 교과서에 담겨 있지 않다는 것이다. 백제 강성기에 요서를 점령하여 지배하였다는 자랑스런 역사 또한 우리측 사료가 없다는 이유로 배제하고 있는 서글픈 현실도 따끔하게 지적한다. 실증사관이란 이름으로 중국과 일본에 유리한 역사적 해석을 하고 있는 우리 주류 사학계에서 깊이 생각해 볼 대목이 아닌가 싶다.

 

이에 반해, 오랑캐라 무시했던 흉노족에게 조공을 했던 역사적 사실을 감추고, 수천년 역사에서 이민족에게 정복, 지배당했던 시기가 더 길었음에도 그것을 중화주의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는 중국 교과서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일본 또한 마찬가지다.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에 의해 문명을 전수받은 고대 일본사를 의도적으로 축소하는 것은 물론, 침략전쟁까지 정당방위로 포장하고 있는 역사 교과서의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김종성은 우리 교과서는 민족의 자랑스런 과거를 수록하지 않을 뿐 아니라 축소, 은폐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주장한다. 해양과 유목지대에서 강대국의 모습으로 살았던 과거의 역사를 어떻게든 부정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에 대해 논란이 있을 수는 있지만 우리 교과서가 스스로 알아서 우리 역사를 축소, 은폐하고 있으니 중국과 일본 교과서가 한국 역사를 마음대로 재단하더라도 제대로 대응할 수 있을 지에는 의구심이 들 수 밖에 없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루여행 - 당신에게 주는 선물
이한규 지음 / 황금부엉이 / 201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처음 책을 폈을 때의 불편함은 서서히 사그라 들었다. 이한규가 지은 <하루여행>이란 책에 대해서는 자세한 정보가 없었다. 그저 여행이란 단어에 끌렸고, 표지를 가득 채우고 있는 바다 풍경이 마음에 와 닿았던 탓에 별 망설임 없이 이 책을 골랐던 것이다. 사실은 이 시원스런 바다가 내가 얼마 전에 다녀온 신두리 바닷가란 것도 책을 읽으며 알게 됐을 정도였으니.

 

불만은 이런 것들이었다. <하루여행>이란 책은 한시간에서 다섯 시간 거리의 여행거리를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있는데, 그 기준점이 서울이란 것 때문에 우선 기분이 나빴다. <하루여행>이란 제목에서 우리는 가볍게 당일치기로 다녀올 수 있는 여행지를 소개할 것이란 걸 어렴풋이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런데, 기어코 서울에서 가깝게는 한 시간 거리, 멀게는 다섯 시간 거리 등으로 구분을 해서 이 나라의 중심이 서울이란 걸 강조하고 싶었을까 하는, 지방민의 컴플렉스라고나 할까.

 

또 하나, 이건 순전히 개인적 취향 탓이다. 나는 여행 에세이를 무척 좋아 하지만, 반드시 풍경이 중심이 되어야만 한다. 손쉽게 떠날 수 있는 국내 여행에서부터 해외 극지탐험까지 이제 여행은 보편화가 됐다. 여행에 관련된 책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출간된다. 여행자들이 불편을 느끼지 않도록 세세한 정보를 제공해주는 '유익한 책'들도 많이 나오지만, 나는 여전히 마음을 순식간에 빼앗는 멋지고, 아름다운 풍경이 담겨있는 책들이 좋다.

 

<하루여행>은 그런 면에선 나와 궁합이 맞지 않았다. 이 책에는 숨겨진 비경을 자랑하는 여행지 보다는 이미 우리들에게 익숙한 여행지들이 대부분이다. 게다가, 커피는 그저 아메리카노만 마시면 나같은 문외한들이 썩 내켜하지 않을 전국 각지의 카페들을 친절히 소개하고 있다. 솔직히 내 관심사는 아닌 것이다.

 

다행이 것은 내가 커피 맛은 잘 모르지만 분위기는 좀 안다는 거다. 카페에 가서 커피만 마시는 것은 아니잖은가. 잔잔하게 흐르는 음악 선율에 지친 마음도 잠시 쉬어갈 수 있고, 간만에 읽고싶었던 책을 여유롭게 읽을 수도 있는 곳. 소파에 몸을 깊이 파묻고는 무심히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하겠다.

 

그림같은 풍경에 현혹되지는 못하겠지만, 다양한 볼거리를 소개되어 있어 이채로웠다. 특히 북카페는 물론 자주 접할 수 없는 헌책방을 소개해 준 것은 고마웠다. 켜켜이 쌓인 먼지를 닦아내고 보물처럼 숨어있던 책을 발견하는 순간, 가끔 헌책방을 들러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호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뒷골목으로 밀려난 헌책방들이 우리 주변에서 더 이상 밀려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이미 다녀온 여행지를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호불호가 갈리는 곳도 있겠지만, 역시 정말 좋은 곳은 누구에게나 비슷한 감흥을 안겨주는 것 같다. 큰 기대 없이 갔었던 신두리 해안사구에서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고야 말았던, 그날의 즐거운 기억이 떠올라 <하루여행>을 끝마치는 기분이 따뜻할 수 있어서 무척 다행스러웠다. 당신의 '일상'을 '이상'으로 바꾸는 아주 특별한 하루여행을 다시 떠나봤음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