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비겁한 승리
김연수 지음 / 앨피 / 201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좀 뜬근없이 느껴질 수도 있겠다. 420여년 전 이 땅에서 일어났던 전쟁을 이제금 다시 이야기 하는 이유가 뭘까 하고 말이다. <임진왜란 비겁한 승리>의 지은이 김연수는 임진왜란은 살아 있는 역사이며, 임진년 당시의 상황과 지금의 상황이 조금도 변한 것이 없기 때문이라며 그 물음에 답 했다.

그는 책의 머릿말에서 임진왜란은 지배층의 무능과 부도덕이 빚어낸 민족적 참화였음을 다시금 주지 시킨다. 그 당시 조선이라는 나라가 안고 있던 총체적 문제들을 집약적으로 보여준 임진왜란.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2013년의 대한민국이 처한 상황 또한 암울하다는 것이 지은이의 기본적 시각이다.

이 책을 읽으니 묘하게 김훈의 <남한산성>이라는 소설을 읽었던 때의 느낌이 떠올랐다. 역시 무능하고 부도덕한 왕과 사대부로 인해 전쟁의 참화를 겪어야 했던 남한산성 안의 무고한 백성들의 삶이 오버랩 되었기 때문이다. 전쟁은 그 자체로도 엄청난 비극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미리 막을 수 있었던 전쟁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임진왜란 역시 마찬가지다. 어처구니 없는 것은 전쟁이 일어날 줄을 모두 알았다는 것이다. 알면서도 그 누구도 대비하지 않았고, 대비할 힘도 없었다는 이야기는 헛웃음을 짓게 만든다.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이지만 사실이 그러했다. 조선왕조실록을 포함한 수많은 기록들에서 그 유력한 증거들을 찾아볼 수 있다.

당시 조선 사람은 전쟁이 일어날 줄을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발설하는 순간 조선이라는 국가를 아래로부터 개혁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는 실로 역성혁명에 준하는 엄청난 일이었다. 주어진 선택지는 전쟁과 개혁이었고, 결국 조선이 선택한 것은 중국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것 뿐이었다.

 <임진왜란 비겁한 승리> 라는 제목이 마땅찮다. 7년 동안이나 백성을 도탄에 빠뜨린 국가적 재난에서 집권층이 한 것이라고는 도성과 백성을 버리고 도망가는 것, 상국인 명에 의지하여 생명줄을 유지하는 것 밖에 없었다. 실질적으로 나라를 지킨 것은 성리학의 가르침을 실천한 의병장들과 자신의 땅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왜적과 싸운 이름없는 민초들이었다.

지리하게 7년을 끌던 전쟁은 침략군 일본이 스스로 철군함으로써 끝이 났다. 조선은 전시작전 지휘권을 명에 넘겨준 탓에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침략군을 물러칠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지배층들은 전쟁이 끝난 뒤 그들만의 논공 행상으로 승리를 자축했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슬픈 한편의 코메디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에 와서 과거의 과오를 되짚어 보는 것은 우리의 부끄러운 선조를 비난하고자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지 않을 것이다. 지은이 김연수가 지적하듯 지금 우리 사회의 현실, 그리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 강대국들의 움직임이 그때와 많이 닮아 있다는 것을 함께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는 이땅에 임진왜란과 같은 역사의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자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모두의 바람이기도 한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왕과 아들, 조선시대 왕위 계승사 - 권력은 부자간에도 나눌 수 없다
한명기.신병주.강문식 지음 / 책과함께 / 201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것이 아비와 자식 사이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권력이나 금전이 개입하면 그 긴밀한 관계가 틀어지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구중궁궐 깊숙한 곳에서 펼쳐지는 최고 권력자 '왕'과 그의 후계자인 세자 사이에서 펼쳐지는 갈등과 불협화음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그래서인지 이런 이야기들은 지금껏 영화나 드라마에 소재로 자주 사용되었다. 이성계의 조선 개국과정을 그렸던 대하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아버지 못지않은 야심가였던 이방원과 태조 이성계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잘 묘사됐었고, 몇 해 전에 큰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이산'에서는 뒤주 속에 갇혀 죽임을 당했던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의 참담함이 잘 나타나 있다.

서울대 국사학과를 졸업한 강문식, 한명기, 신병주가 함께 쓴 '왕과 아들'이란 책에는 조선왕조를 통틀어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심각한 갈등을 일으켰던 문제적 아버지와 문제적 아들 이야기를 싣고 있다. 조선왕조를 연 태조 이성계와 그가 가장 신뢰했던 다섯째 아들 방원을 시작으로 태종과 양녕, 선조와 광해군, 인조와 소현세자, 영조와 사도세자가 바로 그들이다.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인물과 이야기들이지만 기존에 알려져 있던 것과는 다른 이면을 들여다 보는 재미가 있다. 특히 그들이 그러한 비극을 겪을 수 밖에 없었던 시대 상황과 정치적 지형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비가 자식을 버린다는 것은 지극히 비상식적인 일이지만 본능적인 부모의 사랑마저 무기력하게 만드는 절대 권력의 비정함은 소름돋는 일이기도 하다.

태종과 양녕의 사례는 그 중에서도 특별하다. 두번에 걸친 왕자의 난을 거쳐 정적들을 제거하고 아버지의 뜻을 거슬러 왕위에 올랐던 태종으로선 적자이면서 장자였던 양녕에 대한 기대가 유달랐다. 당연한 이유로 그는 계속되는 양녕의 실수에도 관용을 베풀었지만 결국 왕위는 장자가 아닌 셋째 아들 충녕으로 이어지게 됐고, 결국 그가 5,000년 민족사를 통틀어 으뜸되는 성군으로 칭송받는 세종대왕이라는 사실은 역사의 또다른 아이러니라 할 수 있겠다.

지금껏 알려진 바와 같이 맏이였던 양녕이 동생 충녕의 왕재(王材)를 일찌기 알아보고 그에게 왕위를 양보하기 위해 일부러 기행을 일삼았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닌 듯 하다. 조선왕조실록 등 역사적 기록에서도 양녕과 충녕 사이가 그다지 원만하지 못했고 양녕이 동생 충녕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는 대목도 등장하기 때문이다. 또한, 양녕에게 정치적 야망이 없었다는 추론 또한 그가 이후 세조의 왕위 찬탈 과정에서 단종의 사사를 주도했던 사실로 미루어볼 때 신뢰성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이 모든 것이 권력이라는 절대적 힘 앞에서 벌어진 일이다. 앞서 언급됐던 다섯 명의 왕과 아들이 처음부터 사이가 나빴던 것은 결코 아니다. 왕들은 공통적으로 세자들에게 큰 기대와 깊은 신뢰를 가졌었지만 불가항력적인 상황 속에서 결국 비극이 잉태되었다고 보는 것이 좀더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한 과정의 뒷편에서 절대권력을 놓고 펼쳐진 정치세력들간의 치열한 암투는 무서울 정도다. 자신이 속한 당파의 이익을 위해, 자신과 가문의 안위와 부귀영화를 위해 권모술수를 마다 않았던 그들에게서 수백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정치권의  모습이 오버랩 되는 것 같아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 두번째 무라카미 라디오 무라카미 라디오 2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오하시 아유미 그림 / 비채 / 201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본을 대표하는 소설가라고 하면 너무 박한 대접일까. 세계적으로 이름난 작가 중 한명이라고 해 두자. 본업인 소설이 아닌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는 어떨까 궁금했다. 단지 단순한 그 이유 하나만으로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라는 다소 생뚱맞은 제목을 가진 그의 에세이 한권을 읽어 보게 됐다.

무라카미 스타일로 쓰는 에세이의 원칙은 이렇단다. 타인의 험담은 구체적으로 쓰지 않기, 변명이나 자랑을 되도록 하지 않기, 시사적인 화제는 가능한 피하기가 그것이다. 학창시절 배운대로 표현하자면 경수필, 미셀러니 수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의 글은 가볍고 일상적이고 담백했다.

그렇다고 그의 본업인 소설 쓰기가 아니라고 해서 무라카미 하루키가 에세이를 그저 쉽게 생각하고 쓰지는 않은 듯 하다. 분명 그는 "나의 본업은 소설가요, 내가 쓰는 에세이는 기본적으로 '맥주 회사가 만든 우롱차'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는 '나는 맥주를 못 마셔서 우롱차 밖에 안마셔' 하는 사람도 많으니, 이왕 그렇다면 일본에서 제일 맛있는 우롱차를 목표로 하겠습니다."라고 공표했으니 말이다.

쉽지 않은 일이다. 주류 브랜드 1등인 회사에서 주종목이었던 맥주의 신제품을 만들어 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테지만, 전혀 다른 분야인 우롱차를 만드는 것, 그것도 1등 제품을 새롭게 만들어 보겠다는 것은 열심히 하겠다는 각오는 최고 작가의 자신감을 넘어 선 자부심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라는 책에 담긴 글들은 일본의 한 패션잡지에 '무라카미 라디오'에 연재되었던 글들이라 한다. 아무래도 패션잡지의 성향상 젊은 여성들이 주된 독자층이 되었을테고, 글들 또한 그 독자층에 알맞는 느낌과 문체로 쓰여졌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능력은 역시 아주 사소로운 일상을 읽어볼 만한 글로 재탄생 시켜낼 수 있다는 것, 바로 그것일 거다.

그의 글 중에서 로마에서 처음 운전을 배웠던 경험이 기억에 남는다. 삼십대 후반의 늦은 나이에 처음 운전을 배워 극성스럽기로 유명한 로마 시내를 초보 운전자로 돌아 다녔을 그의 모습이 생생히 그려진다. 운전대만 잡으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기로는 우리나라 역시 만만찮지 않은가. 길은 좁고 차는 많아서 양보심은 줄어들고, 약삭빠른 운전 기술만 늘어가는 우리 모습이 그 글에 그대로 투영되는 느낌이었다.

프로야구가 재미없어졌다고 하는 것도 그렇다. 무라카미가 보는 일본 프로야구도 그렇지만, 인기 거품이 잔뜩 끼어있는 우리 프로야구의 현실도 별반 다르진 않다. 양적 성장에만 치우쳐 야구의 본질에 대한 선수들의 진지함과 팬들의 안목은 갈수록 한심해 지는 수준이다. 한 경기 백 오십번의 피칭이 있는 동안 정확히 백 오십번의 까치발을 했던, 마치 표범처럼 온 몸에 힘이 넘쳐났던 고액 연봉자 알렉스 로드리게스의 기억에 관한 글은 내게도 서서히 잃어가고 있는 야구에 대한 열정을 다시금 생각해 보게 했다.

마지막으로 나이에 대한 생각. 1949년생인 무라카미 하루키는 '제법 나이를 먹었지만 스스로를 절대로 아저씨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했다. 실제로는 아저씨를 지나 영감이 되고도 남을 나이지만 "나는 아저씨니까" 하는 생각을 하는 순간 진짜 아저씨가 되기 때문이란다.

그의 얘기처럼 사람이란 나이에 걸맞게 자연스럽게 살명 되지 애써 더 젊게 꾸밀 필요는 없다. 마찬가지로 굳이 자신을 아저씨나 아줌마로 만들 필요도 없는 것이다. 나이에 관해 가장 중요한 것은 되도록 나이를 의식하지 않는 것. 평소에는 잊고 지내다가 꼭 필요할 때 혼자서 살짝 머리끝쯤에서 떠올리면 된다는 그의 말에 짝짝짝 박수를 치며 책을 덮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라진 건축의 그림자 - 전통건축, 그 종의 기원
서현 지음 / 효형출판 / 201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전통 건축에 대한 관심으로 여러 고택, 오래된 절집을 많이 찾아 다니긴 하지만 보는 데는 한계가 있다. 제대로 된 교육이나 전문 서적 한번 읽어본 적이 없으니 건축학적으로 의미있는 건물을 봐도 무엇에 감탄해야 하는 지, 왜 역사적으로 주목받는 것인 지를 알 수가 없어 답답했던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물론 이것이 문외한일 수 밖에 없는 일반인들만의 탓은 아니다. 문화재 안내판을 봐도 마찬가지다. 하앙이니 부연이니 갈모산방이니 하는 말들은 구체적인 설명이 없으면 이해하기 어렵다. 무릇 안내문이란 잘 모르는 사람들이 쉽게 알아듣게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역할을 해야 하는데 우리나라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안내문을 보면 머리만 더 아플 뿐이다.

지금보다 더 모를 때, 나는 오래된 한옥믈 볼 때마다 지붕에 눈길이 갔다. 모양이나 크기도 제 각각이지만 건물 꼭대기에 올려져 있는 지붕의 모양에서 그 차이가 확연했다. 맞배지붕, 우진각지붕, 팔작지붕과 같은 정식 명칭은 그 이후에 알게 됐지만 왜 지붕들이 통일성을 갖지 않고 저렇게 다른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이 늘 있었다.

모양으로만 보자면 단순한 형태인 맞배지붕보다는 우진각지붕이나 팔작지붕이 훨씬 아름답다. 처음엔 단순히 건축학적 미감을 살리기 위해 목수들이 노고를 아끼지 않은 덕분에 저런 형태의 지붕들로 진화, 발전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했었는데 한양대학교 건축학부 교수로 재직중인 서현 교수의 '사라진 건축의 그림자'라는 책을 보면서 한수 배울 수 있게 됐다.

건축 재료가 한정적일 수 밖에 없던 과거에는 근처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무가 건축의 주된 재료가 될 수 밖에 없었다. 땅 덩어리가 큰 중국이나 상대적으로 강수량이 풍부해 나무의 성장이 유리한 섬나라 일본에 비해 쓸 수 있는 목재의 양과 재질이 한정적일 수 밖에 없었던 한계 속에서도 높은 수준의 건축술을 발전시켜 온 목수들의 노력과 재능에 경탄할 수 밖에 없다.

책을 두 번이나 읽었지만 여전히 건축은 어렵다. 특히나 전통 건축들은 목재를 이용하는 기법들도 생소하고 실생활에서 자주 접할 수 없기 때문에 책 속의 설명들이 머릿 속에 잘 들어오진 않는다. 이제 겨우 지붕들의 생김새와 쓰임새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전통 건축의 시작이 어떤 형태였으며 일련의 시행착오를 거쳐 완성을 보게 된 것인지 어렴풋하게 머리에 그려지게 됐다.

저자는 "도편수는 죽을 때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고 썼다. 이름난 고건축물을 보며 아름다움을 얘기하는 것이 공허함으로 돌아오지 않으려면 그 건축물을 완성시키기 위한 목수의 모습까지도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고 당부하고 있다. 건축에 모든 것을 내어놓고도 그 이름 조차 남길 수 없었던 목수들의 처지에 대한 건축가 서현의 안타까움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건축 자체의 미학에도 여전히 막눈일 수 밖에 없는 내게 부담스러운 가르침이긴 하지만 짧은 순간 머무르며 의미없는 사진 몇 장을 남기는 것보다는 훨씬 의미있는 여정이 될 것만은 충분하기에 그 길을 쫓아 가보려 한다.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그런 여정이, 수고스러운 발걸음이 시간 낭비에 그치지 않는 답사 여행을 떠나 보련다.

전통건축이 진정 아름답다면, 숨이 막힐 만큼 아름답다면, 그리하여 그 답사 여행이 가치가 있고자 한다면, 배우고 외웠던 자연미와 곡선미의 찬사 뿐만 아니라 절실하던 목수의 모습도 배경에서 찾을 수 있어야 한다. 단 한 번도 역사에 이름을 남길 기회를 얻지 못했던 그들의 존재가 침묵의 건물을 통해 드러나지 않을 때, 우리 앞의 그것은 단지 나무토막의 조합에 불과하다. 그때 되뇌는 아름다움은 가식적이고 찬미는 공허하다. 마음에 각인되지 않고 스치는 노정의 여행은 시간 낭비에 지나지 않는다. - 저자의 말 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가 나를 사랑하는 일, 당신이 당신을 사랑하는 일 - 개정증보판
최갑수 지음 / 예담 / 2013년 6월
평점 :
품절



뭔가 찜찜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시인 최갑수가 이렇게 부지런할 리가 없지 않은가. 조금만 더 세심하게 살폈더라면 'Sentimental Travel' 라는 문구를 놓쳤을 리가 없다. 이미 몇해 전에 한 번 당한 적이 있던 나로서는 당혹스럽기도 하고, 한편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걸 어찌할 수가 없다.

최갑수의 신작 '내가 나를 사랑하는 일, 당신이 당신을 사랑하는 일'은 결국 몇 해 전에 그가 펴낸 '당분간은 나를 위해서만' 이란 책을 다시 펴낸 것에 불과하다. 물론 '목요일의 루앙 프라방'을 사진까지 그대로 실어서 '행복이 오지 않으면 만나러 가야지'란 제목의 책으로 발간했던 것에 비하면 이번은 "그래도 양심은 있네"라고 봐 넘어갈 만 하다.

제목은 참 마음에 든다. 언제나 그렇듯 최갑수의 책에는 시인의 감성이 잔뜩 묻어난다. 하지만 이제 나도 나이를 먹어서일까. 에필로그에서 다시 보아도 문장은 어색하고 사진은 유치하다고 겸손을 드러내고 있지만 5년의 세월이 흐른 뒤 다시 읽어보는 이 글들에서 과거의 그 공감을 고스란히 떠올릴 수 없음이 안타깝다. 비야 커피를 작은 종이컵에 타 먹는 것처럼 쓰다.

예전에는 그의 넘치는 감성이 부러웠지만 어느 순간 부담스러워졌나 보다. 끈적거리지 않고 그저 쿨한 것이 세상사는 데는 편하다는 것을 절절히 느끼기 때문일까. 모진 풍파를 겪고 질곡의 삶을 산다 해도 그의 언어 속에서는 결코 드러나지 않는 담백함으로 머물러 있으면 좋겠다.
 
오랜 기다림이 아쉬움으로 돌아서긴 했지만 앞으로도 난 최갑수의 글과 사진을 기다릴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비록 무책임하게 5년전의 글을 재탕한다 해도 여전히 여행을 좋아하는, 그 느낌을 공감가는 글과 사진으로 남길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그를 버릴 수 없는 까닭이다.

누구나 자신만의 별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누구나 그 별에 닿는 자신만의 방법을 가지고 있다.
어떤 이는 그림을 통해
어떤 이는 음악을 통해
어떤 이는 사진을 통해
어떤 이는 사랑을 통해 그 별에 닿는다.
그리고
내가 그 별에 닿는 방법은 여행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