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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근희의 행진
이서수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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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조야, 너 그거 아니? 인간을 육체적으로 학살하는 것은 시간이지만, 정신적으로 학살하는 것은 시대야.
「미조의 시대」 中
막막하고 팍팍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미조’와 ‘근희’가 이 소설을 읽었으면.
우리들의 행진에 많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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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 디킨슨 시 선집 을유세계문학전집 126
에밀리 디킨슨 지음, 조애리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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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 디킨슨의 첫 번째 시집은 1890년 히긴슨과 오빠의 연인이던 메이블 루미스 토드에 의해 출판되었지만 심하게 편집된 내용이었다. 1955년에 비로소 토머스 H. 존슨이 시 전집을 출판해 독자들은 그녀의 시 전체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255쪽)

하마터면 에밀리 디킨슨의 시를 온전히 보지 못할 뻔했다니 조금 놀랐다.
그의 시들은 요즘 시와는 다르게 대체로 짧다. 사실 짧은 시를 쓰는 게 더 어렵다. 그 길이 안에 하고 싶은 말을 담는 것이 힘들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리고 좋은 시가 될 확률이 낮다는 걸 알기 때문에 대단하고 생각했다.

디킨슨의 시에는 제목이 없다. 유일하게 제목이 붙은 시는 「눈송이」이다. 시나 소설을 쓰는 것보다 제목을 붙이는 일이 내겐 더 어려운데, 디킨슨도 그랬던 걸까.

시는 어렵지 않게 슥 읽을 수 있었다. 재밌고 마음에 드는 표현이 많았다. 오히려 해설을 읽자 어렵게 느껴졌다. 나는 그냥 읽었는데 전문가들은 철학적인 개념을 가져왔다. 디킨슨이 정말 그런 의도로 썼을까. 꿈보다 해몽이라는 말이 떠올랐지만…. 들뢰즈의 ‘탈주선’을 끌어들여 해석한 부분은 흥미롭게 읽었다.

디킨슨의 시는 견고한 절편의 균열로 시작하여 탈주와 재영토화를 거쳐 마침내 성공적인 탈주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 준다. 디킨슨은 우선 종교와 결혼이라는 견고한 절편의 억압을 형상화하고 있다. (중략)
그러나 이러한 탈주선이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중략) 그러나 마침내 탈주선이 성공하면 종교와 결혼 같은 제도를 파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배치를 창조한다. (286-287쪽)

실제로 에밀리 디킨슨은 종교에 대해 불신을 가졌으며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고 한다. 자신의 신념을 고스란히 녹여 냈다는 점에서 그의 시가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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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나는 알고 있다
클라우디아 피녜이로 지음, 엄지영 옮김 / 비채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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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나의 딸 리타가 사망한 채 발견된다. 그녀의 죽음은 자살로 종결된다. 그러나 엘레나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리타는 분명 타살된 거라고 생각한다. 아무도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자 엘레나는 이사벨을 찾아간다. 그녀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도와주게끔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게 전부다. 소설은 엘레나가 이사벨의 집으로 향하는 여정에 관해 8할 이상의 분량을 할애한다. 이사벨은 마지막에서야 겨우 모습을 드러낸다.
왜 이런 구성을 취한 걸까? 그 이유는 주인공인 엘레나에게 달려 있다. 엘레나는 파킨슨병 환자이다.
소설의 첫 문단은 다음과 같다.

우선 오른발을 바닥에서 몇 센티미터가량 들어 올려 허공에 내디디면서 왼발을 어느 정도 지났다 싶으면 거기에 발을 내려 놓는 것이 요령이지. 그게 전부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엘레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했고, 그녀의 뇌 역시 움직이라는 명령을 내렸음에도 오른발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발이 올라가지 않는다. 허공에 내디뎌지지 않는다. 다시 바닥으로 내려가지도 않는다. 아주 단순한 동작이지만 발은 그것마저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엘레나는 자리에 앉아 기다리기로 한다. 그녀의 집 부엌에서. (후략) (13쪽)

엘레나는 한 걸음을 떼는 것조차 힘들다. 소설에서는 이렇게 그녀의 한 걸음에 관해 집요하게 서술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방식으로. 읽다 보면 엘레나의 사소한 동작이 이루어지는 과정에 집중하게 된다. 그녀의 움직임은 매우 더딜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독자는 엘레나의 심정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머리에서 명령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 그에 대한 답답함과 고통을. 한 문장 한 문장 읽어 내려가는 행위 자체가 힘겹게 느껴진다. 문장은 간결한데 길고 느린 호흡으로 읽게 되었다.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진실이 드러난다. 그러나 진실보다 무거운 것은 질문이다.
‘엘레나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
정보라 작가님의 추천사 제목이기도 한 이 질문은 묵직하게 독자들을 향해 던져진다.
질문에 대한 답을 고민하기 위해 다시 앞으로 돌아가야 한다. 엘레나는 왜 이사벨을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도와주게끔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었을까? 그것은 과거에 리타와 그녀가 이사벨을 도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엘레나는 그것을 ‘빚’이라고 생각한다. 이사벨이 갚아야 할 빚. 그래서 초반부부터 이사벨에게는 ‘빚을 청산하는 대신’, ‘빚을 받아내려고 한다’ 따위의 설명이 붙는다. 독자는 ‘빚’의 정체를 나중에서야 알게 된다.
그녀에게 멋대로 빚을 지운 엘레나의 행동을 어떻게 봐야 하나. 도움받는 사람이 원치 않는 도움도 도움이라고 할 수 있나. 내가 도움이라고 생각하는 행위가 타인에게는 ‘범죄’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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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나와 리타를 보며 나 같다고 생각했다. 정확히는 엄마와 나.

그들은 말다툼을 벌였다. 매일 저녁만 되면 어김없이, 어떤 문제든 가리지 않고. 사실 중요한 것은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택한 대화 방식, 즉 싸움을 통해 자기의 생각을 전달하려고 하는 대화 방식이었다. (27-28쪽)

특히 이 장면이 그랬다. 모녀 관계란 정말, 어떤 단어 안에 가둘 수 없을 것 같다. 이토록 기이하고 모순적인 관계가 세상에 또 존재할까. 왜 다른 관계보다도 모녀만 유독 그럴까.

부모님한테 받은 걸 되돌려드릴 때가 된 것 같구나. 오래전에 네가 어머니를 필요로 했던 것처럼 지금 어머니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은 바로 너야. 리타, 이제는 네가 어머니의 어머니가 될 차례라고. (233쪽)

의사가 리타에게 한 말이다. 여기서 질문을 안 할 수가 없다. 만약 리타가 남자였어도 똑같이 말했을까.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실제로 돌봄 노동은 여전히 여성의 몫이다. 과거보다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이 압도적이다.

외할머니께서 수술 후 거동을 못 하신 적이 있었다. 요양보호사를 구하기 전까지 엄마와 이모가 번갈아가며 할머니를 돌봤다. 병실의 간이 침대에서 쪽잠을 자가며. 먹여 주고 씻겨 주는 건 물론 화장실 갈 때도 붙어 있어야 했다. 남자 형제가 셋이나 있음에도 그들은 가끔 한 시간 남짓 병실에 머물다 떠났다.
할머니가 아니라 할아버지가 편찮으셨어도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엘레나와 리타를 보며, 할머니와 엄마와 이모를 보며 생각했다. 모녀에 대해. 모성애에 대해. 여성의 육체에 대해.

엘레나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 무엇을 알았는지 궁금하다면 소설을 직접 읽어보길 권한다. 개인적으로 서평을 읽는 것과 직접 읽는 것의 격차가 큰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읽고 나서 거대한 질문의 무게를 절감해 봤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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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나 바우쉬 - 끝나지 않을 몸짓 현대 예술의 거장
마리온 마이어 지음, 이준서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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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 시간에 피나 바우쉬를 배운 적 있다. 교수님께선 피나 바우쉬가 창안한 탄츠테아터의 무용적 발화에 관해 강의하셨다.
탄츠테아터의 무용에서는 각기 다른 개별적 존재들이 공존한다고 하셨다. 이것은 작품을 작가가 ‘만드는’ 것인 작가 중심주의와 대조된다.
또 탄츠테아터의 무용에는 철저하게 의미를 내려놓는 비언어적인 힘이 존재한다고 하셨다.
’비언어적인 힘‘이라는 게 당시에는 크게 와닿지 않았지만, 이번에 『피나 바우쉬-끝나지 않을 몸짓』이라는 책을 읽으며 비로소 체감할 수 있었다.

“나는 의도를 밝히는 것이 대해 경계할까 합니다. 그것은 분명 모든 작품에서 볼 수 있잖아요. 그걸 다시 알아차리게 만들려면 내가 시인이었어야 할걸요.” 그녀가 자신의 작업을 말로 옮기는 것을 얼마나 불편해했는지, (중략) 대담과 인터뷰에서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언젠가 그녀는 만약 모든 것을 말할 수 있었더라면 자신은 결코 안무를 할 필요가 없었을 거라고 밝힌 적이 있다. (50쪽)

“나는 말로는 할 수 없던 모든 감정을 춤으로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그토록 많은 다양한 분위기, 그토록 많은 음조와 색조. 그리고 풍성함을 유지하는 것, 그것을 제한하지 않는 것, 다양한 분위기를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들의, 우리들의 모든 감정은 아주 정확합니다.“ (58-59쪽)

피나 바우쉬의 발언들이 시사하는 바는 명확하다. 그래서일까. 이 책 역시 그의 안무에 대한 해설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무용수들이 어떤 동작을 취하는지, 어떻게 움직이는지, 무대 배경이 어떤지 등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거나 기술한다. 피나 바우쉬의 ‘무용적 발화’와 가치관을 존중하기 때문에 저자가 그렇게 한 거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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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제전>에서는 무대 바닥에 토탄土炭이 두텁게 뿌려져 있었다. 바우쉬는 분출하고 휩쓸어 가는 군무로 희생 이야기를 거칠고 무자비하고 난폭하고 그러면서도 극도로 감정적이고 에로틱하고 관능적으로 들려줬다. 붉은 옷으로 알아볼 수 있는 선택된 여성은 남성들과 여성들의 전선 사이에 들어간다. 그녀는 그들에게 극적으로 죽도록 뒤쫓긴다. 마지막에는 모든 무용수가 토탄과 땀으로 이루어진 층으로 짙게 물들어 있다. (88쪽)

두번째 사진이 <봄의 제전>의 한 장면이다. 나는 무용에 관해서는 문외한이다. 그래서 전문적인 시선으로 뜯어볼 순 없지만, 사진임에도 불구하고 무언의 힘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이게 바로 다양한 존재들의 공존에서 비롯되는 힘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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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담고 싶은 문장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이른바 예술은 오히려 작은 집에서 생겨나고, 그러면 큰 집이 그걸 사들이죠.” (173쪽)

결국 피나 바우쉬에게는 “사적인 것”을 구현하는 게 아니라, 누구나 알고 있고 그것에서 관객이 자신을 재발견하는 보편타당한 무언가를 개인적인 것에서 보여 주는 것이 관건이다. (249쪽)

“불현듯 춤을 통해 음악을 이해하게 되었고, 그 반대이기도 했습니다”라고 부르커르크는 설명했다. (272쪽)

피나 바우쉬는 언젠가 음악은 250번을 들어도 여전히 좋아야 한다고, “닭살이 돋는 느낌”이 들어야만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276쪽)

피나는 소진될 때까지 마음으로 보았노라고 했다. (282쪽)

춤이란 무엇인가? 가장 강력한 표현은 몸이에요. (중략) 작품 속의 인간 한 명 한 명이 나에게는 중요하답니다. 나는 각자에게 무엇인가를 발견해 주어야만 하지요. (308쪽)

내 작품들은 언제나 양쪽 다입니다. 명랑하고도 슬프죠. 작품은 대립적인 감정들을 먹고산답니다. (309쪽)

공감되는 문장도 있었고(특히 음악 관련 문장) 문장 자체로 너무 좋은 문장도 있었다. 피나 바우쉬의 예술관을 뚜렷이 알 수 있는 문장들이었다. 예술 하고 싶은 사람으로서 닮고 싶은 부분이 많은 사람이다. 나도 그처럼 활활 불태우다 소진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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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나 바우쉬는 그녀의 작품 속에서 계속 살아 있다. (301쪽)

본문의 마지막 문장이다. 부제인 ‘끝나지 않을 몸짓‘과 더없이 잘 어울리는 문장이다. 내 마음 한편에도 그의 정신이 오래도록 남아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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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나바우쉬 #무용 #안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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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6
문진영 지음 / 현대문학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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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도서 서포터즈(aka 서평단)에 당첨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래서 문자를 받았을 때 되게 기뻤다. 기쁘면서도 걱정됐다. 이왕 하는 거 잘 하고 싶은데. 온 마음을 다해 쓰고 싶은데. 그러려면 읽을 때 진심이어야 했다. 억지로 읽고 쓴 글은 티가 나기 마련이니까.
이유를 명징하게 말하진 못하지만, 아니 나조차도 알 수 없지만 나와 맞지 않는 글이 있다. 읽다가 자꾸 막히는 것이다. 그런 글들은 결국 읽기를 그만두곤 했다. 혹시 이 책도 그러면 어떡하나, 염려했다.
이런저런 걱정이 무색하게 『딩』은 앉은 자리에서 끝까지 읽었다. 완독하는 데 두 시간도 채 안 걸린 것 같다.
다행이었다. 마음으로 읽는 데 성공해서. 그리고 이 소설을 알게 되어서. 만약 서포터즈 활동을 하지 않았다면 이 소설을 읽지 못했을 수도 있으니까.

『딩』은 5부로 구성되어 있다. 부가 바뀔 때마다 인물의 시점도 바뀐다. 지원, 주미, 재인, 영식, 쑤언의 흐름으로. 이들에게는 사람을 잃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 사람은 가족이기도, 친구이기도, 연인이기도 하며 같이 일했던 동료이기도 하다. 모두 상처와 사연을 갖고 있다.
누군가는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나’ 말할지도 모른다. 맞는 말이다. 그리고 그 지점이 이 소설을 더욱 빛나게 한다.
소설을 죽 읽어나가면서 신기했던 건 허투루 등장하는 인물들이 없었다는 점이다. 주미의 시점에서 한 문장으로 스쳐 지나갔던 ‘외국인 노동자’가 쑤언의 동료라는 사실이 나중에 밝혀지는 식으로. 모종의 사건들로 인해 접점 없는 이들이 연결된다. 그 과정이 그다지 작위적이지 않다는 게, 모든 인물들을 무의미하지 않게 만든 게 좋았다. 그리고 이건 대단한 거다.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걸 써본 사람으로서 잘 아니까.
지원의 시점에서 엑스트라 정도로 느껴졌던 재인은 재인의 시점에서 주인공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주연이자 조연이자 엑스트라이다. 내 삶에서 나는 주연인 거고 타인의 삶에서 나는 조연이나 엑스트라인 것이다. 모든 것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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딩, 하고 발음해보면 어디선가 종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딩― 그 소리는 메아리처럼 여러 겹으로 계속 퍼져나간다. 산책을 하며 눈에 보이는 풍경마다 딩 났어, 하고 중얼거리다 보니 나는 이 소설이 딩에 대한 소설이지만 딩에 대해 말하는 소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상처를 말하는 소설도 아니고 상처를 낸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소설도 아니다. 그저 딩, 하고 가만히 말해보고 그 울림을 적어나가는 소설이다. 그러니 이 소설의 아름다움은 그 울림을 느낄 때 알 수 있지 않을까? (「발문」, 156-157p)

인물들을 떠올릴 땐 눈송이를 생각했다. 저마다의 결정으로 찬란한, 고유하고 고독한 각각의 눈송이들. 그러나 결국 그들은 지상에서 만나 서로 몸을 기댈 것이다. 이 소설을 쓰면서, 얼굴도 이름도 모르지만 나와 이어진 존재들을 마음으로 발견하면서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오늘 내가 분명히 건네받은 이 온기는, 누군가로부터 누군가를 통해 기어이 내게 도착한 것이라고.
그렇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한 채 서로가 서로를 조금씩 구원하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단번에 일어나는 구원은 신의 일이겠지만, 인간들은 서로를 시도 때도 없이, 볼품없이 구해줄 수 있다고 나는 믿고 있다. (「작가의 말」, 171p)

윤성희 작가님이 발문을 너무 잘 써 주셨다. 작가의 말 역시 너무너무 좋다. 이 글들을 읽으며 내 감상이 무용한 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만….
내게 『딩』은 그 속의 배경이 폭설 내리는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따뜻한 소설이다. 오늘 바깥의 날씨처럼. 그리고 나는 눈송이의 마음으로 살아가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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