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심도심과 기질변화

감각과 사고 기능으로 이루어진 일반인의 지각은 비록 
동물에 비해서는월등하지만, 성현과 달리 소당연과 
소이연의 이치를 인식해서 깨달을 수없다고 보는 이이는 
처음부터 이황과 지각론적 관점이 달랐다. 

이러한 차이는 결국 성혼과의 논변을 통해 "기가 발하고 
리가 타는 한 가지 방식만이 있다"는 주기론적 지각 이론으로 귀착되었던 것이다. ‘기발이승‘이라는 하나의 방식으로만 지각이 성립된다는 주장은, 외부 사물에 대한 감각 경험으로부터 독립된 어떠한 내적 발동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함축한다.

이이는 이에 대해 "생각건대 퇴계는 안에서 나온 것을 
도심으로 여기고 밖에서 느낀 것을 인심으로 여긴 것이요, 
나는 인심도심이 모두 안에서 나온 것이지만 움직임은 
모두 밖에서 느낀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한다. 이황 또한 사단도심을 포함한 모든 지각작용에는 내적 원리의 발동 이전에 기에 근거한 외감이 필수적으로 
전제됨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각 내용을 살펴보면, 
사단도심 같은 도덕적 감정은 외감과는 별도로 내적 도덕이성이 발현한 것이라고 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사단도심이 칠정인심과 달리 당위로서 자각된다는 점에 있었다. 이이는 바로 이 점을 
부정한다. 즉, 마음의 지각 작용은 외물의 감응에 말미암되 지각하는 까닭이 개입한다는 형식만을 말할 수 있을 뿐, 
사단과 칠정, 인심과 도심의 내용적 차이는 지각상에서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선과 악을 나누는 
기준은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 있다고 그는 말한다.

가만히 퇴계의 뜻을 상세히 살펴보니, 사단을 내부에 
말미암아 발현한 것으로 여기고 칠정은 외부를 감응하여 
발현하는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중락…) 
비록 성인의 마음이라도 감응 없이 스스로 움직이는 것은 
없으니, 반드시 감응하여 움직이도 감응한 것은 모두 
외물입니다. 무엇을 근거로 말하냐하면, 부모를 느껴서 
효성이 움직이고, 임금을 감응하여 충성이 발동하며, 형을 
느껴서 공경이 움직이니, 부모 · 임금 . 형이 어찌 안에 있는 이치이겠습니까?

천하에 어찌 감응 없이 안에서 말미암아 스스로 발현하는 
정이 있겠습니까? 다만 감응한 것에 바르고 삿됨이 있으며 움직임에 지나치고 모자람이 있어서, 이에 선악의 구분이 
생길 뿐입니다. 

이황의 주장처럼 사단과 칠정, 인심과 도심은 도 내부의 
지각내용에 의해 선험적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지각은 경험적이므로, 성인이라 하더라도 외물의 
감응 없이 감정이 발동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부모를 
감지하고 느껴야 효도의 마음이 발동하게 되는데, 이때 
효도의 원리는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임금에 대한충, 형에 대한 공경의 
원리는 모두 내부에 있지 않고 외부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바르고 삿된 것을 가르는 기준으로서의 규범적 
예이다. 부모에게는 효도해야 하고, 임금에게는 충성해야 
하며, 형에게는 공경해야한다는 예의 절목이 곧 바르고 
삿됨, 선과 악을 나누는 기준이 된다. 위에서 외물에 
반응하여 움직인 결과가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있다는 것은곧 예의 절목에 맞지 않는다는 뜻이다. 부모에 대한 효도와 임금에 대한충성, 형에 대한 공경은 이미 외부에 규정되어 
있는 예의 절목을 따르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이이는 다음처럼 말한다. "그렇다면 천지는 
성인의 준칙이며, 성인은 보통사람의 준칙입니다. 
그 이른바 수양의 기술이란 성인이 이미 완성한 법도를 
따르는 것에 불과합니다. " 성인의 만든 법도 즉 예의
절목에 맞는 경우는 선이 되고 그렇지 않고 지나치거나 모자라는 경우는 악이 된다는 것이다.

만약 선악을 구분하는 기준이 마음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감정과 행동의 결과가 외적 규범에 
부합하는가에 놓여 있다면, 마음에내재해 있다고 말해지는 인ㆍ의 · 예지의 원리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이이의 어록에는 제자 한 명이 "마음의 지각이 기인지 
리인지"에 대해 묻자 "능히 지각할 수 있는 것은 기요 
지각하는 까닭은 리이다"라고 대답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런데 이어서 제자가 지각은지의 틀에 속하는지를 묻자 
이이는 다음처럼 대답했다. "지각은 마음이니 인 의 · 예·지의 성을 싣고 있다. 그러므로 사단의 정은 머물러 있는 곳에 
따라 발현하니, 이것이 마음의 지각이다. 만약 지각을 
지의 틀에 배속시킬 뿐이라면, 인의는 작용할 곳이 없게 된다. 

말하자면, 이이는 인·의·예·지가마음에 있긴 하되, 그것은 
사단의 지각 내용적 근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지각 
작용이 일어날 수 있는 까닭이나 형식적 원리라고 본 것이다.

마음은 이러한 지각의 원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마음이 
머물러 있는 상황에 따라 발현하되 외적 예의 절목에 
부합하면 사단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칠정이 된다는 것이다. 선악을 판별하는 기준은 내적 원리에 있지 않고 외부의 
규범에 맞는지 여부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마음의 감정이 예의 절목에 부합하는지 중절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계산하고 비교하며 헤아리는 
의의 작용에 달려 있다. 즉, 정에 의의 작용이 부가될 때 
비로소 심이라고 칭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인심과 도심은 정과 의를 겸하여 말한 것이지, 정만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다. 칠정은 감정 일반으로서 정이 되고 
그 가운데 절도에 맞는 것을 사단이라 칭할 뿐인데, 
감정의 결과에 대해 의가 공적 규범인 도의를 위하면
도심이 되고 개인적인 형기만을 위하면 인심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심과 도심은 지각 내에서 선험적으로 
대립하는 것으로서 자각되는 것이아니라, 감정이 일어난 
후 헤아려서 의도하고 목적하는 것에 따라 두 가지중 어느 
하나로 결정되는 것이다. "인심과 도심은 어떤 것은 형기를 위하고 어떤 것은 도의를 위하는데, 그 근원은 비록 하나이지만 그 유출된 것이 이미 갈라진 것이니, 진실로 양변으로 
분리하여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양변으로 분리하여 설명한다는 것은 인심과 도심이 지각 내에서대립적으로 자각된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선한 것과 악한 것으로서 결과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이다. 

다만, 처음에 인심이었다가 노력 여하에 따라 도심이 
될 수도 있으며, 반대로 도심이었다가 다시 인심으로 
전락할 수도 있게 된다. 이것이 인심과 도심은 서로 처음과 끝이 될 수 있다"는 설이다.

이이는 비록 만년에 《인심도심도설》에서 인심을  인욕과 다르게 보되 도심과의 대립성을 인정하고 도심의 
주재와 인심의 청명을 강조하는 정론을 확립하게 되지만, 
전체적으로 종시설과 만년설 모두 도심과 인심을 지각된 
내용에 따라 성명과 형기, ‘리발‘과 ‘기발‘로 구분할 수 있다는 주희와 이황의 입장과는 다른 것이다. 선악은 마음의 지각 차원에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 규범에 부합 여부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정자는 ‘선과 악이 본성 가운데 두 사물로 상대하여 있다가 각자 나오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대체로 선과 
악은 분명히 두 가지이지만, 오히려 상대하여 각자 나오는 
이치란 없습니다. (중략) 리의 본연이란 것은 진실로 
순선하지만, 기를 타고발용할 때 선악이 이에 나뉩니다. 
다만 기를 타고발용할 때 선한 것이 있고 악한 것이 있음을 
보되 리의 본연을 알지 못한다면, 이는 대본을 인식하지 
못한 것입니다. 단지 리의 본연만을 보되 기를 타고발용한 
것이 혹 흘러서 악이 됨을 알지 못한다면, 적을 자식으로 
여기는것입니다. 이 때문에 성인은 이를 근심하여 정이 
곧바로 성명의 본연을 이루는 것으로써 도심이라 지목한 
것이니, 사람들로 하여금 존양하여 그것을 확충하도록 한 
것입니다. 정이 형기에 엄폐되어 곧바로 성명의 본연을 
이룰 수 없는 것을 인심이라 지목한 것이니, 사람들로 
하여금 그 지나치고 미치지 못함을 살펴서 절도 있게 
통제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것을 절도 있게 통제한다는 
것은 도심이 행하는 것입니다. 대체로 인간의 형제와 모양은 천성입니다. 인심 또한 어찌 선하지 않겠습니까? 
그 지나침이 있거나 미치지 못함이 생기는 것으로 말미암아 악으로 흐를 뿐입니다.

이이는 리의 본연이 순하다고 함으로써 표면상 맹자의 
성선설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리의 본연은 
선악을 떠난 가치적인 중립적 상태라고 봐야 한다. 
만약 리가 순선하다면, 그것에 의해 선한 도심과 그렇지
않은 인심이 지각 상에서 구분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이에 있어 그것은 부정되기 때문에, 선악의 
기원은 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리의 본연이 기를 타고
발용하여 현상화될 때 그 상태가 선한지 악한지, 
인심인지 도심인지는 지각 차원에서 구별될 수 없는 것이다. 기가 유행할 때 선악을 결정하는 기준은 감정이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함 없이 절도에 맞는가에 놓여 있다. 

그러나 일반인은 지각 상에서 그것을 인지할 수 없기 때문에, 성인은 사람들이 선과 악, 인심과 도심을 분별하고 수양의 실천을 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인심과 도심을 규정하고 
그것을 구분하는 객관적 기준으로서의 예를 제정했던 것이다. 리의 본연을 그대로 발현시킨 마음은 감정이 절도에 
맞는 상태로서 도심이라고 명명하되, 육체적 형기에 가려진 마음은 감정이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여 절도에 맞지 
않으므로 인심이라고 칭한것이다. 일반인은 자신의 감정 
상태를 객관 규범에 비추어 헤아려서 그것이 도심이면 
존양하고 확충하며, 그것이 인심이면 그 과불급을 절도에 
맞도록 통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도심이 인심을 통제한다는 것은 둘의 병존과 
갈등상태를 말한 것이 아니라, 어떤 하나의 심적 상태를 
살펴서 성인이 만든 규범으로서의 예의 절목에 맞도록 
제재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음의 발동이 객관적 예의 절목에 맞도록 
주재하기 위해서는어떤 수양법이 필요한가? 
기가 유행하여 감정이 발동할 때 절도에 맞도록하는 것은 
의가 살피는 것에 달려 있으므로, 의를 성실하게 하는 
성의공부가 자기수양에 있어 가장 우선적인 것이 된다. 

그런데 의의 작용이란 마음의 기에 의존해 있으며, 
심리적인 기는 몸의 전체적인 ‘형체와 모양‘을 결정하는 
심리 -육체적 기질에 속한 것이므로, 기질을 변화시키는 
공부가 가장 근본적인 것이 된다. 기질 변화가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이유는, 인심과 도심을 구현하는 데 
있어 리와 기의 본연과 유행의 상태가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이는 다음처럼 말한다.

도심은 성명에 근원하였으나 발하는 것은 기이니, 이것을 
리발이라고 하는것은 불가합니다. 인심과 도심이 모두 
기발이나 기가 본연의 리에 순한것이있으면 기 또한 본연의 기이므로 리가 본연의 기를 타서 도심이 되는 것이며,
기가 본연의 리에서 변한 것이 있으면 또한 본연의 기도 
변하므로 리 역시 변한 바의 기를 타서 인심이 되어 
지나치기도 하고 미치지 못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이는 도심이 성립되려면 본연의 기와 본연의 리가 결합해야만 하며, 반면 인심은 본연의 리에서 변한 특수한 
이치와 본연의 기에서 변화게 된 특정한 상태의 기가 결합하여 성립된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리에본연지성에 해당하는 본연의 리와 기질지성에 해당하는 분수의 리가있는 것처럼, 기에도 본연의 기와 특수한 상태로 변질된 기질의 기가 
있다는 것이다. 본연의 리와 본연의 기가 결합하여 성립된 
도심은 본연의 순수한리(성)를 보전하고 있는 것이지만, 
발동하는 주체는 여전히 심리적 기일 수밖에 없다. 

일반인의 심리적 기는 항상 유동적으로 변화하여 불안정한 것이고, 더구나 "기가 리에게서 명령을 듣고 안 듣고는 
모두 기가 하는것이요 리는 작용함이 없기 103 때문에, 
일반인의 경우에는 늘 인심의 불안정하고 편향적인 심적 
상태에 머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반면, "성인은 형기가 리에게 명령을 듣지 않음이 없어서 
인심 또한 도심이니, 이것은 마땅히 따로 의논해야 할 것이요 똑같이 한 가지 말로 뒤섞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성인의 기질은 순수하고 뛰어나서 심리-육체적인 
기질이 본연의 기의 상태에 가깝기 때문에 항상 본연의 
리를 곧바로 이루지만, 일반인의 기질은 성인과 달라서 
항상 불안정하고 편향되어 있기 때문에 본연의 기의 
상태를 회복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반인은 
도심을 이루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텅 비고 밝은지각 능력을 가지므로 
기질을 변화시킬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즉, 일반인의 지각은 성인처럼 이치를 인식하고 실천할 
수는 없지만, 동물과 달리 심리-육체적 기질을 성인과 
같아지도록 노력할 줄 아는 인지 능력은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로지 인간만이 성인이 되고자 하는
수양 공부가 가능하다.

이이에 있어 기질의 변화란 이렇듯 일종의 심리학적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기질 변화에 
있어 그 기준과 목표로서 성인의기질은 어떤 것이고 
무엇에 근거해서 변화시켜야 할 것인지가 문제가 된다. 

이이에 의하면, 일반인은 심리적 기질의 가변성과 
편향성으로 인해 리와 기의 본연 상태를 대부분 상실한 
상태이고, 이황이 말한 리발과 같은내적인 도덕성의 
발동도 부정하기 때문에, 결국 기질을 변화시키기 위한
기준이나 모범은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서 찾아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모범이 되는 성인의 기질은 구체적으로 설명될 수 
없으며, 단지일반론의 차원에서 본연의 기를 온전히 
보전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다만, 성인은 
책을 써서 중요한 가르침을 밝혀놓았으며, 여러가지 
예법들을 제정해서 사회질서를 유지하도록 했던 것이다. 

따라서 일반인은 독서를 통해 예법을 궁리하는 지적 
공부가 필요하며, 또한 극기복례와 같이 예가 아니면 
보거나 말하지도 행하지도 않는 실천적 공부도 필요하다. 

실천적 공부는 특정한 상황에서 자신의 심리적 기질이 
내보이는 특정한 반응양태나 경향성을 살펴서 그 치우치고 편벽된 것을 예법에 비추어 교정하는 교기질과 바람직한 
기를 보양하는 양기공부로 구분할 수 있다. 예법에 대한 
지적인 공부와 실천적 공부 가운데어느 것에 더 중점을 두고 행할지는 자신의 타고난 기질에 따라 결정해야한다.

기가 맑고 질이 순수한 사람은 지혜와 행을 힘쓰지 않고도 
능하게 되어 더할 것이 없습니다. 기는 맑으나 질이
 순수하지 못한 사람은 알 수는 있어도 행할 수는 없는데 
만일 궁행에 힘써서 반드시 성실해지고 독실해지면,
행실이 바로 서서 유약한 사람도 강해질 수 있습니다. 
질은 순수하기가 탁한 사람은 행동할 수는 있으나 잘 알 
수는 없는데, 만일 묻고 배우는 데 힘써서 반드시 성실하고 정밀하게 하면 지식에도 통하여 우매한 자라도 명석해질 
수 있습니다. 

기가 맑은 사람은 지각 능력이 뛰어나고, 질이 순수한 사람은 행동이 올바르니, 기질이 맑고 순수하면 궁리의 지적 공부나 거경 · 여행의 실천 공부에 힘쓰지 않아도 자연히 수양의 
효과가 잘 나타나게 된다. 

그런데 기는 맑지만 질이 순수하지 못한 사람은 알 수는 
있지만 행할 수는 없으니, 궁행에 힘쓰면 기질을 변화시킬 수 있다. 

반대로 질은 순수하지만 기가 탁한사람은 행동은 잘 할 수 
있지만 지각 능력은 떨어지니, 궁리에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사람은 자기 기질의 단점이 되는 것을 예를 기준삼아궁리와 여행 공부를 지속적으로 해나가면 기질을 점차 
변화시켜서 성인과 같은 상태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 좀 더 중요한 것은 역시 교기질의 실천적 
궁행이다.

아, 그런데 절묘한 세상에 기예를 가진 백공은 있으나 
학문을 하는 사람 중에 그 기질을 변화시킨 자를 보지는 
못하였으니, 이는 다만 그 지식을 넓히고 언론에만 힘을 
쏟는 데서 온 결과입니다. 

그리하여 너무 굳센 자는 끝내 부드러운 선을 갖지 못하고 
부드러운 자는 끝내 강한 선을 갖지 못하여, 탐욕한 자가 
청렴해지고 참는 자가 자애로워지고 경박한 자가 신중해지는 것을 아직 볼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실제 노력하는 일이 백공의 기예에만 
있을 뿐이오, 학문에는 없다는 것이 되니, 
얼마나 탄식할 노릇입니까.

세상에 기예를 고도로 발전시킨 사람들은 흔히 있지만, 지금 학문하는자들 중에서는 실질적으로 기질을 변화시켜서 성인의 수준에 이른 자는없다는 것이 이이의 한탄이다. 학자들은 단지 지식을 넓히고 언론에만 힘을 쏟을 뿐, 자기의 기질적 단점과 편향된 부분들을 교정하고 바로 잡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교기질의 궁행 공부가 좀 더중요하다는 것이다. 
교기질 공부를 지속적으로 실천해서 조금씩 치우친
기질을 고쳐나가는 노력이 축적될 때, 비로소 기질은 
중용의 덕을 습득하게 되어 원만해질 수 있다. 

이와 같이 이이는 심리-육체적 기질 개념에서 출발해서 
도덕 심리학적인 맥락에서 자신의 독특한 수양론을 
구축하였으니, 그것은 곧 지적이고 실천적인 기질 변화의 
공부로 귀착되는 것이다.

특히, 율곡은 외적인 예법이나 규범을 기준으로 자신의 
편향된 기질을 교정하는 교기질과 양기의 실천공부가 
학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요청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제 율곡철학에 있어 지각론과 인심도심론과는 다른 맥락에 있다고 여겨지는 본체론적 현상학에 대해 살펴보자.

리통기국과 리기지묘

이이의 "리는 통하지만 기는 국한된다"는 명제는 
일반적으로 성리학의 형이상학적 전제 가운데 하나인
 "리는 하나이지만 나뉜 것은 다르다는 것의 율곡철학적 
버전으로 간주되어 왔다. 

예를 들어, 배종호는 다음처럼 리통기국을 설명한다 
"생각건대 이일분수설은 리를 중심으로 리일과 리분수를 
체용일체, 따라서 현상본체의 입장에서 설파한 것이요, 
리통기국설은 리일과 기분수를 종합적으로 본 것이다."

여기서 ‘현상즉본체 본체즉현상‘이라는말은 ‘이일분수‘
보다는 오히려 ‘리통기국‘에 더 적절한 것처럼 보이는데,
‘리통기국‘이 본체로서의 ‘일‘과 현상으로서의 ‘기분수‘를 
종합하고 있다는 점은 잘 말해주고 있다. 다만, ‘리통기국‘은 리의 보편성보다는 기의 특수성에 더 많은 강조점이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리와 기의 존재론적 특성에 관한 
이이의 다음 언급을 살펴보자.

리와 기는 원래 서로 떨어지지 않아 한 물건인 것 같으나 
다르다고 하는 까닭은, 리는 무형이고 기는 유형이며, 
리는 무위이고 기는 유위이기 때문입니다. 

무형과 무위이면서 유형과 유위의 주재가 되는 것은 
리이고, 유형과 유위이면서 무형과 무위의 그릇이 되는 
것은 기입니다. 리는 무형이고 기는 유형이므로 리는 
통하고 기는 국한되는 것이며, 리는 무위이고 기는 
유위이므로 기가 발하여 리가 타는 것입니다.

이이에 의하면, 존재론적 관점에서 볼 때 천지만물은 리와 
기의 두 측면으로 구분할 수 있다. 리는 형이상의 본체적 
측면을 나타낸다면, 기는 형이하의 현상적 측면을 가리킨다. 

천지만물은 실제로는 리와 기로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합쳐져 일체로서 존재하는 것이지만, 인간은 천지만물을
설명하기 위해서 리와 기로 구분한다는 것이다. 

기는 물질-에너지로서유형의 운동성이 있는 물리적인 
실체인 반면, 리는 작용성이 없고 무형인것으로서 물리적 
실체를 주재하는 원리나 이유에 해당된다. 리는 무형과 
무위라는 속성에 의해 만물에 관통하는 초시공적 보편성을 지니는 반면, 기는 유형과 유위의 속성에 의해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국한되는 특수성과 개별성을 띤다. 
이 점에서 "리는 통하고 기는 국한된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리와 기의 이와 같은 존재론적 속성에 의해 천지만물은 
예외 없이 "기가 변화하고 리가 그것에 타는"방식으로 
작용하고 현상화한다. 인간도 예외가 아니어서, 마음과 
지각은 "기가 발하고 리가 올라타는 하나의 방식과 
경로로만 작동한다. 

이 점에서 ‘리통기국‘은 ‘기발이승일도설‘이라는 주기론적 
지각론의 존재론적 근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리통기국‘은 표면적으로는 리의 보편성을 말함으로써 우주론적 
원리나 물리법칙 같은것을 강조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
상 그것이 지시하는 바는 만물이 공통적으로 지니는 ‘소이연‘ 즉 현상적 그러함의 근본적인 까닭이나 존재의 이유에 
가까운 것이다. 그것은 현상들 속에서 발견되어야 할 
이념으로서 본체를 가리키는 것이다. 더구나 리의 본체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유형 유위한 기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다. 다음의 인용문은 이 점을 잘 말해주고 있다.

‘리의 통합‘은 무엇을 말하는가? 리란 것은 근본과 말단이 
없고 앞과 뒤도 없습니다. (중략) 그러므로 기를 타고 
유행하여 천태만상으로 고르지 아니하나 그 본연의 
신묘함은 없는 데가 없습니다. 기가 치우치면 리도 역시 
치우치나, 그 치우친 것은 리가 아니라 기입니다. 
기가 온전하면 리 또한 온전하나, 온전한 것은 리가 
아니라 기입니다. 

맑고 탁한 것ㆍ순수하고 잡박한 것ㆍ찌꺼기 · 재 · 거름 • 
오물 가운데도 리가 있지 않은 곳이 없어 각각 그 본성이
되지만, 그 본연의 신묘함은 손상되지 않고 그대로임을 
‘리의 통합‘이라 합니다. 

‘기의 국한됨‘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기는 이미 형제와 
흔적에 관련되므로 근본과 말단, 앞과 뒤가 있습니다. 
기의 근본은 담일청허할 뿐이니,
어찌 일찍이 찌꺼기 · 재 · 거름 • 오물 등의 기가 있겠습니까.

오직 그것이 오르내리고 날아올라 조금도 쉬지 않으므로, 
천태만상으로 고르지 않아 수만가지 변화가 생깁니다. 
여기서 기가 유행함에 그 본연을 잃지 않는 것도 있고
그 본연을 잃는 것도 있으니, 이미 그 본연을 잃으면 기의 
본연은 이미 존재하지 않습니다. 치우친 것은 치우친 기요 
온전한 기가 아니며, 맑은 것은 맑은기요 탁한 기가 아니며, 찌꺼기 · 재 · 거름 • 오물은 찌꺼기 · 재 · 거름 • 오물의 기요 담일청허한 기가 아니니, 이것은 리가 만물 가운데서 그 
본연의 신묘함이 어디서나 그대로 존재하지 않음이 없는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 이를 일러 기의 국한됨이라 합니다.

위의 설명에서 눈에 띄는 점은 주도권이 리에 있지 않고 
기에 있다는 것이다. 이이에 의하면, 리는 항상 기에 의
존하므로 "기가 치우치면 리도 역시 치우치며 기가 
온전하면 리 또한 온전"하여 기에 따라 수많은 현상적 사물들의 본성으로 변형되는 것이다.

원론적으로, 사물을 격물궁리한다면, 그 본성적 원리나 
법칙 따위를 지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리의 통합‘
즉 리의 ‘본연의 신묘함‘은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리가 기에 의존한다면 항상 기의 유행에 따라 변형된 
상태로 정해져서 존재해야 할 것인데, 리의 ‘본연의 신묘함‘은 기의 유행에 관계없이 어느 사물이든 그 안에 내재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물의 본성이나 특수한 원리와는 
다른 것으로서 만물에 대해 보편적이고 무차별적인 것이다. 기의 근본인 ‘담일하고 맑고 텅 빈‘것은 변형된 기에 전혀 
남아있지 않는 것과 달리, 리의 본연은 잡다한 어떤 기에도 존재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가능한 하나의 해석은, 리의 ‘본연의 신묘함‘이란 곧 기의 유행과 변형 상태에 제한을 받지 않는 것으로서, 
기의 본래적 상태에 대해 일깨워주는 존재의 이유나 의미 
같은 것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리의 본체는 
잡다한 수많은 현상들 안에서 그 현상들의 본연 상태는
어떤 것이라고 인간에게 말해주는 나침반이나 이정표의 
역할을 한다는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기의 본연 상태란 
실재하는 것은 아니며, 과거에 실제했었는지도 매우 
불분명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어찌되었든 리의 본연은 특정한 현상들의 이상적인 
모델이나 이상향을 의미하는 것이다. 만약 본체가 없다면 
현상계의 잡다하고 변화무쌍함 속에서 인간은 나아갈 
방향을 잃게 될 것이다. 다만 사물들은 이러한 이념적 
본체를 자각할수 없으며, 오로지 인간만이 그와 같은 
본체가 있음을 확신하고 자신의 기질을 본래 상태로 
만들려는 변화기질의 수양공부를 할 수 있다. 

다음의 인용문은 본체 속에 현상이 있고 현상 속에 본체가 
있다는 ‘현상즉본체,본체즉현상‘의 사상을 말해준다.

‘리는 통하고 기는 국한된다‘는 것은 본체 상에서 말해야 할 것이요 또한본체를 떠나서 따로 유행을 구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성이 사물의 성이 아니니, 이것은 기의 국한된 것이요, 사람의 리가 곧 물의 리이니 이것은 리의 통한 것입니다. 
모나고 둥근 그릇은 같지 않으나 그릇 속의 물은 한가지요. 크고작은 병은 같지 않으나 병 속의 공기는 한가지입니다. 
기의 근본이 하나인 것은 리가 통하기 때문이요 리가 만 
가지로 나누어진 것은 기가 국한되기 때문입니다.
본체 가운데 유행이 갖추어 있고 유행 가운데 본체가 
존재하니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리는 통하고 기는 국한된다‘는 설이 과연 한쪽으로 떨어졌습니까?

위의 인용문을 보면, 이이가 ‘리통기국설‘을 본체의 차원에서 거론한 것이며 현상적 사물들의 이치에 대한 인식은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사물들의 본성은 기의 유행과 국한성에 따른 결과로서 
인간의 본성과는 다르다. 그러나 사물들의 리의 본연은 
본성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인간과 동일한데, 이것은 리의 
본체의 관통성과 보편성 때문이다. 

예를 들어, 둥근 그릇과 네모난 그릇은 다르지만 그 안에 
담긴 물은같으며, 큰 병과 작은 병은 다르지만 그 안의 공
기는 동일하다. 여기서 그릇과 병의 다름은 기가 국한된 
것으로 인한 결과요 그 안의 물과 공기의 동일함은 리의 본체가 관통해 있음을 비유한 것이다.

‘리통기국설‘은 본체에 기의 유행현상의 가능성이 함축되어 있고, 유행현상에는 본체가 내재한다는 것을 함축한다는 것이다. ‘동기‘의 이러한 함의가 가능하기위해서는 인간의 의식현상이 특히 강조될 필요가 있다. 

리와 기는 실제로는 존재의 차원에서는 일체로서 하나이기 때문이다. 본체 가운데 유행이갖추어 있고, 반대로 유행 
가운데 본체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인간의 
현상적 의식 속에 기의 본연에 대해 상기시켜 주는 어떤 
것이단지 이념적으로 존재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본체와 현상을 강조한다는점에서 이이의 존재론적 논의들은, 정이나 주희가 비판했던 노불의 본체론적 존재론과 유사한 성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이는 인간의 지각과 
의식현상을 중시하기 때문에, 노블의 본체론과 차별화시켜서 ‘본체론적 현상학benti phenomenology‘ 이라고 칭할 수 있다고 본다. 

‘리기지묘‘도 이러한 본체 현상학의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리와 기의 신묘함(결합)은 알기도 어렵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무릇 리의근원은 하나일 뿐이요, 기의 근원도 
하나일 뿐입니다. 기가 유행하여 고르지못하면, 리 역시 
유행하여 고르지 못하니 기는 리를 떠날 수 없고 리도 
기를 떠날 수 없습니다. 이와 같다면 리기는 하나이니, 
어디에서 다름이 있음을 보겠습니까? 
이른바 ‘리는 리이고 기는 기이다‘라는 말은 어디에서 
그 ‘리는 리이고 기는 기이다‘라는 것을 볼 수 있겠습니까? 

위의 인용문은 리와 기가 존재론적으로 일체이고 
하나임을 말해준다.즉, 리의 근원도 하나이고 기의 근원도 
하나인데, 우주에는 두 개의 근원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리와 기는 일체이고, 기의 유행에 따라 리역시 
유행하여 수많은 원리와 본성들로 지각될 뿐이다. 
결국 "리는 스스로 리이고 기는 스스로 기이다"라는 말은
단지 이론상에서만 가능할 뿐, 실제 세계에서는 성립되지 
않는다. 실재하는 세계는 리와 기가 일체화된본체와 그 
유행현상만이 존재할 뿐이다. 

다만, 앞서 말했듯이 의식 현상 속에는 기의 본연 상태를 
일깨워주는 표지처럼 리의 본연이 존재하므로, 인간은 
현상적 마음속에서 그와 같은 리의 본연을 인식할 수 
있도록 자신의 기질을 변화시켜 나가야 한다. 

의식 현상 속에서 본체를 인식해야 한다는이이의 현상학적 견해는 노불의 본체론을 지각론과 결합시킨 독특한 사유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본체 현상학적 특성은 율곡철학 속에서 주기론적 지각론이나 인심도심론에 비해 그 비중이 
크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각론과는 
다른 사유의 결을 지닌 것으로서 율곡철학의 독창적 
일면을 이루는 요소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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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성 이론

정신적인 속성과 물질적인 속성, 마음과 몸이 근본적으로 
동일한 속성이라고 말할 수 없는가?

바로 이것이 1950년대 호주의 철학자인 플레이스(Ullin Thomas Place)와 스마트(J. J. C. Smart)가 발전시킨 
동일성 이론이다. 정신적인 속성과 물질적인 속성은 
동일하다. 정신적인 속성에 대한 표현들은 마음 내적인 
경과도 어떤 행동 성향도아닌, 뇌의 한 속성을 말해 준다. 
이와 함께, 정신적인 것에 대한 표현이 물질적인 것에 대한 
표현으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요구는 폐기된다. 그러면 
정신적인 속성들이 어떻게 두뇌의 속성들과 동일한 것이
가능할수 있는가?

프레게(1848-1925)의 생각이 여기서 도움을 줄 수 있다. 

"새벽별은 새벽별이다"와 "새벽별은 저녁별이다"라는 
두 개의 진술을 생각해 보자.

첫 번째는 a=a라는 형식의 문장이다. 이는 동어 반복(tautology)이고, 아무런 새로운 앎도 주지 않는다. 

반대로, 두 번째 문장은 a=b라는 형식이다 이런 문장은 
새로운 지식을 제시해 줄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새벽별이 
저녁별이라는 것을 몰랐다면, 두 번째 진술에 따라 새로운 
지식을 얻는다. 두 표현 즉 ‘새벽별‘과 ‘저녁별‘은 동일한 
대상, 금성(venus)을가리킨다. 지칭 대상은 같지만, 
표현은 다르다. 새벽별은 아침에 뜨는 가장 밝은 별이며, 
저녁별은 저녁에 뜨는 가장 밝은 벌이다.

하나의 대상을 다양한 표현으로 지칭할 수 있다. 이처럼 
우리는 동일한 두뇌 상태에 대해서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두뇌 상태에 대해서 "지금 해가 빛나고 
있다고 철수는 생각한다"라는 문장으로도, "철수의 두뇌의 특정 부위가 지금 이러저러하게 활성화되고 있다"라는 
문장으로도 지칭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떠한 두뇌의 상태가 어떠한 정신적 상태와 
같은가? 철학은 이 물음에 답하지 못한다. 이는 뇌 과학
(신경 과학)이 맡아야 할 과제이다. 뇌 과학은 어떤 종류의 정신적 상태가 어떤 종류의 두뇌 상태와일치하는지 연구하고 규정해야 한다.

그러나 동일성 이론은 수긍되기 어렵고, 경험적으로도 
반박된다. 많은 사람들에게서 특정한 정신적 상태가 
상이한 신경적 상태들과 일치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게다가 같은 사람일지라도 일생 동안 정신적 상태와 두뇌 
상태들의 일치가 변화될 수 있다. 또한 뇌손상을 입은 경우,
손상된 두뇌 부위가 맡았던 역할을 다른 부위가 떠맡을 수 
있다는 것도 입증되었다.

기능주의

정신은 육체의 ‘기능‘으로 환원된다.
퍼트넘(Hilary Putnam)과 포더(Jerry Fodor)는 
기능주의이론을 발전시켰다. 기능주의의 핵심은, 
정신적인 것은 다양한 방식으로 육체적(기능)으로 
실현될 수 있다는 ‘정신적인 것의 복수 실현 가능성‘이다. 
기능주의는 정신적 상태를 기능적 상태로 규정한다.
이 기능을통해서 정신의 상태를 식별한다.

정신의 기능적 상태는 인과적 역할을 한다. 정신 상태의 
기능은 우선 입력(Input)에 의한 정신 상태를 일으킴을 
통해, 두 번째로 정신 상태를 통한 출력(Output)을 
일으킴을 통해, 세 번째로는 다른 정신적 상태들에 대한 
인과적 관계들을 통해 규정된다.

예를 들자면, 통증은 무엇인가? 통증은 신체의 손상을 
통해 야기되고, 통증은 비명과 신음 그리고 손상된 부위로 
주의력을 돌리게 만든다.

이것이 통증을 느낄 수 있는 존재에게서 통증이 떠맡게 
되는 기능 혹은인과적 역할이다. 어떤 존재가 이런 인과적 
역할이 관찰 되는 상태에 있다면, 그는 통증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동일성 이론이 정신 현상을 두뇌 현상으로 바꾼 
반면, 기능주의는 정신 현상을 육체적 기능으로 치환한다.

반론 1

두뇌 과정에 비해서 우리는 우리의 정신적 상태에 대해서는상대적으로 정확하게 안다. 정신적 상태들은 두뇌 활동이 
갖지 않는 속성을 가지므로, 그 둘은 동일하지 않다.

대답

이는 동일성 이론을 오해하고 있다. 동일성 이론에 따르면,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에 대한 표현이 동일하다는 것이아니라, 그 둘이 같은 대상을 지시한다는 것이다.

반론2

생각과 감정은 주관적이고, 특정한 방식으로 느껴진다. 
해변에서의 휴가에 대한 생각 혹은 화상을 입었을 때의 
통증은 특정한 느낌과 연결된다. 반면 그에 해당되는 두뇌 
상태에 대해서는 느낄 수가 없다.

대답

생각과 감정 역시 언어적인 표현으로서 느껴지지가 않는다.
느낄 수 있는 것은 어떤 상태이며, 이 상태는 곧 두뇌의 상태이다.

반론 3

기능주의는 다음과 같은 문제에 직면한다. 빨간색을 보면 
초록색으로, 초록색을 보면 빨간색으로 느끼는 색맹인 
사람이있 다. 이 사람은 신호등이 초록색이면 운전을 
계속하거나, 초록색 토마토는 장바구니에 담지 않는 등 
정상적인 사람들처럼 초록색 대상에 대해똑같은 반응을 
보여 준다.

빨간색 물체나 초록색 물체를 볼 때, 그의 정신적 상태의 
기능적 반응은 다른 사람들과 동일하다. 그러나 이 사람이 
동일한 색채 감각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없다. 우리가 
초록색을 지각할 때, 이 사람은 빨간색을지각하기 때문이다. 기능주의는 이 차이를 실명할 수 없다.

대답

만일 그가 다른 것을 느낀다면, 그의 상태가 정말로 같은 
기능을 할 수 있는지가 분명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가정한다고 해도, 그가 다른 색채 감각을 
가진다는 것을 남이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확인할 수 
없다. 확인할 수 없는 것에 근거한 이 반론은 내용 없이 
형이상학적 테세에 근거하는 것이다.

반론 4

남이 어떤 것을 느낄 때, 우리는 그것을 그대로 느낄 수 없다.
따라서 그 느낌을 알 수 없다. 네이글이 말하듯, 박쥐가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내적인
관점에서 지각할 때에만 우리는 이 주관적인 느낌에 대해 
알 수 있다. 정신적인 것을 물질적인 것으로 환원시키려고 
하는 다른 모든 물질주의처럼 기능주의는 정신적인 상태들의 주관적 특성을 설명하는 데에 실패하고 있다.


만일 기능주의가 옳다면, 모든 정신적 상태들을 기능적으로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이론이 있어야만 한다. 이 이론이 우리에게 들어맞으면서, 또한 다른 존재에게도 들어맞는다면, 그 존재도 정신 상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동일한 하나의 이론이 정신적 상태를 가진 모든 
존재에게 적용되어야만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는 틀렸다. 

왜냐하면, 인간들 사이에서도 이미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특정한 생각을 가진 전문가들은 비전문가와 
다르게 처리하며, 장님은 정상적인 사람과 다르게
지각할 수도 있다. 이런 사실을 고려해 볼 때, 하나의 통합 
이론은 가능하지 않으며, 철학적 입장으로 기능주의는
 옳지 않다.

무법칙적 일원론

몸과 마음은 ‘일원적‘이다. 그 사이에 ‘법칙‘은 없다.
데이비드슨(Donald Davidson, 1917-2003)은 정신적
 속성을 육체(물질)적 속성으로 환원시키는 문제를 피해 
가는 방식으로 대답하고자 한다.

그의 테제에 따르면, 그러한 환원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데이비드슨은 자신의 입장을 무법칙적 일원론이라고 
부른다. 그의 입장은 오직 물질만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일원적이며, 정신적인 속성들과 물질적인속성들을 연결해 주는 법칙이 없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무법칙적이다.

데이비드슨은 어떻게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는가? 
그리고, 이 결론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정신과 육체의 관계는 다음과 같은 세 명제를 연결해서 
이해할 수있다.

(1) 어떤 정신적인 사건들은 육체(물질)적인 사건들을 일으키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2) 인과 관계가 있는 곳에는 엄밀한 법칙이 있다.

(3) 정신적인 사건들을 예측할 수 있는 엄밀한 법칙은 없다

각각 참인 것으로 보이지만, 함께 연결할 경우 세 명제들은 서로 모순 관계에 있다. 만일 정신적인 사건이 육체적인 
사건을 일으킨다면, 그에 상응하는 엄밀한 법칙들이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세 번째 명제는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을 연결해 주는 그러한 법칙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고 있다.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첫 번째 명제는 사람이 주위의 환경에 의지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존재로서의 자기 이해와 일상에서의 경험을 
통해서 확정된다.

두 번째 명제에 따라서, 만일 엄밀한 법칙이 있다면, 하나의 정신적인 사건은 하나의 육체(물리)적 사건과 인과적으로 
연결될 수 있다. 엄밀한 법칙에 의해 기술되는 사건들은 
육체적 사건들이다. 따라서 정신적사건 역시 육체적 사건이어야만 한다.

세 번째 명제는 마음의 영역과 물질의 영역이 어떻게 
인과적으로 상호 작용하는지를 설명해주는 엄밀한 법칙은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만일 어떤 상태를 정신적인 상태로 
기술한다면, 이는 엄밀한 물리적 법칙에 의해 파악되지 
않고서도 기술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앞의 두명제와 
모순 관계에 빠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마음의 상태로 
기술하는것도 어디까지나 육체(물리)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즉 기술하고 설명하는 층위와 물질적 존재론적 
층위를 구분해야 한다. 동일한 사건은존재론적 층위와 
기술적 층위에서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저넉별‘과 
‘새벽별‘이라는 표현들은 동일한 행성을 가리키지만, 
그 두 표현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를 보여 준다.

데이비드슨의 해결책은 모든 개별적인 정신적인 사건은 
동시에 육체(물리)적인 사건이라고 주장하는 데에 있다. 
그러나 이 이론은 정신적인 사건과 육체적인 사건들 사이에 법칙적인 관계가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 단지 구체적인 
사건들 사이에서 존재론적 층위에서 단 하나의 동일성만이 허용된다. 기술적 층위에서는 정신적인 사건들과 육체적인 사건들 사이의 동일성이 아니라, 오직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에대한 언어만이 존재한다. 이를 통해서 
데이비드슨은 많이 약화된 동일성 이론을 주장하게 된다. 
따라서 무법칙적 일원론은 위의 입장들에 제기된 반론에 
그대로 직면하게 된다.

반론 1

데이비드슨의 무법칙적 일원론은 어떻게 정신이 신체와 
연관을 맺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해 주지 않는다. 정신적인 
것의 무법칙성 테제는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 사이에 
엄밀한 법칙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로써, 정신적인 
것은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겨진다.

반론 2

데이비드슨이 어떤 정신적인 사건들은 육체적인 사건들을
일으킨다고 주장하려고 한다면, 그는 어떠한 속성들에 
입각해서 정신적 인 사건들이 인력을 가질 수 있는지를 
설명해야만 한다.

만일 그 속성 들이 정신적인 속성들이라면, 육체(물리)적인 영역은 닫혀있지 않아야 한다는 문제가 생긴다. 
만일 그 속성들이 물리적 속성들이라면, 정신적인 인과에 
정신적이라고 할 만한 것이 남겨질 수 있는지, 또 그것은 
무엇인지가 이해되지 않게 된다.

요약

정신적인 속성들의 담지자는 무엇인가? 정신적인 실체인가? 아니면, 물질적인 실체인가?

실체 이원론에서 정신적 속성들의 담지자는 신체와 독립된 정신적 실체이다. 그러나 실체 이원론은 정신과 신체가 
어떻게 서로 인과적 상호 작용을 하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다음의 세 가지 물질주의는 이런 문제에 부닥치지 않지만, 
정신적인 속성이 육체적인 속성으로 환원될 수 있음을 
설명해야만 한다.

논리적 행동주의는 정신적인 속성이 행동에 대한 성향으로 환원될수 있으며, 정신적인 속성과 행동 사이의 관계는 
논리적이고 개념적인 관계라고 한다. 그러나 문제는 어떤 
경우에는 그런 환원이 불가능하며, 정신적인 속성과 행동 
사이에 인과적인 관계가 있다는 점이다.

심리 철학에서 동일성 이론은 정신적인 속성들과 물리적인 속성들이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동일성 이론의 
이러한 주장은 경험적으로 틀렸음이 드러났다.

기능주의는 정신 상태를 기능적 상태로 간주함으로써, 
동일성 이론을 더 정교하게 만든다. 기능주의는 정신적 
상태의 주관적인 특성에 맞지 않는다. 그리고 만일 
기능주의가 옳다면, 정신에 대해서 유일한 하나의 이론만 
있게 될 것이다. 이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

데이비드슨이 주장한 무법칙적 일원론은 모든 개별적인 
정신적 상태는 육체적 상태라고 주장한다. 이를 통해, 
데이비드슨은 동일 이론성과 기능주의가 직면한 문제들을 피해 간다. 그러나 무법칙적 일원론은정신이 무엇이며, 정
신과 신체는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해 설명하지 못한다는
난점에 직면한다.

이 세 이론은 정신을 몸의 행위, 두뇌어 상태, 혹은 기능으로
환원시킨다. 행위는 겉으로 드러난 것이고, 두뇌 상태와 기능은 좀 더 과학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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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적 지각론의 형성

이이가 본격적으로 성혼과 함께 사단칠정과 인심도심에
관한 논변을 시작하기 이전에 이미 그는 사단칠정논변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었으며 그것의 
철학적 합의에 대해 주목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는 이황의 
관점에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연히 기대승에 가까운 
견해를 가지게 되었고, 마침내 이황에 맞서는 지각론적인 
입장을 정립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와 같은 지각론적 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혼과의 논변 이전에 그가 지녔던 
지각 개념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유 익할 것이다.

첫 번째로 살펴볼 자료는《사생귀신책》인데,이것은
23세때그에게 장원급제의 영광을 안겨준 유명한 《천도책》과 비슷한 시기의 저작으로 추정된다. 책문은 대과에 
합격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왕과 고위관료들이 내린 질문에 답한 글이기 때문이다. 

사생귀신책은 죽은 후의귀신에 지각이 있다면 불교의 
윤회설이 타당성을 지니게 되고, 반대로 지각이 없다면 
유교의 제사는 무의미해진다는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질문한 것에 대해 대답한 글이다. 이 난제에 
대해 이이는 인간의 지각이란 정기 인간의 정신을 이루는 
맑은 기와 육체를 구성하는 비교적 한기로서의정(精)에 
의거해서 성립하는 것이기 때문에, 죽음의 상태 즉 정기가 
분리되어 흩어진 상태에서는 지각이 성립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생각건대 사람의 지각은 정기에서 나옵니다.
눈과 귀가 총명한 것은 백(魄)의 신령함이며, 마음의 
기관이 생각하는 것은 흔의 신령함입니다. 
그 총명하고 생각하는 것은 기이며, 그 총명하고 생각할 수 있는 까닭은 리입니다. 리는 지각함이 없고 기는 지각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귀가 있은 후에야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눈이 있은 후에야 색깔을 볼 수가 있으며, 마음이 있은 
후에야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정기가 한 번 흩어지고 나면 귀는 들을 수가없고 눈은 볼 수가 없으며 마음은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니, 모르긴 하지만 어떤 것에 무슨 
지각이 있겠습니까?

위에서 말한 혼백이란 인간의 귀신을 가리키는데, 그것은 
천지자연의 기 가운데서도 매우 정밀하고 신령한 것으로서 정기에 해당한다. 즉, 혼은 기와 같고 백은 정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이는 인간의 지각 기능이정기백에 의거하되, 
특히 오감 등의 감각은 백의 신령한 작용이요 마음의 사려 
기능은 혼이 담당한다고 말한다. 이이는 감각지각과 사려의 작용을 하는 것은 기이고 그 감각하고 사려하는 까닭은 
리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지각 작용 자체는 기에 놓여 
있는 것이지 리에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어쨌든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정기혼백의 기가 분리되는 
것을 말하고, 이미 정백과 기후가 분리된 상태에서는 
지각인지 기능이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이다. 죽은 후의 정기에 지각 기능이 남아 있지 않다면, 천당의 복과 지옥의 고통도 알 수 없을 것이고 자연히 불교의 인과응보설과 윤회설도 
성립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인간이 죽으면 그 정기가 천천히 흝어지기때문에 
정성과 공경을 다하여 제사지내면 조상의 혼백과 감동할 
수 있다는것이다. 죽으면 지각이 없기 때문에 불교의 
인과응보나 윤회설은 잘못된것이라고 말해야 하지만, 
유교의 전통적 제사는 나름대로 이치가 있기 때문에 지내야 한다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불교에 대한 비판, 그리고 혼백과 제사의 이치에 관한 이이의 설명은 주자서를 읽으면서 나름대로 깨우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대체적인 내용은 주희와 상통하며 이황과도 공유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주목할 점은, "듣고 보고 생각하는 것은 기이며, 듣고 
보고 생각하는까닭은 리"라는 설명이다. 이 말은 지각을 
우주론적이고 존재론적인 리와기로써 설명하는 방식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이는 일찍이 「천도책」에서
"가만히 생각건대, 만 가지 변화의 근본은 하나의 음양일 
뿐입니다. 이기가 움직이면 양이 되고 고요하면 음이 되니, 한번 움직이고 한번 고요한 것은 기요, 움직이게 하고 
고요하게 하는 것은 리입니다" 라고 하여 우주론적
차원에서 운동 작용하는 것은 기요 그 원리나 이유가 되는 
것은 리라는 견해를 밝힌 바 있다. 

이이는 《사생귀신책》에서 그러한 우주론적 이기 개념을 
인간에 그대로 적용하여 지각 작용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즉 지각을 담당하고 수행하는 것은 기이며, 리는 그러한 
지각이 가능한 원리나 까닭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은 우주론존재론적인 이기 개념을 인간의 
영역으로까지 연장시켜서 지각작용을 동일한 방식으로 
설명할수 있다는 입장을 나타내는 것이다. 

지각에 대한 이이의 설명방식은 우주론적인 리와 기를 
지각의 두 요소나 형식으로서 적용하고 있다는 특징을 
내보인다. 인간의 인지 기능에 대한 이러한 자연주의적인 
태도는 이후성혼과의 사칠변에서도 "리는 작위함이 없고 
기는 작위함이 있다"는주장과 더불어 "발현하는 것은 
기요, 발현하는 까닭은 리"라는 논리로 반복된다.

이이와 성혼 사이의 사단칠정 · 인심도심에 관한 논변은 
실상 위에서 드러난 것과 같은 인간의 지각을 동물적 인지 
기능과 동일시하는 일종의 자연주의적 입장이 인식론과 
윤리학의 맥락에서 본격적으로 개진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주된 논쟁점은 인간의 지각 기능의 구조와 과정은
 어떻게 설명되고, 도덕적인 선악과 인심도심을 어떻게 
관련지어 설명할 수 있는지 등의 문제였다. 

이황에 의하면, 인간의 지각 기능은 하나이지만 그 지각된 
내용에 있어 당위적인 것과 그렇지 않는 것과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이 같은 사단과 친정, 도심과 인심의 대립을 
각각 리발과기발로써 구분해야 한다. 

성흔은 1572년 이이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 같은 상대적
 설명을 거론하면서 다음처럼 질문한다. "마음의 텅 비고 
신령함과 지각 작용은 하나일 뿐인데 인심과 도심의 두
 이름이 있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그것은 혹 형기(감각기관을 포함한 육신)의 사사로움에서 생기거나혹 성명본성의 
명령의 바람에 근원하기도 하여, 리와 기의 발현이 같지 
않으며 위태롭고 은미한 작용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이름이 둘이지 않을 수없는 것입니다."

이이에 의하면, 호발설은 이와 달리 작동 방식이 하나가 
아니라 두 가지이므로, 마음을 두 가지 근본으로 나누는 
것이 된다. 호발설을 따른다면 "리와 기가 두 사물이 되어 
어떤 것은 앞이 되고 어떤 것은 뒤가 되며, 상대하여 두 
갈래로 각자 발출해 나올 것"이므로 마음의 근본을 둘로 
나눈것이 된다. "주희도 말했듯이 "마음의 허령지각은 
하나"이기 때문에 작용하는 방식도 발동하는 것은 기이고 
발동하는 까닭은 리"에 의해 단일하게 설명되어야
하는 것이다.

즉, 마음은 기로 이루어져 있고 이것이 지각의 원리인 리에 의해 발동하여 사단칠정, 인심과 도심 같은 모든 작용들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이는 호발설을 다음처럼 비판한다.

주자는 ‘마음의 텅 비어 신령하고 지각작용하는 것은 
하나일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형은 어디로부터 이런 
이기호발설을 얻었습니까? 주자의 이른바
‘어떤 것은 성명에 근원하며 어떤 것은 형기에서 나온다‘는 말은 이미 발현한것을 보고 이론을 세운 것입니다. 
무릇 발현하는 것은 기요 발견하는 까닭은 리입니다. 
기가 아니면 발현할 수 없고리가 아니면 발현할 근거가 
없습니다(발지 이하 23자는 성인이 다시 나와도 
이 말을 바꾸지 못할것입니다). 선후도 없고 분리됨과 
합함도 없으니 호발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인심과 도심은 어떤 것은 허기를 위하고 어떤 것은 
도의를 위하는데, 그 근원은 비록 하나이지만 그 유출된 
것이 이미 갈라진 것이니, 진실로 양변으로 분리하여 
설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퇴계는 이것(주자의말)으로 
인해 입론하여 말하길, ‘사단은 리가 발현하여 기가 그것을 따르고칠정은 기가 발현하여 리가 그것을 탄다‘고 하는데, 
이른바 ‘기가 발현하여리가 그것을 탄다‘는 것은 옳습니다. 다만 칠정만 그러할 뿐 아니라 사단 또한 기가 발현하여 
리가 타는 것입니다. 어째서인가 하면, 어린애가 우물에 
빠지는 것을 본 후에야 이에 측은한 마음이 발현하는데, 
그것을 보고 측은해 하는 것은 기이니 이것이 이른바
 ‘기가 발동한다‘는 것입니다. 측은함의 근본은 仁이니 
이것이 이른바 ‘리가 그것을 탄다‘는 것입니다. 
다만 사람 마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천지의 조화가 
氣化하되 理가 그것을 타는 것이 아님이 없습니다. 

위의 설명에 따르면, 이이는 "마음의 허령지각은 하나"라는 것을 지각의 작동 방식이 하나라는 것으로 이해하며, 
그것을 곧 "기가 발하되 리가탄다"는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즉, "사단은 리가 말하되 기가 따르는 것이요 칠정은 기가 
발하되 리가 올라탄다"는 호발설은 지각 작용의 메커니즘을 두 가지로 설명한 것이 된다. 이는 잘못된 것이며, 지각은 
오로지 "기가 발동하되 리가 올라타는" 방식으로만 
작용한다는 것이 이이의 주장이다. 

이처럼 ‘기발이승일도설‘은 "발동하는 것은 기요 발동하는 
까닭은 理"라는 지각의 형식이나 요소만을 주안점으로 
삼아서 도출한 결론이다. 칠정과 마찬가지로 사단도
 이 같은 지각의 메커니즘에 의해 이루어진다는것이다. 

예를 들어, 어린애가 우물에 빠지는 것을 본 후에 측은한 
마음이 생기는데, 그 장면을 시각적으로 감각하고 
측은함을 발동시키는 것은 기이지만 이때 측은함을 
발동하는 까닭으로서의 리(仁)가 그 안에 내재해 있다는 
것이다. 외물의 감각으로서 ‘기발‘은 육체의 감각기관이 
외물의 감각자료sense data를 수용하고 이에 반응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기발‘에 지각의 원리principle of 
sense perception가 개입해 있음을 ‘리승‘이라고 칭한 
것이다. 그는 ‘기발이승‘이라는 지각의 작동 방식이 마음에만 있는것이 아니라 천지만물 모두에 적용되는 자연적이고 
보편적인 방식이라고주장한다.

지각에 관한 이이의 주기론적 입장은 천지자연의 리와
기를 체와 용, 형이상과 형이하의 관계에 의거하여 
‘발하는 까닭(소이발자)‘ - 體-형이상과
‘발하는 것(발자)‘- 用 -형이하로 규정하고, 이를 인간의 
마음에도 그대로적용한 것으로서 천지자연과 인간을 
연속적으로 설명하려는 자연주의적입장을 나타낸다. 

이러한 입장은 대체로 "자연에 있어서의 이기를 먼저
관찰 체인함으로써 그 원리를 가지고 인간을 관통한 
것이라고 할 수있다. 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 지각은 
"기가 발하고 리가 올라타는(기발이승)" 하나의 과정과 
경로만을 가질 뿐이며, 사단과 칠정은 모두 이러한 과정으로 작용한 것이다. 이때 ‘기발‘은 감각기관이 외물의 감각 
자료를 받아들이고 이것에 심리ㆍ육체적psycho-physical 기가 반응함을 가리키되, ‘리승‘은 이와 같이 
반응하여 지각함에 그럴 수 있는 까닭이자 원리가 그것에 
내장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이이의 
주기론적 지각론을 경험론적empirical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주기론적 지각론의 일관성은 인심과 도심의 
상대성과 선악의 근거를 설명하는 데 그 관건이 놓여있다. 
이이는 인심이든 도심이든 마음의지각이 ‘기발이‘ 이라는 
하나의 방식에 의해 성립되지만, 발동된 감정에대해 의사 
작용이 도덕적 원리를 위하는 경우가 있고 일산의 몸의 
안일과 쾌락을 추구하는 경우가 있으므로, 사단칠정과 달리 인심도심은 상대시켜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성혼은 계속해서 인심과 도심의 지각 근원은 
리와 기로써 구분된다고 이의를 제기했다.

성혼의 주장은 지각의 근원을 기준으로 할 때, 
사단칠정뿐만 아니라 인심도심도 리와 기로 
구분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이이의 궁극적인답변은 사단칠정처럼 
인심도심도 실제로는 마음의 지각 안에서 기원이
다른 것으로 구분되어 자각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마음의 작용을 결과론적으로 변별한 것일 뿐, 
지각 상에서 기원에 따라 선험적으로대립된 것으로서 
자각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제 이에 대한 이이 의해명을 살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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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과 몸

나는 정원의 나무 한 그루를 보고 있다. 나는 ‘나무‘를 보고 
있다고나는 의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나는 그 나무를 
보고 있는 것이 ‘나‘라는 것도 의식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대답하기 어려운 이유는 이것들이 특별한 종류의 현상에 속하기 때문이다. 바로 
정신적 현상들이다. 무엇이 정신적 현상들인 지는 아직 
아무도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첫째, 정신적 현상은 의식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시험에 대한 본능적 불안과 같은 무의식적인 정신적 현상도 있다. 또한 "내가 범인을 보았을 때, 이마의 상처를 의식적으로 인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내게 사진을 보여 준다면, 
나는 그 상처를 기억해 낼 수 있다"라는 말처럼,
의식적 상태는 무의식적 부분들을 포함하고 있기도 하다.

둘째, 정신적인 현상은 공간적이지 않다. 만일 정신적인 
현상이 사물이 아니라, 상태 혹은 속성이라면, 정신적 현상에 장소를 할당하는 것은 부질없는 것이다.

셋째, 정신적인 현상은 개인적이다. 그것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은그 현상들에 대해 특별하고, 개인적인 접근을 할 수 
있다. 그 현상들을경험하는 사람은 그 현상들을 느낀다. 
만일 내가 불안을 가지고 있다면 나는 불안을 느끼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아마 내가 불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인식하겠지만, 내가 느끼는 그대로 그 불안을 감지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불안, 기쁨, 사랑의 느낌과 같은 현상들이 
정신적 현상의 전부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나폴레옹은 
잔혹한 전쟁의 지휘자였다는나의 삶은 아무런 느낌도 
일으키지 않는다. 이 상태는 내가 더 자세히 기술할 수 
있는 특별한 방식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넷째, 정신적인 현상은 지향적이며, 명제적 태도를 가진다.
마음은 늘 무언가와 관계를 맺는다. 어떤 대상을 향해 있다. 나는 그냥 보지 않고, 나무 한 그루와 같은 특정한 무언가를 본다. 나는 단순히희망하지 않고, 어떤 특정한 것이 일어나기를 희망한다. 마음이 어떤 대상으로의 향함을 브렌타노
(1838-1917) 이래로 ‘지향성‘이라고 한다. ‘지향적 상태‘ 
혹은 ‘지향적 태도‘가 그에 상응하는 상태들이다.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사물에 향해진 지향적 상태와 사물의 속성과 같은 사태에 향해진 지향적 상태가 정신적 상태의 
전부는 아니다. 지향적이지 않은 정신적 상태들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는 무엇에대해 불안해하는지 말할 
수 없지만, 불안해할 수도 있다. 혹은 그와 비슷하게 긴장할 수도 있다. 이 경우 긴장에 대한 느낌은 지향적이지 않다.

명제적 태도 : 대상은 나무 한그루처럼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사물일 수도 있지만, "나무가 초록색 잎을 지니고 있다"와 같은 사태(속성)일수도 있다. 사태는 종속절을 통해서 
기술될 수 있다. 하나의 종속절은 하나의 명제를 표현한다. 그래서 어떠한 사태로 항해진 태도들을 ‘명제적 태도‘라고 부른다.

명제적 태도들은 내용과 상태로 이루어진다. 
예컨대 ‘믿다‘ ‘의지하다‘ ‘원하다‘ ‘생각하다‘ ‘희망하다‘
 ‘무서워하다‘ ‘의도하다‘ 등이 상태에 해당한다. "나는 내일 남호를 만난다는 것", "모레 비가내린다는 것", "지구는 
둥글다는 것" 같이 주어진 사태가 내용에 해당한다. 
내용과 상태를 합하면, "내일 남호를 만난다는 것‘을 
나는 원한다"와같은 문장이 되며, 이것이 명제적 태도이다. 
사태는 틀릴 수도 있다. 실제로는 비가 내리지만, 지금 
눈이 내린다고 나는 믿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용과 상태는 다르다.

정신적 상태의 특징을 재는 단 하나의 척도는 없다. 그런 
척도가 되는 단 하나의 특징은 없다. 위에 언급한 네 개의 
특징들 중 세 개는 정신적인 상태를 비정신적인 상태와 
구분해 준다. 이 탁자는 의식의 상태가없다. 탁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그 무엇으로도 지향해 있지 않다.
탁자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 반면 이 고양이는 
무언가를 지각하고, 그 지각은 무언가로 향해 있으며, 그는 
그것을 의식하고 있다. 즉 고양이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고양이도 마음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고양이는 인간처럼 자기의식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양이도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물음에 답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어떤존재가 마음을 
가지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의식이 필요한지, 그리고 
고양이도 그 정도의 의식들을 실제로 가지고 있는지가 
해명되어야 한다.

영혼은 정신적인 실체이다. 실체 (substance)는 다른
것들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실체는 속성들을 
붙잡고 있는담지자이다. 물질적인 실체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정신적 실체가 있다. 이 입장을 ‘실체 이원론‘
이라고 한다. 물질과 정신이 두 실체이다.

그에 반해 이른바 ‘물질주의‘ 혹은 ‘물리주의‘는 오직 
물질적인 실체만 있다고 본다. 만일 물질주의가 옳다면, 
정신적인 속성들은 물질적인속성들로 환원되어야 한다. 
이것이 과연 가능하냐는 물음은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실체 이원론-데카르트

정신적 속성들의 담지자는 무엇인가? 
전통적으로 서양에서는 정신의 본성에 대해 생각을 해 왔다. 특히 인간이 죽으면, 정신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 왔다. 인간이 죽으면 존재하기를 멈춘다는 생각은 
많은 이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만일 신체의 죽음 이후에도 
정신은계속 존재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이러한 불안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정신이 신체와 다를 때에만, 
정신은 죽지 않을 것이다. 영혼은 신체와 달라서 죽지 않는다. 이를 보여 주고자 많은 철학자들이 시도했는데,
그 중 중요한 것이 플라톤 (427-347)의 대화편 「파이돈」, 데카르트(1596-1650)의 방법서설과 『성찰』이다.

실체 이원론의 핵심 주장은 정신과 신체는 서로 다른 
실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데카르트의 논증은 다음과 같다.

첫번째 논증: 다음과 같은 가정에 근거하고 있다. 인간은 
기계가 가지지 않은 능력들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자연 
법칙을 통해 행위가 규정되거나, 이 법칙을 통해 설명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데카르트는 이러한 능력의 예로
 말하기와 지적 행위를 든다. 이 능력들은 과학으로 완전히 설명할 수 없다. 만일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다면, 그 능력은 과학의설명 대상인 물질적인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능력들을 가능하게 하는 또 다른 뭔가가 있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정신적인 실체, 즉 영혼이다. 데카르트는 이 
능력을 가지고 인간과 동물들의 차이를 확정 짓는다. 
동물들과 달리, 우리 인간은 말할 수 있고, 지적으로 
행위할 수 있으며, 따라서 영혼을 가지고 있다. 
다른 동물들은 우리보다 더 적은 이성을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예 이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두번째 논증은 좀 더 복잡하다. 데카르트는 말한다. 내가 
명석하고(lear) 판명하게(distinct) 파악하는 모든 것은 
신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다. 따라서 내가 명석하고 판명하게 파악하는 모든 것은 존재 가능하다.

내가 순수하게 생각하는 존재, 즉 나는 신체적 속성들 없이도 존재할 수있는 것이라고 나는 명석 판명하게 파악한다. 
정신과 신체는 다르다고나는 명석 판명하게 이해한다. 
내가 명석 판명하게 서로 구분할 수 있다면, 실제로 그것은 서로 다르다. 이로부터, 정신은 신체와 실제로 다르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따라서 정신적 실체(res cogitans)와 
연장된 실체(resextensa)가 존재한다.

반론 1

첫 번째 논증은 건전하지 않다. 몇몇 동물들은 지적으로 
행동한다. 우리는 애완용 고양이의 행동에서 이미 이런 
사실을 알 수 있다. 고양이는 집으로 가는 길을 찾을 줄 
알고 먹고 싶을 때는울음 소리를 낸다. 우리는 고양이의 
이러한 행동을 자연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정신적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영혼을 가정할
필요가 없다.

대답

데카르트의 논증은 동물들이 그 어떤 정신적 능력들도 
가지고 있지 않음을 보여 주려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첫번째 논증은 여전히 거부될 수 없다. 인간의 능력은 
여러 가지 면에서 동물들의 능력을 넘어선다. 특히 우리는 
자기 의식을 가지며, 우리 자신을 서로 구분할 수 있는 
구별된 존재로 지각한다. 그리고, 우리는 행위를 장기간에
걸쳐 계획할 수도 있다.

대답에 대한 반론

대부분의 원숭이나 다른 포유류들은 어떤 종류의 
자기의식을 가진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에 대한 이해를 
가진다. 또한 자기 자신과 미래에 대해 진술할 수 있는 
지능적 로봇과 같은인공적인 존재도 있다.

대답

그런 동물이나 로봇은 인간과 현격하게 차이가 난다.

반론 2

첫번째 논증은 타당하지 (valid) 않다. 어떤 현상을 
자연과학이 지금까지 설명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 현상이 
비물리적원인을 가진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다. 
두뇌가 사람의 정신적 능력을 어떻게 가능하게 하는지 
아직은 정확히 알지 못하더라도, 정신적 능력들에 대한 
원인은 우리의 두뇌이다.

대답

이는 당신의 신념이지, 객관적으로 증명된 사실은 아니다.

반론 3

두번째 논증은 건전하지 (sound) 않다. 생각하는 존재로서 우리가 신체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는 가정은 옳지 않다. 
생각함은 신체 기능을 필요로 한다. 신체 없이 어떻게 생각할 수 있는지 상상할 수 없다.

대답

우리는 항상 신체를 통해서만 경험하고 생각하기 때문에, 
신체 없이 무엇을 생각할 수 있는지를 상상할 수 없다. 
그것은 습관이다. 그러나 논리적으로는 몸이 없어도 
정신은 생각을 할 수 있다.

반론 4

인과적인 상호 작용의 문제가 있다. 만일 정신이 비신체적인것이라면, 정신은 신체에 인과적인 영향을 줄 수 없고, 
받을수도 없다. 그렇다면 정신은 몸의 부대 현상(Epiphänomen)이다. 존재하지만, 인과의 힘을 발휘할 수 없는 현상에 불과할 것이다.

첫째, 정신과 신체가 접촉점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둘째, 물리적 원인의 닫힘성원칙 때문이다. 몸이라는 
물질적인 것의 원인은 항상물리적이어야만 한다. 

따라서 비물질적인 정신과 물질적인 신체의 인과적 상호 
작용은 불가능하다. 정신은 몸에 인과적 영향을 행사할 수 
없으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의지로 몸을 움직일 수있는 존재로 경험한다. 가령 누군가 
내 팔을 바늘로 찌른다면, 나는 통증을 감지한다. 
이처럼 실체 이원론을 반박할 수 있다.

대답 1

데카르트는 정신과 신체 사이를 이어 주는 접촉점으로 
송과선(松果線)을 제시한다. 이는 뇌의 특정 기관이다.

대답 2

만일 접촉 지점과 인과에 대한 우리의 통상적인 개념과 
생각으로, 신체와 정신 사이의 인과적 상호작용을 기술할 
수 없다면, 이는 실재에 대한 탐구에 좋을리가 없다. 
이 경우 정신과 신체의연관성은 설명되지 않은 채 남겨지게 되기 때문이다.

보헤미아의 엘리자베스 공주에게 보낸 편지에서 
데카르트는 말한다. 일상에서 우리는 정신과 신체의 
통합을 인식하지만, 그에 대해 되씹으면서 숙고하면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따라서 정신과 육체의 상호 작용을 상식적으로 인정해야 한다.

대답 3

정신과 신체의 연관성에 대해서 라이프니츠(1646-1716)는 시계를 비유로 들어 설명한다. 우리는 같은 시간을 가리키는두 개의 시계를 상상할 수 있다. 두 시계는 왜 동일한가? 
두 시계가 애초부터 서로 연결되어 있거나, 부지런한 사람이 늘 시간을 새로 맞추거나, 처음부터 정확히 동일하게 
작동하도록 제작되었다.

이 중 어떤 것이 가장 합리적인가? 세 번째 일 것이다. 
정신과 신체의 관계를 두 시계와 비교한다면, 처음부터 서로 맞게 예정되어 있다고해야 한다. 이를 예정 조화설이라 한다.

대답들에 대한 반론

대답 1은 옳지 않다. 정신과 신체는 다른 실체이기 때문에
서로 완전 분리된다. 대답 2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대답이 맞으려면 기계 신(deus ex machina)과 같은 신이 지속적으로 개입을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대답 3은 정신과 신체의 관계 문제이다. 정신과 신체 
사이에는 미리 예정된 조화가 있다. 정신과 신체는 신에
의해 항상 평행하게 움직이도록 설정되었다. 따라서 만일 
나의 뇌 안의특정 부위가 활성화되면, 항상 나의 정신은 
통증을 느끼고, 내가 의자에서 일어나기를 원한다면, 
나의 신체는 일어난다.

이런 식으로 신을 설정한다면, 세상에 설명하지 못 할 것이 없게 된다. 이는 반과학적, 반철학적인 태도이다.

반론 5

실체 이원론의 예정 조화설이 옳다면, 정신적인 상태는 
가지지 않지만, 우리와 완전히 똑같이 행동하는 존재가 
있을 수도 있다.

이 좀비는 우리에게 인사하고, 우리와 대화를 나누며, 
농담을 하면서 웃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이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실체 이원론에서 정신은 존재는 
하지만 신체에 인과력을 행사할 수 없는 부대 현상이 된다. 따라서 신체로부터 독립적인 정신은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이 도출될 수 있다.

대답

예정 조화설이 실체 이원론의 전부는 아니다. 물질로 
정신을완전히 설명할 수 없다면, 물질과 정신의 두 실체를 
인정하는 이원론이 최선이다.

논리적 행동주의

몸과 마음은 ‘논리적‘ 관계이며, 마음은 몸의 ‘행동‘으로 
환원된다. 독립적인 실체로서 정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결국 물질적 실체나물질(몸)만 존재한다는 가정이 남는다. 물질주의는 라메트리 (1709-1751)가 그의 저서 
《인간 기계》에서 제시했다. 그러나 물질주의는 
20세기가 되어서야 널리 지지받는 대세가 되었다.

물질주의는 정신적인 속성이 물질적인 속성으로 환원될 
수 있는가. 어떻게 그렇게 되는가 라는 헤어나기 어려운 
난제에 직면한다. 아래에서는 이 문제에 대한 세 개의 
대답과 이에 따르는 물질주의의 버전들을 소개하겠다.

자연과학의 발전에 따라, 세계는 물질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확고한 대세가 된다. 따라서 정신의 실체를 부정하고, 몸을 실제하는 것으로 본다.

논리적 행동주의, 동일성 이론, 무법칙적 일원론이 그것이다.
비트겐슈타인(1889-1951)과 라일(1900-1976)이 가장 
중요한 주창자인 논리적 행동주의는 첫째, 정신적 속성들이 행동으로 환원될 수 있다.

둘째, 정신적인 것과 신체적인 것 사이의 관계는 논리적 
혹은 개념적인방식이라고 주장한다. ‘논리적으로 정신적 
속성들은 특정한 ‘행동‘으로바꾸어서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논리적 행동주의‘라 한다.

첫째, "정신이 행동으로 환원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논리적 행동주의에 따르면, 정신 혹은 정신적인 것에 대한 
설명들은 단순한 행동에 대한 진술이 아닌, 상세한 행동 
성향에 대한 언급들로 번역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는 
통증을 느낀다"라는 말은 그 말을 하는 사람이 울거나 
신음을 하거나, ‘아야‘ 하고 비명을 지르는 행동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논리적으로 바꿀 수 있다.

물론 누군가는 자기 억제를 하여 그런 어떤 행동 성향도 
보여 주지않을 수도 있다. 반대로 연극이라면, 통증이 
없는데도 몸을 웅크리며 아픈 척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통증을 가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자 한다면, 우리는 특정한 행동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즉 특정한 행동 성향을통증을 가진 사람에게 적용시키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그 상황을 직관적으로 설득력 있게 
이해할 수 있다. 어떤 이가 통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만, 행동에 있어서는 통증에 상응하는 성향을 보이지 않고, 
지극히정상적으로 행동한다면, 그가 통증을 가지고 있다고 믿기 어렵다. 결국 정신적인 현상에 대한 표현은 특정한 
행동 성향들로 바꾸어서 말해야 한다. 이렇게 환원되어야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

둘째, 정신적인 것과 신체적인 것의 관계는 인과적이지 
않고, 논리적 혹은 개념적이다. 논리적 경험주의 두 번째 
주장은 무슨 뜻인가?

정신적인 현상에 주목할 경우, 우리는 종종 특정한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서 다르게 표현하곤 한다. 예를 들어, "신선한 공기가 들어오기를 원했기 때문에, 윤희는 창문을 열었다" 
라고 말한다고 해보자. 우리는 흔히 그녀의 의지가 그 행동의 원인이라고 간주한다. 그러나 정신적인 것에 대한 표현들은 행동 성향들로 환원된다는 논리적 행동주의자들의 주장을 따른다면, 이는 틀렸다. ‘의지‘는 관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신 특정 행동은 그 행동에 대한 성향으로 설명해야 한다.

이러한 논리적 행동주의의 설명은 인과적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특정 행동 성향에 대한 개념은 행동의 
개념으로부터 논리적으로 독립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성향에 대한 기술은 정확하게 행동과 연계되어 있다. 
만일 두 개의 사건들이 논리적으로 서로 독립적이지 않으면, 하나는 다른 하나의 원인이 될 수 없다.

이에 어떤 논리적 행동주의자들은 재해석해서 말한다. 
행동성향에대한 설명은 "설탕은 물에 용해된다. 왜냐하면 
설탕은 수용성 (물에 녹는성질)이기 때문이다"와 같은 
종류의 설명이므로 인과적인 설명이 아니다.

이 역시 문제이다. 수용성은 설탕의 용해에 대한 원인이 
아니라, 설탕의 성향에 불과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행동 
성향은 원인이 아니다.

반론 1

정신적인 것에 대한 모든 문장들을 행동 성향에 대한 
문장들로 대체하려는 논리적 행동주의의 프로젝트는 
성사될 수 없다. 그들의 주장에 따라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자.

"남호는 맥주를 원한다"는 무슨 뜻인가? 이 문장은
 "남호는 맥주를 마신다"로 대체될 수 있을까? 아니다. 
왜냐하면 이 문장은 필요조건도 충분조건도 아니기 
때문이다. 남호는 아무것도 마시지 않으면서도, 맥주를
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원한다고 꼭 마시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남호는 맥주를 보고, 눈을 반짝이기 시작했다"로 번역할수 있을까? 이 조건 역시 충분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눈을 반짝임은 맥주를 마셨을 때일 수도 있지만, 친구와 
대화했던 기억 때문일 수도 있다. 이처럼 다른 원인을 
가질 수도 있다.

정신을 행동 성향으로 환원시키려는 시도는 이처럼 
아주 간단한 경우에서부터 실패하는 것 같다. 
이웃 국가의 정치적 위기에 대한 배경 정보를 알고자 하는 
욕구와 같은 복잡한 경우는 말할 필요조차 없다.

대답

우리는 더 간단한 상황들을 통해서 명제적 태도에 대한 
설명을 시작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한 생명체의 감각 
기관이 어떻게 구조 지어졌는지 안다면, 생명체의 직접적인 주변 조건에 대한 기술을 통해서, 그 생명체가 어떤 정신적 상태를 가지고 있는지 추론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남호가 눈을 뜨고, 맥주 앞에 선다면, 그가 맥주를 보고 있다고 추론할 수 있다. 또한 남호가 몇 시간 전부터 
아무것도 마시지 않았다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남호가 
갈증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할 수 있다. 

이런 욕구들과 남호가 맥주 앞에 서 있다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남호가 맥주를 원하고 있다고 추론할 수 있다.

반론 2

정신적인 현상과 행동 성향 사이의 개념적인 연관성에 
대한앞의 비판적 논증은 건전 (sound) 하지 않다. 
성향은 원인의 한 부분이다. 설탕의 수용성은 왜 특정 
분량의 설탕만 물에 녹는지에 대한 원인의 한 부분이다. 
이처럼 정신적인 현상은 그것이 성향이라는 가정하에서 
그 자체로 행동의 원인일 수 있다.

정신 현상을 행동 성향으로 바꾸는 것은 원인ㆍ결과라는 
관점과는아무 상관이 없다. 우연히 행동 성향이 원인일 
수도 있겠지만, 이는 부차적인 것이다.

반론 3

우리의 정신은 우리의 신체에 인과적 영향을 행사한다. 
우리는 우리의 행동을 의도적으로 조정할 수 있다. 
그와 반대로 우리의 행동은 우리의 정신에 영향을 준다. 
우리는 정신과 행동 사이의 인과적 상호 작용을 매일 
경험한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을 부정하는 논리적 
행동주의는 옳지 않다. 실체 이원론처럼 논리적 행동주의 
역시 정신적인 것을 부수적인 현상으로 보고 있다. 
이는 정신적인 것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맞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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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에 따르면 미덕은 남용될 수 없다. 게다가 
사실 그는더 강한 어떤 것을 주장했다. 즉 사람들이 특정 
미덕을 가졌기 때문에 그 미덕을 가지지 않았을 때보다 
더 나쁘게 행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주장을 지지했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기본적으로 
오직 하나의 미덕, 즉 올바른 판단의 능력the power of right judgment이라는 미덕만 있다고 믿었고 그런 믿음에 
일관성이 있을 수 있었다.

우리가 그 점에서 소크라테스를 따라야 할 필요는 없다. 
더 중요한점으로, 우리는 이 이념들[특정 덕을 가졌을 때의 행위가 그 덕을 가지지 못했을 때의 행위보다 나쁠 수 없다는 이념 및 궁극적으로 올바른 판단의 미덕이라는 하나의 
미덕만 있다는 이념]에 동기를 부여했던 부분에서 
소크라테스를 따라서는 안 된다. 그것은 바로 개인의 삶에 
있는 무조건적으로 좋은 것, 모든 가능한 여건에서도 좋은 
것에 대한 추구이다. 그 추구는 근대의 표현도 갖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중 하나를 도덕이 특별히 몰두하는 것the 
special preoccupations of morality에서 마주하게 
될 것이다.

미덕 함양의 문제는, 만일 그것이 일인칭의 숙적 훈련으로 
이해된다면, 오히려 당신의 사고가 충분히 당신 자신을 
향하지않는다는 것이다. 미덕의 면에서 당신의 가능한 
상태를 생각하는 것은 당신의 행위들에 관해 생각하는 
것이 아니며, 당신의 행위들에 관하여 당신이 생각할 수 
있거나 생각해야 하는 면에 대해 두드러지게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당신의 행위들에 관하여 생각하는
그 방식에 대해 타인들이 기술하거나 논평을 할 수도 있는 
방식에 관하여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당신 숙고의 본질적 내용을 나타낸다면, 그것은 정말로 윤리적 주의를 
잘못된 쪽으로 돌린 것 a mis-direction of the ethical 
attention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의 교훈은미덕이 중요한 윤리적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보다는, 윤리적 개념의 
중요성은 그 개념이 일인칭 숙고의 요소가 됨에 놓여있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관대하거나 용감한 사람들의 숙고, 
그리고 더 관대하거나 더 용감해지고자 하는 이들의 숙고는 그렇지 않은사람들의 숙고와는 다르다. 그러나 그 차이는 
자신들이 관대함이나용기 면에서 어떠한지 생각한다는 
점에서 주로 나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질문 -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기주의는, 날것 그대로의 몹시 사리적인 답이긴 
하지만, 어쨌건 그 질문에 대한 지성적으로 이해 가능한 
답이다. 비록 우리 대부분은 이기주의를 거부하는 성향이 
있겠지만 말이다. "윤리적"이라는 단어를,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대한 지성적으로 이해 가능한 답변을 제시할 삶의 
계획이라면 어느 것에나 사용할 수도 있다. 그렇게 "윤리적"을 최대의 폭넓은 뜻으로 사용하면, 가장 노골적인 이기주의조차 윤리적 선택지가 될 것이다. 나는 우리가 그 용법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처음에는 아무리 모호할지라도) 우리 및 
우리의 행위를 요구, 필요, 주장, 욕구, 그리고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삶과 이해할 만하게 연관짓는 윤리적인 것의 
관념을 갖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윤리적 고려사항이라고 
부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에서 이렇게 우리 자신의 요구 
등과 다른 사람의 삶을 연관짓는 관념을 보존하는 것이 
유익하다.

그러나 이기주의는 그 가장 노골적인 형태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매우 헷갈리게도 윤리적 이기주의 ethical 
egoism라고 불려온, 우리가 어떻게 행위해야 하는가에 
관한 하나의 이론이 있다. 

윤리적 이기주의는 각자가 사리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윤리적이기주의는 반성적인 입장이며 사람들의 이익에 관한 일반적 견해를 취하기 때문에 노골적인 
이기주의와는 다르다. 우리가 윤리적 이기주의를(그것이 
자칭하는 대로) 윤리 체계로 부르는지 아닌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윤리적 이기주의가 윤리적 고려사항이라는 이념에 어떻게 기여하는가가 중요한 질문이다. 

처음 보기엔 윤리적 이기주의는 윤리적 고려사항이라는 
이념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각자가 윤리와 무관한 고려사항들nonethical
 considerations에 따라 행위 해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만일 윤리적 이기주의가 그것만 말한다면, 그저 독단적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만일 사람들이 실제로는 사리 
이외의 고려사항들에따라 행위한다면, 무엇이 그들이 
그렇게 행위하는 것이 비합리적이라는 점을 보여주는가? 

윤리적 이기주의가 할 가능성이 더 높은 것은 사실 윤리적 
고려사항의 역할을 열린 채로 두는 일이다. 그리고 윤리적 
고려사항들을 따르는 행위를 포함하는 삶이 사리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묻는 것이다.

윤리적 고려사항의 역할을 열린 채로 두는 윤리적 이기주의와 상당히 비슷하게 보이지만 이와는 다른 또 하나의 견해가 있다. 이 견해 역시 일어나야 마땅한 것은 각자가 사리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무엇인가 일반적인 것을 주장한다. 이 견해는 행위하면서 고려에 넣는 고려사항을 불안정하게 하는 효과를 낳을 가능성이 높다. 그 견해는 일상적인 
뜻에서 윤리적인 고려사항을 도입할 수도 있다.

만일 사람들이 각자의 사리를 추구하는 것이 일어나야 
마땅한 것이라고 내가 믿는다면, 내가 할 이유가 있을 수도 있는 것 하나는 각자가 사리를 추구하는 사태를 증진하는 
것이며, 이것은 다른 사람들이 그 정책을 채택하는 것을
내가 도와주는 일은 포함할지도 모른다. 그러한 노선의
행위가 내가 나 자신의 사리만 그저 추구하는 것과 충돌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실제로 일어나야 하는 것이 사람들이 그들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날것 그대로의 믿음을 지탱하는 일은 
꽤나 어렵다. 이 믿음을 다른 고려사항으로 지지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그 다른 고려사항이란, 각자가 모두 그렇게 한다면 가장 좋으리라는 고려사항이다it is for the best if 
everyone does that. 

이 고려사항은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하려는 시도는 
일어나야 할 사태가 무엇인지 혼동을 줄 뿐이다‘와 같은 
말을 하는 형태를 취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이 논하면서도 
실제로 어떤 다른 윤리적 고려사항, 예를 들어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은 좋다는 것 같은 고려사항도 받아들여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원하는 것을 가능한 한 
많이 얻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각자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믿는 것이 가능하다. 이런 믿음은 물론 
19세기 초에 주장되었던 자유방임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데사용된 것이다. 어떤 이들은 심지어 20세기 말에도 모든 
경제 체계가사람들이 사리를 넘어서는 성향을 갖는다는 
사실에 의존한다는 명백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런 믿음을 주장한다. 아마도 이 모순은 왜 자유방임주의의 몇몇 
옹호자들이 자신의 사리를 추구하는 데 실패하고있는 
사람들에게뿐만 아니라 추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설교조의 강연을 하는 경향이 있는지 설명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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