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강의 - 제3판
김하열 지음 / 박영사 / 202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최근 로스쿨 교육과정에 맞게 가독성을 높이고
쉽고 자세하게 서술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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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법과 사법

법을 나누는 방법도 이유도 여러 가지다. 법을 어떻게 
나누느냐에 따라 전체적인 법 체계를 이해하는 방법도 
달라진다. 대륙법에서는 법을 나누는 방법 자체가 하나의 
법이다. 아무렇게나 나누는것이 아니라 일관된 원칙하에서 나눈다. 법을 나누는 방법은 사건을 어떻게 분류할지, 
교육 과정을 어떻게 구성할지, 학자들의 전공을 어떻게 
나눌지, 책이나 학회지의 주제를 어떻게 정할지, 도서관
서기에 책을 어떻게 배열할지에 영향을 미친다. 
법률가 사이에서오가는 대화조차도 법의 분류와 관련이 
있다.


- P161

단순히 나누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눈 부분이 전체 
법 체계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를 심각하게 고민한다. 제10장에서 본것처럼 법학자들은 각종 법 관련 자료로부터 법의 기본 개념을 추출한다. 그걸 모아서 범주화하다 보면 
완성된 법 체계가 된다. 

즉, 개념과 범주는 체계의 한 요소이자 속성이 된다.
처음에는 단순히설명 목적으로 나눠본 것이었는데, 
그것 자체가 하나의 규범이 되어 달리 나누는 방법은 없는 
듯한 느낌을 준다. 개념과 범주를 특히강조하다 보면, 
체계화, 추상화, 형식주의, 순수법학 등 대륙법의 특징이 
고스란히 묻어 나온다. 학자들이 학생들에게 주로 
가르치는것도 이 개념과 범주다. 그것이 모든 법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대륙법은 법을 공법과 사법으로 나눈다. 대륙법 국가의 
법률가들이 보기에 이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명백한, 
꼭 필요한 분류법이다. 적어도 논문이나 책, 교재 등도 
전부 이 이분법에 기초하고 있다. 유럽과 라틴아메리카에서 법학을 배우는 학생은 아주 어린 나이부터 공법과 사법으로 법을 나누고 공부를 시작하기 때문에 그분류법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영국 법학자 홀랜드를 비롯한 
많은 학자가 공법과 사법으로 나누는 것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고 지적하며, 그런 구별은 필요하지도 않고, 원칙도
아니며, 분명하지도 않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분류는 대륙법계 법률가에게는 전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들에게 공법과 사법은 물과 기름이다. 
그들은 공법인지 사법인지 헷갈리는 영역이 생기면 
분류법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현실이 잘못
 돌아간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더 열심히 공부해서 둘 
사이를 더 확실히 나누려고 하며, 법률이나 판례, 이론 등 
모든 면에서 공사 이분법을 관철하려고 한다. 
분류가 안 되면, 분류법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공부가 
덜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공사법 구별론은 대륙법 전통 안에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 구별이 로마 시대 고전주의 법학에서
시작되었는지, 아니면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의 <로마법대전>에 처음 등장하는지 여부는 분명치 않지만, 최소한 주석학파와 후기주석학파의 저술에는 이 구별법이 자리 잡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중세 보통법 시대 내내 공법과 사법이 
구별되었고, 19세기 법전 편찬과 사법개혁의 틀 속에서도 
이 구별은 지속되었다. 같은 세기 개념법학자들이 나와서 
법학전체의 체계를 다시 세울 때도 공법과 사법은 준별되는 것이었고, 학자들의 저술에서 거듭 강조되면서 이 구별은 
아주 기본적이고, 필요하며, 명확한 것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공사법 구별론은 그 안에 특정 이데올로기를 담고 있다. 
17세기와 18세기 유럽의 정치, 경제,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고, 19세기 프랑스,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독일에서 제정된 민법전의기본 이념을 대표한다. 

원래 민법전은 사법 가운데 가장 핵심이 되는 것으로서 
개인의 소유권과 계약자유를 그 내용으로 한다. 
당시 합리주의와 세속적 자연법에 따라 국가는 개인의 
불가침의 소유권과 자유로운 계약을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세를 얻었다. 국가가 할 일은 개인의 권리를 
인정하고 보장하는 것이며, 이를 명시해놓은 민법은 
헌법과 다름없는 기본권의 보루로서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19세기에는 대부분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때라 
법학자들도 이를 의심 없이 받아들였고, 
19세기 자유주의가 그대로 녹아든 법학이 나왔다. 
당시 독일 판덱텐주의자들은 법학 분야에서 19세기적인 
생각을 가장 체계적이고 추상적인 법 규범 속에 
구현하는 데 공헌했다. 그 기술이 얼마나 교묘했는지 
독일이 만든 법전을 20세기 유럽과 라틴아메리카가 
큰 반감 없이 받아들일 정도였다. 독일식 사고란 법의 
영역에서 개인의 자유를 확고히 하는 것이었으며,
이런 사상은 민법이 아닌 다른 법에도 적지 않게 녹아 
들어가 있다.

한편 사법의 세계와 달리 공법의 세계는 전혀 다른 생각이 
지배하고 있다. 국가의 역할은 개인의 권리 보호와 공익 
실현이다. 보통공법이라고 하면 국가의 조직 원리를 담은 
헌법과 국가 운영 및 정부와 국민 간의 관계를 규율하는 
행정법을 말한다. 사법에서는 모든 당사자가 평등하고 
국가는 그들 사이에 심판 역할을 하는 데 반해, 공법에서는 국가가 공익의 대표자로 당사자가 되고 개인보다 우월한 
지위에 선다. 이처럼 서로 다른 원리가 지배하는 법 체계인
공법과 사법이 합쳐져 하나의 국법질서를 이루게 된다.

하지만 최근 들어 정부의 역할, 경제상황, 사회제도 등에서 많은변화가 있었고 이론과 실제가 제대로 들어맞지 않는 
부분이 속속늘어가고 있다. 공사법 구별 자체가 위기에 
처했고, 이를 둘러싼 논의가 유럽 법조계에서 계속되고 있다. 그 달라진 환경을 정리하면다음과 같다.

첫째, 대륙법계 법률가들이 영미법을 전보다 더 많이 
알게 되었다. 19세기 고리타분한 대륙법 학자들은 
영미법을 대륙법에 비해 조잡하고 투박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두 법 제도 간 교류, 특히 대륙법과 영미법의 
비교연구를 통해 대륙법이 영미법에서 말하는
보통법(common law)보다 더 정교하고 효율적이고 
공정하다고 할순 없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꽃을 피운 영미에서 공법과 사법의 구별이라는 쓸데없는 고집을 피우지 않고도안정적이고 선진적인 법 
제도를 구현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공사법 구별론을 버려야
한다고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지는 않지만, 공사법 
구별이라는 것이어느 시대에나 통용되는 진리라는 
생각에서 대륙법계 법률가들이조금씩 벗어나는 계기가 
마련된 것만큼은 틀림없다.


둘째, 독일의 나치,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소련의 소비에트, 
20세기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독재정권에서 보듯이, 
공법과 사법의 구별이라는 거짓 진리를 방패막이 삼아 
대륙법계 국가에서 국가권력이 남용된 역사가 있다. 

이미 오래전부터 눈치 빠른 법률가들은 법을 공법과 
사법으로 나누는 것의 바탕에 어떤 이데올로기가 깔려있지 않은지 의심을 품었다. 

레닌이 "사법은 부르주아를 위한 법이다"라고 말한 것과 
혁명가들이 법은 결국 공법이다"라고 지적한것도 같은 
맥락이다. 사법우월주의는 부르주아를 위한 극단적인 
자유주의를 은폐하기 위한 개념이고, 반대로 혁명가들이 
주장하는 공법우월주의는 개인보다 국가를 우위에 두는 
전체주의를 구현하기위한 시도였다. 

즉, 어느 쪽을 강조하는 철저한 공사법 구별론은 그 배경에 
모종의 의도가 있다. 특히 20세기 들어서면서 국가가 
사법에 개입하지 말아야 하고, 그럼으로써 개인의 자유가 
보장된다는식의 생각은 시대착오적이라는 점이 확인되고 
있다.

셋째, 정부의 성격 자체가 바뀌었다. 이제는 국가가 사회·
경제적인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시대다. 
19세기 경찰국가는 20세기 복지국가로 바뀌었고, 국가의 
역할이 확대되면서 개인이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던 영역도 점차 축소되었다. 기본적인 사법이론이 후퇴한 자리에 
공법적 요소가 가미되고 있는 것이다. 사법의 ‘공법화‘ 
또는 ‘사회법화‘는 이런 경향을 나타낸다. 1917년 멕시코 
헌법과 1919년 바이마르 헌법은 공공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권리가 제한될 수 있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학자들 말로 소유권을 포함한 사적인 권리의 ‘사회적 기능‘이 강조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아직도 전통적인 공사법 
구별론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은 사회·경제적인 
면에서만 변화가 있을 뿐 법적인 면에서는 시대가
바뀌었다고 해서 민간이 누리는 행동의 자유가 제한되지 
않는다고우기기도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금융, 전력 생산, 유통, 통신, 
운송, 언론 같은 영역의 거대 기업들이 사인인지 아니면 
공적기능을 수행하는 공인인지 헷갈릴 정도다. 국가는 
이들을 규제하고 통제한다. 순수한 사법 영역이 그만큼 
줄어들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넷째, 국가가 이제는 적극적으로 경제활동에 가담하고 있다. 상업과 제조업에 국가의 이름으로 직접 참여하는 경우도 
있고, 공기업을 만들거나 사기업이라는 우회로를 통해 
참여하기도 한다. 국가가 예전처럼 행정법을 통해서 시장에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공기업이나 국가기관이 시장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국가 정책이 추진되고실현되기 때문에 사법이 오히려 정책 수단으로 선호된다. 

이런 현상에 주목해서 일부 행정법 학자들은 "사법이 
행정법의 일을 대신하고 있다"거나 "사법과 행정법의 
영역이 모호해졌다"고 이야기한다. 행정법과 헌법의 
성격 자체가 바뀌기도 했다. 원래 행정법은 국가의 특권과 
그 제한에 관한 법이고, 헌법은 국가의 구성에 관한 법이다. 그런데 헌법법원이 나오고 인권법원이 다양한 판결을 
내놓으면서 국가와 행정이 아니라 국민의 기본권과 
법치주의가 우선이라는 생각이 헌법과 행정법을 지배하게 되었다. 즉, 공법이 예전 우리가 알던 그 단호한 어조의 공법이 아닌 세상이 되었다.

다섯째, 20세기에 우리가 목격한 또 다른 현상 중 하나는 
법인의 역할과 중요성이 비약적으로 커진 점이다. 
예전에는 법에 개인과 국가만 있었고, 개인과 국가가 해야 
할 일이 명확히 정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법인, 기업, 노동조합, 협동조합, 
종교 단체, 컨소시엄 등 개인과 국가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존재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이들의 힘이 
얼마나 센지는 정당과 노동조합, 대기업을 떠올려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이들은 한마디로 민간 ‘정부‘ 급이다. 개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으로 보면 그냥 정부라고 해도 무방하다. 
이런 상황에서 법을 사법과 공법으로 나누는 것은 
너무 단순한 생각일 수 있다.

여섯째, 유럽과 라틴아메리카의 헌법을 보면 소유권과 
법률행위자유의 원칙 등 사법에 있어야 할 내용이 대거 
들어가 있다. 개인의권리 보호를 위해 꼭 지켜야 할 원칙이 사법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가장 공법적인 헌법에 들어간 
것이다. 이걸 학자들은 사법의 ‘헌법화‘ 또는 공법화‘라고 
부른다. 과거 개인의 권리 보호를 위해 사법과 공법을 
나누자고 했던 사람들의 생각이 이제는 설득력이 약해진
또 하나의 이유다.



일곱째, 유럽과 라틴아메리카 대부분의 국가에서 
법률에 대한 위헌심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를 위해 
따로 헌법법원을 만들기도했지만 어떤 국가에서는 
일반법원이 위헌법률심사를 한다. 입법에사법이 
관여할 수 없다는 삼권분립의 원칙과 공사법는 구별에
집착하는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이미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여덟째, 내용상으로도 공법과 사법의 구별이 점차 
희미해지고 있다. 공법의 핵심 내용은 원래 국가가 
우월하다는 점을 기본으로 한다. 그런데 법치주의의 
관념이 널리 퍼지면서 공법의 영역에서도국가가 우위에 
있지 않고, 국가라고 해서 특별한 취급을 받을 수 없다는 
생각이 지배하고 있다. 국가는 그저 비중이 큰 당사자에 
지나지 않는다. 

학자들은 국가와 개인이 본질적으로 대등하다는 점을
강조해왔고, 이로 인해서 ‘공법의 사법화‘가 급속도로 
진전되었다.

아홉째, 학자 세계에서도 미묘한 변화가 있었다. 
19세기에는 판덱텐학파 일색이었으나 20세기에 
신진세력이 가세했다. 종래의 개념법학이 아직 유효한 건 
맞지만, 거기에만 매몰될 수 없다는 생각에서 법 이외의 
다른 영역으로 법학자들의 관심이 확대되었다.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현실 세계이고, 따라서 현실 세계가 
돌아가는 것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나와 
법과 현실의 관계를 깊이 연구하기 시작했다. 개념법학의 
딱딱한 논리에 답답해하는사람도 많아졌다. 

법학의 관심사가 넓어지고, 유연한 사고가 법학에도 
도입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에 따라 낡은 공사법 구별론의 
입지가 그만큼 줄어들었다.

마지막으로 대륙법 국가 내에서 공법과 사법 어느 쪽에 
속한다고단정할 수 없는 분야가 늘어났다. 
가령 노동법이나 농업법은 공사구별법에 딱 들어맞지 
않는 분야다. 하지만 이런 법에도 교수가 있어야 하고, 
교육과정, 연구소, 학회지가 있어야 한다. 공법과 사법의 
구별만 강조할 상황이 아닌 것이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어떤 학자는 이제 공법과 
사법이라는 구별법을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둘 사이의 애매한 영역이 점점 더 늘어나서 유연한 
법률가일수록 공법과 사법을 굳이 구별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법과사법은 
여전히 구별되고 있고, 이런 생각이 여전히 다수의 견해다.
두 법은 내용도 다르고, 대부분의 법률 문제는 둘 중 하나로 바로분류되어 해결되곤 한다. 법 관계자들의 관심마저도 
결국은 공법적인 관심, 사법적인 관심으로 나뉜다.

게다가 구별을 통해서 얻는 이득도 있다. 가르치거나 
연구하거나 토론할 때 공법과 사법을 나누는 것을 기초로 
법을 더 세분화해 분업의 원리를 극대화할 수 있다. 
문제는 이게 지나치다는 데 있다.

대륙법 세계에서 민법 교수는 공법을 가르치지 않는다. 
부동산 소유권은 열심히 가르치지만, 부동산에 대한 과세, 
부동산을 둘러싼도시 계획과 수용 문제, 소유권의 헌법적 
보호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이런 부분은 공법 
전문가에게 맡길 일이라고 보는 것이다.



공법과 사법만 나누는 것도 아니다. 그 안에서 다시 
실체법과 절차법을 나눈다. 대륙법에서는 이런 구별이 
통할지 몰라도 영미법에서 보기에는 너무 어색한 일이다. 

어떤 법률 문제를 쫓아가다가 경계를 넘는다고 멈추어 
서는 것은 미국 변호사 입장에서는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다. 그런데 대륙법에서는 그것 자체가 법이다. 세상에
처음부터 공법 영역과 사법 영역이 있었던 것처럼 말한다. 
더 웃긴것은 새로 생긴 분야가 있으면 그것이 어느 쪽인지 
토론한다는 점이다. 각 분야마다 고유한 역사가 있을 텐데 
그런 것은 무시하고 공법 쪽인지 사법 쪽인지 편을 가른다.

대륙법 법률가들은 공법과 사법, 혼합 이렇게 세 가지로 
나누는것이 철칙인 줄 안다. 공법을 헌법과 행정법, 
형법으로 나누고, 형법과 관계가 있다는 이유로 
형사소송법까지 공법에 넣는다. 민사소송법을 공법에
넣을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논의 중이지만, 공법에 
넣자는 쪽이 다수다.

사법은 민법과 상법이다. 이 가운데 민법의 비중이 훨씬 
큰데, 이는 당연히 로마법의 영향이다. 교회법이 관할권의 
대부분을 빼앗긴 후로 교회법도 민법으로 흡수되었다. 
그 바람에 민법은 내용이 더 풍부해졌고, 교회는 법과 
관련해서 발언권의 대부분을 잃어버렸다.
요즘은 상법까지 전부 민법에 편입될 기세다.


상법은 앞에서 본 것처럼, 상인이 자신의 사건 처리를 
목적으로 창안한 법이다. 나름의 법과 관습이 있고, 법원과 
판사, 판결과 집행절차, 관할이 있다. 민법,형법, 교회법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분야다. 그런데 이런 특징은 점점 
사라졌고, 민족국가의 태동과 함께국법질서 안으로 
편입되었다. 상사법원도 민사소송법 규정을 적용하기 
시작했고, 상법만의 독자적 관할권은 옅어졌다. 

상사법원이 따로 없는 국가나 이름만 존재하는 국가도 
있다. 판사 중에 상인을한 명 앉힌 것 외에 다른 점을 
발견하기 어려운 국가도 있다. 상소심에서는 상인을 빼서 
일반법원과 전혀 차이가 없다. 민사와 상사를 거의 구별 
없이 보는 것이다. 상사법원이 별개의 법원이라기보다 
민사법원의 한 분과처럼 된 셈이다.

물론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아직 상사법원이 따로 존재한다. 하지만 그런 곳마저도 예전과는 상사법원의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예를 들면 스위스와 이탈리아는 상법전을 
폐기하고 상사에 관한 내용을 민법전에 규정한다.

이처럼 대륙법 세계에서 상법이라는 분야는 설 자리를 
거의 잃었다. 대학에 상법 전공이 따로 있고 도서관에 
상법 서가가 따로 있지만, 보통은 대학에서 민법을 
연구하는 사람과 공법을 연구하는 사람이 대다수이고, 
상법은 민법에서 연구된 것을 가져다 쓴다. 

한편 사법 내에서 ‘회사법‘이라고 하는 민법과 상법은 
물론이고 세법과노동법까지도 아우르는 새로운 학문 
분야가 급속히 성장하고 있다. 아무튼 상법이 사실상 
민법에 편입되면서 사법과 민법이 동의어가되어가고 있다.

상법이 대부분 민법으로 편입되면서 교회법이 민법에 
편입될 때와 비슷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민법의 구성과 
내용이 풍부해진것이다. 보통 민법에서 사인 간 거래는 
그다지 활발하지 않은 데 반해 상인 간의 거래는 활발할 
뿐만 아니라 정형화되어 있다. 이것은수백 년 동안 민법과 
상법을 나누는 기준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의미가 없어졌다. 현대산업사회에서는 민법에서도 상법처럼 활발한거래가 
이루어지고 있다. 사법이 ‘상법화‘되기도 한 것이다.

전통적으로 사법에 속해 있던 두 분야, 민법과 상법에서 
대조되는 움직임이 있었던 셈이다. 민법은 상법을 
흡수하면서 내용이 풍부해졌고, 상법은 민법에 영역을 
빼앗기면서 그 독자적인 의미를많이 잃어버렸다. 
이렇게 민법과 상법은 통합의 길을 거쳤고, 통합된 사법은 
민법과 같다는 결론으로 향해 가고 있다.

이처럼 종래의 분류법은 다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사법은 공법화되고, 공법은 사법화되고, 절차가 헌법에 
규정되는 등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대륙법은 과거에 묶여 있다. 대학에는여전히 사법학과와 공법학과가 있고, 헌법 교수, 행정법 교수, 형법교수, 상법 교수가 있다.
 정책 실현에서의 법의 역할, 사회·경제적문제 해결을 위한 법의 역할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된 세상에서, 사실 공사법 
구별론은 과거의 잔재다. 지금 누가 노동법과 재정법이 
사법인지를 고민하겠는가. 통합의 시대가 왔고, 법도 
경제학과 사회학, 인류학과 나란히 연구하는 세상이다. 
법을 안쪽에서 나누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끊임없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다음 장에서 이 문제를 다시금 되짚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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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외사례를 무시하는 자유주의 법치국가의 원리

예외사례에 관해 부여된 권한을 명문화하는 일
(상호통제를 통해서든 시간적 제약을 통해서든, 
법치국가가 계엄상태를 규제할 때 하는 것처럼 
특별 권한의 나열을 통해서든)이 성공했을 경우, 
주권 문제는 심각하게 뒷걸음질치게 되지만 그렇다고 
제거되지는 않는다. 

실제로 일상생활과 현재 생업 문제에 관심이 있는 
법률가는 주권 문제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또한 그는 정상사례만을 알 뿐 다른 
모든 것은 그에게 ‘귀찮은 일‘에 다름 아니다. 
그는 극한사례와 마주하여 아무것도 파악할 수 없다. 

왜냐하면 특별 권한, 경찰의 모든 긴급조치나 긴급명령 
각각이 반드시 예외상태에 대응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외상태는 원칙적으로 제한 없는 권한, 즉 모든 
현행 질서를 효력정지시키는 권한을 포함한다.



이 상태가 되면 법은 후퇴하는 반면 국가는 계속 존립한다는 사실이 명백해진다. 예외상태란 그럼에도 무정부상태나 
혼란상태와 다른 무엇이기 때문에, 법질서가 없어졌다 
하더라도 여전히 법학적 의미에서 하나의질서가 존속한다. 
여기서는 법규범의 유효성보다 국가의 실존이 이론의
여지없이 우월하다. 결정은 모든 규범적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고유한 의미에서 절대화된다. 

예외사례에서 국가는 이른바 자기보존의 권리에 따라 
법을 효력정지시키는 것이다. ‘법질서‘라는 개념의 
두 요소는 서로 대립하게 되며, 각각의 개념적 독립성을 
표명한다. 따라서 정상사례에서 결정의 독립적 계기가 
최대한 억제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외사례에서는 
규범이 무화된다. 그럼에도 규범과 결정이라는 두 요소가 
법학의 틀 내에 머물러 있기에 예외사례는 여전히 법학적 
인식의 테두리안에 남아 있다.

만약 예외란 법학적으로는 의미가 없기에 ‘사회학‘에 
속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사회학과 법학 사이의 
형식적 구분을 거칠게 적용한것이리라. 

예외는 어떤 상위 개념에 귀속시킬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일반적 파악으로부터 벗어나 있지만, 동시에 
법학에 고유한 형식요소, 즉결단을 완전히 순수한 형태로 
드러내 보인다. 

그런데 예외사례가 절대적 형상으로 출현하기 위해서는 
먼저 법조문이 유효한 상황이 창출되어야만 한다. 
모든 일반적 규범은 생활환경이 정상적인 형태를 취할 
것을 요구하는데, 일반적 규범이 복잡한 현실에 
적용되려면 이 형태가 필요하며, 그 규범은 이 형태를 
스스로의 규제 아래에 둔다.

규범은 균질적인 미디움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렇게 확립된 정상성은 법률가들이 무시할수 있는 
단순한 피상적 전제가 아니다. 오히려 이는 규범의
 내재적 유효성을 구성한다. 

혼란상태에 적용될 수 있는 규범 따위는 없다. 
법질서가 유의미할 수 있기 위해서는 질서가 
구축되어야만 한다. 하나의 정상적 상황이 
창출되어야만 하며, 주권자란 바로 이 정상적 상태가 
현실을실제로 지배하고 있느냐 아니냐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자이다. 

따라서 모든 법은 ‘상황에 따른 법‘이다. 주권자는 상황을 
하나의 전체로서 완전하게 만들어 내고 보장한다. 
그는 이 최종적 결정의 독점자이다. 

여기에 국가주권의 본질이 있는데, 그것은 강제나 지배의 
독점이 아니라 결정의독점으로 정확히 법학적으로 정의될 수 있으며, 여기에서 결정이라는 말은 보다 널리 발전될 
일반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예외사례는국가적 
권위의 본질을 최대한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이제 결정은 법규범으로부터 분리되고, (역설적으로 
정식화하자면)국가의 권위는 법을 만들기 위해서는 
법이 필요없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예외상태는 로크(John Locke)의 법치국가적 원리와 
합리주의적 18세기와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17세기 자연법에서 뚜렷한 의미를 가졌던 예외사례에 대한 생생한 의식은 비교적 안정적인 질서가지배했던 18세기 
들어 또다시 사라져 버렸다. 

칸트(Immanuel Kant)에게 긴급권은 결코 법이 아니다. 
오늘날의 국가론은 긴급상황에 대한 합리주의적 무지와 
본질적으로 반법률적인 이념으로부터 비롯된 긴급상황에 
대한 관심이라는 두 가지의 경향이 동시에 상호대립하는 
흥미로운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켈젠과 같은 신칸트학과 
법학자들이 예외상태를 체계적으로 다룰 수 없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그러나 법질서 자체가 예외사례를 예상하는 
것이며 ‘스스로 효력정지‘될 수 있다는 사실에 틀림없이 
합리주의자들도 흥미를 보일 것이다. 이러한 법학적 
합리주의 입장에 서면 규범이나 질서나 참조점 ‘스스로가 
스스로를 정립시키는‘ 그림이 손쉽게 그려지는 모양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사태에 직면하여 체계적통일성과 질서가 어떻게 스스로를 효력정지시키는가 하는 물음은 구성하기가 매우 어려우며, 그럼에도 이 물음은 예외상태가 법률적 
혼란상태나 어떤 임의의 무정부상태와 구분되는 한에서 
법학적인 문제이다. 예외상태를 가능한 한 세세하게 
규제하려는 법치국가적 경향은 법이 스스로를 
효력정지시키는 사례를 정확하게 법률에 기입하려는 
시도를 의미할뿐이다. 


그렇다면 법은 이 힘을 어디서 길어 오는 것일까? 
그리고 규범이 어떻게 해도 법률구성적으로는 
파악 불가능한 구체적 예외사례에 직면했을 때, 그래도 
그 규범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이 어떻게 논리적으로 
가능한 것일까?

다양한 학문적 관심이 던지는 규칙(규범)이나 예외냐라는 
질문의 일반적 의미


예외는 무엇도 증명하지 않으며 오로지 정상상태만이 
학문적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면 일관적 
합리주의일 것이다. 그런데 예외는 합리주의적 틀의 
통일성과 질서를 흐트러뜨린다. 실제로 통용되고 있는
국가론에서도 자주 비슷한 주장과 만난다. 

안슈츠(Gerhard Anschütz)는 예산법이 없을 때 어떻게 
할 것이냐의 문제는 결코 법의 문제가 아니라고 답했다. 
"여기서는 법률, 즉 헌법조문에 결함이 있다기보다는 법에 
결함이 있는 것이며, 이 결함은 법학적 개념조작 따위로 
해결될 수 없다. 그저 국법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다. 
구체적인 삶에 대한 철학은 여기에 이르러 예외사례와 
극한사례를 앞에 두고 오던 길을 되돌아가서는 안 되며 
이 사례들에 최대한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 

이 철학에는 규칙보다도 예외가 더 중요할 수 있는데, 
이는 역설을 선호하는 낭만주의적 아이러니가 아니라 
진지한 통찰에서 비롯된 인식이며, 이 통찰은 언제나 
밋밋하게 반복을 일삼는 텅 빈 일반화보다 깊은 곳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예외는 정상사례보다 흥미롭다. 
정상적인 것은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지만예외는 
모든 것을 증명한다. 예외가 규칙을 보증할 뿐 아니라, 
규칙은 애당초 오로지 예외에 의해서만 존속한다.

예외 속에서 실제 삶의 힘은 되풀이됨으로써 굳어 버린 
기계장치의 껍데기를 깨부술 수 있다. 자신의 생명력 
넘치는 강렬함이 19세기에 신학적 성찰을 가능케 했음을 
증명한바 있는 한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외는 일반적인 것을 설명하고, 자기 자신도 설명한다. 
그리고 만약 일반적인 것을 올바르게 연구하고자 한다면, 
오로지 진정한 예외에 눈을 돌리기만 하면된다. 모든 것이 
일반적인 것보다는 예외 속에서 백일하에 뚜렷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것을 놓고 끝없이 떠들어 대면 힘이 
빠지기 마련이다. 예외가 있기 때문이다. 이 예외를 
설명하지 못한다면 일반적인것 또한 설명할 수 없다. 
만약 열정 없이 그저 겉치레로 일반적인 것을 사유한다면 
결코 이 어려움을 감지할 수 없을 것이다. 예외는 이에 
반해 일반적인 것을 뜨거운 열정으로 사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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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법학의 문제점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사비니가 처음으로 지적한 이래, 
빠르게 일반의 승인을 받은 법과 언어 및 예술의 발전이 
유사하다는 생각을 단호하게 배척해야 한다. 

그것은 이론적 견해로서는 틀린 것이지만 특별히 위험하지는 않다. 반면 그것을 정치적 원리로 생각하는경우에는 
가장 우려할 만한 잘못을 포함해 엄청난 재앙을 불러일킨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이 반드시 행동해야 할 경우, 
즉 목적을완전하고도 명확하게 정하고 전력을 기울여 
행동해야만 하는 경우임에도, 그렇게 하지 않고도 문제는 
스스로 해결된다고 주장하면서, 그들이 말하는 법의 원천, 
즉 국민의 법적 확신으로부터 서서히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믿고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라고 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때문에 사비니와 그의 모든 제자는 입법의 개입에 
반대하고 푸흐타의 관습법론은 관습의 참된 의의를 완전히 왜곡한 것이다. 

푸흐타가 말한 관습이란 법적 확신의 단순한 인식 수단에 
불과하다. 그 확신이 행동으로 비로소 형성된다는 것, 
행동함으로써 확신이 실제로 그 힘을 보여주고 생활을 
지배하는 사명을 수행하게 된다는 것, 요컨대 법은 힘과 
결부된 개념이라는 명제가 관습법에도 적용된다는 점에 대해 저 석학은 눈을 완전히 감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푸흐타는 오로지 자기 시대의 조류에 
따랐다. 그것은 독일문학의 낭만주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낭만주의라는 개념을 법학에 적용해 문학과 법학의 
두 분야에서 유사한 경향을 비교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은 사람은 내가 역사학과를 낭만주의학파라고 불러도 
좋다고 주장해도 그것을 부당하다고 보지 않을 것이다.
법이 들판의 초목과 같이 어떤 고통이나 노력이나 행동도 
하지 않고 형성된다고 하는 것은 전적으로 낭만주의적인 
즉 과거상태의 잘못된 이상화에 근거한 생각일 뿐이다.

그러나 가혹한 현실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바는 그 반대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현실의 단면, 즉 현재 거의 모든 점에서 여러 국민의 실력 투쟁을 보여주는 이 현실만이 그런 생각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과거 시대를 보아도 받는 인상에 
변함은 없다. 

따라서 사비니의 학설이 적용되는 것은 어떤 사료도 없는 
선사시대뿐이다. 그러나 선사시대에 대해 추측할 수 있다고 한다면, 나는 선사시대가 민족의 확신에서 비롯된 무사 
평온한 법형성의 무대였다고 본 사비니의 추측과는 
정반대로 보고 싶다. 내 추측은 적어도 유사 이래 법 
발전으로부터의 유추에 근거하는 것이고, 사건에 따르면 
이러한 소급적 유추의 방법은 인간 심리의 연속성으로부터 옳은 결론으로 이끌 개연성이 크다고 생각되는데, 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원시시대가 후대에 비해 쉽게 법을 확보할 수 있다는 
상정은 더 이상 믿기 어렵다. 내 생각으로는 원시시대에 
법을 확보하기위해 지불해야 했던 노력 쪽이 훨씬 더 컸다.

가령 자신의 물건을점유자로부터 뺏는 소유자의 권능, 
지불불능한 채무자를 타인에게 노예로 매각하는 채권자의 권능에 대한 초기 로마법의 법명제와 같은 가장 단순한 
법명제도, 어려운 투쟁으로 얻어진 뒤에 비로소 투쟁의 
여지가 없이 일반적인 승인을 얻게 되었음에 틀림없다.
문서 사료의 출현 이래의 역사가 법의 생성에 대해 
가르쳐주는 점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것에 따르면 법의 
탄생은 인간의 탄생과마찬가지로 통상 격렬한 진통을 
수반했다.

그렇다면 상황이 이렇다고 개탄만 해야 하는가? 
여러 국민이 어떤 수고도 하지 않고 법을 확보한 것이 
아니라, 법을 추구해 고심하고 다투고 싸우고 피를 흘려야 
했기 때문에, 각각 국민과 그 법 사이에는 생명의 위험을 
수반하는 출산을 통해 모자간에 생기는 것과 같은 두터운
유대관계가 생기는 것이 아닐까? 어떤 노력도 하지않고 
확보하는 법은 황새가 물어온 아이의 처지와 같은 것이다.

북유럽 전설에 따르면, 창조의 바다에서 떠다니는 태아를 
황새가 발견해 사람에게전해주었다고 한다. 출생을 뜻하는 
‘Birth‘라는 말의 어원은 ‘나르다‘라는 의미의 고대영어 
‘Beran‘인데 이 말은 스칸디나비아어에서 유래했다. 
서양에서는 아이들로부터 출생에 관한 곤란한 질문을 받을 경우 황새가 물어서 날라다 주었다"고 말한다.

그 아이는 여우나 독수리가 다시 채갈지도 모른다. 
반면 아기를 낳은 어머니는 아기를 빼앗기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피를 흘릴 정도의 노고를 통해 법과 제도를 
쟁취해야 했던 국민은 이를 빼앗기지않는다. 이를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다. 어떤 국민이 자신의 법에 힘을 쏟고 
자신의 법을 관철하기 위해 뒷받침하는 애정의 힘은,
그 법을 얻기 위해 쏟은 노력과 노고의 크기에 비례한다고 
국민과그 사이의 가장 튼튼한 유대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은 단순한 관습이 아니라, 그것에 지불된 희생이다.

그리고 신이 어떤 국민을 선택한다고 해도 신은 국민이 
필요로하는 것을 그들에게 주지 않고 국민의 노고를 경감해주지도 않는다. 도리어 신은 그것을 더욱 무겁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아무런 주저 없이 말한다. 
법이 탄생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투쟁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라고.

민사소송은 권리를 위한 투쟁


눈을 돌려 주관적 내지 구체적 레히트, 즉 권리를 위한 
투쟁을 살펴보자. 이 투쟁은 권리가 침해되거나 빼앗긴 
채로 있는 경우에 시작된다.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는 
권리자의 이익에 대해, 이를 무시하려는 자의 이익이 
언제나 대립하는 이상, 개인의 권리이든, 국민의 권리이든 
침해의 위험을 면하는 것은 없다. 따라서 권리를 위한 
투쟁은 어떤 법 분야에서도, 즉 아래로는 사법에서 
위로는 헌법과 국제법에 이르는 모든 분야에서 반복된다.


전쟁이라고 하는 형태의 권리침해에 대한 국제법상의 
주장, 국가권력의 자의적 행사나 헌법 위반에 대한 
봉기와 반란과 혁명과같은 형태의 국민의 반항, 
중세의 소위 린치법Lynchgesetz이나 권리실현을 
위한 자력구제권Faustrecht, 그리고 그것의 현대 유물인 
결투Fehidereche라는 형태의 사적 권리의 거친 실현, 
정당방위라는 형태의 자위권, 민사소송이라는 규제된 
형태의 권리주장은 모두 분쟁 목적물이나 투입된 힘, 
투쟁의 형태나 차원이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권리를 
위한 투쟁이라는 점에서 모두 하나인 것의 여러 형태와 
장면이다.

이제부터는 이러한 형태 중에서 가장 냉정하게 
행해지는 것, 즉 소송이라는 형태를 취한, 사적 권리를
위한 법적 투쟁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이는 법률가인 나에게 익숙해서가 아니라, 민사소송의 
실상이 법률가에게도 일반인에게도 매우 알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 밖의 경우에는 실상이 분명하므로 
커다란 힘을 투입할 정도로 가치가 높은 목적물이 
다투어지고 있다는 점은 바보라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왜 싸워야 하는지, 왜 양보하지
않는지를 묻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사법상의 다툼에서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분쟁의 목적이 되는 이익(보통은 소유권)의 가치는 
비교적 근소하다. 그러한 문제의 처리에 관련된 
무미건조한 법률론을 보면, 이러한 종류의 분쟁은 
오로지 냉철한 타산과 인생관의 분야에 속하는 
것처럼 보인다. 민사분쟁이 처리되는 형식도, 
그 형식의 기계적 성격도, 당사자의 자유롭고 
강력한 자기주장의 금지도, 민사소송의 차가운 
인상을 도리어 강렬하게 만들 것이다. 

본래 민사소송에서도 당사자자신이 심판의 장에서 
주역을 연기한 시대, 그 덕분에 분쟁 투쟁Kampf의 
참된 의의가 분명했던 시대가 존재했다. 
아직 검으로 소유분쟁을 해결하고, 중세의 기사가 
상대에게 결투요구서를 보낸 시대에는 제3자라고 해도, 
이러한 분쟁 = 투쟁이 단순히 물건의 가치를 둘러싼 것, 
즉 금전적 손실의 방위를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당해 물건과 관련되어 당사자의 인격, 그 권리와 명예가 
다투어지고 주장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형태는 다르지만 실질적으로는 완전히 그것과 
같은 현재문제의 해석에 도움이 될 것이 없으므로 
오늘날에 와서까지 과거의 상태를 상기할 필요는 없다. 
현재 생활의 여러 가지 현상을 일별하고, 우리 자신의 
심리에 대해 자기 관찰을 시도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권리를 침해당하면 권리자는 다음과 같은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권리를 주장하며 침해자에게 저항하는 것, 
즉 싸움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투쟁을 회피하기 위해 
권리를 포기해야 할 것인가? 그는 이에 대해 스스로 
결단해야 한다. 어떤 길을 택하든, 그 결단은
희생을 수반한다. 

권리를 희생해 평화를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평화를 선택해 권리를 희생할 것인가?

이 문제를 더욱 깊이 파고들면 다음과 같다. 즉 사실관계와 당사자의 구체적 사정에 따라 무엇을 희생하는 쪽이 참기 쉬운가? 부자는 평화를 위해 자신에게는 근소한 소송액을 희생하지만, 같은 액수를 크다고 생각하는 빈민은 그것을 위해 평화를 희생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권리를 위한 투쟁이라는 문제는 
순수한 계산문제가 되고 만다. 이 계산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사자 각자가 이해득실을 비교 형량해야 한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일상적으로 알 수 있듯이 예상되는 노고와 정신적 소모, 
비용의 크기에비해 소송물의 액이 부족한 소송은 
얼마든지 있다.

물속에 떨어진1탈러를 줍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 
2달러를 지불할 사람은있을 수 없다. 이 경우에 
얼마까지라면 지불할 것이라는 문제는 오로지 계산문제다.

그렇다고 한다면 왜 사람들은 소송의 경우에도 같은 
계산을 하지 않을까? 원고는 재판에 이긴다고 믿고, 
비용을 피고에게 부담시킬 작정이라고 설명하는 것으로 
이 문제는 풀리지 않는다. 법률가가 잘 알고 있듯이, 
이기기 위해 방대한 비용이 필요한 것이 분명한데도 
소송을 포기하지 않는 당사자가 상당수 있다. 
사건의 어려움을 설명하고, 소송을 포기하도록 권하는 
변호사를 향해 아무리 돈이 들어도 소송을 하겠다고 
말하는 의뢰인도 얼마나 많은가?

합리적인 이해타산의 견지에서 본다면 비상식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러한 행동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해 자주 듣는 답은 모두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소송중독증이나 권리주장증이라고 하는 혐오스러운 병이라든가, 철저한 싸움 취향이라든가, 상대방과 같은 
정도의 희생, 경우에 따라서는 상대방보다도 큰 희생을 
지불해야 하는 것이 확실하다고 해도 여하튼 상대방에게 
화풀이를 하고 싶어 하는 충동 때문이라고 한다.



일단 개인 간의 분쟁에서 벗어나 두 국민 사이의 분쟁을 
먼저 생각해보자. 한 국가의 국민이 다른 국가의 국민에게서 1제곱마 일의 무가치한 황무지를 위법하게 빼앗았다고 
가정하자. 피해국은 전쟁을 시작해야 하는가? 

경계선의 2, 3피트 안까지 이웃이 경작해서피해를 본 
농민이나 이웃이 모은 밭의 돌을 자기 밭으로 던져 피해를 
본 농민이 소송을 제기하는 것을 소송중독증이라고 보는 
것처럼, 이 국제분쟁을 고찰해보도록 하자. 

수천 명의 사람이 죽고 신분에 상관없이 비탄과 곤궁이 
초래되며, 엄청난 국비가 소모되고 국가의 존립조차 
위협당하는 전쟁에 비하면 1제곱마일의 황무지에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일까! 그만큼의 전과를 위해 
그 정도의 희생을 지불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예로 든 농민과 국가를 동일 척도로 본다면 위와 같이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위 농민에게 소송을 
포기하도록 권하는 사람이라도, 국가에 대해서 같은 
조언을 할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누구라도 알 수 있듯이 이러한 권리침해를 묵인하는 
국민은 자신에대한 사형 판결에 서명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웃 나라에게 제곱마일의 영토를 뺏기면서도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나라는 그밖의 영토도 빼앗기에 되고, 
마침내 영토를 전부 상실한 국가로 존립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런 국민은 그런 운명에 처할 수 밖에없다.


그러나 더욱더 생각해보면, 어떤 국민이 1제곱마일의 
영토를 위해 그 가치의 대소에 관계없이 싸워야 한다고 
하면, 왜 농민에 대해서도 약간의 토지를 지키기 위해 
일어서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주피터에게 허용된 것도 소에게는 허용되지 않는다‘는 격언에 따라 농민을 포기시켜야 하는가? 

사실 국민이 단지 1제곱마일의 영토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즉 자신의 명예와 독립을 위해 싸우는 것처럼, 농부가 자기 권리를 무례하게 무시당한 것을 제거하기 
위해 하는 소송도 근소한 가치밖에 없는 소송물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념적인 목적을 위해서, 즉 인격 자체와 그 권리감각을 보여주기 위해 수행되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에 비추어보면 소송에서 생기는 여러 가지 
희생과 불편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권리자는 생각한다. 
목적 때문에 수단을 다하는 보람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피해자를 압박해 소송을 제기하게 하는 것은 냉정하게 
숙고된 금전적 이해관계가 아니라 가해진 불법에 대한 
윤리적 불쾌감이다. 피해자에게 소중한것은 소송물을 
되찾기 위해서가 아니라-이러한 종류의 소송에서 소를 
제기한 참된 동기를 보여주기 위해 종종 행해지듯이, 
원고가 배상금을 구빈시설에 기부하도록 결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도리어 자기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내면의 소리가 그에게 물러서서는 안 된다고 하며, 
자신에게 소중한 것은 무가치한 소송물이 아니라 
자신의 인격과 명예와 권리감각과 긍지라고 말하는 것이다. 요컨대 그에게 소송은 단순한 이해관계의 문제로부터 
품격의 문제로, 즉 인격을 주장하는가, 아니면 포기하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역시 경험이 가르쳐주는 바에 따르면, 동일한 
상황에서정반대의 결심을 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다. 
힘들게 주장해야 하는 권리보다도 평화 쪽이 낫다고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생각하면 좋을까? 
그것은 각자의 취미와 기질의 문제로 싸움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평화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권리는
 권리를 주장하거나 포기하는 것을 권리자의 선택에 맡기고 있으므로 권리의 입장에서 본다면 싸움도 좋고 싸우지 않
는 것도 좋다고 말해 끝내야 하는가?

알다시피 그런 의견을 실생활에서 종종 듣게 되지만, 
나로서는 그것이 대단히 잘못된 생각이고 권리의 
궁극적인 성질을 오해한것이라고 본다. 
그런 잘못된 생각이 지배적이 된다고 한다면 권리자체가 
부정될 것이다. 왜냐하면 권리의 존립을 위해서는 불법대한 용감한 저항이 필요하다는 점에 대해, 앞서 본 잘못된 
생각은불법에서 도망치는 비겁한 태도를 장려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잘못된 견해와 맞서는 내 생각은 다음과 같다. 
인격 자체에 도전하는 무례한 불법, 권리를 무시하고 
인격을 모독하는 형태의권리침해에 대해 저항하는 것은 
의무다. 그것은 먼저 권리자 자기자신에 대한 의무다. 
그리고 또한 국가공동체에 대한 의무다. 
법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권리침해에 대한 저항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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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과 권리를 위한 투쟁 문예 인문클래식
루돌프 폰 예링 지음, 박홍규 옮김 / 문예출판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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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법학의 개념에 대한 통렬한 비판은 당시로서도
매우 진보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20세기 새로운 법학의
새로운 기폭제가 되었으며, 21세기 현재에도 참신한
자극제일 수 있다고 보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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